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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1984년』을 통해서 본 ‘사회공학’의 의미

  • 작성일 2006-09-25



그리스 신화에 보면, 영웅 테세우스는 그의 아버지인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를 찾아가는 길에서 많은 악당들과 괴물들을 만나 퇴치했지요. 그 중 하나가 ‘잡아 늘이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프로크루스테스입니다. 이유인즉, 그는 쇠로 만든 침대를 하나 갖고 있다가 그의 집에 들어온 여행자들을 그 위에 결박하여 키가 침대 길이보다 짧은 경우에는 잡아 늘여 침대에 맞도록 하고, 반대로 침대보다 긴 경우에는 다리를 잘라내어 역시 침대에 맞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에게도 역시 똑같은 짓을 하려 했다가, 고약한 악당은 결국 죽임을 당했지요.

이러한 연유에서, 사람들은 이렇듯 나름대로 어떤 한 가지 기준을 가지고 모든 것을 그것에다 맞추려는 사람을 프로쿠르스테스라고 하고, 그런 획일화 작업에 사용되는 폭력적 도구를 일컬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학자들은 흔히 지난 200여 년간 사회 각 분야에서 획일화 작업을 해온 ‘근대인’을 프로쿠르스테스로, 그리고 그런 획일화 작업에 사용되어온 ‘근대적 이성’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사회공학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최초의 사회공학 저서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국가』가 보여주듯, 사회공학에는 이상적인 사회 형태를 설계하고 확정하는 작업과 그것에 맞게 인간을 길들이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통해서 본 ‘인간공학’의 의미」에서 보았듯이,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인간 길들이기를 처음부터 권력에 의한 것이며,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합니다.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서 슬로터다이크는 독서(내지 휴머니즘)가 이 길들이기를 담당해왔다고 주장했지만,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교육’과 ‘처벌’이라는 두 가지 메커니즘이 오랜 세월 동안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역할을 맡아왔지요. 사실인즉 교육은 키를 늘이는 작업을 담당해왔고, 처벌은 다리를 잘라내는 작업을 실행해온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고발한  ‘근대적 이성의 양면성’과 그를 이용하는 ‘권력의 음모’인 거지요.

푸코는 그의 저서 『광기의 역사』(1961), 『병원의 탄생』(1963), 그리고 『감시와 처벌』(1975) 등에서 병원, 학교, 감옥 등 사회의 미시적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규격화, 조직화, 표준화에 의한 획일화와 그것을 위한 체제적인 폭력을 고발하는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테세우스의 영웅적인 퇴치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부활한 근대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그는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고발한 겁니다. 푸코가 보기에는 근대적 병원, 학교, 감옥이란 정상성, 정당성, 합리성이라는 개념에 의한 비정상성, 비정당성, 비합리성, 곧 병자, 범죄자, 변태자 들을 규정하여 만들어 내는 감금과 감시의 프로그램, 곧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푸코보다 한발 앞서 이 같은 일을 문학에서 수행한 사람이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이라는 영국 작가이지요. 사회문제에 대한 열렬한 관심 때문에 작가가 된 그는 『동물농장』(1945)과 『1984년』(1949)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지요. 오웰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지만 확고한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 프랑코의 파시스트들과 맞서 싸웠으며, 런던 빈민가로 이주하여 호텔 접시닦이로 일하기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동정심을 보였답니다. 자신의 『동물농장』이나 『1984년』 같은 작품들을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비판으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가 아무리 바람직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억압과 폭력에 의한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될 경우 그것은 우리가 진정 원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한때 모스크바로부터 ‘숙청’ 대상으로 지목될 정도로 그 시대의 전체주의인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대항했던 겁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자유, 존엄성, 사랑 등이 상실된 전체주의 사회는 결코 유토피아일 수 없다는 거지요.

오웰은 1950년 1월 21일, 46세로 세상을 떴는데, 그 몇 달 전 병마와 싸우며 혼신의 힘을 다해 쓴 『1984년』이 출간되었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전체주의라는 체제적 폭력으로 새롭게 부활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인간과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시키는가를 극렬하게 고발했지요. 『1984년』을 보시죠.



