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2)
- 작성일 200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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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봄을 심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공단 지구의 침묵이 콧등을 때렸다.
기계 소음, 불 켜놓은 사무실, 밤새워 달려왔거나 달려갈 트럭들의 으르릉거림 같은 것은 없었다. 하다못해 졸린 표정의 경비원이 손전등 들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후각적으로도 고요했다. 기계 윤활유 냄새나 독한 화공약품 냄새, 어느 외계 행성의 대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냄새들이 없다는 것을,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잠깐 동안 갈피를 못잡는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서있었다.
문득 봄내음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흙냄새, 풀냄새, 미세먼지와 화분이 뒤섞인 비릿한 듯하면서도 차분한 냄새가 없었다. 도시에도 그런 냄새를 풍기는 물건들은 많다. 공장 담벼락 아래에 핀 후줄근한 민들레나 광고지 붙이라고 심어둔 것 같은 가로수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내가 선 밤에는 그런 냄새도 없었다.
나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저 앞에 걸어가는 주혁을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시민들이 호흡하는 공기가 얼마나 지저분한지를 알려주기 위해 설치한 듯한 보안등 아래를 거닐고 있는 사색에 빠진 표정의 고릴라 한 마리. 하나님인지 알라인지 옥황상제인지, 어쨌거나 이 세상을 주관하는 지적 존재가 실존한다면 그 연출가적 소양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아니, 어쩌면 그 분은 45억 년 전부터 데카당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연출 기법에 그런 흔적이 많이 엿보인다.
나는 그 고릴라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데?”
“우리 공장 원료 야적장. 넓고 양지바르거든.”
그렇다면 혹 들키더라도 불법 침입으로 체포당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일 진정 넣을 거지?”
주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제에에엔장. 나는 체불임금과 근로감독관, 악덕고용주가 받아야할 응보, 그리고 정의 구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상당량의 단어들을 낭비해야 했다. 주혁은 내 말을 오징어처럼 질겅질겅 씹다가 그걸 툭 뱉듯이 말했다.
“아니.”
“왜?”
“월급 받아낸 다음에 뭘 할지 아직 결정 안했어.”
“뭐?”
“그렇잖아. 대판 싸워서 월급 받아냈으면 거기서 나와야지. 계속 다닐 수는 없지. 그럼 다른 일을 해야 할 텐데 마땅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느껴졌다.
첫 번째는 안도감이었다. 주혁은 체불 임금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령한 이후의 일까지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하긴 자기 일이니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주혁이 자기 앞날을 생각했다는 사실이 꽤 놀라운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놀라움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내 표면적 반응을 이끌어낸 것은 두 번째 감정이었으니까.
왈칵 화가 치밀었다.
“뭘 할지 몰라서 그냥 뭉그적거리겠다고? 그런 말이 어디 있냐?”
취기가 이제서야 오르는 모양이다. 나는 발에 걸리는 뭔지 모를 물건을 걷어찼다. 그것은 블럭 담장에 맞아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후련한 기분이라곤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니, 깔끔하게 정리를 못하니까 앞으로 뭘 할지 안 떠오르는 거야. 알겠어?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고 잡생각 안나도록 시간 떼워주는 일도 있으니까 그냥 거기에 안주하고 싶은 거야. 그걸 정리해야 해. 그래야 뭘 할지 떠올라도 떠오를 거 아냐.”
거기서 말을 끊고 싶었지만 소주와 결탁한 내 입은 자결권을 주장했다. 평소에 품었던 생각이지만 감히 꺼내지 못했던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지독하게 자기 위주의 생각이지만 난 가끔 부모님들이 미워.”
주혁은 소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경악하며 말했다.
“백수로 지내도 될 만큼 뒷바라지를 해주니까 내가 앞으로 치고나가질 못해. 아, 그래. 이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호강에 겨운 헛소리지. 하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고.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는 것을 딱 중단하면 내가 스스로 살 궁리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야.”
천박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주혁은 탓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우리 부모 세대는 탯줄을 끊지 못했지.”
“뭐라고?”
주혁은 침묵했다. 긴 말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한참 후 주혁은 침묵한 적도 없다는 듯이 말을 시작했다.
