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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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커버스토리 8월호 ‘왜 사나……’ 망설여지는 대답을 찾으시거든
“따스한 첫봄 한낮의 산기슭에 높인 마을/새로 이인 오막살이 여남어 집/수숫대 울타리에 빨간 빨래 조각들/사흘 전 기원절(紀元節) 축기(祝旗)를 아직도 달아놓은 집이 있다/홀로 추녀 끝 그늘 밑에서/도꾸방아 찧는 나이찬 처녀의 머리채여/수탉이 지붕에서 훼를 치며 길게 목을 빼는 한낮의 마을/멀리 보이는 바다 한 귀가 백금(白金)으로 빛난다.”(「웅천곡」전문) 선생의 생가에는 안채, 사랑채 등이 있고, 생가 입구 오른쪽에 우물이 하나 있다. 마당에는 비파나무와 가죽나무 그리고 감나무와 대나무가 바람을 지휘하고 있고 텃밭에는 열무가 나비를 꽃잎처럼 날리고 있다. “가끔 바람이 오면/뒤우란 열무우 꽃밭 위에는/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열무우꽃 -칠월의 향수」)던 바로 그 뒤란, 무위자연의 사상이 싹을 틔운 그 텃밭이다. 1933년 늦가을, 당시 스물여섯의 선생은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서 금강산 유점사로 향했고 이듬해 주지 운악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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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입안의 송곳
“생고기 이인 분 줘요.” 메뉴판을 덮어 아줌마에게 건네준다. 후배 녀석은 저녁 약속이 있다며 사이다만 한 병 시킨다. 주방에서 고기 내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도끼로 뼈를 부서뜨리는 건가. 퍽, 퍽 둔탁한 소음이 내 시선을 주방으로 끌고 간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간하고 천엽도 방금 들어와서 싱싱한데요.” “그건 별론데. 이인 분이 작나? 흐벅진 거 말고 단단한 거 있죠? 씹는 맛 나는 질긴 걸로 삼인 분 줘요.” “우리 집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는데요, 그럼 심줄 있는 걸로 드려볼까.”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뿐이다. 녀석은 바로 전에 점심 먹고 뭘 그리 많이 시켰냐고 참견을 한다. 그러면서 아줌마가 내준 삶은 메추리알을 부지런히 까먹는다. 후배 녀석과 나는 멍하니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 우리는 조금 지쳤다. 주방에서 나는 소리를 덮으려고 텔레비전 볼륨을 올린다. 아프리카 풍경은 가보기라도 한 것처럼 늘 익숙하다. 〈동물의 왕국〉은 적자생존의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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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민들레 수상자 나주탐방 동행기] 민들레와 쪽빛의 힘
‘배 잡아줄’ 이인 모양이었다. 이 큰 배를 맨손으로 어떻게 잡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너무 추워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래저래 왔다 갔다 하며 심부름을 하고 있던 나만 빼고 모두들 선실 안에서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나 혼자 얼어 죽는 줄 알았다고 너스레를 떨자, 수상자들이 하나 둘 내 곁으로 와주었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모자를 샀다며 형광색 모자를 쓰고 온 전년도 수상자가 보였다. 2014 대상 수상자도, 1회 수상자도 보였다. ‘자갈 자갈 자갈’이라는 시구로 기억하고 있는 수상자도 보였다. 심사위원을 맡으신 고영직, 박경장 선생님도 보였다. 수상자와 함께 온 시설 관계자도, 그리고 추위에 떨다 선실에 웅크리고 있던 나와 그곳에 모인 ‘우리 모두’가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한 황포돛배 안이었지만 천연염색박물관에 이르러서는 다 같은 식구처럼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강바람이 춥다고 옆에서 구시렁거리던 나의 시인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