101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나 



발표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특히 1983년에서 84년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는 제목이 가져온 특수를 맞아 미국에서만 200만 부가 넘게 팔린 『1984년』은 당시로는 먼 미래인 198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시작합니다. 원래 제목은 “유럽의 마지막 인간”이었는데 출판사가 반대하자, 오웰이 “1984년”을 제목으로 선택했다지요. 소설 속의 1984년은 매우 암울합니다.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의 세 불록으로 나뉘어 전쟁 중이지요. 그 가운데 영국 런던은 유라시아 제1공대(Airstrip One)에 속합니다.

정부에는 네 부처가 있는데, 전쟁을 담당하는 평화성(平和省), 억압적인 법과 질서를 담당하는 애정성(愛情省), 피폐한 경제를 담당하는 풍부성(豊富省), 뉴스와 오락 그리고 예술을 담당하는 진리성(眞理省)이지요. 정부는 사상경찰들을 통해 시민들을 항상 감시하고, 진실을 조작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일을 합니다. 특히 모든 공공장소, 사무실, 구내식당, 심지어는 집안에까지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여 시민들의 행동과 대화를 감시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언어, 역사, 사상에 대해 국가의 지도와 통제를 받으며, 통제에 거부하는 일체 행위는 즉각 처벌되지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이 암시하듯, 전쟁에 의해 내부 불만을 해소하고 단결을 도모하며, 개인의 자유의 불필요성을 강조하고, 무지는 힘이라고 세뇌시킵니다. 또한 거리에는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brother is watching you,!)”라고 적힌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지요.

『1984년』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유행어가 된 “빅브라더(Big Brother)”는 이 사회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기관이지요. 이 용어는 본래 유인원이나 폭력배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을 가진 속어였지만, 이 작품 이후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져서 아무도 모르게 모두를 지켜보는 불쾌한 ‘감시자’, 모든 이들을 불안하게 하는 비열한 ‘고발자’, 언제든 고문실이나 감옥으로 보내는 비밀스런 ‘정부 관리’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1984년』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진리성에서 뉴스를 조작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중간 관리이지요.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자기가 하는 왜곡 행위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식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결국 비밀저항조직과 접촉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줄리아라는 여성을 만나 동지이자 연인이 되지요. 하지만 그들은 곧 고발당해 사상경찰에게 넘겨집니다. 그리고 애정성(愛情省)에 끌려가 소위 ‘재교육’을 받게 되지요. 애정성에서도 가장 잔혹한 곳이 101호실입니다.

이 국가에서 모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텔레스크린을 끌 수 있는 소수의 인물 가운데 하나인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다음같이 말합니다.

“자네가 언젠가 내게 물었지. 101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냐고 말이야. 그때 나는 자네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말해주었지.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거든. 101호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네.”

오웰은 101호실로 끌려가는 한 죄수의 입을 통해 그 끔찍한 일에 대한 공포를 이렇게 묘사했지요.


“몇 주일 동안이나 나를 굶겼지? 이제 그만하고 죽여, 총살을 하란 말이야. 목을 매! 25년 징역을 내리라구. 내가 또 불어댈 사람이 있나? 누구든지 상관없어.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하든지 알게 뭐야. 마누라도 있고 자식도 셋이나 있어. 맨 위 놈이 여섯 살도 안 됐어. 그 애를 잡아다 내 앞에서 목을 따더라도 참고 보겠어. 하지만 제발 101호실만은.”  


윈스턴은 처음에는 줄리아가 받을 고통을 생각하며 ‘내가 두 배의 고통을 받아 줄리아를 구할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해야지.’라고 생각하지요. 또한 “빅브라더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 오브라이언에게 “나는 빅브라더를 증오합니다.”라고도 대답하지요.

하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에 의해 육체적․정신적으로 완전히 망가진 윈스턴은 101호실로 끌려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쥐에게 뜯어 먹히는 고문을 받게 되자 결국 줄리아를 배반합니다. 그가 간직했던 마지막 인간성마저 버린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야 재교육이 끝나고 ‘완치된 자’로 판정받고 석방됩니다. 작가는 주인공이 도달한 이 비참한 결말을 “애정성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용서받고, 그 영혼을 눈처럼 깨끗하게 했다.”라고 표현했지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2+2=5’, ‘신은 권력’과 같은 명백한 오류를 진리로 인정하게끔 철저하게 세뇌된 윈스턴은 빅브라더의 커다란 얼굴을 올려다보며, 지난 40년 동안이나 그의 존재와 사랑을 의심하고 오해했던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모든 것은 잘되었다. 싸움이 끝난 것이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

