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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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등단 말고 다른거
이것이 이기리 시인과 서호준 시인, 김누누 시인의 작품들을 묶어 읽어 보려 하는 이유다. 1) 이러한 시각은 《문장 웹진》 2021년 4월호의 「2021년 기획 연속좌담 ‘등단’ 1차 ‘시선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8193 2) 〈등단하진 못했지만, 나는 이기리라〉, 《조선일보》, 2020.12.28. https://www.chosun.com/culture-life/2020/12/28/S3TJCRIHGBFTND55Y5VWJYKVCI 2. 이기리,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민음사, 2021 글을 시작하며 언급한 사건의 주인공, 이기리 시인의 시집부터 살펴보자.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에 ‘나’가 등장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화자가 자신의 체험과 감정, 생각을 진술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시가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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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무언가를 적는 손
무언가를 적는 손 이기리 무언가를 적는 손은 회색 연필을 쥐고 있다. 새로 깎은 것임을 가늘고 길쭉한 몸을 보 고 알 수가 있다. 무언가를 적는 손이 쏟아지는 햇빛에 고스란히 담긴다. 손에 닿은 햇빛 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손에게 밝음을 나누어준다. 흰 벽에 무언가를 적는 손의 실체가 달라붙는다. 어둡진 않고 단지 검음뿐이라서 창문을 열고 닫는 일에 온 정신이 쏠리게 된다. 반복적인 행위를 계속하다보면 의미가 생기고 질서가 형성되는가. 리듬은 끊어진다. 리듬이 생기는 그 순간부터. 악기의 소리들이 쌓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여기는 시간을 미워하는 곳이다. 단 한 번도 시간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모두 바보인 셈이다. 심장의 단면에도 별거 없다. 유리로 된 책을 읽는다. 글자들이 유리 위를 떠돈다. 물을 쏟자 흐릿하게 번져간다. 책을 놓치자 사방으로 깨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밟고 발바닥으 로 피를 흘리며 문장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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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꽃꽂이
꽃꽂이 이기리 어쩌면 며칠 생활을 잠시 두고 온 것뿐인데 오늘은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날이 벌써 밝아지고 있어서 수평선이 보일 것 같아서 숲을 걷다 노래를 부르고 생선 구이를 먹다 혼자라는 단어에 가시가 박혔길래 그냥 살다 보면 다 넘어가겠지 싶었는데 그런 결론은 너무 무책임했는데 책임지는 건 또 왜 이리 싫은지 보기만 해도 좋을 이 삶을 누가 꺾어 갔으면 하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에게 말도 걸어보았습니다 갑판 위에 올려놓은 말린 오징어들 뜯은 빵 부스러기들 나날들 모두 당신 것이지요 눈빛을 부러뜨리고 도망쳤습니다 구두를 벗으니 살갗이 까진 뒤꿈치 바다는 혼잣말을 하지요 계절을 실재하는 것으로 증명하기 위해 비와 눈이 내리고 나무는 열매와 잎을 맺고 열매와 잎을 떨구고 바닥은 낙엽을 치우고 발자국을 새기고 두들겨 맞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몸을 내어 주고 사람과 만나고 사람과 헤어지고 사람과 죽는 일 다음 세대 다음 세기가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