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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지 않는 까닭

  • 작성일 2015-06-01



서울을 떠나지 않는 까닭




임수현



서울을-떠나지-않는-삽화







*


신의 복사뼈쯤 되겠다. 계호가 국립현대미술관 공사장의 타워크레인을 가리켰을 때, 나는 이제껏 서울 하늘은 뚜껑이 덮여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고개를 잦혀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구나. 마침 옛 한국일보사 자리에 지어진 트윈트리타워 옆구리로 트롤리 갈고리에 매달린 철제 빔이 흔들거렸고, 르메이에르 지나 에스케이서린 빌딩까지 겹친 고층건물 등선 위로 서울은 엄연히 경계 없는 하늘을 가지고 있었다. 새삼스레 길쯤한 벽과 그 아래 잘린 길들이 팔짱을 낀 것처럼 밭게 느껴졌다. 아는 길이고, 약도를 그릴 수 있는 조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세계의 범위가 건축물의 고도까지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처럼 홀린 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평선을 볼 수 없는 지세라고, 채 오십 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국경은 이념으로 가로막히고, 그래서 상자에 갇힌 게으른 교양이 유령의 귀환을 초래한 것이라고 푸념했는데, 서울 하늘은 하나의 날씨로 경작할 수 없을 만큼 광활했다. 남색 어스름으로 분홍 놀이 물감을 개듯 고였다. 맥주가 먹고 싶어지는 발견이었다. 아마 차가운 알코올을 들이켰다면 안주는 하늘이 될 공산이 컸고, 인중에 묻은 거품만 핥아도 괜히 그럴싸해질 것 같았는데, 계호와 나는 삼청동을 좀 더 산책하곤 정독도서관 갈림길에서 그만 헤어졌다. 계호는 인사동에서 누굴 만난다며 풍문여고 방향을 가리켰고, 나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는 가회동삼거리 쪽 언덕길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성균관대학교 후문에서 내려 산책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갈 속셈이었다. 하지만 혼자 걷다 보니 허전해서 마냥 걷게 됐고, 나는 골목이 맥주병처럼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늑장을 부렸다. 얄미운 계호.
계호가 타워크레인이 서 있는 서울 풍경을 이야기했을 때, 삼 년 전 팔월 그날 오후가 고스란했던 건 나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해 겨울이 오기 전 태국으로 떠나 27개월 동안 서른다섯 나라를 여행한 계호는 돌아오자마자 서울과의 이별을 선언했다. 계호는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봄밤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는데, 서울과 남쪽 읍을 넘나드는 허공 아래에는 계호 혼자 있었다. 그날은 물론, 나는 없었다. 나는 혼자 계호가 입 다물었던 오후를 메아리 삼아 서울의 밤을 무작정 걸어 거인을 목격하게 되는데, 독창적인 생각도 아닌 시늉에 지나지 않는 산책의 시간이 밤인 까닭은 신은 어둠의 편. 하루는 자정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못생긴 나를 용서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계호는 묵묵부답이었고, 나 역시 고층건물들의 등선까지 접어 놨던 하늘 커튼이 지면까지 드리워 세계를 장악하는, 그 시간들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섭, 아직 여기 있다며? 계호가 불쑥 전화를 걸어 삼선동 제집 마당으로 초대한 건 벚꽃이 가지에 반, 바닥에 반이었던 올해 사월 밤이었다. 필요한 게 있느냐 물으니, 굵은 소금 있으면 한 줌만 챙겨오라는 대답에 머뭇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시간은 성큼 저쪽에서 이쪽으로 자연스레 고였다. 돗자리를 딱 두 개 펼치면 빠듯한 마당에는 계호 대신 집을 돌봤다는 후배 굴비를 비롯해 삼 년 전 가끔 본 사람들까지 여덟이었다. 나는 이름들이 헷갈려 어정쩡한 인사만 건네고 소금, 하곤 계호 근처로 갔다. 걔네들은 지금은 없어진 국산 마이크로 블로그에서 알게 된 사이라고 했는데, 끼리끼리 본명 대신 물고기, 식물, 지명 등 서너 음절 되는 닉네임으로 불렀다. 계호는 부엌에서 종지 세 개를 들고 와 굴비와 제 사이에 틈을 벌리며 날더러 앉으라고 재촉했다. 그러고는 술잔이 모자란다며 종이컵은 금세 눅눅해지니까 두 개씩 겹쳐 써, 하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따랐다. 얼떨결에 맥주 거품을 핥으면서 어떻게 안부를 물어야 할지 어색한데, 계호는 금세 여섯 사람을 살피느라 눈과 손이 바빴다. 나 빼고 서로서로 근황을 꿰고 있는지 걔들이 두런두런하는 말을 통해 계호는 보름 전 돌아왔고, 그사이 화개에 내려가 빈집을 하나 얻었고, 늦어도 칠월 전에 서울을 떠난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계호는 금세 자신이 주인공인 수다에 동참해 이야기를 보태고 바로잡고 참견하느라 나하고는 차분하게 인사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계호는 여전히 명랑했고, 자못 들떠 보였다. 손님들의 이야기가 한풀 꺾이자 계호는 갓 지은 밥을 양푼에 퍼 와 숯불이 잦아든 석쇠 위에 올려놓았다. 가시가 많은 음식을 먹는 것처럼 침묵만 골라지자, 계호는 찬찬한 말씨로 다음 주부터 화개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집을 고친다며 소독저로 조감도를 그려 보였다. 검댕이 묻은 그물코를 따라 지은 집은 한 사람 두 사람 방을 내줘 점점 넓어졌고, 이내 마당에는 매화, 석류, 감나무가 우거지고 상추, 깻잎, 아욱 텃밭이 뒤꼍까지 풍년을 이뤘다. 나는 기억이 훌륭한 편이 아닌데도, 엊그제 어울렸던 것처럼 그 마당의 질서에 동화했다. 어떤 기분도 내색하지 않고 입을 잊는 것. 한쪽 귀로 듣고 기역자로 마음에 삼키는 것. 칫솔 한 자루만 있으면 어디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계호의 말은 맛있어 닉네임들은 배부르고 나른한 표정인데도 토씨 하나 안 흘리고 야금야금 먹었다. 나는 아무래도 계호의 미래가 서먹했다. 변덕스러운 재개발 소문에 시달리며 빗물이 새 지붕에 가빠를 덮어쓰고, 콘크리트가 벗겨진 축대에 기댄 서울성곽 아랫마을에 살며 온갖 대필 아르바이트로 버티고 있는 나로선, 먼 집은 허공에 드리운 그물 같아 이 밤이 지나면 어둠이 벗겨지듯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계호를 서울에서만 보았기 때문인지, 계호의 배경으로는 서울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삼 년 전 초여름부터 맥주가 당기는 한여름 해질녘까지 계호와 나는 서울을 무던히도 걸었더랬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끝나고 연둣빛이라면 무턱대고 황홀해지던 이맘때였다. 