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 > 소설
따스한 칼날
<따스한 칼날>1. 쓰러지고 싶은 오늘"너 자학하냐?"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피나는 것 좀 봐라, 얼마나 쥐어뜯어 가지고…."슬그머니 일어나려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역정 섞인 목소리를 내었고, 어머니는 말없이 일어나 약상자를 찾았다."약 안 발라도 괜찮아요. 지가 알아서 낫겠거니…."나의 항변은 묵살되고, 반투명의 찐득한 연고가 이마의 상처 위에 올라앉았다. 사실 내 맘대로 할 것 같으면 애써 낫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공부할 때, 오른손에는 필기구를 쥐고 왼손으로 쉴새없이 건드렸던 상처. 머리칼이 솟는 부분의 약한 살갗은 염증을 일으켰고 끝내는 피가 배어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짜증스럽던 통증이 점점 그윽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내가 이런 자해에 가까운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지난 기말고사 준비기간부터였던 것 같다. 전교 1등만 계속하던 내가 지난 중간고사에서 전교 5등이란 충격적인 성적을 받은 후, 난 중압감에 짓눌려 찌그러질 것만 같았다. 핏발 선 눈으로 기말고사를 초조하게 준비하던 그 기간 동안, 중간에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잔 밤이 며칠이나 되던가? 꿈속에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가 서렸다. 창문에는 그림 같은 붉은 달이 있던 꿈…. 나는 소스라쳐 허우적거리며 그놈의 꿈속을 헤쳐 나오곤 했다. 꿈보다 가위눌리는 것이 더 무서웠다. 육체와 정신이 따로 노는 그 무서운 상태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나는 이런 고역을 치르고 작은 신화를 창조했다. 기말고사 전과목 만점.사람들이 떠들어대며 낯간지럽게 칭찬을 했다. 웃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웃었다. 검은 자줏빛으로 부풀어오른 상처를 머리칼 뒤에 숨긴 채로 멍청히 웃고 있었다. 2. 일심 검도관어머니와 아버지가 뭐라고 쑥덕공론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의 짜증은 안 봐도 뻔하다.-사내자식이 이렇게 약해서야 쓰나!그 아버지가 한가지 해결책이란 것을 내놓기는 내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아연하게 만들었다."정신교육이 안 되어서 그러는 거야. 요 앞에 검도관에라도 좀 보내 봐."싫어요! 하고 튀어나오려는 나의 말대꾸를 권위에 찬 아버지의 눈빛이 가로막았다.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그리하여 나는 '일심 검도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기합소리가 살벌하게 쩡쩡 울려 퍼지는 도장의 풍경을 멍하니 선 채로 둘러보는 나에게 처음으로 안내를 해준 사람은 정혁주 사범님이었다. 그는 한눈에도 키가 후리후리하고 골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얼굴빛은 거무레한 데다가 푸른 기까지 돌았으며 눈빛이 여간 날카로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 면상에서 인상이 좋은 것이라고는 어울리지 않게 선이 고운 입과, 사무라이들처럼 훤한 이마뿐이었다.그는 나에게 검도의 기본을 차근차근 가르쳤다. 내 딴엔 단정하게 입었다고 자신했던 도복도 그의 지적을 피하지 못했다. 쓱 훑어보던 그는 대뜸 내 등 아래 허리춤을 잡아 위로 끌어올리고 앞자락은 가볍게 아래로 당겼다."자, 봐라. 바지는 앞이 내려가고 뒤가 약간 들리는 편이 좋다. 뒤가 내려가면 후퇴할 때 밟아버린단 말이야."죽도를 잡을 때에도 요령이 있었다."왼손을 꽉 잡아라. 격렬하게 싸우다가 오른손을 놓쳐도 왼손은 놓치면 안 돼. 손목은 바짝 조이고…."걷는 방법까지 배운 다음에야 진짜로 죽도를 휘두르는 차례가 왔다. '상하 후리기'와 '정면 후리기'. 정면 거울을 보면서 무려 200번을 계속 휘둘러야 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노려보며 부지런히 죽도를 휘두르는 내 뒤로 사범님이 잠시 멈추어 섰다."검도를 하다가 슬럼프에 빠지면, 이 정면후리기를 해보는 것도 좋아. 자세가 다시 한 번 가다듬어지니까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이 쓱 지나쳐가면서 목소리만 나직이 들려왔다."사는 것도 비슷하지, 뭐.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는 듯하면 뒤돌아보고, 흐트러진 것을 바로잡아 보는 거야…." 3. 상처검도를 배우기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났다.내게 일어난 변화는 불행히도 별것 없었다. 