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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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잡담의 발견
잡담의 발견 최인호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봐야겠지요 이 빵을 도넛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면 처음부터 가운데가 텅 비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채울 생각을 않기로 했다는데 말입니다 그 작은 구멍으로 뭐가 보이긴 하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목욕탕에 불이 나도 얼굴만 가리고 나오는 사람도 있는데요 뭐, 밥 주는 사람만 없으면 길고양이가 없어질 거라 믿으니까 저렇게 소리 지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또 슬그머니 창문을 닫고 마는 거 아닙니까 처음부터 도넛이었으니까요 가운데는 중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발레리나는 우아하게 돌아버리겠지요 고요한 가운데 발은 불어터질 테고 물집이 잡히겠죠 물이 아무리 많이 들어있어도 쓰라릴 겁니다 목욕탕에도 불이 나는 것처럼요 길고양이는 쓰레기봉투를 뜯어 끼니를 해결할 테고 길고양이를 낳을 테죠 우리는 알아서 늙어 갈 겁니다 이어폰 낀 날에는 독립적인 표정으로 살아갈 겁니다 주기적으로 고지서가 날아오고 있을 겁니다 애매한 약속에는 살짝 도넛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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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상황의 발견
[단편소설] 상황의 발견 김선재 종이 흔들린다. 갑자기 갈라진 틈처럼 문이 열린다. 남자는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열린 문 사이로 몇 가닥의 눈발과 남색 후드와 흰 운동화가 보이는가 싶더니 가방을 멘 누군가가 들어온다. 다가오는 낯선 방문객의 어깨와 정수리에 내려앉았던 눈이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진다. 축축하고 서늘한 냄새가 끼친다. 남자는 말없이 방문객을 바라보고 방문객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한다. “예약했는데요.” 앳된 목소리이다. 뒤집어쓴 후드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방문객은 소녀가 분명하다. 남자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인다. 예약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입구에 붙여 놓은 폐업 안내 문구를 보지 못한 걸까. 남자는 문 밖을 가리키며 이미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은 소녀를 향해 더듬더듬 사정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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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장소의 발견
장소의 발견 조정인 묘지 안은 흐르는 도형처럼 사계가 흘렀다. 각기 다른 색의 계절들은 서로에게 향하는 친밀로 애틋해했다. 한 소년이 왔다. 소년은 나를 경유하는 중이다. (여기선 이렇게 걷는 거야, 음전한 여학생처럼 고양이 옥이가 발꿈치를 들고 드레스실 복도를 지나갔다.) 머리맡으로 검은 석탄차가 지나가고 흰 나비가 지나갔다. 검은 시간과 흰 시간 위로 조율사의 손가락이 빠르게 지나갔다. 소년과 나는 건반처럼 나란히 누워 있었다. 소년의 입에서 모래가 흘러나왔다. 생소한 음역의 노래였으나 직역이 가능했다. ― 나는 무리의 선출된 총받이. 구멍 난 시신을 부축하고 걷는 건 너무 힘들어. 풀숲에 눕히고 눈을 쓸어주었어. 피에 젖은 척척한 넝마를 걸친, 낡은 나무목걸이를 끌어안은 그 아이. 그 애는 이제 거기 없어. ― 배고파, 무서워, 집에 가고 싶어, 자꾸만 잠이 와, 엄마. ― 우선 옷을 좀 갈아입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