광화문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계호는 라오스에 한 달 정도 다녀올 일이 생겼다면서, 내게 사나흘에 한 번 정도 들러 화분에 물을 주지 않겠느냐 부탁했다. 그 부탁이 너무 생소해 그냥 꾸민 말이거니 시뻐했는데, 정말 전화가 왔고, 나는 열쇠를 건네받아 푸성귀의 성장을 책임지게 됐다. 계호가 직접 바느질한 물고기가 매달린 열쇠고리가 때 탈 것 같아 지퍼백에 보관해 놓고 나는 수요일과 월요일만 되면 계호 집으로 나서야 하는 핑계들을 궁리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에서부터 봄을 두고 가는 게 아쉽다며 엄살을 부리던 계호가 그곳의 더 깊고 푸른 소식을 모바일 메신저로 전해 오는 동안, 나는 겨울옷을 세탁소에 맡기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잔치국수를 먹은 다음 계호의 빈집을 찾아가곤 했다.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어느 정도 주어야 하는지 시범을 보였던 계호를 따라하는 게 번거로워 세 번째 갈 때는 철물점에 들러 물뿌리개를 하나 샀다. 새파란 주전자 모양의 그것을 들고 가는, 그늘을 끓이고 있는 듯한 조용한 오후가 좋아 나는 처음으로 계호와 내 집 사이를 잇는 서울성곽과 그 곁에 웅크린 마을 골목을 골골샅샅이 다녀보게 되었다. 세상에 알려진 기분에 흥미 없는 척 굴었지만 걷는 동안 간단해진 기분이 불만스럽지 않았고, 나는 나를 조금 잊을 수 있었다. 내가 웃자란 상추와 처음 열린 방울토마토 사진을 보내면서 “이상한 독촉장이 왔더라. 상추 몇 장 따갈게” 말을 건네면, 계호는 아침 탁발을 하고 있는 동자승, 튜브가 물결의 배꼽처럼 떠 있는 강, 밤을 주홍색으로 흩뿌린 풍등 사진을 답장으로 보냈다.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계호가 여행에서 오려낸 풍경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먼 곳에서 계호는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그려 볼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계호는 누구보다 서울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술을 머금고 물렁해진 종이컵을 조심스레 쥐었다. 빈속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좀 알딸딸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계호가 그려 보이는 화개는 그냥 이곳에서 멀리 돌아앉은 또 어느 마당 같았다. 피정에 가까운 귀촌이라기엔 계호는 병들지도 않았고 너무 어렸고, 혼자 사는 계호가 여행이라면 모를까, 고향도 아닌 익명이 불가능한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서울에서 본 방식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없었다. 퍼뜩 오래전 계호 집에 살았던 V 얼굴이 떠올랐다. 직장 상사를 통해 알게 된 광화문 단골 술집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보름에 한 번 꼴로 갈 때마다 마주쳤던 V가 여행을 떠난다며 환송회를 해주는 날, 서울성곽의 이쪽저쪽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새벽에 같이 택시를 탔다. V가 대학로 근처에 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리 가까운 줄 몰랐고, 그렇게 구체적으로 약도를 파악하다 한성대입구역에서 함께 내려 술을 한잔 더 하고 각자 성곽을 따라 걸어갔다. 그리고 배턴 터치하듯 계호를 알게 됐다. 몇 번 V와 들르던 계호를 본 게 전부였는데, 자정 넘어 말짱한 얼굴로 들어온 계호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자기가 V 집에 살게 됐다면서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가자고 했다. 계호는 V를 통해 내 이름과 동갑내기라는 걸 알고 반말로 스스럼없이 굴었지만 어떤 이야기든 너와 나로 바로 통과하지 않고 V를 인용했다. 계호는 어린 V 같았다.
나는 계호가 서울을 떠나는 까닭이 사랑 때문이 아닐까 짐작했다. 단골 술집 바에 놓여 있던 V와 계호의 여행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들은 엇비슷한 곳을 여행했고, 실패한 사랑을 희미하게 고백했다.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길과 연애하는 것 같은 그들의 여행은 사진과 글이 어우러져서인지 이름을 지우면 그냥 같은 사람의 책처럼 보였다. 나는 계호를 통해 지금은 근황을 알 수 없는 V의 과정을 목격하는 기분이었고, 어쩌면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훔치지 않더라도, 사랑은 닮아 가는 감정이고, 어느덧 시늉하고 있는 서로이므로. 종내 계호의 미래는 화개가 아니라 V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먼 시간과 공간을 헤매기만 하면서 사랑의 주소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어리석은 짐작 끝에 어떤 공간을 이동하게 되는 까닭은 거창하게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사람인 건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호와 함께 화개를 산뜻하게 꿈꿀 수 없는 까닭은 그곳을 지나 한 시간 남짓 가면 부모 집이 있는 읍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내가 읍을 떠난 이유는 나를 닮은 사람들로부터 달아나는 것이었고, 늘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극복되지 않는 예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왜 화개인 거니?
나는 고작 나다운 해석에 취해 불쑥 그렇게 물었다. 일순간 여러 시선이 내게 쏠렸고, 잠시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게…… 타워크레인 때문인가.
계호는 영리하게 그 한마디로 분위기를 전환하고, 휴대전화를 열어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난전처럼 남루한 마을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자이크를 이룬 가림막 위로 제관 양식 지붕에 타워크레인 일부가 피뢰침처럼 붙어 있었다.
시청 앞이었어.
계호는 휴대전화를 잠그고 동물원의 노래처럼 잔잔하게 지난 시간으로 뒷걸음쳤다.
