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 어린이와문학
(작가론) 권정생의 공부
특별 기고 | 안상학
권정생의 공부
안상학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年 11月의 新川」 당선.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등이 있다.
권정생(1937~2007년)의 학력은 경북 안동에 있는 일직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중이거나, 혹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상태에서 야학에 나가 영어, 수학, 한문 등을 잠시 배운 적이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선생을 앞에 두고 배운 것은 여기까지다. 그 후로는 순전히 독학을 했다. 책을 좋아하던 소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배우지 못한 것이 제일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도 사전을 펼쳐 놓고 봐야 되니, 글 한 번 쓰는 데야 말할 나위 없지요. 그래도 자꾸 틀립니다. 어려운 말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쉬운 말로 쓰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계속 글은 쓰겠습니다. 앉아서 배길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무엇이곤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니까요. 아무와 얘기할 것이 없으니, 자연책에 눈이 가고, 하고 싶은 말을 쓰지 않을 수 없지요.(권정생·이오덕,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2003, 57쪽)
1974년에 권정생이 이오덕(1925~2003년)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누구 하나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이도 없다. 같이 토론하며 공부할 도반도 없다. 혼자서 책 읽고 혼자서 글 쓰며 고투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서른일곱 살 들도록 사전을 옆에 끼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맞춤법에 애를 먹는 흔적이 역력하다. 권정생의 유품 목록에는 사전류만 해도 84권이다. 독학의 기본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어린이들을 위한다고 했는데 어린이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것, 그리고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자연 속의 생물들도 같이 생각하면서 우리는 글을 써야 된다고 봅니다. 특히 동화는 그렇지요. 동화를 쓰는 사람은 누구라도 쉽게 써진다는 거 절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동화를 쓰는 사람은 더 많이 알아야 하고 그래서 세계역사도 공부해야 되고 우리 한국의 역사도 공부해야 되고 다른 교육에 대한 것도 공부해야 되고 더 많이 알아야만 아이들한테 진정 무엇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동화를 써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동화를 써야 하는가. 정말 냉정한 생각으로 써야 된다고 봅니다.(권정생, 「‘사람’으로 사는 삶」, <어린이문학> 1999년 2월호)
권정생 선생의 유품 중에 친필 편액이 한 점 있다. “좋은 동화 한 편은 백 번 설교보다 낫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백번의 설교보다 좋은 동화 한 편을 쓰려면 준비 동작을 잘 갖추어야 한다고 그는 강변한다. 동화는 어린이만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만을 위하는 것도 아니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위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맞춤법은 물론이고 역사, 교육 등 다방면에서 많이 알아야 하며 글을 쓰는 마음가짐 또한 냉철함과 진지함을 겸비해야 한다고 발언하고 있다. 그가 책을 끼고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동화를 대하는 그의 마음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동화 작가 권정생. 사실 그의 이름 앞에 참으로 많은 무엇을 붙일 수 있다. 동화는 물론이고 시, 소설, 평론, 희곡, 산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글을 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상가나 철학자의 면모도 지녔다. 무엇을 붙여도 다 맞다. 그렇지만 시인, 소설가, 사상가 따위를 붙여 놓고 보면 왠지 허전하다. 아무래도 동화가 본령이기 때문이다. 본인도 동화 작가이길 원했다. 동화가 우선이었으며 나머지는 차선책이었다. 동화로 못 다 쓴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소설과 산문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권정생 이름 앞에 어울리는 말은 ‘동화 작가’다.
사람의 정서는 대체로 8세 전후에 완성된다고 한다. 그 정서로 평생 살아가는 것이다. 눈과 코와 귀와 입과 몸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정서다. 생텍쥐페리가 자신의 정서적 자아인 어린 왕자와 나눈 대화를 나는 좋아한다. 사람마다 다 저마다의 정서적인 자아인 ‘어린 왕자’가 있다. 사회적 자아가 세상 살면서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정서적 자아를 불러내어 자문을 구한다. 대개 정서적 자아에 충실한 판단과 선택을 하는 삶은 순수하다.
