문장웹진(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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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엄마의 과일청 외 1편
당신은 병 속에서 자신의 손발을 꾹꾹 누르고 있습니다. 차곡차곡 쌓여서 썩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어 합니다. 울고 있는 순간에도 달짝지근한 눈물이 쏟아져 병 속의 당신이 핥을 수 있기를, 죽은 후에도 찻물을 부으면 다시 살점이 단단해지기를, 심장을 누르는 돌…… 뚜껑을 열어 놓아도 당신은 나갈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함께 나가자고 병의 입구에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아름다운 악취가 흘러나왔죠. 슬픔의 냄새란 병 속의 바람에서 퍼져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없어진 손발 대신 몸통으로 과육들을 빨아들이고 있네요. 나의 영혼에서 흘러나간 이 바람은 무엇인가요. 급속도로 모든 것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앉은뱅이처럼 병 속에서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이곳에서 시작된 어지러운 바람. 스무 살에 살던 방이었습니다. 나뒹구는 모든 병들이 썩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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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파장
입원 절차를 마치고 바로 병실로 올라갔다.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벗어 놓은 속옷을 빨았다. 베란다에 블라인드 커튼이 쳐진 걸 확인하고는, 급하게 빨래를 널러 가다 거실과 베란다를 가로막는 유리창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빨래를 담은 통이 엎어지면서 흐른 물에 발이 미끄러졌다. 거실 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다. 엄마는 거실 한가운데 큰대자로 넘어진 직후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감지하지 못했다. 황당한 마음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네, 하면서. 천장 벽지에 묻은 갈색 얼룩이 눈에 띄었다. 저 얼룩이 언제 생겼을까, 없애려면 의자 위에 올라가 닦아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이참에 집 도배를 다시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그저 가볍게만 생각했다. 508호와 저녁 약속이 생각났다. 이제 일어나서 옷을 입어야겠다며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허리와 골반 쪽에 날카로운 통증이 덮쳤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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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읻다]
병이. 근데 말한 게 을이 뭐였더라 방금. 이렇게 뒤죽박죽 묻고 싶었던 것은. 무엇을. 무엇을 말이야? 이 한 문장이었는데. 병은 뒤죽박죽이었다. 병은 엉망진창이었다. 병은 갑에게. 그렇게 회복도 말할 것 내가 독이 따지는 때 억울해 된다 같아? 이렇게 물었다. 그게 말이 되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을이 옆에서 비웃었지만. 갑은. 견딜만해. 난 견뎌. 나를 견뎌. 너를 견뎌. 한꺼번에. 갑자기. 두려움을 견뎌. 이런 식으로. 갑은 견뎠다. 신기하게. 갑, 을, 병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남의 일 같지 않고. 남에 일 같지 않았다. 자신만만한 사람들을 견뎌. 갑이 말하면. 나는 잘 참아. 을이 말하고. 참는다는 단점은 내 것이다. 병이 말해. 나는 욕심 없이. 22층까지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갑, 을, 병. 셋 중에 하나여도 좋겠다. 생각했다. 22층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날 오후에는. 작은 토끼, 큰 토끼. 양 쪽 다 이빨을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