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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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청포도
칙, 담배 꺼내 물고 달 처녀 불러내던 갈기 구름 아래 어슬렁대며 햇살 낚아채던 한 번씩 장대비에 두개골 깨지고 싶은 건달의 시절은 진즉 담을 넘어 떠나버렸다 우아하게 분사되는 스프링클러 앞에 사육우처럼 하루 더 속절없이 또 하루 몸피 늘려 가는 머리칼 바람에 날리지도 못하는 저치들은, 별수 없이 수인이 다 돼 간다 헌데 분이 묻은 하품을 잘 익었다고 푸푸, 옛 추억 내뱉는 입술은 또 무언가 칸칸이 포개진 방 안에 머릴 포개고 트럭에 실려 가는 출옥수가 왜 저리 심드렁한가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는 말은 수정될 때가 되었다 팅팅 불은 저 우울의 안구 앞에서 * 이육사, 「청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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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신발이 작아졌다
신발이 작아졌다 임경섭 신발이 작아졌다는 것은 이미 다 자란 아이에게 성장을 꿈꾸게 하는 것도 손발이 팅팅 부어오른 옆집 아줌마의 림프부종을 알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신발이 작아졌다 그리곤 한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인 언덕 위 정보화도서관 진흙이 말라붙은 작은 공터에 갈 곳 잃은 발자국 한 켤레가 놓여있다 칠 벗겨진 담벼락에 기대어있는 그늘 속에 온몸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부산한 오후 속에 처음 보는 고요한 폰트 모양으로 뻗어있는 시옷 저 발자국 신발의 일부였을 동안 얼마나 무거운 생애를 짊어지고 다녔는지 선명한 흔적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흐릿한 알몸으로 끔벅끔벅 졸고 있는 그는 자신의 이력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알고 있다 이 세상 얼마큼의 발자국들이 예정된 길들을 돌고 돌아 안락한 선반 위에 놓일 수 있을까 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길 위를 헤맨 시간들 상처로 가득한 신발들은 날마다 작아지고 있다 신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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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
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 김성규 서른한 살, 직업은 없음, 가족 사항은 아내와 딸 하나, 우물에서 팅팅 불은 사내가 끌려 올라온다 이장은 소주를 마시고 구제역에 걸린 돼지들은 거대한 구덩이에 빠진다 자주 들락거리드라고, 미친 사람인 줄 알았다니께, 터널에서 빠져나온 듯 소란스러운 마을, 수돗가에 앉아 빨래를 하는 아낙(43세)은 경찰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방역반이 돼지의 머릿수를 센다 마을 입구에 뿌려지는 흰 가루들 피리를 불면 귀 달린 뱀이 나타난단다 뱀을 보면 사람의 눈이 멀게 된단다, 그렇게 애들한테 얘기하더라니까 머리 위로 흙이 쏟아질 때마다 꽥꽥거리며 우는 돼지들, 이래야 나도 먹고 살지, 포클레인 기사(47세)는 삽으로 흙을 뜬다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듯 흙은 가볍게 구덩이 위로 올려져 하얀 수퇘지들의 머리 위로 뿌려진다 우글거리며 구석으로 달아나는 돼지들, 시체를 비닐에 싼 경찰이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