이틀에 한번 땀을 빼니 밥맛이 좋아진 것, 그리고 검도 기술이 이것저것 늘어난 것뿐이다. 2·3단 기술, 제치기, 코등이 싸움, 물러나서 치기, 스쳐올리기…. 그러나 처음에는 그런대로 긴장과 흥분이 느껴지던 검도가 점점 시들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나는 밥상 위 접시에 드러누운 고등어의 눈구멍을 젓가락으로 콱 찍었다. 눈이 빠진 채 입을 쩍 벌리고 바짝 타 들어간 꼬락서니가 보기 싫었다. …처음에 정면후리기를 거듭할 때 나는 기대했던지도 모른다. 언제나 내 안을 떠도는 유령같은 불안을, 목놓아 울고 싶은 답답함을 검도라는 격한 운동이 싹 씻어가 주기를. 그러나 애초에 운동 따위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마음은 실타래처럼 얽혀버려 잘라버리기 전에는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호구를 챙겨서 도장으로 향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들끓고 있었다. 터덜터덜 걷다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가로수에 손을 짚었다. 피곤하다며 제자들과의 호격 연습을 기피하던 정 사범님이 오랜만에 칼을 뽑았다. 그의 실력은 단연 빼어났다. 빈틈이 보이지 않았고 발이 무섭도록 빨랐다. 그가 때때로 공격할 기회를 주어도, 상대는 지레 겁을 먹고 공격다운 공격 한 번 해보지 않았다."놓치면 안 될 순간을 계속 놓치네. 내 동작이 나오는 순간이나 끝난 순간, 이런 때에 기술을 걸어야지."사범님은 잔소리를 실컷 한 후, 또 다른 제자를 잡아 대련을 하려는 듯 호면 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갑자기 모두들 연습하는 척하며 그의 눈을 피했는데, 미처 피하지 못한 나만이 그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래, 정한이. 이리 와 봐.""저요? 저는…."뒤늦은 회피는 쓸데없었다. 체념한 나는 그의 맞은편에 와서 섰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쪽으로 벌려 걸으며 생각했다.'사범님은 키가 크니까 거리를 잘 유지하고, 머리비켜 머리치기를 조심….'커다란 기합 소리에 생각이 뚝 끊어졌다. 공격이 내 머리로 날아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사범님은 죽도를 더욱 후려 올리더니 한발 더 나아가 머리를 날카롭게 쳤다. 처음 공격에 당한 순간 전략은 무너져버렸다.그대로 멍청히 서 있으면 더 공격당할 것이 뻔했으므로 나도 즉시 반격에 들어가려고 오른발을 굴러 밟아 들어갔다. 하지만 사범님은 죽도를 거의 후려올리지 않은 채, 튀어나오는 내 머리를 다시 한 번 딱! 쳐버렸다. 순간 맥이 빠지는 내 옆으로 사범님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내가 머리 맞기를 싫어하고 겁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금 내 맞은편에 선 그를 보며 나는 어떻게 해야 맞지 않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런 나의 죽도를 그가 작게 제쳤고 이번엔 손목에 타격이 왔다. 손목을 친 후, 그는 반격을 막기 위해 온 체중을 다 실어서 몸을 부딪혀왔다.호면쇠 사이로 사범님의 눈이 보였다. 눈앞에서 나의 표정을 읽고 있는 그 날카로운 두 눈에서는 뱀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제발 떨어져라, 칼 코등이가 맞물린 채 지나치게 밀어오는 그의 죽도를 버텨내며 나는 기도했다. 그의 눈에서 파랗게 이글대던 불길이 사라지며 나무라는 표정이 스쳤다.'바보.'순간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비로소 사범님의 의도를 이해한 순간에 그는 왼발을 뒤로 성큼 물리면서 내 오른손목을 가격했다. 그는 바로 그 기술을 걸도록 유도해주려고 일부러 지나칠 만큼 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가 팍 죽은 나는 더 이상 아무 기술도 걸 수 없었다. 한참동안 신나게 얻어맞기만 했다.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벌려 걷다가 결국 넘어진 나를 한발 물러선 채 내려다보며 사범님은 내뱉었다."이런 걸 삼살법(三殺法)이라고 하지. 상대의 검, 기술, 마음을 죽이는 것. 다른 건 잠시 제압되어도 마음만은 흔들리면 안 돼!"일장 연설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원망을 억누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그의 냉엄한 모습 위로 한 남자의 그림자가 스쳐간 것은.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나의 가슴속 검은 자줏빛 상처에서 피가 한 방울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도장 마룻바닥에 넘어진 소년이 아니었다…어둑한 방 한구석에 나동그라져 훌쩍이는, 아주 어린 아이였다. 방 한쪽에는 나처럼 쓰러져 떨고 있는, 희고 넓적한 얼굴이 눈물에 젖은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몸집이 거대한 남자가 우뚝 서있었다.