오웰은 『1984년』을 통해 그 시대의 전체주의, 곧 파시즘과 공산주의 사회가 지닌 악몽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가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지요.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언제라도 그런 상황이 닥칠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그것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는 문제다.”라고 경고도 했습니다.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오웰이 남긴 경고를 크게 ‘감시사회’의 문제와 전체주의의 문제, 이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선, ‘감시사회’의 문제이지요. 『1984년』에 등장하는 사회는 전체가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 시스템이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는 거대한 ‘일망감시시설(一望監視施設)’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지요.   


“텔레스크린은 송신과 수신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윈스턴이 내는 소리는 아무리 낮은 소리라 해도 다 기계에 걸려든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 금속판의 시계(視界) 안에 들어있는 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들리고 보인다. 그러나 언제 감시를 받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말 안에 ‘일망감시시설’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일망감시시설이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설계하고 ‘팬옵티콘(Panopticon)’이라고 이름 붙인 감옥시설이지요. 영어로 ‘팬옵티콘’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어 ‘파놉티콘’은 본래 ‘다 본다(all seeing)’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벤담의 설계에 따르면 팬옵티콘은 원형으로 된 거대한 감옥인데, 바깥쪽으로는 죄수들을 가두는 방이 있고 중앙에 죄수들을 감시하는 원형의 중앙감시탑이 있지요. 죄수들의 방과 중앙감시탑의 사이에는 창이 있는데다 죄수들의 방은 언제나 밝았기 때문에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간수에 보입니다. 하지만 중앙감시탑은 내부가 항상 어두워 간수를 보기는커녕 간수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지요. 그럼으로써 벤담 자신이 강조한 대로 “죄수들이 항상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팬옵티콘의 핵심 구조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죄수들이 갖는 “감시의 환영”에 대해  오웰은 『1984년』에 이렇게 표현했지요.


“사상경찰이 한 개인에 대한 감시를 어떤 계통으로, 또 얼마나 자주 행하는지는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을 언제나 감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들이 하고 싶으면 언제라도 감시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 밖에 내는 소리는 모두 들리고 캄캄할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모든 동작이 감시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했고 또 그것이 본능처럼 습관화되어버렸다.”     
       
푸코는 1975년 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오웰이 말하는 본능처럼 된 “습관화”를 규율권력의 “내면화”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이란 사람 개개인의 몸을 정해진 규율을 통해 길들여서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통제시스템을 운용하는 권력을 말하지요. 푸코가 보기에,  팬옵티콘에 수감된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시선 때문에 처음에는 규율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다가, 점차 이 규율권력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게 된다는 겁니다. “요컨대 감금된 자가 스스로 그 유지자가 되는 어떤 권력적 상황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지요. 같은 말을 오웰은 “자신의 모든 동작이 감시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했고 또 그것이 본능처럼 습관화되어버렸다.”라고 표현한 거지요. 

그런데 푸코가 주목한 것은 근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습관화” 내지 규율권력의 “내면화”가 단지 감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군대, 병원, 공장, 학교에서까지 똑같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감옥이 공장이나 학교, 군대나 병원과 흡사하고, 이러한 모든 기관이 다시 감옥과 닮았다고 해서 무엇이 놀랍겠는가?”라고 물었지요. 그가 염려하고 고발한 것은 바로 근대사회 전반의 팬옵티콘화였던 겁니다. 벤담이 단지 효율적인 감옥시설을 위해 고안했던 팬옵티콘을 푸코는 규율권력이 사회 곳곳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작동하는 근대사회의 상징으로 분석한 거지요.

푸코가 보기에 인간은 규율권력에 의해 ‘제조’됩니다. 이 근대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우선 학생시절에는 학교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에 알맞게, 학교를 졸업하면 공장에서 ‘노동자’라는 신분에 걸맞게 사람들을 - 잡아 늘리거나 다리를 잘라내어 - 제조한다는 거지요. 그러다 간혹 이 규율에 저항하거나 벗어나면 곧바로 감옥으로 보내져서 ‘죄수’라는 신분에 적합하게 다시 제조되고, 만일 여기에서마저 적응하지 못하면,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근대적 이성’을 되찾는 프로그램을 밟게 됩니다. 비록 극화되긴 했지만, 『1984년』에서 주인공 윈스턴이 밟았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던 거지요.       

