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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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옛 제자 드림
옛 제자 드림 이경교 네 편지는············ 옛 제자 드림, 하고 끝났다 이름이 없다, 그건 너무 흔한 보통명사다 글자들이 곤충 알처럼 박혀 있다············ 알들은 무사히 벌레가 되었을까, 그럼 어느 숲을 지나고 있나············ 옛과 지금 사이로는 아직도 강이 흐를까············ 물길이 트이고, 내 기억 어느 모퉁이에 가로등이 켜진다, 강의실, 약국, 책방············ 길 저쪽이 하얘진다············ 편지는 한 세기를 건너온 나비를 닮았다············ 그 순간, 너는 고유명사가 된다············ 암말이 이끄는 구름, 점박이 꼬리············ 아니다, 그건 인디언의 이름이다············ 나는 다시 어둑어둑한 나무가 된다, 가로등이 꺼진다············ 갑자기 눈앞을 스쳐가는 나비가 있다 내가 네 익명 위에 이름을 단다············ 한 세기를 지나온 나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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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내 이름
내 이름 이경교 자, 이번엔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름을 뺀다············ 너는 기억이 떨구는 꽃잎들을 아득히 바라볼 테지, 그만두렴, 이름은 차라리 구름기둥, <말은 개다*> 나는 풀꽃, 쇠못, 지렁이다 <나는 그들이다**> 어떠냐? 너는 지워진 이름 너머로 살별이 긋고 간 하늘, 할퀸 자국을 보고 있을까, 아니야, 벌떼처럼 몰려오는 눈발을 떠올릴 테지············ 그럼 그 익명 위에 그것들을 가만히 올려놓으렴············ 살별 자국, 눈발의 벌떼············ 또는 하늘 응달에 핀 무지개············ 그게 내 이름이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는다, 꽃씨를 터뜨리는 저 풀꽃들············ 내 이름이 사방으로 튄다 이럴 때 은닉은 죄가 아니라 확장이다, 너도 보고 있니? * 惠子 ** 우파니샤드. I am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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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점액질
점액질 이경교 사람들은 저마다 깃 안에 고개를 파묻고 흘러가지 물컹거리는 안개 더미 속으로 점액질처럼 스며들지 그냥, 묵묵히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어디쯤에서 다 녹아버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 다만, 흐르고 흘러 저 다리 아래로 강물은 흘러가고 사람들은 지금 이곳이 어딘지 알지 못한 채 안개 더미 속으로 바쁘게 흡수되지 오히려 안개 속에 편입되지 못한 몇몇 그림자만 어두운 유령처럼 거리를 배회하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다만, 제 본분을 다해 흐르는 강물이 보이고 말없이 서 있는 가로수 아래 정체 모를 점액질이 흐르고 있지 흐르고 흘러 점액질이 고이는 곳마다 집이 서 있지 넘치는 그릇을 주체하지 못해 방을 잘게 쪼개 놓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