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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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기쁨과 슬픔과 절망의 트라이앵글
기쁨과 슬픔과 절망의 트라이앵글 _7년 전의 7년 전 일기 유형진 7년 전, 4월에 우리는 바닷가에 갔었다 바닷가에는 데이지나 아네모네 화분에 물을 주었을 때 꽃잎 끝에 맺히는, 투명도 99%의 물방울 같은 햇살이 우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웃고 있었다 멀리 바닷가 마을에 사는 개가 이방에서 온 손님들에게 멍멍멍 짖었다 그래도 중요한 건 우리는 웃고 있었다 기쁨과 슬픔과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치는 것처럼 우리의 웃음은 땡땡땡땡…… 바닷가 투명한 햇살을 받으며 땡땡땡땡…… 트라이앵글 바닥면의 절망과 양쪽으로 똑같이 기울어진 기쁨과 슬픔을 치면서 우리는 4월의 바닷가에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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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춘분(春分)
춘분(春分) 유형진 복강경 수술로 담낭의 돌을 꺼낸 친구가 준 커피에서 담뱃재 냄새가 난다. 친구는 요즘 캡슐커피머신을 쓰기 때문에 커피콩이나 갈아 놓은 커피를 주면 손 흘림으로 내려야 해서 자주 안 먹게 된다며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 가져왔다. 지인이 동남아 여행 다녀오면서 선물로 커피를 주었다는데. 에스프레소 머신용으로 갈아 놓은, 아주 진하게 볶은 콩이었다. 봉지에는 ‘아라비카 100%’라고만 되어 있고. 베트남 커피 만드는 식으로 우려서 연유를 넣어 먹어야 할까, 차가운 물로 한 방울씩 내려 우유를 타서 마셔야 할까 고민한다. 남쪽엔 눈이 온다는데. 담뱃재 냄새가 나는 커피를 들고 창밖을 내다본다. 나무에겐 아무것도 없다. 눈도, 새 잎도, 꽃도, 단풍도. 지나가는 계절의 진공상태. 계절 밖의 계절 같은. 어쩌면 가을 같기도 하고, 겨울 같기도 한. 보이지 않게 모든 것이 충분한 춘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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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목련탕약
목련탕약(木蓮湯藥) 유형진 목련 꽃망울이 가지 맨 끝 솜털 속에 자고 있다 이 아파트 단지엔 목련이 유난히 많다 목련꽃이 툭, 툭, 떨어지는 계절이 되면 온 천지에 탕약 달이는 냄새 집 안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폐병 환자가 있는 듯 잎도 없이 알몸으로 봄을 앓는 목련이 흰 촛대 같은 꽃망울을 들면 마침내 뿌리 끝 탕기에 불이 오른다 검게 젖었던 탕기는 차츰 달구어지다 가장 서럽게 어두운 날, 마당 가장자리에 놓인 곤로 탕기 위 훈김에 서성이는 봄눈들이 어디로도 내려앉지 못하고 증발해 버리는, 가보지도 않은 북유럽 어느 하늘처럼 하루 종일 저녁같이 깜깜한, 그런 날을 골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툭, 촛대에 올린 흰 빛을 터트리고 마는데 흰 종이에 쌓인 약 한 재 모두 달일 쯤 꽃잎 터질 때처럼 흙색 꽃잎들 무거워 멀리 날지도 못하고 곧장 바닥으로 툭, 아무나의 발에 차이고 짓이겨지면 천지에 목련탕약 냄새는 더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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