권정생의 정서적 자아는 어떤 모습일까. 어땠기에 그 모든 악조건을 견디게 했으며, 치열한 글쓰기의 삶을 밀어가게 했을까.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했으며 어떤 인간관계를 사랑하고 미워했을까. 하고많은 것 중에 왜 하필 동화를 선택했을까. 정서 형성기의 권정생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거리 청소부였던 아버지는 쓰레기더미에서 헌책을 가려내어 와서 뒤란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이따금 찾아오는 고물 장수에게 얼마의 돈을 받고 팔았다.
내가 그 쓰레기 책 더미 속에서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찾아내어 읽은 것이 6, 7세 때의 일이다. 아직 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는 이 쓰레기 책 속에서 혼자 글자를 익히고 세상을 배웠다.
책은 곰팡내가 나고 반쪽이 찢겨 나가고 불에 타다 남은 것도 있었다.
『이솝 이야기』, 『그림 동화집』 그리고 훗날 알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오가와 미메이의 『빨간 양초와 인어』, 미야자와 겐지의 『달밤의 전봇대』 등등 그때 읽은 동화들은 내 머리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자리 잡았었다.
이불 속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고 있으면, 판자 쪽 줄무늬가 어느새 찬 빗줄기로 변하고 그 찬비를 맞으며 왕자와 제비가 떨고 있었다. 잠이 들면 꿈속에 빨간 양초의 인어가 상인에게 팔려가는 구슬픈 모습이 나타나곤 했다.(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14~15쪽)
평생 독학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걸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소년 권정생은 대여섯 살 때부터 혼자 글을 익히고 책을 읽었다.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잘 타던 권정생은 고물더미에서 동화책을 찾아 읽으며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었다. 막연하게나마 자신도 동화 속의 아름다운 이야기 같은걸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다.
이때 읽은 책들은 두고두고 권정생의 기억 속에서 재생되곤 했다. 산문에서든 강연에서든 그 책들 이야기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솝 이야기』,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오가와 미메이의 『빨간 양초와 인어』,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 등은 어린 권정생의 가슴에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새겨져 있었다. 작품 속에서 얻은 삶의 지혜와 더불어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마음,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 현실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은 권정생이 평생 간직했던 정서의 코드이자 글의 올이 풀려나온 실바구니였던 셈이다.
권정생은 9세까지 살았던 도쿄가 그립다고 한 적이 있다. 전쟁과 폭격만 아니었다면 비록 가난해도 평생을 살고 싶었던 곳이라고 회상하곤 했다.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있고, 학교도 다닐 수 있고, 책도 마음껏 볼 수 있었던 시절이 그리웠다는 말이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가차 없이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얼비친 것이다.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태평양전쟁으로 그 곳에서 쫓겨났으며, 귀국해서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행복한 삶을 빼앗겨 버렸다는 말이다. 이웃 간의 따뜻한 정도, 책을 볼 수 있는 기회도, 학교를 더 다닐 수 있는 형편도 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속절없이 잃어 버렸다는 말이다.
해방이 되어 열 살 때 여기 왔는데, 여기 와서도 적응이 안 되데요. 그래 뭐라도 읽고 싶었지요. 국어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다시피 했는데, 지금도 외워요. 하도 읽을 게 없어 그랬지요. 국민학교 졸업해서는 부산 가서 4년을 살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어요. 6·25직후라 살기가 너무 어려웠고, 책을 읽고 싶어도 구할 길이 없어, 일하던 가겟집 주인이 차비를 주면 그걸 아껴 헌책방에 가서 책을 사게 되면 밤을 새워 읽었는데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나와 비슷하면 위안을 받았지요. 그러다가 나도 내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는데, 한국 사람들의 상황이 비슷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 주는 것 같았어요. 저는 처음부터 옳은 생각으로 동화를 썼던 것 같아요.(권정생,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종로서적, 1986, 321쪽)
권정생은 미국의 도쿄 대공습(1945. 3. 10.)이 있기 전에 소개(疏開)되어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겨울에 도쿄를 떠나서 군마현과 후지오카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1946년 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려 좌우대립이 극심하던 해방 정국이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시절이었다. 시골도 그런 시골이 아니었을 청송과 일직에서 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어를 습득한 소년이 국어를 다시 습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렇더라도 국어로 된 문학 관련 책이라곤 달랑 국어책밖에 없는 처지였다. 마르고 닳도록 국어책만 줄줄이 욀 수밖에 달리 독서욕을 채울 길이 없었다. 책을 좋아하던 소년 권정생에겐 밥을 굶는 것만큼이나 책을 읽을 수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이렇게 떡잎부터 표가 나는 법이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을 읽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반 친구가 책방을 하는 숙부에게서 얻은 책을 몇 권 가지고 있었다. 핼런 배너먼의 그림동화 『꼬마 검둥이 삼보』, 정홍교의 동화 『박달 방망이』,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정도였다. 권정생은 이 책들을 빌려다가 거의 외다시피 하며 몇 번이고 읽었다. 훗날 권정생은 이원수 인물 이야기 『나의 살던 고향은』을 내면서 머리말에 “6·25전쟁 때 정홍교라는 분의 『박달 방망이』라는 동화책을 읽어 본 것이 한국 아동 문학의 전부”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 글에서 그는 그 흔하던 이원수의 작품을 좀 더 일찍 대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한탄하기도 했다.
