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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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대장을 찾아서
대장을 찾아서 여세실 하나뿐인 가짜가 좋았다 거리에 옷무더기가 쌓여 있다 헐값에 팔고 있는 금속 시계가 가판에 널브러져 있다 나는 그 속에서 청바지를 목에 둘러보고 옷소매에 묻은 얼룩을 문질러 보았다 세탁을 한다고 지워질 게 아닌 걸, 소매를 오래 쥐고 있다가 흔들어보았다 처음 보는 색이었다 보라색에 가까웠다 그건 연한 것과 진한 것 사이 너를 부르면 네가 돌아본다 옷감은 부들부들하다 옷걸이가 휘어있다 이 뜨개와 자수는 사람이 일일이 짠 것 같고, 너는 거의 사람이다 일부는 버리고 몇몇은 나누기도 하며 매대에 있는 옷 중에 제일 이상한 옷 옷 중의 대장 내가 쓰지 않는 것과 네가 찾지 않는 것들이 다시 쓰임을 찾아갈 때에도 밑단이 짧은 셔츠, 콩단추가 달린 자켓 이 거리의 상인들은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홈이 페인 그릇과 유리들 그 사이를 걸었다 그릇 위에 그릇이 쌓여 있었다 반짝인다 이 그릇들을 차례로 쌓아놓았을 주인의 걸음걸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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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정당한 요구
정당한 요구 여세실 당신은 어느 날 나더러 미쳤다고 말하고 나는 알게 된다 내가 여자라는 것을 어느 날 문득 양배추의 맥박을 알아차리게 된다 입속에 샐러드를 넣고 천천히 씹을 때 사려 깊은 초록의 비명을 듣게 된다 산책을 하다가 발치 앞에 떨어진 꽃 뭉텅이를 줍고 사지가 찢길 것 같아 멈춰 섰다 급소를 걷어차인 구름의 표정을 읽게 된다 어느 날 문득 사슴의 뿔과 나뭇가지의 경로가 같아 보이고 그러다가 우리 집 앞 안양천 물비늘에서 혼잣말의 손금을 읽게 된다 접시 하나가 깨질 때 그 속에서 천둥 벼락을 보게 됨 그런 것을 알아보게 되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도 됨 실격임 일정하고 똑바른 패턴들 아기의 옷에 그려진 비행기는 셀 수 없어서 꾸준히 사랑하려면 더 느리게 뛰기 위해 전념해야 함 물비늘 저것은 동물이다 졸졸졸 포효하는 한 줄기 동물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 입술이 겨울마다 트고 시뻘겋게 뜯어져 피톨이 맺힐 이유가 없다 잠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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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계주
계주 여세실 나는 오늘 처음 보는 엄마가 되어 너를 위해 달린다 네가 지금껏 달려 온 레이스를 계속 이어 나가 보려고 우리는 전생에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사이 같아 다른 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 나가 놀 때 외따로 거리를 두고 앉아 각자의 책을 읽고 있었을 것 같아 이미 배가 부른대도 억지로 식판에 남아 있는 밥을 다 먹는 심정으로 각자 몫의 책을 읽어 내려 갔겠지 나는 오랫동안 어설프게 말을 건네지 않으려고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은 척 네 뒤에서 쭈뼛거려 온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 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것일 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 말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번에는 비껴가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똑똑히 건네주려고, 너의 친구가 되어 보려고 망설임 없이 너의 운동장에서 뛴다 배턴을 넘겨받아 질주한다 앞서 나가는 상대 팀의 뒤통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