18, 9세기의 근대사회에 대한 푸코의 이러한 분석이 20세기의 후반에 와 지식인들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이유는 급속히 진행된 정보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20세기 말부터 불기 시작한 정보화에 의해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폐쇄카메라(CCTV), 각종 전자카드에 의한 전자결제 등을 이용한 다양한 감시와 통제 방법들이 개발되고 사용됨에 따라, 사람들이 점점 민감해진 거지요. 오웰의 『1984년』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그의 저서 『통제사회에 대하여』에서 푸코가 파악한 “규율사회(disciplinary society)”는 증기기관과 공장이 지배하고 요란한 구호에 의해 통제되는 18, 9세기 사회이기 때문에, 컴퓨터와 기업이 지배하고 숫자와 코드에 의해 통제되는 오늘날의 사회는 그와 다르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태의 감시사회를 “통제사회(control society)”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푸코가 말하는 규율사회가 팬옵티콘이라면, 들뢰즈가 언급한 통제사회는 전자 팬옵티콘이라는 거지요.

둘 모두 ‘감시사회’이자 ‘처벌사회’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감시와 통제가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더 강화되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통제사회에서는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폐쇄카메라, 전자결제 등에 의해서 비단 군대, 병원, 공장,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언제나, 그리고 더욱 철저하게 감시․통제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오웰의 『1984년』에서처럼 말이지요.

실제로 우리는 폐쇄카메라가 이미 거의 모든 공공장소와 거리, 심지어는 사적공간에까지도 침투하고 있고, 첩보 위성은 이미 극히 작은 물체들의 세밀한 움직임까지도 추적하고 있으며, 각종 도청장치나 심지어는 핸드폰까지도 감시체제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전자결제는 신용, 건강, 학력, 직업, 취미, 소비 취향, 가족 관계 등을 노출시키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웹페이지로 전송되는 쿠리파일들은 인터넷 쇼핑이나 웹페이지의 방문수를 알려주며, 사내 중앙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PC는 업무 시간, 작업 과정, 작업량, 성과 등을 상관에게 전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지요. 그럼으로써 타의에 의해 또는 자발적으로 감시받고 통제되고 있는 겁니다.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사회를 통제사회라고 불렀는데, 언제나 어디서나 “텔레스크린은 송신과 수신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라고 오웰이 『1984년』에 그린 사회가 바로 그렇지요. 그런데 바로 이러한 감시와 처벌의 사회에는 전체주의라는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오웰이 남긴 경고입니다. 감시와 처벌이 전체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중요한 골격이기 때문이지요. 알고 보면 전체주의란 이상사회 건설을 빌미로 국가가 감시와 처벌을 극단적으로 행사하는 사회공학인 겁니다.



전체주의에 감춰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의 사용은 1925년 6월 22일에 행해진 연설에서 무솔리니가 “강력한 전체주의적 의지”라는 말을 처음 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연설에서 “국가 안에 모두가 있고 국가 밖에는 아무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오웰의 『1984년』에서는 같은 말이 윈스턴을 가혹하게 고문하고 세뇌시키는 오브라이언의 입을 통해 수없이 반복됩니다. 윈스턴과 오브라이언이 애정성 고문실에서 나눈 대화가 그 단적인 예이지요.


“빅브라더는 정말 존재합니까?”

“물론이지. 그 분은 존재하고 있네. 당도 존재하지. 빅브라더는 당의 화신이야.”

“그 분은 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합니까?”

“자네는 존재하지 않아.”