1953년 봄,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권정생에게 더 가혹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은 중학교 근처도 못 가게 했다. 책은 고사하고 교과서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년 동안 닭을 쳐서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전염병이 돌아 100여 마리로 불어난 닭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이다. 안동 시내로 나가 고구마 상회 점원으로 일을 하면서 뒷일을 도모했지만 그도 여의치 않았다. 그해 겨울 부산으로 갔다. 이종사촌 형이 재봉틀 상회를 하고 있었다. 점원으로 취직한 것이다. 여전히 고학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재봉틀 상회는 일이 많았다. 전쟁 이후라 고물을 수거해 수리해서 되파는 게 주된 일인데 무척 바빴다. 아침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주경야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막을길이 없었다.
나는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신문 연재소설에서 시장바닥에서 파는 삼류 대중잡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고 읽었다. 내 소년 시절은 눈과 귀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였다. 완전히 잡식동물이 되었던 것이다.(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1996, 156쪽)
기훈이와 나는 용돈이 생기면 초량동에 있는 ‘계몽서점’이란 헌책방에서 책을 빌려다 보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계몽서점은 중앙국민학교 분교장 앞에 있었다. 주인은 마흔 살이 조금 넘은 마음씨 좋은 분으로, 처음엔 책값만큼의 보증금을 내고 책을 빌려 왔지만 나중에는 서로 알게 되어 값비싼 책도 그저 내어 주었다.(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22쪽)
권정생은 수정동에 있는 이모네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초량동에 있는 재봉틀 상회까지 600m정도 거리다. 그 사이에 헌책방이 있었다. 책을 사볼 형편이 안 되었던 그로서는 돈이 조금 생기면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저렴하게 책을 빌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책에 목마른 그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고교생이나 청년들이 봤던 문예잡지 『학원』을 줄곧 탐독했다. 이 잡지에 소설을 투고하여 실린 적도 있었다. 고전도 이때 많이 읽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이광수의 『단종애사』, 이태준의 『문장강화』, 현진건의 『무영탑』등 많은 책을 두루 섭렵했다. 어린이 도서 중심에서한 단계 도약한 것이다.
1955년, 부산에서 생활한 지 1년 반 정도 지날 무렵이었다. 외로운 그에게 친구가 둘 생겼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던 한 살 맏이 오기훈과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살던 충청도가 고향인 최명자가 그들이다.
오기훈과는 책 읽는 취미가 맞아 좋은 책을 구하면 돌려 읽고 감상을 나누었다. 더러는 감동을 주체할 길 없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서로 외로웠고 그래서 따뜻한 이웃이 그리웠던 그들이기 때문에 공감의 폭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기훈이 자살을 한 것이다. 권정생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일도 헌책방을 드나드는 일도 기훈이를 잃고는 시들해져 버렸다.
