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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예술영화를 보고 싶다, 볼 권리가 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극장에서 10만 관객을 모으고(이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현상이었다), 키에슬롭스키, 쿠스트리차, 구로자와 아키라 등의 영화도 극장에서 개봉해서 흥행은 물론 수익도 냈었다. 레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도 프랑스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흥행한 것이 유일한 기록이었다. 지금은 모두 잊어버렸지만, 왕가위 영화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었다. 당시에는 예술영화 전용관도 존재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정말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약간이라도 무게가 있는 영화잡지는 팔리지 않고, 그렇게 꿈에 그리던 시네마테크가 생겼는데도 만성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해 존폐 위기에 섰다. 여기서 다시 묻게 된다. 한국에서 예술영화와 독립영화 관객층은 사라졌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부산영화제를 비롯한 국제영화제에 가면 너무나 많은 관객들을 만나게 된다. 그 뜨거운 국제영화제의 열기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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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나는 비평가다, 고로 나는 비평한다
같은 글에서 듀나는 “스노브들은 예술가들을 먹여 살린”다고 쓰며 1995년에 뒤늦게 국내 개봉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유작 <희생>(1986)을 십만 명이 관람했던 사건을 언급한다. ‘손해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딱 맞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이렇듯 영화를 (‘스노비시’하게) 향유했던 경험을 남기고 지나갔다는 게 내 판단이다. <곡성>(나홍진, 2016)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쏟아져 나오는 걸 단순히 시장 규모나 관객 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부럽다 부러워. ‘문단의 문법’이라든지 ‘자기들끼리만 돌려보는 소설’이라든지 하는 말들을 들으면 속상하다. 삼십 톤짜리 컴퓨터가 손바닥 안에 들어오기까지가 반백년인데, 소설은 ‘한국 현대소설’의 역사만도 짧게 잡아 백 년이다. ‘인식’은 몰라도 ‘미학’은 일종의 테크놀로지다. 소설의 기술(記述)은 기술(技術)이란 말이다. 기술(技術)은, 테크네(techne) 운운하며 어원 따질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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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서 본 ‘회상’의 의미
러시아의 천재적 영화작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1932~1986)의 작품 『노스텔지아』이지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그토록 사랑한 두 공간이 병치되어 떠오릅니다. 즉, 이탈리아 토스카나 성당을 배경으로 러시아 시골농가 풍경이 펼쳐지고 그 안에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있는 장면이지요. 이곳은 러시아의 고향도 아니며,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도 아닌 전혀 새로운 초자연적 공간이지요. 그러나 그곳은 전혀 낯설지 않은 곳으로 그의 영혼 안에 언제나 있었고 그가 항상 그리던 곳이며 언제나 사랑하던 사람들이 있는 공간, 바로 그의 영혼의 고향[本鄕]인 겁니다. 영화는 주인공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하고 앉으면서 끝납니다. 평안 그리고 안식! 이어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은 순백의 눈, 곧 구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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