한낮이었고, 계호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로댕의 ‘신의 손’을 보고 나와 이대호가 아홉 경기 연속 홈런을 날릴 수 있을까 궁금해 중계방송을 볼 수 있는 맥줏집을 찾아 대한문에서 시청광장으로 건너갔다. 걷는 동안 버릇대로 돌담에 어린 나뭇잎, 돌바닥에 드리운 추녀, 둥그런 잔디밭에 엎드린 호텔 그림자를 카메라에 담았지만 거인이 응시하고 있는 건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광장은 집회가 아니면 머물기 어색한 곳이었다. 마침 낮술 먹기 좋은 곳이 떠올라 청계천 방향으로 잡아들던 참, 계호는 저만치 앞선 동행에게 잠시 기다리라 손짓하곤 가림막으로 되짚어왔다. 시청 별관 공사장을 가린 방진벽과 가림막은 백 미터 달리기 기록을 재도 좋을 만큼 기다랬다. 계호는 잠시 타워크레인의 전신을 확보하기 위해 틈새를 찾으려던 사실을 잊고, 가림막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광장에서 모였던 사람들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었다. 계호는 혹시 아는 사람이 없나 확인했다. 계호는 거인의 전신을 확보하겠다는 마음을 잊고, 사람들이 팔을 겯고 가린 서울시청과 타워크레인의 좌우로 뻗은 지브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게 천안함이 침몰했던 2010년 봄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 계호는 방진벽을 두르고 서 있는 타워크레인을 수시로 발견할 수 있었다. 창과 문이 없는 가림막은 아무리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단장해도 단박 알아볼 수 있었고, 서울은 호흡하듯 한순간도 공사가 멈추지 않았고, 깨닫고 보니 극장보다 자주 거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호는 저 거대한 거인들이 어떻게 서울 한복판까지 이동할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에 공사장을 발견할 때마다 스마트폰이나 디에스엘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게 버릇이 됐다. 꼬마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거인의 팔, 산을 향해 기지개를 켠 거인의 양팔, 구름의 지겟작대기…… 를 프레임에 가두다 보니 이거 뭔가 물건이 되겠다 싶어 노트북에 ‘서울의 거인’이란 카테고리 하나를 만들었다. 가끔 카메라를 팔매 삼아 거인의 전체가 내려다보일 법한 골목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주로 뉴타운이 들어서는 공사장이었다. 처음 가보는 동네도 있었고, 익숙한 동네도 있었다. 계호는 거인을 좇다 V가 졸업한 예술대학교를 발견하곤 운동장에서 볼을 다루는 사내아이들을 한참 쳐다보기도 했다. 계호는 해거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뛰었고, 교문 앞 문방구에서 정구공을 하나 샀다. 타워크레인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놓인 정구공은 카메라에 몇 장 남았지만, 어쩐지 연둣빛 공은 시부저기 사라졌다.
계호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밤기운이 썰렁한지 어깨에 걸칠 만한 것을 가지러 움직이고, 덩달아 화장실을 가느라 잠시 마당은 어수선해졌다. 계호는 검댕으로 지은 집 지붕에 기름 먹어 노란 버섯으로 종을 삼고, 양파로 횡을 삼아 T자를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타워크레인을 세우는 동안, 나는 계호를 마지막으로 본 삼 년 전 그날 오후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나는 기대의 사촌쯤 될 표정을 가장하며 계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계호 역시 얼핏 나를 쳐다봤던 것 같은데, 그건 술잔이 비었는지 확인하는 단순한 염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서울에 돌아와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집이다, 하고 우리 동네를 쳐다봤는데 허공에 타워크레인이 서 있는 거야. 하늘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오는 내내 갑자기 쓰고 싶은 이야기가, 당연히 한동안 잊고 있던 서울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거야. 밤새 사진 파일을 찾아보고 뭔가 끼적였는데도 시차 때문인지 전혀 졸리지 않았어. 날이 밝자마자 남부터미널로 가서 그 사람이 이야기했던 화개로 내려갔던 거야.
계호는 파키스탄 길기트에서 우연히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 닷새 걸려 인도 국경을 넘어갈 때까지 동행하게 됐다. 멀미 때문에 낮엔 유령처럼 널브러져 있다가 이상하게 밤이 되면 말짱해졌다. 그래도 스무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있다 보니 어느 순간 적응이 됐고, 옆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많은 공통점이 찾아져 둘은 숨겨진 식당까지 떠올리며 언젠가 서울에서 만나게 되면 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산비탈에 멈춰 소변을 보곤 스트레칭을 하는데 수백 마리는 좋이 넘을 것 같은 까마귀 떼를 보게 됐다. 그는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래전 화개에도 되새가 수십만 마리 날아왔다고, 특히 해질 무렵 하늘을 가득 덮었는데, 붉은 놀 위로 재가 흩날릴 것 같아 산불이 난 것 같았다고, 수백 그루의 벚나무가 만개했을 때보다 더 밝았다고…… 끊임없이 열아홉 살에 떠나왔다는 화개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계호는 딱히 할 말이 사라져버렸다. 어쩐지 화개에 비하면 자기의 고향인 서울은 추억이란 없는 고장 같았고, 그 수많은 고장을 여행하면서 대체 이제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막막해졌다.
계호는 공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초점이 희미한 눈빛으로 술을 한 모금 축였다. 술을 한두 잔만 먹어도 금세 얼굴이 벌게지는 계호라 추억에 잠긴 건지 술이 오른 건지 흐린 눈빛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었다. 나는 마을버스가 끊길 것 같아 계호의 집 마당을 나섰다. 멈칫 집으로 가는 내리막길 대신 낙산공원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을 몇 발짝 걸어갔다. 계호 말마따나 한성대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지하주차장 공사를 하느라 타워크레인이 보안등을 눈깔처럼 매달고 서 있었다. 늘 조감하게 되는 위치에 살아서 그런지 계호가 걸었던 동네는 한 뼘쯤 축소되게 느껴졌다. 사실 내 마음이 그려낸 풍경일지 몰랐다. 직장을 그만두고 성북동으로 이사한 뒤 나는 어깨를 늘 구부리고 있었으니까.
문득 그날 오후의 메아리를 기다리듯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나 혼자 계호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계호가 떠돈 장소를 한 군데도 가보지 않은 나로서는, 처음으로 내가 알고 있는 장소를 이야기하는 계호 말에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서울시청 별관 공사장 가림막에 서 있는 천 명의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게 눈에 들어온 건 그들은 하나같이 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서로 어울리기 위해 손목을 잘린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날 계호가 집게손가락으로 가리켰던 허공을 고스란히 기억하는데, 계호는 공이 굴러간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사계절 넘는 시간 동안 그 공을 찾아 헤매느라 지쳐 나와 함께 보았던 시간까지 찾아오는 건 무리일까. 나는 섭섭하면서도 어쩐지 계호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없는 지금 그 마당에서 어떤 이야기는 계속될지 몰랐다. 거인을 등지고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날의 기억은 점점 각별해졌다.
