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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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페이지 터너를 생각하며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석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밤잠을 못 잤는지 사위의 얼굴이 수척했다. 보호자 명패를 목에 건 그의 등이 초조함에 흔들리는 듯도, 긴장감에 콘크리트처럼 굳어있는 듯도 했다. 동의서에 사인도 사위가 하고 남편과 나는 바라만 보았다. 불안하고도 생경한 상황에 모든 역할을 하며 간간이 여러 과정에 관해 설명해 주니 고맙고 든든했다. 그런데 뭔가 어색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막중한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함과 무력감이 동시에 일었다. 딸내미의 삶은 이제 그들이 연주하고 우리는 객석의 관객이 된 것일까, 객쩍은 생각들이 스치며 피아노 연주회의 그녀가 떠올랐다. 화려한 의상의 피아니스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입장했다. 관객들의 박수갈채가 잦아들 무렵 수수한 검정색 차림의 여자가 발소리도 없이 들어와 연주자의 옆에 앉았다. 피아노 소리는 홀을 가득 메우고 가끔 그림자 같은 여인이 악보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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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손의 역할
손의 역할 한재범 카페에 앉아 있는데 웬 아줌마가 떡을 줬어 애인의 말은 늘 뜬금없이 시작되고 오늘이 부활절이래 남이 부활한 날을 왜 우리보고 기뻐하라는 거지 나도 부활하고 싶다 애인은 장난치고 옆 테이블에서 〈네 저 그 환자 보호자 되는데요 산소호흡기 떼주세요 네〉 남의 통화소리가 들리고 지금 내가 쥔 떡은 네가 준 떡 포장지를 뜯어 냄새를 맡았다 상한 밥 냄새 내가 너무 오래 쥔 걸까 아님 네가 너무 오래 쥔 걸까 그 아줌마일까 떡이나 밥이나 상하면 그런 냄새가 나 너도 알지 혼자 남은 집 냄새 너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잘 떠오르지 않아서 문득 내 몸 냄새를 맡게 되고 이미 굳어버린 떡은 부활하거나 하지 않는다 내 손에 쥔 떡은 그저 내 손에 쥔 떡이다 떡의 부활 같은 걸 바라는 사람은 없겠지 누군가의 손안에서 떡은 신의 몸을 형상화한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던데 나는 혼자 카페에 남았다 신도 카페에 앉고는 생각했을 거다 아이스티를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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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시계태엽 오렌지
오렌지를 오렌지라고 부르면 오렌지가 아닌 것처럼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그녀의 세계가 모두 가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 채 12시간 넘게 수술 중 불 켜진 보호자 대기실에서 내가 떠올린 그녀의 오렌지는, 그랬다. 나는 눈을 감고 골동품 상점으로 들어선다. 그 상점은 미국에 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소도시 어디쯤일 것이다. 골동품 상점 안에는 작은 시계태엽 오렌지 하나가 놓여 있고, 미국인 양부는 카운터에 앉아 있다. 딸랑, 하며 종이 울리고 검은 머리에 눈이 찢어진 동양인 소녀 하나가 문을 열고 맨발로 뛰어 들어온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손깍지를 끼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다. 수술실 앞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노란 선이 있다. * 그 너머 그녀의 디즈니랜드가 있다. 그곳은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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