최명자는 권정생의 삶에서 어쩌면 매우 중요한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권정생이 평생토록 가장 가까이 한 책인 성경을 최명자가 선물을 한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최명자는 권정생에게 교회에 나가도록 간곡하게 권유했다. 벌써 병색이 깊던 권정생의 얼굴을 살피며 걱정하던 최명자는 그해 늦가을 서울로 떠나고 만다. 거리의 여자가 된 것이다. 친구 둘이 떠나고 남은 권정생은 시름시름 병세가 깊어졌다. 책은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권정생의 병명은 늑막염과 폐결핵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한 해를 넘어 버티다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안동 집으로 돌아갔다.
고향집에 돌아온 지 6년 만인 1963년 나는 교회학교 교사로 정식 임명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한 건강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소변은 역시 매 시간마다 보아야 했고, 걸음도 아주 천천히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죽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철야 기도도 계속해 나갔다. 유일한 읽을거리는 성경책이었다. 신문도, 라디오도, 책 한 권 빌려 볼 수 없는 산골에서 성경은 나의 마음을 무한히 넓게 깊게 가르치고 일깨워 주었다.(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30쪽)
들판에 앉아서 읽었던 성경은 생생하게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머리로 읽는 성경은 자칫하면 환상에 그치고 말지만 실제로 체험하면서 읽으면 성경의 주인공과 대화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죽음과의 싸움에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만났고, 아모스를, 엘리야를, 애굽에 팔려간 요셉을, 그리고 세례 요한을, 사도 바울을 만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가깝게 나의 주 예수님을 사귈 수 있었던 기간이기도 했다.(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43쪽)
성경을 품에 안고 거지 생활을 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몸은 거의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초주검이 되어 집에 돌아와 몸져눕고 말았다. 그해 겨울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폐결핵은 전신 결핵으로 옮겨 갔다.
이듬해인 1966년 6월 부산 성분도병원에서 신장을 한 쪽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여의치 않아 그해 12월 부산대학병원에서 방광을 들어내고 하나 남은 신장마저 오줌을 밖으로 받아내는 시술을 하였다.
수술비용은 일본에 있는 셋째 형 권을송(1925~2010)이 댔다. 생활비와 읽고 싶은 책도 사서 보내 주었다. 권을송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권정생은 없었을 것이다. 편지는 주로 질녀인 권송미와 주고받았다. 당연히 일본어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권정생은 일본어 독학교본을 끼고 살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책을 놓지 않았다. 편지 자료를 보면 처음에는 초보 수준이었지만 나중에 보낸 것들은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독학은 권정생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형님께 세계사상전집을 사달래서 지금 『루소』를 읽고 있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육체는 고칠 수 있지만 대신 정신병을 안겨 준다고 했어요. 진작 제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저 자신이 구원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세상 인간들은 전부 사기꾼입니다.(권정생·이오덕,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2003, 138쪽)
권정생이 이오덕에게 보낸 편지다. 권정생이 책 목록을 적어 보내면 권을송이 책을 구해서 보내 주는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유품 목록에 보면 일본어로 된 책이 242권이나 된다. 20권 1질인 『노신전집』(학습연구사, 1984)이 우선 눈에 띄고, 루소, 헤겔, 사르트르, 하이데거 등 18권의 『세계대사상』(하출서방신사, 1973), 『미야자와 겐지 전집』(암기서점, 1973),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신조문고, 1970), 니이미 난키치 동화집 『아기여우 곤』, 권정생이 여러 군데서 극찬해 마지않은 재일교포 소녀 야스모도 스에꼬의 일기집인 『작은오빠』(광문사, 1959)를 비롯해서 시, 소설, 민담, 종교, 교육, 철학, 역사, 비평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망라된 걸 알 수 있다. 권정생의 독서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어를 하던 소년이 국어를 배우고 다시 일본어를 깨쳤다. 편지도 편지지만 형에 의지해서 독서를 하고 싶은 열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일
본어 실력은 아라키다 이에히사의 『아이누 동화집』(강담사, 1981)을 번역할 정도였다.
권정생이 성경 다음으로 자주 언급한 책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완역판이다. 필자에게도 이 책에 대해서 몇 번 강조한 적이 있다. 필자의 딸이 중학교 졸업할 때 이 책을 사 준 기억이 있다. 순전히 권정생의 권고에 따랐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은 중국의 『삼국지』처럼 여러 인물들의 삶이 담겨 있어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자라는 청소년기엔 한 번씩은 읽어야 할 필독서가 아닌가 싶다. 주인공 장발장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아무도 쉽게 살아가는 인생이란 없다.
