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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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매혹의 지도를 그리는 방법
[기획-다시 이 작가] 매혹의 지도를 그리는 방법 - 홍일표 시인 인터뷰 고봉준 내게 '홍일표'라는 기호는 두 개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단정하고 점잖은 태도가 그 하나이고, 최근 몇 년 동안 이전의 시세계와 단절하면서 밀고 나가는 새로운 시적 경향이 다른 하나이다. 앞의 것이 '사람'에 관한 것이라면, 뒤의 것은 '시'에 관한 것이다. 홍일표 시인은 『매혹의 지도』(2012) 이후 새로운 작시법을 선보이면서 전통적인 서정의 세계에서 이탈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평론가는 이 변화를 "그동안 그가 축적해 왔던 시학적 준거와 기율의 일대 전환을 예고하는 돌올한 실례"(유성호)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그의 시집들을 읽어 보면 일련의 실험적 경향이 분명한 목표 지점을 설정하고 나아가는 여정이라기보다는 그때그때마다 시가 위치하고 있는 토대를 허물어뜨림으로써 다른 세계를 개시하려는 부정의 몸짓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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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지금 어디 계세요?
홍일표 눈 위에 기다랗게 흘림체로 이어져 있는 발자국들, 때론 초서로, 때론 행서로 사관의 붓끝에서 흘러나와 확신으로 빛나던 뜨거운 역사였다 좀벌레 같은 햇살들이 야금야금 두툼한 실록 한 권을 파먹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군데군데 해어진 책들은 걸레조각처럼 너덜거렸다 제 고집으로 뭉쳐 있는 눈덩이들만 병들고 늙은 개처럼 납작 엎드려 뼈다귀만 남은 발자국을 움켜쥐고 있었다 눈이 녹으면서 개들은 발자국을 물고 사라졌다 길바닥은 질척질척 짓무른 과일처럼 썩어가고, 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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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텍스트
텍스트 홍일표 허공의 화법일 뿐이라고 바람이 중얼거리는 동안 나뭇잎들이 품고 있던 여러 색깔의 감정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어제의 밤과 오늘의 낮이 뒤엉켜 잠들어 있는 슬픔의 극지에서 붉은 등을 들고 있던 꿈들이 어두운 호흡 속으로 스미었다 사건 속에서 새로운 이름을 얻은 사물들이 다른 표정을 짓는 시간 얽히고설켜 경계 없이 무한으로 펼쳐지는 종이의 심장에 기록한 낯선 행성의 유적들 달과 별이 해석하지 못한 장문의 밤을 들여다본다 흰 고양이가 검은 문장을 부수고 뛰쳐나갈 때까지 조금씩 어둠의 틈새로 새어나오는 실금 같은 빛 죽은 자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독백이라고 한다 생각의 끄트머리로 처음 본 문자들이 두런두런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