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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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어떤 시들은 상처를 요구한다-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문학과지성사, 2010)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 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전문 이 시를 주도하는 것은 단연 ‘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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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매장된 아이
매장된 아이* 최치언 나는 누군가를 찔렀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누군가를 사정없이 찔렀다 광장의 후미진 골목에서 나는 그 누군가를 만났다 그의 안경알은 분수대의 햇살처럼 튀어 올랐다 나는 중얼거린다 비둘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엄마는 그네에 앉아 자꾸 아득한 허공으로 발을 차셨다 나는 그 발길에 차이면서 “엄마, 제가 죽여 드릴게요. 다 죽여 드릴게요.” 튀어 올랐던 햇살이 그 누군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오른손으로 그는 내 멱살을 움켜잡았고 아무도 보지 못했으므로 나의 왼손에 들려 있던 과도는 기차처럼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불쑥 통과해 버렸다 엄마는 허공에 발목만 남겨 놓고 지상으로 내려와 검은 아스팔트 위를 한들한들 걷는다 나의 중얼거림은 끝이 없고 “엄마, 제가 죽였어요. 다 죽였어요.” 콸콸 쏟아지는 붉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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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작렬하는 생
작렬하는 생 최치언 외딴 담장 아래, 손톱처럼 하얗고 새침한 소녀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옆구리를 걷어차 버린 도둑이여 봉오리가 벌어지듯 소녀의 동그란 입에서 헉하니 내뱉던 더운 비명을 도둑의 복면이 지워버렸으니 곱게 젖어 가는 석양처럼 그 앞에서 치마를 내리던 소녀여 도둑의 눈 속에서 그토록 탐스럽던 검은 음모는 처음이었으니 한 마리 사자가 울부짖듯 그토록 건강하게 곱슬거리던 욕정도 처음이었으니, 무릎을 꿇고 소녀의 음부에 혀를 가져다 대는 도둑이여 도둑의 혀끝에 시큼한 치욕이 묻어나듯 소녀의 구릉진 엉덩이가 단단히 오므려졌으므로 허리를 툭하니 꺾는 담장의 그늘 속으로 활짝 핀 장미, 도둑의 혀를 뽑고 도둑의 눈알을 파낸 수천의 장미 비명처럼 쿨렁쿨렁 쏟아지던 정액을 어쩌지 못하고 꽃대 같은 소녀의 발목에 흩뿌리곤 비밀을 아는 것들은 무덤 속에 잠든 것들이려니 울부짖는─ 도둑이여, 그때 살기를 띠고 번뜩였던 건 소녀의 흰 블라우스 단추뿐 소녀의 머리통을 담장에 으깨어 놓으며, 도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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