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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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오, 행복하여라
그리하여 외로움 하나만으로 나 풍성해지는 거짓말 같은 생. 나 이제 외로움의 식구를 얻었으니 함께 먹고 또 먹어 배 터져 죽고 싶다. 버석거리던 날들이 외로움의 독을 입어 이리 촉촉하니 축복 받음 아닌가. 날마다 독이 퍼져 이 저녁의 숨소리 그윽하구나. 외로움이 서 있는 그 자리. 거긴 원래 미루나무가 오래 서 있던 자리, 내 딸이 날마다 학교 가던 길. 지치고 아플 때 하염없이 집을 바라보던 길. 오늘도 집 나간 마음은 기별 없으니 기다림으로 접혀진 마음자리는 쉽게 찢어지고, 마음 없이도 몸은 자주 아프고, 마음 없이 병든 몸은 가난한 세간 옆에서 쓰러져 잠들고, 그리운 것도 없이 살 수 있다니, 오 놀라워라 거짓말 같은 나의 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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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눈의 여행
눈의 여행 조온윤 커다랗고 광활한 너의 정면 가까이 마주한 네 정면은 펼쳐진 초원 같아 내 시선은 양떼처럼 그 위를 뛰어가 코의 산으로부터 이마의 능선까지 뺨의 비탈에서 미끄러져 턱 끝 낭떠러지로 귀의 동굴을 지나 어둑한 심부로 향하는 눈의 여행은 유구하고 눈의 여행은 지난하지 그 속에서 세상의 모든 미움을 끌어안고 잠든 뱀처럼 웅크려 있는 네가 보여 그 모든 거침을 견디고 있는 너의 차고 미끈한 민낯이 보여 나는 그저 바라봐 손댈 수 없이 벌벌 떠는 너의 추위와 외로움 벌벌 떠는 너의 분노를 관망할 뿐 눈의 여행은 무력하고 눈의 여행은 초연하지 가까이 마주한 네 고통은 아득한 초원 같아 내 시선은 길 잃은 양떼가 되어 그 위를 방황하다가 흰 눈썹을 펜스처럼 두른 안전한 밤으로 돌아와 그때에야 눈 속에 담은 것들을 쏟아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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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효자손傳
효자손傳 정다혜 행복빌라 103호 세 들어 사는 일흔 한 살 이씨 할머니 슬하에 일곱 남매 두었는데 새 아들 입양했다 자랑이다 그 양아들 태어난 곳은 대륙이라 본적은 中國産 이름은 孝子라 제 몸에 새겼으니 겨울이 오면 혼자 사는 외로움보다 등이 더욱 가려웠던 이씨 할머니 이제 새 아들 孝子가 등 긁어 드린다 하루 24시간 제 어미 곁을 떠나지 않으며 시린 등 사는 외로움 박박 긁어 드리니 과연 효자 중의 효자로다 일 년 내내 얼굴 보기 힘든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전화통에 대고 사랑한다고 청개구리 새끼들처럼 합창하지만 누구 하나 찾아와 등 한 번 긁어 준 적 없는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손 외손들 남편 훌쩍 떠나고 마른 등 뒤에 숨어 살던 서른 해의 가려움病 효자의 손에 놀라 달아나 버렸다 이씨 할머니 세상으로 일곱 남매 열 네 개의 손을 내보냈지만 그 손들 모두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 추운 밤 손이 끊어지면 길이 끊어지는 세상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의 대나무 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