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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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꿀사과들에게 고함 - 자기소개서 외1
꿀사과들에게 고함 황성희 나보다 더 먼저 불기 시작했으면서 나보다 더 늦게까지 부는 바람이 싫었다. 나보다 더 먼저 태어났으면서 나보다 더 늦게까지 태어나는 나무가 싫었다. 잠깐! 이건 마트에도 없는 너무 뻔한 상상이잖아요. 괜찮아, 고양이 한 마리쯤 죽여 버리면 되지. 어머니는 차마 못 죽이겠고 아버지도 차마 못 죽이겠고 파리나 한 수천 마리 죽이면 되지. 사실은 내가 그 파리인지 파리 잡는 손바닥인지 궁금한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넌 어떤 사과니? 도로변에 놓인 청송 꿀사과들에게 소리친다. 혹시 72년 식목일 이름도 모르는 애송이 손에 함부로 심긴 너 국방색 맛이 나는 사과니? 미안, 편지라면 사양하겠어. 꿀사과들아, 난 주소가 없단다. 내가 누군지 정 알고 싶다면 늘 하던 대로 천천히 죽어. 첫사랑2)이 말했듯 널 알기 위해 세상의 모든 사과나무를 조사할 필요는 없단다. *1) 박찬욱 감독의 영화 *2) 투르게네프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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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젖소와 함께 티타임 外 1편
젖소와 함께 티타임 황성희 젖소의 무리들이 나타난 것은 오후 무렵. 주차장을 가득 메운 젖소들은 느긋하게 화단의 풀을 뜯고 인도 위로 배설을 한다. 놀이터에 진을 친 사자들에겐 벌써 이름이 붙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새로운 이웃이 늘어난다. 저기요, 삼삼오오 주차장의 젖소들은 이상합니다.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하체가 필요하다. 뿌리에서 나뭇잎에 이르는 나무의 줄거리와도 같은. 거실 바닥에 놓여진 두 발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오른쪽과 왼쪽의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걱정 말아요, 당신은 코끼리처럼 보이지 않아요. 식탁 위 화병처럼 나는 안정된 자세로 놓여있다. 새로운 종을 발굴하고 학명을 붙이는 일에 골몰합시다. 그래도 시계 밖으로 시간이 흘러나오면 고장이지요. 아파도 결석은 안 된다 선생님 말씀처럼 받아들이길. 가면을 벗는 게 부담스러우면 그냥 공존하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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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허공에 걸터앉은 나의 구체적 자세 외 1편
허공에 걸터앉은 나의 구체적 자세 황성희 최승자를 읽을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시가 들려주고 보여주는 세계보다는 자신의 시를 살아낸 한 여자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감당해야 하는 게 실존이라면 나는 누구에게도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사물의 귀퉁이가 투명해진다 싶은 날에는 얼른 뛰어가 텔레비전을 켠다 거기에는 이국의 전쟁고아들도 있고 불치병으로 투병하는 환자들도 있다 후원단체의 스케치북에 감동하는 아버지와 주민센터의 도배로 곰팡이가 숨겨진 방에서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가족도 있다 그들 옆에서 잠시 나의 허공을 잊고 옷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후원계좌를 받아적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건강한 게 최고야 먼 세계의 메아리 같은 내 목소리를 듣지만 숨소리의 직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시각각 실존의 정면이다 대대로 이어져 온 나는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 이 세계는 어떤 기원에 대한 상동과 상사의 기관인지 유서 깊은 벽에 누고 또 눈 지린 오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