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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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8월_시_면]서교동 술집의 마스크들
호두처럼 일그러지면 우리는 지루한 나머지 거짓말이라도 고백합니다 도토레Dottore 낯모를 친구여 병난 위장에는 독한 술이 필요하네 어느 저명한 의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술주정꾼이 염치없는 것은 위장이 단단하기 때문이라네 조로(早老) 역을 맡았다 파경에 이른 배우처럼 피나는 연습을 한 탓이지 날마다 조금씩 얼굴빛을 검게 바꾸며 떠드는 걸세 세상이 아직 자신을 조명하지 않은 무대란 듯이 허구를 진실이라 믿어야 자네가 불행해지지 않을 테니까 카피타노Capitano 나도 너처럼 유언이 야망인 양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무용담을 늘어놓기 위해 허리춤에 소설집을 끼고 살았지 때로 눈먼 애인들은 손뼉을 치며 울기도 했어 말장난에 지친 벗들이 더 이상 안부를 묻지 않는 동안 나는 용병(宂兵)처럼 끝없이 첫차를 기다렸다 끝없이 기다리면 아무도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했다 * 이탈리아 즉흥극「Commedia Dell’arte」의 가면들 작가소개 / 석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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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생존 게임의 서글픈 레짐
대기발령 12일째 지연은 사직서와 함께 남은 세 사람에게 메일을 남긴 채 떠났다. 기회에 남편과 히말라야를 가고 싶다고 했다. 연아는 짧은 답장만을 발송했다. 며칠 후 연아는 자회사로의 고용 승계 제의를 수락하는 쪽을 택했다. 물론 패자에게는 면접이라는 형식적 절차와 반성문이라는 굴욕이 요구되었다. 희정은 홍보팀으로 옮기는 걸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일이 꼬였다. 서둘러 패자들이 떠나야 하는 눈치 게임에서 그녀는 배신의 칼날이 오히려 자신을 상처내고 있음을 나중에야 안 듯하다. 결국 그녀도 연아가 떠난 이후 회사의 배신 제안을 배신했다. 중훈만이 석 달을 버텼다. 연아는 "벽을 보고 앉은 중훈의 등 뒤를 그냥 지나"(161쪽)/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자회사에서 석 달을 일하고 나와 여러 회사를 옮기면서 "우정이나 동료애 같은 단어가 공허하고 기만적인 구호"(159쪽)라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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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후5
석미는 초록색 플라스틱 그릇에 계란국을 덜어 왔다. 지현은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포크 여섯 개를 착착 꺼내서 각자의 손에 쥐여 줬다. 셋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나란히 앉고 셋은 그들 사이에 서서 계란국을 떠먹었다. 주방 쪽에서 나민정! 하고 부르자 민정이 우리, 우리 거, 하고 말했다. 지현이 쟁반에 음식을 받아 왔다. 김밥과 떡볶이와 순대와 어묵이 동글동글한 접시에 각각 담겨 있었다. 차선집이 무슨 뜻이야? 김밥을 먹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몰라. 근데 전부 그렇게 부르던데. 누구여도 상관없는 아이가 대답했다. 뜻도 모르고 간판도 없지만 다들 그렇게 부르는 장소가 거기 있다는 걸 나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학교로 돌아온 우리는 그날 점심에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했다.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고 화장실에 나란히 서서 이를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