계호는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바쁜지 불쑥 전화를 걸어 무엇을 먹으러 오라거나 아니면 그냥 걷자는 아무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가끔 계호네 집에 가볼까 싶었지만, 나는 삼선동과 반대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걷곤 했다. 와룡공원에서 말바위 쉼터로 올라가 삼청공원을 지나 국립현대미술관까지 걸어간 적도 있다. 밤의 미술관은 뺨이 없는 얼굴처럼 표정을 알 수 없어 조금 더 걷고 싶었지만, 방패를 들고 서 있는 의무경찰과 닭장차를 보자 이런 마음으로는 그 너머까지 간다는 게 부끄러워 나는 마을버스를 타러 언덕길을 넘어갔다. 소금을 만지는 기분으로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계호의 블로그를 모두 뒤져 보았다. “나는 우연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행은 가장 계획된 우연이라는 점을 깨달은 뒤 내 발은 그 기묘한 우연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렇게 시작하는 계호의 기록에는 내가 걷거나 본 장소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계호는 여전히 세계를 떠돌고 있었고, 당연히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계절이 흘렀다. 하지만 여름뿐이라고 여겼던 적도의 겨울, 모래언덕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막의 풀밭을 바라보면서도 계호는 마음의 속도로만 이동했기 때문에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 시간들은 차라리 온통 이별의 계절이라고 부를 만했다.
가끔 계호와 걸은 적 없는 동네의 밤을 걷기도 했다. 대개 마포나 홍대에서 사람들을 만나 어중간하게 취한 밤이었다. 걷기 좋은 밤이었고, 걷다 보면 하염없이 걷고 싶었고, 정말 그렇게 걷다 보면 한 번쯤 타워크레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거인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기웃거린 건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 거인이 있는 장소는 대개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인연이 닿아 있는 곳이었다. 돈의문뉴타운 공사장에 주줄이 서 있는 타워크레인을 봤을 때, 나는 계호가 아니라 오래전 헤어진 애인을 떠올렸다. 애인은 낡고 오래된 골목을 산책하기 좋아했다. 주로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보고 우리는 근처 동네를 한 시간 정도 걷고 술을 마셨다. 아마 비가 오는 날이었고, 우리는 강북삼성병원 뒤편으로 걸어가다 적산가옥 분위기가 짙은 중국집에서 배갈을 두 병 마시고 서대문로터리에 있는 여관에서 처음 같이 잤다. 우리는 이튿날 헤어지지 않았고, 깍지를 낀 채 편의점에서 산 투명한 우산에 기대 비를 핑계로 영천시장 건너편에 있는 도가니탕 집에서 또 낮술을 마셨다. 애인은 여자치곤 술이 세, 우리는 제법 술을 많이 마셨다.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다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조각조각 방이 나눠진 식당은 뒷문으로 들어갔는데 앞문으로 나오게 됐고 나는 손바닥으로 빗물과 놀면서 담배를 연거푸 피웠다.
낮은 점점 길어지고, 밤은 점점 물러나게 되는 날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돈의문뉴타운 안을 직접 들여다보고 싶어 독립문로터리에서 내렸다. 해가 한 뼘 정도 남아 있었고, 나는 대필 원고 계약서를 쓰러 서교동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홍파동, 교남동, 소월동, 평동의 약 6만 평의 공간은 분화구처럼 황무지겠으나, 궁궐의 정문과 백범의 얼굴에 가려 그 안을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거인이 서 있는 그 폐허의 풍경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걷다 보니 거인을 저지하듯 성곽이 보였고, 성곽을 따라가다 보면 내 집과 계호의 집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계호에게 전화를 걸어 내려가기 전에 술을 한잔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쩐지 계호가 마당으로 초대하기 전에 우리는 그렇게 성곽의 이쪽저쪽에서 침묵하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이어지는 성곽처럼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계호에게 있는 기억은 내게도 존재하는 것이라. 노동을 했다는 자부심이 시늉일 뿐이라는 자책을 조금 이긴 건지 나는 제법 관대해져 있었다. 나는 그만 거인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정직하게 좋은 음식을 먹고 싶고 깨끗해지고 싶었다. 영천시장에서 장조림과 갓 버무린 김치, 꽈배기를 봤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누 거품을 많이 일어 목과 발가락을 꼼꼼하게 씻었다. 나는 시장에서 올해 처음 산 자두를 베어 물고 계호의 블로그를 열어 봤다. 양치질을 한 탓에 마취된 입처럼 흐르는 군침이 감당이 안 됐다. 블로그 속에서 계호는 여전히 세계를 떠돌고 있었고, 서울을 전혀 그리워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누군가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직장을 다닐 때 주머니가 좀 넉넉했던 시절의 장소였고,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엔 신의 무릎쯤에 기댄 묘비라면 모를까, 탑 모양의 기중기가 아무래도 거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계호의 비유는 너무 성의 없고 게으르게 느껴졌다. 다만 특수한 고공 노동이 그은 하늘, 허공을 확보해야 회전할 수 있는 제자리걸음일 따름이었다. 나는 그것을 간단하게 사진으로 남거거나 시로 읽을 수 없었다. 계호는 화개에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거인을 따라가다 보면 계호의 서울이 열리고 세계는 닫히는 시간을 목격할지 모른다. 나는 계호의 여행이 어떤지 몹시 궁금해졌다. 혼자인 밤이 어쩐지 시무룩하지 않았다.