“자식을 자궁 밖으로 내보낸 후에도, 자식이 학교를 가고 취직을 해도 탯줄이 주렁주렁 이어져 있어.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해서 자식이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일이라고 믿지. 물론 엄청난 자기 희생이지만 또한 엄청난 책임 회피야. 자식에게 영양분을 직접 모으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거든. 그건 학교가 해줄 거라고 믿지.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상급 학교에 가는 방법뿐이야. 결국 졸업장은 따지만 그 때도 탯줄은 이어져 있어. 아는 방법은 상급 학교로 가는 방법뿐이고. 더 이상 갈 학교도 없으니 방법은 두 가지지. 탯줄을 부여잡고 빈둥거리거나 세상을 온통 학교로 만들거나.”
한숨이 나왔다.
“시험 치고 등수 매기고 높은 점수가 목적이라고 믿고.”
“일하고 은행잔고 확인하고 많은 돈이 목적이라고 믿고. 그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부모들이 탯줄을 끊지 못하셨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 분들은 그런 방법 밖에 몰라. 언제나 하시는 말씀이 ‘밥은 먹었냐? 안 먹었으면 차리마.’ 같은 것밖에 없다고 해서 그 분들을 탓하면 안돼.”
술 때문에 텁텁한 입안이 후끈거렸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알아. 젠장. 그 분들이 못 끊으면 이쪽에서 끊어야겠지. 하지만 끊고난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내가 하려던 말이 조금 전 주혁이 했던 말 그대로라는 것을 깨닫고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나도 자신이 못 하는 일을 남에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조언이라고 믿는 부류였던 모양이다.
바람은 파업에 들어간 모양이다. 대로와 골목 어디에서도 바람이 불지 않는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들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술 마시는 사이에 3차 대전이 일어나 인류가 멸망했다고 믿을 정도로 고요했다. 주혁의 안전화가 포석에 땅땅 부딪치는 소리마저도 어쩐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봄이 오면 나아질 것 같다.”
갑작스러운 주혁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걸어간 후에야 나는 주혁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뭐? 봄이 오면?”
“그래.”
“뭐가 나아진다는 거야?”
“겨울만 넘기자는 생각 더 안 해도 되잖아. 그러면 뭘 해야할지도 떠오를 것 같다.”
말을 끝낸 주혁은 모퉁이를 돌았다. 길을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 주혁의 뒤를 따라 골목으로 접어든 후에야 주혁의 말에 대해 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주혁의 황당하게 들리는 고찰이 최소한 내게는 엄연한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 몇 년 동안 내게는 봄이 없었다. 겨울만 넘기자고 생각하며 미적거리다 보면 어느새 여름이었다. 봄. 겨울을 버텨낸 사람들이 맞이할 수 있는 그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 내겐 신기루처럼 어렴풋하다.
주혁도 그런 것일까. 겨울만 버티고나서 이 직장 때려치우겠다고 생각하다가 어느새 여름이 와버리는 것을 몇 년 동안 경험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주혁에겐 ‘봄’이 필요했다. 몇 개월 동안 임금이 밀렸기 때문에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시작하기 위해 그만두는 것. 중단하기 위한 중단이 아니라 계속 나아가기 위한 중단을 위해 주혁은 ‘봄’을 원했던 것이다. 때마침 인터넷에서 어떤 기인이 흥미로운 장난질을 하고 있었고 주혁은 그 장난을 자신의 동기로 이용해보려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 이건 기인 기질이 대단히 풍부한 누군가의 장난이다. 주혁이 본 고객 평가라는 것은 이런 장난에 맞장구 치길 좋아하는 네티즌들이 써올린 것일 테고. 왜 이 사건이 아직도 텔레비전에서 보도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다. 이런 사건이라면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사건 사고 수집하는 네티즌들이 오래 전에 이슈로 만들었을 테고 그랬다면 시사정보 프로그램에서도 보도되었을 것이다.
‘(앵커 멘트) 시청자 여러분. 인터넷에 봄을 판매하는 곳이 있답니다. 이 온라인 쇼핑몰은 주문을 받으면 봄을 포장해서 배송해줍니다. 과연 무슨 말일까요? (성우 나레이션) 모모시에 사는 모모씨는 팍팍한 현실에 힘겨워하는 이웃들에게 봄의 따스함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모모씨는 어쩌고 저쩌고……’
주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공장 정문 앞에 서있었다. 이 밤중에 그 쇠창살은 마치 동물원 우리처럼 보였다. 세계 각국에서 모아온 희귀한 금속 동물들을 가둬둔 낡은 동물원. 어딘가에 경고문이 있을 것 같은데. 기계에게 식용유를 주지 마세요. 기계가 아파요. 내가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주혁은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더니 정문 한쪽의 쪽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야간 경비자나 당직 근무자 같은 존재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들어가도 괜찮을까?