‘비참한 사람들’이란 말 그대로 『레미제라블』은 모두가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 『레미제라블』은 대중소설로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 어디서나 언제나 인간은 아무도 고통 없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1996, 198~200쪽)
이오덕에게 쓴 편지에서도 “『레미제라블』은 앞으로 열 번을 더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소감을 밝힌 적이 있다. “장발장의 영웅적인 삶에 감동을 받지만, 두 번 세 번 거듭 읽으면 주인공은 어느새 멀리 밀려나가 버리고 그늘에 가리었던 참다운 인간”을 만날 수 있고, 19세기를 살았던 프랑스 민중들인 “그들은 이름도 없이 너무도 착하게 살다가 죽어간 참인간으로 또렷이 가슴에 남”는다고 독후 감동을 적고 있다.
역사적인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며 살았던 권정생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이름도 없이 너무도 착하게 살다가 죽어간 참인간”을 무수히 만났던 것이다. 영웅적인 주인공보다는 비참하게 살다가 간 사람들의 존엄성에 더 주목한 것이다. 권정생 소설 『한티재 하늘』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인공보다는 수많은 장삼이사들의 삶을 곡진하게 묘사했다. 그가 『레미제라블』을 높이 평가하는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소설이다.
어린 시절 좋은 책 한 권은 평생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거듭 말하고 싶다.(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204쪽)
나는 어린 시절에 동화를 많이 읽었다. 아름답고 슬픈 동화를 읽고 나면, 밤잠을 못 이루고 주인공의 처지를 동정하며, 이불 속에서 혼자서 울었다. 내가 동화를 가장 많이 읽은 때는 다섯 살에서 여덟 살까지였던 듯하다. 그때에 읽은 동화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동화가 많이 있다. 그 가운데서 아주 슬프고 아름다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 하나는 작자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른다.(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232~233쪽)
책 한 권이 운명을 결정하거나 뒤바꾸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정서적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의 경험은 중요하다. 좀 비껴간 이야기지만 한화야구단 감독으로 부임한 김성근의 인터뷰(OSEN. 2014. 11. 13)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야구단 선수인 “김회성이 그렇게 순할 줄 몰랐다. 속이 어마어마하게 하얗다. 그 속에 까만 것을 넣을 수 있고, 빨간 것을 넣을 수 있다.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가 바로 코칭스태프와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고 평했다. 정서가 형성되는 시기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희고
비어 있어서 무엇을 취사선택해서 물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권정생이 어린 시절 읽은 동화 중에 유독 잊히지 않는 작품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누가 쓴 것인지, 제목은 무엇인지 잊어버렸다고 한다. 권정생의 기억 속에 남은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깊은 숲 저쪽에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고, 거기에 큰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호수에 외로운 한 청년이 와서 쓸쓸하게 서 있다가 돌아갔다. 뱀은 쓸쓸하게 서 있다가 돌아가는 청년을 바라보며 “만약에 내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저 불쌍한 청년을 위로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청년은 자주 호수를 찾아왔고 뱀은 점점 더 그 청년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러던 하루 호수를 지키는 신이 뱀에게 아름다운 여자가 되도록 해 주어 청년을 따라가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아기를 낳으면 다시 뱀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시한부 약속을 하게 된다. 여자로 변신한 뱀은 청년과 서로 사랑하며 꿈같은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아기를 낳고는 본디처럼 뱀이 되어 호수로 돌아가 버렸다. 뱀은 자초지종을 모두 고백하고 자기의 아름다운 한쪽 눈을 뽑아 아기에게 장난감으로 남기고 떠났다. 청년은 아기를 보살피며 어머니의 눈을 아기에게 쥐어 주었다. 이상하게도 아기는 그 눈알을 가지고 놀면서 탈 없이 자랐다. 그러다가 아기는 소중한 어머니의 눈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 청년은 아기를 안고 호수를 찾아가 뱀을 불렀다. 물속에서 뱀이 나타나 남은 눈 알 한쪽을 마저 뽑아주면서 “저는 이젠 앞을 못 보는 장님입니다. 부디 잃어버리지 말고 소중히 간직해 주셔요.”하면서 물속 깊이 사라졌다.