이 대화에서 오브라이언의 말은 전체주의의 본질, 곧 국가가 개인보다 우월하며, 개인의 의미는 국가 안에서 부여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의 의미도 역시 국가에서 부여한다고 합니다. 오브라이언은 이 말을 “우리가 못 할 건 없어. 눈에 보이지 않게 할 수도, 공중에 날게도 할 수 있어. …… 당이 원치 않으니까 내가 안 할 뿐이지. …… 지구의 나이는 우리와 같아. 더 오래되지 않았어. 어떻게 더 오래될 수가 있어? 인간의 의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윈스턴은 “나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함으로써, 결국 ‘당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한다.’, ‘당은 얼음이 물보다 무겁다고 말한다.’와 같은 명제들을 무조건 인정하게끔 하는 소위 ‘죄중단 훈련’을 받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그의 책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의 본질은 이렇듯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완전히 약탈하고 전체만이 있을 뿐 개인은 쓸모없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증명하여 개인들이 스스로 “소모되어도 좋다는 감정(the feeling df being expandable)"을 갖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희생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지요. 물론 이러한 비인간적인 마술을 걸기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극단적인 세뇌작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전체주의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할 수 있는 세뇌작업도 교육과 처벌이라는 두 가지 길들이기 작업으로 이루어졌지요. 

우선,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어떤 유토피아를 정하고, 그것을 교육시키며 대중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합니다. 여기에 우상숭배라는 - 우스꽝스럽지만 매우 효과적인 - 연극놀이도 동원하지요. 예를 들자면, 파괴광인 히틀러는 세계의 번영과 평화를 이끌 새로운 독일의 건설자로, 겁쟁이인데다 허풍선이인 무솔리니는 용감하고 남자다운 인간의 상징으로, 야심 찬 음모꾼인 스탈린은 민족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분장하고 마치 배우들처럼 제스처를 쓰며 등장한 겁니다. 그럼으로써 항상 자신이 무력하고 쓸모없다고 느끼는 개인들을 그가 복종하고 숭배하는 지도자, 국가, 조국에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다 바치라는 가르침에 쉽게 열광하게 했지요. 프롬이 지적했듯이 “개인은 자유로부터 새로운 우상숭배로 도피”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의한 ‘잡아 늘리기 작업’이지요.

이러한 세뇌교육을 바탕으로 전체를 위한 개인의 복종과 희생이라는 극히 부자연스러운 행위가 자연스레 진행되는 겁니다. 개인은 체제에 대한 봉사와 희생이 곧 진리와 유토피아의 구현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신 자신의 실현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 이익이 된다고 굳게 믿게 된 거지요. 전체주의자들은 스스로 날조한 진리와 유토피아를 그들이 실행하고 있는 전체주의 체제의 관변 이데올로기로서 내세우고 선전․교육함으로써, 그들이 행하는 개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의 세계 지배는 … 세계를 보다 높은 문화에 봉사시키는 과중한 짐을 진 국민의 승리의 칼에 의해 세워진 평화로 이끌어 갔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기 목표는 다만 독일의 번영뿐만이 아니라 인류문명 전반에 걸쳐 최선의 이익에 봉사하려는 것이라고 위장하여 선동했던 것이지요. 때문에 나치체제의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이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끔찍한 전쟁에 이용되고 희생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인류번영에 이바지한다고 믿으며 죽어갔던 겁니다. 마찬가지로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의 국민들은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버렸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강력한 세계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를 이상으로 갖고 자기를 희생했던 거지요.
오웰의 『1984년』에서도 그런 이상과 세뇌작업이 존재합니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그들이 꿈꾸는 이상사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창조하려는지 이제 좀 알겠나? 그것은 옛날의 개혁자들이 상상했던 어리석은 쾌락주의적 유토피아와는 정반대되는 거지. 공포와 배신과 고통의 세계,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 바로 그것이야. 우리가 창조하는 세계에서의 진전은 고통을 향한 진전이야. 옛날에는 문명이 사랑과 정의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했지. 하지만 우리의 문명은 증오 위에 세워져 있어. 우리의 세계에는 공포와 분노의 승리, 그리고 자기 비하 등의 감정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거야. 그 나머지는 몽땅 우리가 때려 부술 거야. 몽땅.”


물론 다음과 같은 세뇌교육도 반드시 병행하지요. 오브라이언의 세뇌교육은 그 내용이나 스타일에 있어, 만일 전체주의 교범이 있다면 반드시 실릴 만큼 전형적입니다.  