*


계호는 찻잎이 떫어지는 입하 무렵부터 서울로부터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화개로 이사하는 중이었다. 마당에 모였던 사람들과 김을 매고, 회벽을 바르고, 남은 합판과 각목을 얼기설기 엮어 평상을 짜고, 노동을 마치면 섬진강으로 나가 은어 안주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지 않은 계호가 운전하는 용달 짐칸에 사람들을 실어 녹차 밭을 지나 산자락 집으로 돌아갔다. 닉네임들은 화개의 잠과 술에 대한 지분이라며 돈을 여퉈 계호에게 중고 용달을 선물했다. 어쩌다 사람이 넘치면 고속버스와 용달에 나눠 타 구례터미널에서 만나 가위바위보로 짐칸에 앉을 사람을 정했고, 처음으로 마당에 숯불을 피웠노라고, 조금씩 이삿짐을 나르다 보니 어느 순간 이동해 있더라고, 그 과정들을 계호는 블로그에 다문다문 남겨 놓았다. 세계와 화개 사이에 서울만 마치 그날 오후처럼 지워져버렸다.
계호가 서울을 떠난 뒤에서야 나는 비로소 계호와의 시간이 또렷해졌다. 나와 계호는 이웃이었다. 굳이 이웃, 이란 호칭으로 거리를 둔 건, 간단하게 친구나 그러기 멋한 게, 계호와의 거리는 내 마음에서 모든 게 애매해져버렸다. 나는 계호와 한 번도 여행을 해본 적이 없지만 끊임없이 엇갈린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계호와 함께했던 장소를 지나칠 때마다 빈집 마루를 쓰다듬듯 계호와의 시간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 집의 몇 뼘 안 될 봄을 돌봐준 뒤 열쇠를 돌려주려고 찾아가자 계호는 다짜고짜 목욕을 가자고 어깨를 둘렀다. 벌거벗은 계호는 위팔, 허벅지, 몸통만 하얬고 나머진 나무껍질처럼 그을려 언뜻 토르소 같았다. 온탕에서 함께 몸을 불리고 사우나에 들어갔지만, 모래시계의 자주색 모래가 흘러내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호가 때를 미는 동안 나도 덩달아 때를 밀었고, 우리는 서로의 등을 밀어 주었다. 어쩐지 목욕을 했던 한 시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계호와 무척 친숙해진 기분이었고, 그 시간이 계호와 안 시간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졌다. 계호는 젖은 머리를 말리지 않고 목욕탕을 나서면서, 매운 게 먹고 싶다며 성곽을 따라 숭인동까지 걸어가자고 했다. 계호는 구멍가게를 발견하더니 반가운 얼굴로 하드 하나 먹을래, 하며 냉장고를 심각하게 들여다봤다. 데님 반바지에 슬리퍼를 꿰신은 계호는 쭈쭈바를 물고 오르막을 딸각거리며 씩씩하게 걸었고, 치노 바지에 폴로셔츠, 운동화 차림인 나는 서너 걸음 뒤에서 계호의 방향만 따랐다. 어쩐지 우리는 같지만 다른 공간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계호는 젖니처럼 매달린 아카시아 꽃잎을 후르르 훑어 손바닥에 담아 동동 점프를 시키며 걸었고, 나는 계호가 남긴 둥근 이파리로 빼, 풀피리를 불었다. 계호가 카페처럼 아기자기한 단층집과 창유리가 깨진 이층집 샛길까지 훑는 동안 나는 남산타워가 마주 보이는 서울분지를 내려다봤다. 고층건물의 바닷속에서 헤엄치듯 살아가던 시간이 얼핏 그리운 것도 같았다. 도시는 인간이 고안한 자연인 게 분명해. 계호는 내 어깨를 툭 건드리고 성곽 암문으로 빠져나갔다. 하염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계호는 어제 여행을 끝낸 게 아니라 비로소 여행을 시작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날을 시작으로 계호는 마당에서 누구와 어울릴 일이 있으면 내게 밥을 먹으러 오라며 전화를 걸었다. 계호한테는 둘러앉아 먹기 좋은 솥이 있었다. 계호는 휴대전화가 울릴 때마다 상대에게 버섯을 사오라고, 소고기 몇 근 끊어온 게 있으니 전골이나 해먹자고 말했다. 버섯과 야채와 모자란 술과 또 그렇게 드문드문 사람들이 솥처럼 좁은 마당으로 찾아오는 동안 계호는 멸치, 다시마, 고추를 거름망에 담아 맛국물을 내고, 뭉근한 밑불에 단 솥에서 설설 물이 끓으면 고기와 버섯을 넣었다. 어두운 솥에선 마치 그늘을 끓이는 냄새가 풍겼다. 버섯이 익을수록, 뻣뻣했던 내 얼굴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계호는 뭘 하든 그림이 되게 놀 줄 알았다. 계호가 마련하는 차와 밥과 술의 자리는 서툴지 않았고, 계호의 설정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오랜 연습을 거친 듯 부드러웠다. 나만 그게 잘 안 됐다. 자꾸 딴청을 부리게 됐고 덜컥거렸다. 시선은 깊이 스미지 못하고 겉돌았고, 말은 입이 아니라 손으로 삼키는 듯 흐트러진 안주를 접시 한가운데로 모으고, 소독저를 쌌던 기다란 종이로 종이알을 접었다. 누군가 술이 지겹다면서 휴대전화로 산울림의 노래를 틀었다. 계호는 설거지대에서 둥그런 유리그릇 하나를 갖고 와 휴대전화를 그 안에 비스듬히 받쳐 놓았다. 뚜껑을 부러뜨려 감자나 양파, 고구마를 물재배 하던 그릇이라고 했다. 계호는 유튜브로 신청곡을 받아 검색했고, 노래가 좋으면 괜스레 유리그릇을 또르르 굴렸다. 노랫소리가 점점 둥글어지면, 사람들은 다시 둥글게 앉아 둥근 소주잔을 둥근 입술과 입 맞췄다. 그러다 나약한 침묵이 찾아오면 나는 버성기는 조바심과 자부심, 불안과 확인의 욕구가 종내 들통 날까 봐 더 깊이 취하려고 애썼다. 취기조차 작위적이었다. 술이 지겨워지면 몇몇은 방으로 들어가 쪽잠을 청하거나, 계호 침대에 기대 노트북으로 주성치 영화나 미국 드라마를 보았다. 대개 계호와 굴비, 나 셋만 남았고, 술을 마시면 금세 얼굴이 벌게지는 계호는 차를 끓이고 촛불을 켰다. 자리를 비운 계호가 잠이 들었는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촛불을 껐다. 비릿한 그을음이 피어오르는 한 가닥 심지가 어떤 마침표처럼 보였다. 제법 취한 굴비가 아무리 라이터를 찾아도 보이지 않자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담뱃불을 그슬리다 앞머리를 태우곤 만날 라이터가 가난해,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화장실에 가다 부엌에서 계호가 딸기와 멜론을 예쁘게 깎는 모습을 게슴츠레 쳐다봤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내 앞에 어울려 있는 사람들이, 서울 한가운데 서울 같지 않은 이 마당이 아무래도 현실 같지 않았다.