더 자세한 줄거리는 다 잊었지만, 자신의 눈알을 모두 뽑아 주며 호수 속 깊이 숨어 버린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은 두고두고 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233~234쪽)
기억력이 놀랍다. 그만큼 감동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1986년에 발표한 글이다. 반백년이 지나도록 이렇게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 이야기도 어머니의 모성애에 관한 이야기다.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은 두고두고 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권정생이 운명하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어매요!”였다. 모성애는 그의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정서적 자아의 실체 중 하나다.
2013년 6월의 일이다. 문득 이 글을 읽으며 누가 쓴 어떤 책인지 궁금해졌다.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알아본 결과 이 글은 ‘뱀 아내’라는 일본의 옛 이야기로 판명되었다. 일본 전역에 전해지는 이야긴데 무대나 설정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큰 줄거리는 같다. 주로 규슈지방에 많이 전해졌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어떤 버전은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남편이 장님이 된 아내를 위하여 종을 만들어 치는 장면이 나온다. 아내에게 시간을 알려 주려는 마음이다. 한때 교회에서 종지기 노릇을 한 권정생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대목이다.
권정생은 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린, 가질 수 없었던 10대 시절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공부도 공부지만 문학에 뜻을 두고 공부할 때 접할 수 없었던 좋은 책이 많았다며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현덕의 동화 문학을 따라 배우지 못한 것이 정말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새로 문학을 공부할 사람은 백석의 시와 현덕의 동화 속에 담긴 따뜻한 한국인의 정서를 배웠으면 한다.(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133쪽)
권정생은 후학들에게 현덕과 백석을 항상 강조했다. 이들을 어려서 알았더라면 좀 더 나은 문학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섞인 당부이기도 했다. 누군가 길을 가르쳐 주고 어디선가 배울 수 있는 터전이 있었다면 더 나은 문학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말이기도 하다. 권정생이 현덕과 백석의 작품을 늦게 대한 것은 이들이 한국전쟁이후 북에서 활동하였으므로 1988년 해금될 때까지는 잘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권정생의 문학적 자양분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그의 독서편력으로 따져보면 일본에서 ‘다섯 살부터 여덟 살까지’ 읽은 책들이 아니었을까. 정서 형성기에 습자지처럼 빨아들인 그 책들에게서 받은 감동이 아니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어릴 적에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병이 들어 버렸다. 병든 다음에는 하루속히 건강해지기만 바라며 기다려 왔다. 그러나 그 병마에서도 헤어나지 못한 지금, 나는 모든 것이 숙제로 남게 되었다.(권정생, 『빌뱅이 언덕』, 창비, 2012, 44~45쪽)
권정생이 꼽은 가장 위대한 스승은 자연,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이사야서 11장,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이야기는 ‘뱀 아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외곬의 삶에 영향을 끼친 것은 예수와 둘째 형인 권목생의 죽음에 관한 상상 속의 장면이었다.
권정생은 두 번의 큰 전쟁을 겪으면서 평화주의자가 되었고, 동화를 통해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던 낭만주의자였다. 전쟁과 가난으로 정규교육의 기회를 잃었지만 독학으로 한국 아동문학의 금자탑을 쌓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길은 같이 가난해지는 것뿐이라는 생각은 세상 떠날 때까지 지켰다. 집은 비 안 새면 되고, 옷은 가릴 데 가리면 되고, 음식은 먹고 배 안 고프면 된다는 생각도 끝까지 견지했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다. 비록 그는 몸은 최악이었을지 모르나 정신은 최선이었을 것이다. 맑은 정신이 병든 몸을 지탱해 주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가 그토록 목말라했던 정규교육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수재였던 그가 일류 학교를 차근차근 밟았다면 지금의 권정생이 과연 있었을까. 그가 독학으로 지내 온 세월을 톺아보며 이 부질없는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어떤 결론도 내지 못했다. 다시, 결론은 권정생은 그냥 권정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