여인의 머리통을 부숴 버릴 듯이 주먹을 움켜쥔 그 사람. 그는, 그는, 나의 아버지. 4. 지난날의 그림자그 날 이후, 나는 도장에도, 학원에도 가지 않았다. 무작정 집을 빠져나와 아무데로나 방향을 잡아 하염없이 걸었다.머리가 돌덩어리처럼 무거웠다. 나는 밤마다 나타나던 악몽의 실마리를 눈으로 보고야 만 것이다.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놈의 기억에 여전히 얽매여 있는 것이었다. 너는 평생토록 그 상처를 안고서 가끔씩 피를 흘리며 신음해야 한다, 라고 기억은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그 기억을 애써 부정하며 떨구었던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한 가족이었다. 어린아이를 안은 아주머니와 미소를 머금은 아저씨. 나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희고 넓적했다. 눈이 새카맣고 윗입술이 두꺼운 그 얼굴….어머니였다.나는 반사적으로 골목으로 뛰어들어가 몸을 숨겼다. 심장 소리가 목까지 차올랐다. 벽에 바짝 붙어선 채 조심스럽게 골목 밖을 엿보았다. 어머니와 그 새로운 가족을 기다리며. 과연 일가족이 즐겁게 이야기하며 내 옆으로 지나쳐갔다. 그러나 지나가는 아주머니는 어머니보다 훨씬 젊은 여자였다. 착각. 안도인지 슬픔인지 모를 한숨이 내 입에서 토해졌다. 나는 맥없이 방향을 돌려 걸었다. 매미 소리가 찌르르르 요란했다. 걷는 길 중간 중간 눈앞이 흐렸다. "형? 학원 안 갔어?"정신없이 걷던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걸음을 멈췄다. 도장에서 내가 자주 상대해 주었던, 나보다 세 살 어린 후배가 도장에 가는 양으로 죽도를 옆구리에 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어, 하고 어색한 웃음을 머금으며 재빨리 그 아이의 곁을 스쳐가려 했다. 그러나 잠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몇걸음 따라오며 약간 걱정스레 물었다."형 어디 아파? 얼굴이 새하얘!"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이렇게 현기증이 나니까. 정말 그런가 싶어서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의 창유리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확실히 핏기가 가신 하얀 얼굴이 유리에 비치는 것 같았다. 얼굴이 점점 흐려진다고 느낀 순간 내 몸은 앞으로 기울고 있었다."형!"귓가에서 아이의 당황한 목소리가 맴돌며 작은 손이 나를 힘겹게 부축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폭염이 쏟아지는 거리에는 나와 녀석밖에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나를 자동차에 기대놓는 녀석의 손길이 느껴졌고 그의 날랜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어지러워 일어서지 못했다. 몸에 닿은 자동차의 표면이 지옥불처럼 뜨거웠다.얼마 걸리지 않아, 아이는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 짙은 남색 도복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때 다가온 그 사람은 나를 번쩍 들쳐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 쪽이었다. 아이가 질겁했다."빨간 불이에요!""시끄러워!"카랑한 그 목소리를 듣자,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정 사범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산길을 걷는 소년이 있었다. 희망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소년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와 소년은 멀리멀리 달아났다.다음으로, 어두운 방 안에 오도카니 앉아서 명멸하는 브라운관을 응시하는 소년이 있었다. 비디오 돌아가는 소리가 처량했다. 한없이 되풀이되는 똑같은 비디오, 은비까비 옛날옛적에. 또, 푹 패인 바닥 위로 백열 전구가 빛을 겨우 내어주는 좁은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 소년이 있었다. 어머니는 소년이 치약을 삼킨다고 무섭게 악을 쓰며 그의 가녀린 목덜미를 때렸다. 아픈 것보다 섧고 두려워 소년은 훌쩍였다.그리고, 그리고…빵집에서 빵 몇 개를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다리를 흔드는 소년이 있었다. 혼자였다. 소년은 어디론가 사라진 어머니를, 울지 않고 얌전히 앉아서 기다렸다. 유리문을 힘겹게 밀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할머니였다.소년이 나이를 먹어 슬픔을 살이 찢기는 고통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을 무렵, 할머니는 말해 주었다. 