계호는 화분에 여러 푸성귀를 심었지만 농부는 아니었다. 커피콩을 직접 볶아 진한 커피를 내려주었지만 바리스타가 아니었고, 아코디언과 보면대가 있었지만 가수가 아니었다. 그 모두가 아니면서 그 모두가 가능한 그 집이 점점 익숙해질수록 나는 계호의 집으로 갈 때마다 자꾸 늑장을 부리게 됐다. 나는 계호의 초대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전부 호응한 건 아니었다. 밑천이 필요 없는 산책이라면 모를까, 마음이 술을 머금은 종이컵처럼 물렁해지는 술자리는 지레 조심스러웠다. 계호가 아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연애에 실패하고, 직장을 그만둔 뒤 시작한 대필 일거리가 줄어들면서 나는 점점 사람들을 공들여 사귈 줄 몰랐다. 간단하게 돈에 대한 열등감일 수 있었다. 닉네임들은 나와 계호처럼 출퇴근을 하는 직장에 얽매이지 않았지만 궁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리 살지 않으면서 대가가 인색한 노동과 돈이 등가라는 고전적인 미신이 있었다. 아무래도 읍의 유산임이 분명한 그 생각만큼이나, 마당에서 본명을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에도 나는 참으로 어중간한 인간이었다. 대단한 알코올중독자도 아니었고, 미남도 아니었고, 멋쟁이도 아니었다. 나는 때로 내가 이물질처럼 여겨졌고,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냥 자연스럽게 나를 표현하면 될 건데 그게 그리 어줍기도 해서, 아무래도 나는 나랑 노는 게 가장 편안했다. 내 감수성이란 게 겨우 계절에 민감하거나 어둠침침한 영화를 좋아하는 게 전부면서, 특별하게 내세울 게 없으면서 나는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굴었던 걸까. 나는 걔들한테 진솔해질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마당과 어울리는 나를 고안해야 했다. 나는 우연이고 싶었다.
남성과 여성이 오누이처럼 얽혀 있는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들리지 않는 작별인사를 혼자 중얼거렸다. 더 이상 앉아 있으면 술잔과 입이 구분되지 않고 머릿속까지 하얗게 지워질 것 같았다. 나는 살짝 비틀거리며 어깻죽지가 잘린 혜화문과 혜성교회 첨탑의 조명을 홍등 삼아 걸어갔다. 아무리 복기해도 계호의 마당은 성인들의 술자리라고 하기에 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 역시 식물을 돌보듯 침묵으로 열기를 적셔 놓았는지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성생활이 없었고, 그저 술과 섹스하고 담배로 키스하면서 욕망을 다스리고 있었다. 반복하다 보니 그게 더 재미있었다. 둘이서 해도 혼자 하는 것 같았으니까. 사랑처럼 번거롭지 않았으니까. 섹스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움으로 구성할 수 있는 그다지 훌륭했던 경험도 일천했으니. 벌레가 방사하는 정도의 수정 욕구도 없었다. 코를 풀듯 수음을 했다. 어느 순간 내게 섹스는 혼자 하는 것이 되었다.
어떻든 쟤들은, 씹은 하겠지.
불빛은 하염없이 멀고, 술이 점점 오를수록 내 마음도 희석돼 나는 내가 점점 별로였다. 마치 내 마음의 내벽은 거울로 이뤄진 것 같아, 비치는 나는 다 부끄러웠다.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하는 걸까. 어떻게 제 마음을 그렇게 자신 있게 밖으로 내놓을 수 있는 걸까. 실낱같은 나를 데리고 돌아오는 밤길이 쓸쓸해, 가로등이 남겨 놓은 골목의 빛과 집들의 창문, 그런 것들의 입에 말을 걸 기운마저 점점 사라졌다. 나는 점점 껍데기만 남아 내 속의 어떤 내용도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나약하고 어리고 아무것도 없는 마음에다 덧대고 덧대 진짜 마음이 뭔지 잊어버려 놓고 고작 침묵으로 어른을 가장했던 내가, 술에 기대 나한테만 정직해지는 내가 싫었다. 나는 어른의 말을 하고 싶었다. 나를 억압하는 것이 어른이라는 생각은 읍으로부터 서울까지 나이를 먹는 동안 오랜 미신이었다. 나는 내가 안심하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고, 내가 믿는 것보다 개새끼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의 지퍼를 내리고 마음을 꺼내 구긴 뒤 버렸다.
나는 불빛에 섞여 어딘지 정확히 짚을 수 없는 계호네 집을 돌아보았다.
계호 군은 못생긴 딸기입니다.
나는 계호와 함께했던 시간보다 나 혼자 그 마당까지 오고갔던 과정이 내겐 더 각별했다. 내가 만질 수 있는 건 내 마음밖에 없었으니까. 계호와 내 집을 잇는 등뼈 같은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나를 만지고 있다 보면 혼자라도 그렇게 마음은 살과 뼈를 가져 육체를 가진 집이 되었다.
그러니까 계호가 서울에 머물고, 서울을 떠나고, 서울로 돌아오고, 다시 서울을 떠날 동안 나는 서울에 붙박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서울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계호로부터 서울을 배웠던 게 아닐까. 어쩐지 계호와 함께했던 그 짧은 봄여름 동안 비로소 서울을 이해한 기분이었다.


