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2)
-
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조개를 캐는 봄
벌써 한 양동이 가득 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뒤늦게 온 사람도 있다. 망에 든 조개를 바닷물에 씻어 나가는 사람, 아이들과 작은 게나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있다. 저 너머 멀리 여수의 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곳 바닷가의 시계는 도심보다 느리게 간다. 푸른색에 미쳐 남쪽까지 내려왔다. 바다는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매일매일 다른 색이다.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밭일하던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가끔 주변에서 푸성귀도 얻는다. 어떤 날은 부녀 회장님이 ‘쫑쫑 쓸어 간장에 넣어 드이소’라며 쪽파를 갖다주시고 어떤 날은 용소 아주머니가 보드라운 깃털이 묻은 달걀을 갖다주신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바닷가 삶이 낯설다. 호미질을 하다 힘들어 그만둔다. 조개가 든 양동이를 들여다본다. 양동이 가득 채워 가리라고 생각했는데 반도 못 채웠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장마
장마 이서화 십여 년째 혼자 사는 춘목할머니 빗물 떨어지는 처마 밑에 깨진 고무대야 찌그러진 양동이 몇 년 씻지 않은 개밥그릇 죽 늘어놓고 있다 왜냐고 물으니 저렇게 해놓으면 문밖에 꼭 누가 온 것 같아 좋으시단다 비가 올 때마다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미닫이문과 마루 엉덩이걸음으로 문턱을 넘는 춘목할머니, 처마 밑에 앉아 소란스럽게 떨어져 납작하게 흐르는 빗물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게 낙이다 오고 또 오는 비 온다는 말만 줄 서 있는 장마 그저 온다는 말만 들어도 반가운데 세숫대야에 물이 튀고 요란함으로 들썩거려 좋기도 하겠지만 비 그치고 그득그득 고여 있는 문밖을 어떻게 감당하시려는가 한사코 들어오라는 사십 년 된 방 한 칸 눅눅한 며칠이 이미 먼저 와 있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들판에 놓인 변기
인터넷 지식 검색을 찾아보니 막힌 변기에 양동이 가득 뜨거운 물을 펄펄 끓여 부으면 공기 몇 방울이 올라와 뚫린다고 한다. 도처가 풀잎인 계절 나는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비정(非情)을 손바닥에 놓고 후?, 불어 녹여본다. 푸른 아우성이 기찻길을 달려간다. 변기에 머리를 집어넣고 아, 아, 오, 오 지상을 간지럽혀 본다. 변기 아래 깊고 깊은 수렁을 건너온 빗줄기 아래 나는 떠나간 애인을 변기 속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