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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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수평근
수평근 송시내 해안을 따라 소나무 군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나무들은 솔밭을 흔드는 바람에 단단하게 결계를 친다. 소금기 가득한 지표면 위로 굵고 가느다란 뿌리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억척스레 모래땅을 움켜쥐고 있는 수평근의 힘줄이 햇살 아래서 선명하게 불거진다. 수평근(水平根)은 지면과 평평하게 자라는 뿌리를 의미한다. 척박한 땅이나 토심이 얕은 곳에서 나무는 원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 대신, 수평근이 지표에서 자라며 수분과 양분을 흡수한다. 주근(主根)이 해야 하는 역할을 대신하거나 나누는 것이다. 동생에게 엄마의 간병을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도로는 동맥경화 걸린 혈관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려운 수술은 아니었지만 지난 며칠의 병원 생활은 태풍 속을 지나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회복 기간 중 갑자기 들이닥친 섬망으로 가족들을 기함시키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어젯밤엔 정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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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포커페이스
포커페이스 송시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자 눈동자들이 쏟아진다. 순간, 촉박한 일정 탓에 얼굴 가득하던 짜증을 황급히 숨긴다. 급하게 걸친 표정이 거울 속에서 왠지 낯설기만 하다.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포커페이스로 하루를 시작한다. 포커페이스(poker face)는 자신이 가진 패를 상대방에게 읽히지 않기 위해 표정을 숨기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상황 혹은 승패가 바뀐다 하더라도 얼굴에 동요를 나타내지 않는 자기조절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정에 상관없는 표정 조절은 타인과의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결국 포커페이스는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겉면일 뿐,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내면(內面)은 외줄 위의 어름사니처럼 위태롭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는 것일 뿐이다. 결혼생활은 포커페이스를 요구받는 일이 많았다. 자라 온 생활환경과는 이질적인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의중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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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상아 실패
상아 실패 송시내 바람의 감촉이 나비의 날개짓처럼 부드럽다. 나른한 봄기운에 얇은 재킷을 꺼냈더니 단추가 달랑거린다. 단단하게 새로 고쳐 달고 나갈 심산으로 반짇고리 뚜껑을 열면서 오래된 실패의 안부를 확인한다. 요즘은 반짇고리를 꺼내는 경우가 드물다. 아이들은 자라서 떠났고, 이불을 깁는 것처럼 매번 신경 써서 챙겨야 하는 일도 오래전 졸업했다. 두어 달에 한 번쯤 꺼내 사용하지만 열 때마다 꼭 확인해 보는 것이 상아 실패다. 벌꿀색 실패는 어머니의 친정어머님이 사용하던 물건이다. 본인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끼던 것이 지금은 자연스레 내 차지가 되었다. 나비 모양의 얇고 평평한 몸체에 아직 사용하지 않은 무명실이 두껍게 감겨 있다. 당신이 정정하던 때엔 철철이 이불 홑청을 삶아 풀을 먹여 정성들여 기웠다. 그때는 봄가을 외에도 제법 여러 용도로 바쁘게 돌돌돌 실을 풀어냈다. 오늘처럼 봄볕이 좋은 날이면 어머니는 겨우내 덮었던 이불을 걷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