*


신의 저울쯤 되겠다. 고속버스 차창으로 지나가는 타워크레인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막 서울톨게이트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읍에서 첫날을 가장 짧게 보내기 위해 막차를 탔지만, 저녁 여덟 시가 가까운데도 밤은 여태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그랬구나. 계호가 보았던 풍경이 이랬을까. 살굿빛 속살을 드러낸 신도시 공사장의 허허벌판에는 수십 개의 타워크레인이 인간이 닻을 내릴 곳을 가늠하는 저울처럼 양팔 아래 네모난 콘크리트 외벽을 거느리고 있었다. 어스름에 잠기는 하늘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었고, 나는 조금씩 밤에 잠겨 계호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간으로부터 비로소 계호의 메아리를 듣게 된 기분이었다. 그 시간을 좀 더 붙들면서 골똘해지고 싶은데 풍경은 금세 지나갔고, 나는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나는 반년 만에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을 이동하는 중이었고, 그렇게 서울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장 정직한 내 마음과 대면하고 있었다. 계호는 집을 완성했고, 27개월 동안의 여행을 기록한 책을 낸 뒤 여행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잡지와 신문에 화개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히려 계호는 자주 화개를 비워 닉네임들이 그 집을 돌볼 때가 더 잦은 모양이었다. 나는 더 이상 서울 밤을 걷지 않았다. 일거리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집에서 나가지 않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외출해도 좀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 덕에 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가끔 차창으로 타워크레인을 발견했지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고, 심각하게 의미를 해석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어쩌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서울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던 계호처럼, 도시는 인간을 위해 고안된 신의 선물이고, 거인은 인간의 고향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용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끝에 오히려 저 외발 거인들이 자정을 틈타 한꺼번에 질주하는 상상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뭇 명랑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화개에서 멈추지 않고 그곳에서 한 시간 남짓 더 지나야 도착하는 읍으로 부모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읍은 늘 그곳에 있었으나 나는 서울에서 그곳이 수몰된 마을처럼 사라져버린 장소인 것처럼 굴었지만, 나는 어느덧 서울을 잊고 오롯이 유년 시절의 내 마음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부모는 여전했고, 그들을 대하는 내 마음만 더 늙고 형편없이 그대로였다. 날이 밝자마자 근처 시에서 공무원을 하는 누나가 찾아와 우리는 은행나무가 유명한 절 아래로 오리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둘 다 이가 나쁜 부모는 오랜만의 부드럽게 곤 살을 앞에 두고 먹는 내내 나쁜 이를 타박했고, 이쑤시개를 젓가락 삼다시피 했다. 식당을 나와 절로 걸어가면서도 아버지는 이쑤시개를 놓지 않았다. 나는 동동주를 축이면서 부모의 접시에 기름 뜬 국물을 한 국자씩 덜어 주었다. 점심을 먹고 일주문까지 오르는 동안 나는 초록에 한눈팔았지만 어떤 생각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개울에 흰 꽃잎이 이빨처럼 떠 있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에겐 서른 가지의 신체적인 특징이 나타난다고 했다. 넓적한 발바닥 장심엔 바퀴 자국이 새겨지고, 팔다리는 가늘고 길어진다. 국부는 칼집 속에 들어가고, 황금빛 살결에는 자잘한 털이 돋아 들판처럼 부드러워진다. 온몸이 나무처럼 둥글고 곧고 바르고 틈새가 없으며…… 아주 하얀 치아를 가진다. 나는 뒷짐을 진 부모의 크래커처럼 마른 손을 우두커니 쳐다봤다. 나는 어쩐지 영원히 그 손을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낮잠이 들었다. 나도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낮잠이라고 하기엔 제법 긴 잠이라 깨고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담뱃갑과 휴대전화를 챙겨 바깥으로 나갔다. 짙푸른 산과 모가 웃자란 들판을 거느린 깨끗한 오후의 공기가 달콤해 걸어서라도 서울까지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담배 좀 끊지.
어느새 누나가 담담한 얼굴로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응.
나는 담배꽁초를 신발로 짓이기면서 누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헛기침만 했다.
괜찮지?
뭘?
누구 없어?
누난?
난 뭘.
서울 생활은 어때?
그럭저럭.
그렇게 말하는 순간, 서울과 읍의 생활이, 내 마음의 태도가 그다지 다를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올까 봐.
네가 퍽. ……여기 뭐가 있다고. 아무것도 없잖아. 그냥 혼자 여행하듯 살면 편하고 좋지.
누나의 태도에서 계호를 바라보던 내가 보였다. 내가 또다시 담배를 꺼내자 누나는 선득한지 위팔을 쓰다듬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말린 가다랑어처럼 쿰쿰하지만 달착지근하고 금세 푸슬푸슬 바스러질 것 같은 저녁 빛 위로 유난히 둥근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깥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 딱 좋을 여름밤이었다. 계호와 내 집 사이에도 이런 허공이 있었다. 서울과 화개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허공에는 이렇게 달이 신의 눈처럼 매달려 있을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어떤 여행을 마친 기분이었다. 읍에서 서울까지…… 나는 그 어떤 여행보다 길고 고된 기분이었다. 여행의 모든 반대말 같은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었다. 나는 읍의 저녁에 서서 서울의 밤을 떠올려 봤다. 기억은 고스란했지만 어떤 질감도 없었다. 그 시간을 옷으로 짓는다면 벌거벗을 따름. 바람으로 연마한 시간, 그림자로 누빈 걸음, 침묵으로 건넨 고백…… 쓸쓸함의 내기라면 백전백승. 사람에 기댈 수 있었다면 나는 읍에 계속 머물렀을까. 서울에서 좀 더 명랑했을까. 나는 계호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서울을 떠난 까닭을, 화개에서 서울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꿈을 비로소 이해할 것 같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끊을까 말까 싶을 만큼 벨소리가 울렸을 때 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밤이라고 하기엔 이른데, 한 잔 술에 취해버린 걸까, 계호는 신의 발자국에 눌린 듯 목소리가 짜부라져 있었다.
뭐 해?
그냥.
나…… 읍에 왔어.
그래? 놀러와.
계호는 성곽 이쪽저쪽에 있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럴까, 싶었지만, 솥을 걸고 밤을 끓이고 결국 마음을 읽는 수작들 뒤에 나는 그만 읍으로 돌아오고 싶어질 것 같았다. 나는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침묵으로 데워진 휴대전화를 쥐고 올려다본 하늘은 경작할 수 없을 만큼 광활했다. 문득 계호라면 아마 이곳에서 우울했던 나보다 이곳을 훨씬 잘 장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도 없고, 늙고 볼품없는 부모도 없기 때문에 이곳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계호의 미래는 구름으로 엮은 한 그루 나무처럼 자라날 것이다.
근데, 왜 하필 거인이야?
나는 신의 무릎에서 키를 낮춰 왜소해진 은유가 그냥 궁금했다.
뭘? 아……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 만났을 때 네가 가르쳐줬잖아. 그날 오전, 국립현대미술관 공사장에서 불이 났다고. 지하에서부터 불이 시작됐는데, 타워크레인에서 작업하던 사람이 추락하고 말았다고. 생각보다 추락을 예감할 수 있는 노동의 자리가 많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반짝 눈을 뜬 기분이었어. 그래서 거길 가본다고 했었잖아. 같이 가지니까 넌 구경꾼이 되기 싫다고, 그냥 집에 가겠다고 했고. 그곳을 간단하게 바라볼 수 없다고 했잖아. 좀 복잡하다고. 위험한 노동이지만 특수한 노동이고, 남루하지 않고, 그냥 쉽게 말해버리기엔 초라하지 않은 노동 같다고. 외롭되, 돌올한 노동이라고.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타워크레인을 본 순간, 마치 시작의 마침표처럼 그날 오후가 떠오르더라. 안 그래도 그날 너랑 했던 산책 이야기로 다음 책 원고를 겨우겨우 시작했어.
감췄던 진실은 묶지 않은 풍선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랬니.
그랬구나. 나는 그저 계호의 말에 메아리처럼 호응할 따름이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없었고, 왠지 그 시늉뿐인 기분이 썩 서운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거울을 보게 되는 것 같았다. 거울은 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입체인 내 절반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내 그림자를 반영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의 메아리는 그렇게 거울인 듯 서로 다른 의미로 또 그렇게 포개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계호야. 내가 있었던 풍경을 이야기해 줘. 거인 말고, 볼품없는 인간이 있는. 길 위에서 그게 네 장기였잖아. 봄밤 비탈길을 오르면서 한 손에 햇반 하나를 쥐고, 이 리터짜리 생수병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사람은 나였을지 몰라. 은어가 돌아오는 화개천 다리 그늘 아래 소주병을 거머쥐고 곯아떨어진 러닝셔츠 바람의 거무튀튀한 사내는 내 아버지일지 몰라. 매실이나 녹찻잎을 따러 날품을 팔러 온 늙은 아주머니 중, 새참 때 이가 두 개쯤 비어 빵을 입 꼬리로 씹는 사람은 내 어머니일지 몰라. 그런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아무 죄책감 없는 말간 눈으로 혼자 걸어가는 낯빛이 하얀 사내는 나일지 몰라. 계호야,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아름다워질 필요가 있는데…… 아름다워지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르겠어.
네 집은 어디야?
항아리 속 별천지. 1)
벼가 파랗게 자라고 있어. 벼가 인간 같아. 삶의 주식이긴 한데 너무 나약해.
희망은 소멸할 수 있지만, 용기는 호흡이 길어.
……
에릭 호퍼 말씀이야.
부두노동자?
길 위의 철학자.
어떤 마을의 거리는 그가 사는 집 처마와 내 집 처마 사이의 한 뼘.
아무리 가깝거나 멀어도, 그 집과 집 사이에 의지해
나는 가까스로, 서울.
아무래도,
계호는 여기에서 詩가 되려나 보다.
그렇다면
여전히
메아릴까
……
내 무덤은 서울이 될 것이다.


1) 고운 최치원의 『화개동천』 중 ‘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 (우리나라 화개동은 항아리 속 별천지라네)’ 에서 빌려옴.



