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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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글틴 청소년문학캠프 참여후기]어떤 밤 여러분에게도
열아홉의 겨울, 나는 수련원에서 진행된 또 다른 청소년문학캠프에 와 있었다. 감기가 심해 열에 들뜨고 약에 취한 채로 정해진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바이러스가 옮을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사실은 만사가 귀찮아진 나른한 몸의 게으름으로,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서 한 걸음 뒤에 앉아 있었다. 시구에 맞춰 탈춤을 추고, 누가 더 능청스럽게 아이돌의 노랫말을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사처럼 연기하는가를 겨루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혼자 자주 웃었고, 그러다 밤의 복도에서 바닥에 누워 우는 아이를 보기도 했다. 나는 그 애가 유령처럼 느껴졌고, 어쩌면 그 애도 나를 유령처럼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린 서로를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그 애는 몇 번 죽으려고 했다가 살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먼 나라에서 커피를 만들고 빵을 굽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애의 얼굴도 떠올릴 수가 없다. 그저 어떤 밤이었다고만 생각한다. 우리가 만났던 어떤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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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한용국 1. 애인은 침대에서 다리를 찢었다 면벽하는 방아깨비처럼 끄덕거리며, 애인의 다리가 조금씩 양갈래로 찢어질 때 느닷없이 4월이 오고 벽지 속에서 다족류들이 기어 나와 손에 손 맞잡고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를 찢는 애인 옆에서 책을 읽었을 뿐인데 손가락은 어디 있을까 다족류들은 이국적인 스텝으로 침대 위에서 춤추는데 나는 침대에서 튕겨져 나오고 애인의 다리는 벌어지고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었다. 애인아 내 손가락을 돌려줘 일렬로 선 나무들도 다리를 찢고 있었다 애인아 저것 봐 이파리도 없이 마른 사타구니에서 하얀 꽃이 피어오르네 내던져진 책 속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공관처럼 창밖으로 소리를 증폭시켰다 하얀 꽃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추고 있었다 다족류들이 성급하게 벽 속으로 퇴장했다 내 손가락은 어디 갔을까 애인아 이제 네가 노래할 시간이야 나는 아직 다리를 더 찢어야 돼, 갑자기 형광등이 꺼졌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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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병(病)의 밤(夜)
어느 밤, 병원의 복도를 서성이던 우리는 노인을 보았다. 아니, 노인을 보지 못했거나, 노인을 보려 하지 않았거나, 노인을 보고도 잊었을 수 있다. 또 다른 어느 밤, 우리는 애써 노인을 찾아나설지도 모른다. 링거액 주머니를 매단 낡은 스테인리스 거치대를 밀며 느릿느릿 밤의 병원을 걷는 노인. 노인의 발소리, 노인의 걸음걸이, 노인의 그림자.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발소리와 걸음걸이와 그림자와 함께, 병든 육체와 병든 시간과 병든 기억이 밤의 병원을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문장웹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