네 엄마는 '재혼'을 했다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 할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을 때, 소년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꽤나 젊은 낯선 아줌마를 어머니라 부르게 되었다.소년의 어두운 그림자 위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경계선 인격장애가 보입니다. 우울 짜증 분노를 되풀이하죠. 침울하다가도 종이를 찢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나요? 네? 생선 눈을 젓가락으로 찍는다고요? 있을 수 있죠. 혹시 얘 어렸을 때 뜻밖의 이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애들이 크면 경계선 인격장애가 됩니다.인격장애가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하냐고요? 아닙니다. 미국의 쉴라라는 아인 어렸을 때 제 엄마가 고속도로에 내버리는 바람에 반쯤 미친 애인데도 교사들이 놀랄 만큼 공부를 잘 했거든요. 뭐, 이런 게 있습니다. 버림받은 애들은 사람들이 다시 자신을 버릴 거라는 망상적인 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뛰어나려는 욕구가 매우 강하고 뭐든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불안해하죠. 아, 아무튼, 인격장애는 치명적 정신질환은 아닙니다. 그냥 병원만 착실히….-밖에서 몰래 듣고 있던 소년은 쓸쓸히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에 비친 병원 실내 풍경이 눈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형체를 알 수 없게 이지러졌다. 그 빛깔이 점점 짙어갔다. 이윽고 그것이 모두 짙은 남색이 되었을 때 소년은 얼굴과 가슴에 따스한 체온을 느꼈다. 나는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가슴과 얼굴이 따뜻했다.반쯤 떠진 두 눈 가득 진한 남색이 들어왔다. 그것은 땀으로 흠뻑 젖은 검도복이었다. 나는 도복 입은 사람의 등에 업혀 있었고 넓은 어깨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연신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말문을 열었다."사범님.""정신 드냐?""예…….""다 왔다, 응급실이야."나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사범님은 나를 업고 동네 병원의 응급실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황급히 말렸다."괜찮아요, 병원까지 안 가도요.""괜찮긴? 너 쓰러졌었어!""땡볕에서 오래 걸어서…어지러워 그랬나봐요. 이제 괜찮아요.""정말? 어디 아픈 게 아니고?""아니에요…정말…."말끝에 목이 메어오며 눈물이 솟았다. 그 울음에 사범님이 침묵하며 잠시 가만히 섰다. 맴, 맴, 매앰--. 매미 소리가 나와 그의 머리 위에서 기세 좋게 울렸다. 흰 구름의 틈으로 찬연하고 뜨거운 햇빛이 땀에 절은 그의 검은 머리칼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집에 데려다 주마."상당히 다정스런 음성으로 그가 운을 떼었다. 그러나 나는 떼쓰듯 매달렸다. 도장에 가 있으면 안 되겠냐고, 방해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있겠다고. 5. 경구의혹오후반의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정 사범님에게 꾸벅 인사했다."수고하셨습니다!""오냐."그들의 발걸음이 쿵쿵쿵 출입구로 몰려들었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저들이 돌아가고 나면 도장 문을 닫을 테고, 그러면 나도 집에 가야 했다. 나는 사범님을 돌아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칼 코등이에 엄지손가락을 건 채, 작은 창문에서 내리비치는 환한 저녁 햇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져 가는 햇빛의 조명을 받고 있는 그는 마치 고전 소설에나 나올 듯한 옛날 무사처럼 모였다. 그리하여 그 석양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마침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사범님.""왜.""죄송해요. 저 때문에…."그가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죄송하긴. 난 그저 담배 피우려고 잠깐 나왔다가 네가 쓰러졌다길래…."나는 미소지었다. 요전번에 그에게 실컷 얻어맞았을 때의 원망은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지금 집에 갈 거냐?""네. 도장 문 닫지 않아요?""아니, 문이야 나중에 닫으면 되고…그보다, 지금 도복으로 갈아입고 와라."