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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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시는 느낌의 현재에서 문득 출발하는 것
박형준 : 산문집에서 쓰신 대로 스승 서정주 시인을 회고하며 의식적으로 그와 거리를 두려고 한 것이 1980년대 상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 수업, 작가 수업이란 자신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철저한 물음과 함께 정치적 선택까지를 결단하게 한다.’는 의지가 그것인데요. 한편으로는 시집에도 서정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산문집에서도 서정주 시인에 대한 그리움이나 연민이 동시에 보입니다. 이시영 : 웹진 《문장》의 대담에서 정현종 시인은 ‘미당은 정치적으로 백치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정주 선생님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서정주 시인이 선택했던 것은 늘 틀렸던 것이고, 시인도 시민의 한 사람이자 국민의 한 사람인데 안이한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인으로서 서정주는 스승입니다. 지난 학기에는 학부 강의에서 서정주 전집을 읽었는데, 김소월 이래로 한국어를 가장 잘 갈고 닦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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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익명에 대한 몇 가지 단상
남편 이완이 시내에 두고 온 정주의 핸드폰을 찾으러 간 사이 정주는 양수를 쏟고, 폭우 속에 기진맥진 슈퍼까지 걸어온 정주를 발견한 최 씨는 트럭을 몰아 시내 종합병원으로 달려간다. 최 씨 덕분에 아이를 무사히 낳은 정주는 조리를 하면서 남편과 가족에게 다시는 그 시골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정주는 그녀가 시골 마을에서 겪은 그 낯선 ‘과도한 친밀함’이 ‘미지’와 ‘타자성’을 허용하지 않는 인간 탐욕이기도 하며, 그것이 시시때때로 환멸과 적대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 갈 일 없으면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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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유랑과 백파이프의 가을
그 풍성한 음식들을 마을 정주민들과 여러 나라에서 온 이방의 작가들과 섞여 앉아 먹으면서 나는 또 <유랑>이란 단어를 생각했다. 여행보다는 길고 정주보다는 짧은 삼개월의 체류는 내 마음속에서는 늘 길 어딘가를 떠도는 <유랑>이었다. 날짜가 깊어질수록 돌아가 다시 시작될 정주의 생활에 이 유랑이 얼마나 그리울지 미리 짐작되는 그리움의 질과 양 때문에 앞당겨 벅차고 더 허기졌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와 정주의 일상 속에서 가을 감기를 앓으면서 <유랑>이란 단어에의 추억과 그리움 때문에 온몸이 더 저릿저릿하다. 허황일까. 겨울 감기는 현재의 길이에 대해 생각케 하지만 가을 감기는 보내온 가을의 횟수에 대해 생각케 한다. 때론 너무 적어서 투명한 햇빛처럼 아예 없는, 바르자마자 휘발되어 버리는 아세톤 냄새 같기도 하고 때론 너무 많아서 은행잎으로 만든 거대한 동굴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하는 너무 적거나 많은 가을의 횟수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