작가소개 / 임수현(소설가)

- 197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문학수첩》 신인상에 「앤의 미래」가 당선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이빨을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장편소설 『태풍소년』이 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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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오

히데오 서장원 히데오에겐 몇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친부가 일본인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일본 교토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어느 저녁나절, 한적한 거리를 걷던 중에 히데오는 이 사실을 내게 말해 줬다. 이후 히데오는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씩 더 들려주었고, 나중에 나는 히데오의 생애 초반에 일어난 일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꿸 수 있게 됐다. 히데오가 태어난 곳은 교토 외곽으로, 한국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행지 교토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택가였다. 히데오는 그곳을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습한 여름 날씨나 우듬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말 자기 기억인지 교토에 대해 보고 들은 뒤 상상해 낸 이미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덧붙이곤 했다. 교토에서 있었던 일 중 히데오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모두 나쁜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 시절 책상 가득 자이니치나 조센진, 총 같은 단어가 적혀 있던 풍경이나 동급생 남자애들이 그의 가방을 걷어차며 드리블 시합을 했던 일, 그를 조롱하려고 반 아이들이 케이팝 노래를 개사해 불렀던 일, 그런 사건들. 한번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에 히데오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나고야로 이주하는 일을 의논했다. 히데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앉히고 나고야에서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경고했다. 히데오는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히데오가 아는 한, 히데오의 어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기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남편도 아들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계속 살 거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날 밤, 히데오는 코의 통증과 식도로 넘어오는 피, 어머니의 고요한 얼굴과 나고야에서 보낼 새로운 나날의 환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히데오의 부모는 나고야행을 두고 갈팡질팡했고, 히데오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이혼을 결정했다. 이혼 후 히데오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에서의 삶을 철저히 숨겼다.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첫 번째 이름 히데오를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히데오를 처음 본 건 연극원 강의실에서였다. 아직 벚꽃도 피지 않은 3월, 나와 히데오를 포함해 여덟 명의 학생이 강의실에 책상을 둥글게 붙여 앉았다. 그해 연극원에서는 입학이 예정된 학생들을 모아 15분 내외의 단막극, 일명 “짤막극”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신설했다. 입학 전에 그룹별로 모여 공연을 준비하고, 3월 개강과 동시에 연극원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이색적인 신입생 환영회라 할 수 있었다. 학보사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신입생 그룹 중 하나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해 들어 나에게 처음

  • 관리자
  • 2025-06-01
그리고 밤과 가을이

그리고 밤과 가을이 김연수 1 지난여름, 정기에게는 세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길을 걸어갈 때면 날벌레들이 달려드는 것 같아 혼자 손사래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기사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 뒤쪽에서 번개 같은 게 번쩍이기도 했다. 노안이 찾아온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나이가 들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리라고만 생각했지, 거기에 더해 전에 없던 것들이 보이는 증상까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책 읽는 일이 힘들어졌다. 평생의 즐거움이었던 독서가 성가신 일이 되면서 생활은 성기어지고 마음은 허술해졌다. 더 오래전, 나이가 들면 활자 같은 건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소일하며 세속적 가치관에 물든 마음을 고치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은근히 노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시절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두 번째는 포항에서 에너지공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딸 민지와의 관계가 점점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울과 포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년에 집을 새로 구하면서 민지는 아빠인 정기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사의 이유가 언제부터인가 짝꿍처럼 붙어 다니던 여자 선배 희선과 같이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됐다. 그는 민지와 희선이 단순한 선후배 사이가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몇 번 딸에게 희선에 대해 물었지만, 민지의 반응은 모호했다. 그러다가 정기는 그 일에 대해 더 묻지 않게 됐다. 한 번은 민지가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앞뒤 대화의 맥락으로는 그 일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정기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지막 고민은, 자신이 담당한 부고란에 누구의 죽음을 다룰 것이냐는 점이었다. 최종 후보는 미국의 SF 소설가와 전 여당 대표, 둘 중 하나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신문 부고란에 누구를 쓰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기에게는 앞의 두 고민만큼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다. 앞의 두 고민은 과거의 일에서 비롯된 결과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세 번째 고민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기는 생각했다. 과연 소설가냐, 정치인이냐. 정기의 고민은 여름만큼이나 깊어졌다. 2 노트북 화면 너머로 신문사 후배인 은영이 지나가고 있었다. “휴가는 즐거웠어?” 정기가 알은체를 했다. “줄곧 비만 내렸잖아요. 태풍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잔뜩 낯을 찌푸리며 은영이 말했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으면 가지 말았어야지.”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아무 데도 못 가죠. 태풍 지나갈 때 제주 안 있어 봤죠? 그게 진짜 여름이더라구요. 바람이 몰아치는데, 어휴, 엄청났어요. 그러더니만 휴가 마지막 날이 되

  • 관리자
  • 2025-06-01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정기현 단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펜스와 인접한 아파트 건물들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단지 안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어둠의 수심이 깊어져 모든 것이 감추어졌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긴긴 태양 볕 아래 그 흉물스러움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여름과는 달리, 겨울의 단지는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였다. 이야기를 가득 품은 고성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주택 앞,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별칭이 붙은 아파트 단지는 조합원과 건설사 간 충돌로 공사가 중단되어 짓다 만 아파트 건물들이 2년 동안 그대로였다. 1만 5천 가구를 수용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착공에 들어갔던 대규모 단지는 2차선 통행로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번 겨울부터였다. 출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가려면 펜스가 세워지기 전보다 30분씩은 더 둘러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정류장까지 걸을 때면 아파트 중앙 통행로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솔바람, 산들바람 아니고 토네이도에 가까운 세기였다. 물론 토네이도를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거뜬히 날려 버릴 듯 기세 좋은 바람이었다. 단지 바깥은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했으므로, 이는 분명 바람길을 잘못 낸 시공 탓에 불어 대는 건물풍일 터였다. 거센 바람에 펜스가 흔들리며 콰챵- 하는 소리를 낼 때면 살을 에는 새벽녘 추위도 어쩐지 더욱 견디기 어려워져 굳게 잠긴 펜스를 원망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열고 단지 가운데 통행로로 다닐 수 있다면 그 끝의 버스 정류장에 금세 도달할 텐데. 아침마다 30분씩은 더 자고 나올 수도 있을 텐데. 내게는 바람쯤이야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문제였다. 한파 특보 경보 문자가 알람보다도 일찍 울려 잠을 깨웠던 날, 나는 빌라 현관을 벗어나 오른쪽 인도로 걷는 대신 길 건너 펜스 쪽으로 향했다. 펜스 출입구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었다. 화풀이라도 하듯 자물쇠를 세게 두 번 당겨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자물쇠가 훌렁 풀려 버렸다. 펜스 안쪽으로 손을 쏙 넣어 자물쇠가 걸려 있던 걸쇠를 풀고 출입문을 열자 눈앞에 펼쳐진, 소리로만 접하던 바람의 길. 이용자가 나 혼자뿐이라 길은 실제 너비보다도 광활해 보였다. 건축 자재들, 내부 설비들이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고 고목처럼 주차되어 있는 승합차도 몇 보였다. 길 가장자리에도 단지로의 진입을 막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길과 나뿐인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통행로는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람은 듣던 대로 거세었다. 나는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민 채 거센 바람에 맞서 걸었다. 두 발이 동시에 떨어지는 순간 바람에 휘말려 공중으로 붕 떠오를 것 같아 한 발이 떨어지면 다른 한 발은 땅에 꼭 붙어 있도록 의식하며 걸어야 했다. 고갯길의 고

  • 관리자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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