나는 의아했다. 사범님은 더 이상 말해주지 않고 저만치로 걸어가 벗었던 호면을 다시 착용하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도복으로 갈아입고 와서 호구들을 착용하려 하자 사범님이 막았다."그럴 필요 없다. 내가 맞을 거야.""네?""치고들어가는 연습이다. 익힌 기술을 모조리 이용해서 공격해 와라. 그동안 내가 가르쳐줄 것이 있다."나는 이해가 안 갔지만 순순히 끄덕였다. 일단 손목-머리치기를 시도했다. 사범님은 보기좋게 맞았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 태연함에 흠칫하자, 사범님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방금 놀랐구나? 아까처럼 흠칫 놀라는 것을 검도에서는 '경(驚)'이라고 한다. 자, 다시 치고들어와."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손목을 쳐야 할지,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죽도를 제쳐야 할지…. 망설이던 나는 사범님의 손목을 날카롭게 치고는 한발짝 물러섰다. 제대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봐 주신 걸까? 헷갈리고 있는 나를 향해 사범님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아까처럼 망설이는 것은 '혹(惑)'이다. 그리고 잘 쳤나 하고 의심하는 것은 '의(疑)'라고 부른다. 그것만큼 쓸데없는 게 없어. 이미 쳤잖아?""그렇군요….""인생도 그래.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모두 잊을 필요가 있어.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한은.""……!""난 가끔, 검도랑 인생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설명을 마저 하지. 경·의·혹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검도에서는 사계(四戒)로 보아서 주의시킨다. 그 나머지 하나란 '구(懼)', 즉 두려움이다."사범님은 호완 낀 손을 들어 내 눈을 가리켰다. 나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난 항상 네 눈 속에서 사계가 다 보여. 특히 '구'가 심하게.""그…….""언제나 네가 그렇게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건 뭣 때문이냐? 오늘 기절한 것도 아프거나 햇볕 때문이 아니지? 그걸로 쓰러질 것 같으면 격렬한 검도 연습을 견뎠을 리 없고. 틀리냐?""…….""무엇이 널 괴롭히고 있는지 난 모른다만, 다 털어버려라. 아무것에도 쫄지 말란 말야. 약하지도 않은 놈이 왜 약한 척이야?"사범님은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다시 죽도를 고쳐 쥐었다."자.""…….""다시 치고들어와!"카랑카랑한 소리가 빈 도장을 울렸다. 나는 잠시 머릿속이 텅 빈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위해 맞아줄 준비를 하고 우뚝 서 있었다.문득, 가슴이 따뜻해져오는 것을 느꼈다…."어서!"재촉하는 그의 음성은 부드럽고도 힘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는 기운차게 죽도를 휘둘렀다. 날카롭게 그의 죽도를 제친 내 죽도의 격자부가 그의 손목에 떨어졌다. 그리고 머리 쪽으로 떠올라갔다. 사범님은 날쌔게 머리 위로 죽도를 후려올렸다. 순간 그 서슬에 흠칫했다. 호면을 쓰지 않은 내 맨머리를 산산조각내버릴 듯이 살기등등하게 후려올라가 있는 죽도-.주먹을 부르쥔 아버지의 그림자와 내 목덜미를 갈기던 어머니의 핏발 선 눈이 내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지난날의 고통이 껑충 후려올린 죽도만큼 거대한 높이에 우뚝 서 있음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겁만 주려고 날아들어 왔던 사범님의 죽도는 내 죽도와 부딪혀 부서질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크게 빗나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죽도를 바깥쪽으로 힘껏 휘둘러 공격을 받아 떨어뜨린 것이다. 사범님은 내가 그렇게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은 듯 약간 흔들렸다. 그 순간 내 죽도는 그의 호면 꼭대기를 세차게 내리쳤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허리로 내려간 내 죽도의 격자부가 다시 한 번 경쾌한 소리를 냈다. 아무런 계산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것은 배우고 깨우쳐 아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본능적인 용기-금이 간 가슴을 안고서도 몸을 일으켜 앞으로 한 발 내딛는 사람의 환영-가 나의 마음 속에 있었다. 오래도록 아픔에 시달리다가 어떤 따뜻한 사람의 인도로 비로소 떨치고 일어난.