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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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부탁의 해변
부탁의 해변 송재학 파도는, 바다의 간절함을, 바스러지도록 움켜쥐고 있다 눈물의 평지를 달려와서 파도에 매달린 눈썹의 휘날리는 생각 때문에 먼지투성이 항구는 화분의 품종을 바꾸는 중이다 내 아랫도리가 흠씬 젖지 않을 수 없다 먼 곳이라는 꽃말을 가진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건 다른 생각이다 낮달이 만들어 준 면적만큼 어리둥절했다 좋은 색과 슬픈 색이 다르지 않다는 해안선 일부처럼 내 누낭에도 길고 긴 주름이 있다 가슴을 덮는 해일, 자주 마주치는 이 헐렁한 물의 높낮이를 또 어쩌자는 걸까 물결에 비친 나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거 같은 마음이다 먼바다가 파도에게 부탁한 일을 다시 내륙으로 전달하는 순서에 있는 검붉은 절단면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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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지평선 휴게소
지평선 휴게소 송재학 지평선까지 온 길들 중 다른 길 속으로 시나브로 숨어 버리는 길의 꽁지를 보았다 지평선까지 온 별들의 잠자리에서 건초 냄새가 난다면 별들은 자기애에 닿기 위해 다시 내려온다 아르항가이는 초원이지만 기항지가 있다 배들이 별을 싣고 내려온다 별들도 가끔 제 울음을 부리러 온다 나는 두 번 아르항가이 휴게소를 지나쳤다 두 번 다 밤이었다 휴게소에 들러 양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느리게 만드는 것은 붙잡지 못하도록 달려가는 초록 탓이다 밤이어서 초록은 야생쥐와 같이 풀잎을 곤두세우면서 도망다니느라 바쁘다 한 줄의 현이 하늘과 초원을 나누고 있다 그러니까 지평선 휴게소에서 으으 내 귀를 건드린 마두금 소리는 사람만이 내는 소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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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유령
유령 송재학 그와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다식도 먹으면서,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의 설레는 거울 이야기 그는 젊은 시절부터 섬이거나 바다이거니 했다 해안의 커브길처럼 그는 옛날이다 자신이 사용했던 이름이 행성인 것을 고백하고 언제부터 혼자라는 음영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침묵을 이해한다면 그는 나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는 그와 조금 비슷하다 그가 먼저 떠나고 테이블을 정리하던 종업원이 물었다 그분이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는데 맛이 별로여서 그러신가요? 나와 함께 다과를 먹었는데 그의 몫은 그대로 남았다 하나를 씹어 보니 단맛이 죄다 빠져나가고 푸석푸석하기만 했다 그가 마셨던 찻잔 속 향은 사라졌지만 허브의 높이는 그대로 찰랑거린다 그가 남긴 명함에는 낯설지만 이물감이 없는 이름, 어느 시절 그는 나의 속도가 아니었을까 다시 만난다면 내 비밀 쪽지를 그의 손바닥에 쥐어 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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