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단편소설] 어떤 세계의 경우
주원은 여전히 불탄 담뱃갑 같기도, 도미노 골패 같기도 한 건물 앞에 서서 생각했다. 누나의 걱정과 달리 아버지 집 앞뒤로 늘어서 있는 건 지나치게 낭만적인 모습으로 설계된 현대식 건물들이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테라스가 딸린 화사한 건물, 원목으로 만든 가늘고 긴 선베드와 테니스 코트가 바투 선 아버지 집을 한층 더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주원은 마지막 한 개비의 담배처럼 검은 집에 꽂혀 지냈다. 딱히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에 앉아 책을 읽거나 전자레인지에 데운 음식을 먹었다. 햇빛이 드는 곳에 기대 잠들었다가 어두워지면 길고 좁은 정원을 내다보았다. 타르처럼 끈적끈적한 어둠이 눌어붙어 있어 정원은 거대한 돌계단으로 보였다. 무엇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집이었다. 어디에 있어도 뾰족한 모서리가 주원의 살갗을 찌르는 것 같았다. 집 안의 가구들은 실제로도 날카롭게 각이 져 있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제10회_책
나는 사물들을 풀어내고 잘라내야 하는 선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점을 좋아하지 않는다. 점을 찍는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리석어 보인다. 선이 두 개의 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여러 선의 교차점에 있는 것이다. - 『대담(Pourparlers)』- 기하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점이 모여야 선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은 두 개의 점 사이를 잇는 것”이라고 쉽게 믿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들뢰즈는 다르게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선이 교차해서 점이 된다고 말이지요. 점만 그럴까요. 사실 선도 평면이 교차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나아가 평면도 사실 입체와 입체가 교차했을 때에만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여기서 점을 하나의 인간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버지라는 선과 어머니라는 선이 교차해서 탄생한 겁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그들의 오딧세이
그들의 오딧세이 주원익 그들이 유령처럼 그들의 그림자를 쫓는다 그들은 그들 안에 거주하며 전 생애의 노를 젓는다 그들이 그들을 노려보며 그들의 귀를 막는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는다 그들의 머리카락이 거꾸로 일어서고 밤새 검은 물을 쏟아낸다 그들 심장 안에 거주하는 억만년의 소용돌이가 그들의 녹슨 귀를 열어 준다 그들이 그들로 환생하여 그들의 그림자를 따라 노를 젓는다 그들의 노래가 수평선에 걸리고, 침묵으로 항해하던 태양이 좌초하여 하늘과 바다가 한꺼번에 뒤집힌다 노래가 메아리를 던져 그들을 부르고 그들은 노래의 귀를 막는다 노래가 그들의 귀를 부른다 노래는 귀를 막은 그대로 그들의 전 생애를 부른다 노래는 노래 안에 거주하며 그들의 귀를 먹어치운다 그들이 노래의 그림자를 먹어치우는 동안 노래는 피안에 닿아 떨고 있는 그들의 귀를 씻어 주고 있다 노래는 그들의 바다를 노 저어 가고 있다 수만 개의 귓바퀴 둥둥 떠다니는 핏빛 고요의 바다에서 그들이 삼켜지는 소리 아득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