어두운 그림자와의 싸움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겨낸 것이다.사범님이 컬컬한 헛기침을 하며 호면을 벗었다. 나는 조금 긴장되었다. 그가 소리쳤다."의심!"나는 낯빛을 고치며 소리내어 웃었다. 호면을 벗은 머리에서 수건을 풀어내는 그 역시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그는 잘 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탕하게 터뜨리는 웃음이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바로 그거야. 두려운 마음을 있는 힘껏 떨쳐버리는 거야. 6. 오늘은 안 쓰러진다한번 패배한 악몽은 호되게 맞고 꼬리를 감추는 개처럼 슬금슬금 물러났다.난 더 이상 이마의 상처를 쥐어뜯지 않았고, 생선 눈알도 찍어버리지 않았다. 새로운 힘과 용기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검도가 그 원천이었다. 항상 강한 정신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검도는 몹시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 집이 멀리 이사를 가지만 않았더라면 언제까지라도 일심 검도관에 다녔을 것이다. 아버지가 직장을 옮겨서 우리 집은 서울로 올라왔고, 일심 검도관과는 영이별을 해야 했으니….나는 할 수 없이 서울의 큰 도장에 틈틈이 다니고 공부에도 열을 올리며 생활했다. 그 정신없는 나날 속에서 일심 검도관과 정 사범님의 소식을 접한 것은 이사간 지 반년이나 흘러간 후였다. 도장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충청도 공주의 일심 검도관을 알고 있다는 꺽다리 선배를 만났을 때 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전해준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도 단위 대회에 제자들을 이끌고 갔던 정 사범님이 돌연 쓰러졌고, 병원으로 실려가 검사를 받자 폐암이라는 선고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암세포는 이미 등쪽으로 심하게 전이되어 있었다. 다급해진 사범님은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은…."그래서라니? 죽었지 뭘. 언제 장례식을 했더라…한 달쯤 됐지, 아마."나는 비로소 알았다. 그가 가끔 내뱉던 기침이 헛기침이 아니었음을. 나는 뜻밖의 날벼락에 말문이 턱 막혔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그제야 어리둥절한 낯빛으로 바뀐 선배를 뒤로 한 채 도장을 뛰쳐나갔다.출입문을 와락 밀어젖히고 달려나온 거리에는 가느다란 눈발이 미친 듯이 휘날리고 있었다.나는 멍청히 고개를 떨군 채 눈 내리는 거리에 맨발로 섰다. 도복 바짓가랑이가 차가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바지는 앞이 내려가고 뒤가 올라가야 한다며 대뜸 바지 앞자락을 잡아당기던 그의 손길이 불현듯 떠오르자 뜨거운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정신병자에 가까운 상태였던 나를 공포와 망상에서 벗어나게 한 결정적인 것은 나 자신의 마음 속에서 끌어낸 한가닥 용기와 생명력이었지만, 그것에 이르도록 이끌어준 사람은 그였는데….악몽이 또 한 번 나를 덮쳤다. 그러나 그건 지금까지의 악몽을 몰아내는 마지막 악몽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이제는 엷은 흉터만 남은 이마의 상처처럼 사라져가는 아픔이 마음 속에 흐르고 있었다. 자학하면서 불안에 떨던 시간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 사범님의 활짝 웃는 검푸른 얼굴도 그곳에 있었다. 부서진 가슴 위로 내리쳐오던, 그러나 상처를 어루만지던 따스한 칼날이 이젠 부러져 버렸다. 하지만 슬픔일랑은 오래 끌지 말고 훌쩍 뛰어넘으라고 검도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봄이 아주 조금씩 다가오는 늦은 겨울의 맑게 개인 어느 날.차디찬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호구가 든 가방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메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건들거리며 나는 도장에 간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는 걸음이지만 사실은 지독하게 추워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나는 안 추운 척 휘적휘적 걸으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집중하다가, 마침내는 추위를 참다못해 도장까지 죽기살기로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는 거리에 환한 햇살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