“자네는 ‘자유는 예속’이라는 당의 슬로건을 알고 있지? 그것을 뒤집어서 생각해본 적이 있나? 예속은 자유라고. 혼자는, 즉 자유로운 인간은 늘 패배하지.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죽음은 바로 가장 커다란 패배니까. 그러나 인간이 철저하게 완전히 복종을 할 때,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스스로 당이 될 만큼 당의 일에 발 벗고 나서게 되면 그는 불멸의 전능한 존재가 되는 거야.”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가미카제 특공대를 교육시키며 누구보다도 자주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이 말에 대해 윈스턴은 “당신이 지금 이야기한 그런 세계는 만들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아요. 불가능합니다. … 문명을 공포와 증오와 잔인성 위에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건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거예요.”라고 반박하지요. 그래서 오브라이언은 할 수 없이 다음 단계의 세뇌작업으로 넘어간 겁니다.

전체주의적 세뇌작업의 두 번째 단계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의한 다리 잘라내기, 곧 고통스런 고문에 의한 세뇌지요.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에게 자기가 행하는 고문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자백을 받아내려는 것도, 벌을 주려는 것도 아니야. 우리가 왜 자네를 이곳으로 데려왔는지를 알려줄까? 치료해주기 위해서야! 온전한 정신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야! 윈스턴,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완치되지 않고 떠난 자가 없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겠나? 우리는 자네가 저지른 그런 어리석은 범죄에는 관심이 없네. 당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는 관심이 없어. 우리가 다루는 것은 정신뿐이야. 우리는 적을 분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개조시키고 있어. 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겠나?”


전체주의에는 한 가지 미스터리가 따라다니지요. 전체주의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집단이기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집단이기주의 체제는 - 그것이 민중주의든, 보수주의든, 또는 인종주의든 민족주의든 간에 -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그 집단 이외의 대상에 대하여 대항합니다. 그런데 전체주의는 그 집단 이외의 대상에 앞서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의 희생을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것이지요.

이것이 전체주의 제일의 미스터리인데, 오브라이언의 말이 이 미스터리를 잘 해명하고 있는 겁니다. 전체주의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복종이나 봉사가 아니라 전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정신으로의 개조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 곧 자신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전체만을 값어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 때문에 오직 폭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전체주의가 폭력을 필요로 하는 심리학적 정당성이지요. 오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타인을 고통스럽게 함으로써야. 복종으로는 불충분해. 만약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자기 의사가 아닌 내 의사에 복종한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권력은 고통과 모욕을 가하는 데에 있는 거야. 권력은 인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짜맞추는 데 있는 거야.” 


고통을 통한 인간성 말살과 전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인간의 창조, 이것이 전체주의 세뇌교육의 수단이자 목적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 바로 이런 의미에서 -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테러가 지배하는 정치형태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란 “개개인의 모든 생활 영역에 대한 영구적 지배”를 목적으로, 이념이 아니라 테러가 그 국가형태의 본질을 이루고, 정당이나 군대가 아니라 비밀경찰이 정치권력의 수행자요 집행자이며, 수용소가 전체적 지배의 실험실이 되는 정치체제일 뿐이라는 거지요. “테러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러 사람의 복지나 한 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제조(fabrication of mankind)로서, 종(種)을 위하여 개인을 제거하는 것이며 ‘전체(whole)’를 위하여 ‘부분들’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당면한 문제, 곧 무엇보다도 심각하지만 자칫 잊기 쉬운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유토피아란 그 이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 실현 방법에 있어서도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것이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실현방법에 있어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에 불과하며, 진정한 유토피아는 그 이상뿐만 아니라 실현방법에 있어서까지도 인간의 자유, 존엄성, 사랑과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들이 존중되어야만 한다는 거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20세기 역사를 통해 배웠고,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리고 오웰이 『1984년』에서 제시한 사회공학의 제1강령인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 인간적임을 잊을 수 있는가



이제는 우리가 서두에 스스로 던진 문제에 대답할 차례입니다. 어떻게 하면 윈스턴이 겪은 것 같은 악몽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입니다.

