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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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서울(제9회)
인조 잔디 위를 절룩이며 가로지른 개가 팔각정으로 들어가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팔각정에는 방금 전까지도 사람들이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다. 소년은 개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바닥에 흩어진 흰 가루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핫케이크 가루였다. 적어도 소녀가 속한 무리는 버너를 피워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을 만큼의 여유는 누렸던 셈이다. 소년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도 소년 옆에 쭈그려 앉았다. 여자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노인은 소년과 여자 뒤에 섰다. “황급히 떠난 것 같지는 않구나.” “우리가 아는 걸 그자들도 알 테니까요.” “오늘 떠나려 했던 거야.” “우리가 가까이 왔다는 걸 알았겠지요?” “알았겠지.” “그럼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면 왜 총을 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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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단편소설] 웨딩드레스 44
그래서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에서 스카프와, 두 사람이 데이트했던 거의 모든 장소에 혼자 다시 가서 사진을 찍고 편지를 써서 만든 앨범으로 프러포즈했다. 여자에겐 다른 계획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해외 연수도 계획되어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줄게. 그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거야.”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왜 스카프가 두 장이야?” “혹시나 또 잃어버리면 속상할 테니까.” “너무하잖아. 날 뭘로 보는 거야. 하하하.” 남자는 여자가 감동해서 울 줄 알았는데 전혀 울지 않아서 조금 섭섭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여자가 그 드레스를 고른 이유는 아무 장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하늘색 스카프를 거즈를 대고 조심스럽게 다려, 벨트 모양으로 접었다. 드레스와 스카프는 원래 세트였던 것처럼 어울렸다. 4 네 번째 여자는 결혼 한 달 전부터 남자 친구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전셋집을 구하면서 날짜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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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눈빛
제대 직후의 겨울 어느 날, 서울타워 팔각정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이는, 뭔가 다른 눈빛. 십대 소녀처럼 맑으면서도 삼십대 여인의 관능미를 품고 있는 듯한, 아찔한, 모든 걸 빨아들일 것 같은, 여전한 눈빛. “이거 지우면 죽음이야! 알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지난겨울, 어떻게 알고 찾아왔던지 유리는 잔뜩 취한 채로 내 원룸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유리는 블로그에서 자기 사진을 다운받아 바탕화면에 깔아놓더니 주먹을 불끈 쥐여보였었다. 한 번만 더 도망을 가면, 그땐 정말 죽음이야! 알지? 하는 표정으로. 그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아이러니 같았다. 그 눈빛을 피해 군대로 도망갔다가 제대하자마자 만나서 찍었던 사진을, 이번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아 놓게 되다니…… 그건 일종의 상징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야 결코 그녀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