아렌트가 이미 지적했듯이, 전체주의는 어떤 이유에서든 대중 스스로의 극단적 “자기포기(self-abandonment)”와 함께 강력한 정치조직을 열망하게 된 곳에서만 가능해지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E.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전체주의의 메커니즘을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이라는 병리적 현상으로 파악했지요. 사디즘은 다른 사람들에게 파괴적이고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병리이고, 반면 마조히즘은 자기 자신을 강한 권력 속에 용해시킴으로써 그런 힘과 영광에 참여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질환입니다. 이 두 병리적 경향은 외견상으로는 서로 반대지만, 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전체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프롬은 “인간의 정신이 수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념, 즉 삶과 진리에 대한 신념 그리고 개인적 자아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모든 사람에게 고취시킬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전체주의로 향하는 허무주의의 힘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만일 아렌트의 경고와 프롬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감시사회와 전체주의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유토피아를 향한 우리의 사회공학이 나아갈 총체적인 방향이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그것은 모든 유토피아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의한 ‘잡아 늘리기’와 ‘다리 잘라내기’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을 기반으로 설계되고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공적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생산과 강압적 교육을 통해, 오웰의 『1984년』에서는 감시와 통제, 고문과 세뇌를 통해 이상사회를 건설하거나 유지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인간적 수단에 의한 유토피아는 단지 디스토피아임을 작가들은 고발하고 있는 거지요. 프롬은 「『1984년』과 부정적 유토피아에 대해서」에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충분히 참고 읽어 볼만한 말입니다.


“자미아틴(E. Zamyatin)의 소설 『우리』와 헉슬리(A. Huxley)의 『멋진 신세계』 그리고 조지 오웰(G. Orwell)의 『1984년』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 세 부정적 유토피아 소설에는 공통된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그것은 철학적, 인류학적 그리고 심리학적 또한 아마도 종교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렇다. 인간의 자유, 존엄성, 성실, 사랑에의 갈망을 잊어버릴 정도로 인간이 변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인간이 인간적임을 잊을 수 있는가? 혹은 이러한 근원적 욕구의 강탈을 통해 인간적 사회를 비인간적 사회로 만들 역동성을 인간 본성은 갖고 있는가?

여기에서 세 작가들은 오늘날 많은 사회 과학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심리적 상대주의라는 단순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세 작가들은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에게 본질적 자질 같은 것은 없다는, 그래서 인간은 주어진 어떤 사회에서라도 교범적으로 맞추어 살 수 있는 흰 종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은 사랑과 정의, 진리와 연대성을 향한 치열한 정열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데, 바로 이점에서 사회과학자들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들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들이 소설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인공적) 수단들로 인간 본성의 힘과 치열성을 오히려 강조한다. 자미아틴의 『우리』에서는 인간 본성에서 인간적 욕구를 제거하기 위해 뇌엽 절제와 같은 뇌수술이 필요해진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공적 인간의 생산과 ‘소마’라는 환각제의 투약이 필요해지며, 오웰의 『1984년』에서는 그것이 고문과 세뇌의 무제한적 사용이 된다. 이들 세 작가는 그 누구도 인간 내부의 인간성 파괴가 용이하다는 생각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데 오늘날 공동의 수단이 된 지식과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1984년』의 세계가 이 지구상에서 지배적인 삶의 형태로 전개된다면, 그것은 미친 사람들의 세계이며, 인간이 살 수 있는 세계가 못 된다. 나는 오웰도 헉슬리나 자미아틴도 이런 정신 이상의 세계가 닥쳐오리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와 반대로 그들의 의도는 분명히, 우리가 서방 문화의 바른 뿌리가 되는 휴머니즘과 인간 존엄성의 정신을 부활시키지 못한다면 어디로 향할 것인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경고를 울리는 데 있을 것이다. 오웰은 다른 두 작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만들고, 그 다음 기계처럼 행동하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새로운 형태의 관리 산업주의가 인간을 사물로 변모시키고 생산-소비 과정의 부속물로 만드는 비인간화와 완벽한 인간 소외의 시대로 내몬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결국 우리가 진정 원하는 유토피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사회’이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것이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성 자체를 변형시키거나 파괴함으로써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 점에서는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도달한 결론과도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이상사회를 향한 어떤 사회공학도 설계도를 미리 확정하고, 인간을 그것에 맞추려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럴 경우 어떤 식으로라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공학은 오히려 우리가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획득하고 지켜온 인간성, 곧 자유, 평등, 사랑,  존엄성, 고통과 폭력의 감소와 같은 인간적 갈망에 합당한 설계도를 만들고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어떠세요? 그럴 것 같지 않으세요? 아니면 보다 나은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언제라도 그런 상황이 닥칠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그것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는 문제다.”라는 오웰의 경고를 떠올리면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인류는 과학과 예술을 창조할 지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정의의 세계, 형제애의 세계, 평화의 세계는 이룩하지 못하는가?

- 레온 불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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