문앞에서 꾸물거리는 나를 본 주혁이 뭐가 문제인지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 밤에 내가 당직이야.”
“그랬냐?”
“응. 문 잠가놓고 잠깐 나가서 너 만난 거야. 들어와.”
꽤 헐렁한 당직 근무 태도라고 생각하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주혁은 나를 원료 야적장으로 안내했다. 한쪽에 방수포로 덮어둔 거대한 무더기가 있었지만 널찍한 야적장은 전체적으로 허전해 보였다. 나를 그곳에 세워두고 주혁은 어디론가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잠시 후 주혁은 삽 하나와 손전등 하나를 챙겨서 돌아왔다.
주혁은 내게 손전등을 건네고는 땅을 비추게 했다. 나는 될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바닥을 비추었다. 땅 위에 스폿 라이트처럼 동그란 빛이 그려지자 주혁은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화물트럭들이 오간 야적장의 바닥은 단단했다. 곧 그 바닥에 30센티미터 깊이의 구덩이를 파려면 삽보다는 곡괭이가 어울린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내가 그 사실을 지적했지만 주혁은 곡괭이가 없다고 말하고는 삽을 거칠게 놀렸다. 고요한 공단 지구에 그 소리는 쾅쾅 울려퍼졌다. 누가 소리를 듣고 와서 뭐하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겁니다. 문학 파괴자 팽주혁이 텔레비전 좋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한 그루의 봄을 심고 있습니다. 완벽한 대답이군.
주혁이 삽질을 멈췄다.
“안에서 걸리적거리는군.”
주혁은 품속에서 봄씨가 든 상자를 꺼내 내게 건넸다. 다시 삽질을 시작하는 주혁을 보다가 한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손전등 불빛 속에 그것을 넣어 안쪽을 살폈다.
그래. 처음 받았던 인상대로 그건 복숭아씨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인터넷 기인은 복숭아 과수원이라도 가지고 있나 보다. 아니면 과일 가게 주인이든지. 이런 장난이라면 의미가 중요하지 형식은 그다지 중요할 것이 없다. 30센티미터이든 3센티미터이든 아무 상관이 없으니 주혁은 굳이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주혁을 말리려 했다. 그 때 주혁이 삽을 들어올리며 허리를 폈다.
바닥을 보니 설명서의 지시를 충족하는 깊이의 구덩이가 보였다. 앞뒤없이 힘센 놈 같으니라고. 주혁이 이마의 땀을 훔치고 말했다.
“넣어.”
나는 피식 웃고는 상자를 기울여 봄씨를 떨어뜨렸다.
똑바로 떨어진 봄씨는 주혁이 만든 구덩이에 떨어졌다. 주혁은 파냈던 흙을 다시 구덩이에 채워 넣고는 삽 뒷부분으로 땅을 툭툭 다졌다. 땅을 계속 비추던 나는 주혁의 발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닫고는 손전등을 들어올렸다.
“끝난 거야?”
주혁은 손전등 불빛에 눈을 찌푸렸다. 손전등을 낮추자 주혁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끝났어.”
스스로를 비웃으면서도 나는 뭐가 달라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목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느닷없이 벚꽃잎들이 휘날리지도, 사방에서 겨울잠 자던 개구리들이 튀어나오지도, 각색 나비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불황 때문에 시름에 잠긴 공단 지구의 휑한 야적장에 주혁과 함께 서있었고 그건 10분 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제 내 일을 할 차례다.
나는 귀를 열고 주혁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내 역할이야 특별히 짐작할 것도 없다. 나는 증인인 것이다. 주혁은 삽과 복숭아씨를 이용하여 잃어버린 봄을 소환하는 의식을 집전했고 나는 벗의 자격으로 그 의식의 증인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증인이라면 얼마든지 해줄 용의가 있다. 나는 주혁이 봄이 왔다고, 그리고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어영부영 시간을 까먹는 짓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기를 엄숙하게 기다렸다.
입을 연 것은 주혁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밤의 어둠 때문에 비구름이 낀 것을 못봤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빗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졌을 때 우리는 아무런 대비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주혁은 삽을 어깨에 걸치곤 따라오라고 외치며 달려갔다. 그 뒤를 따라 몇 걸음 달리지도 않았는데 이미 비는 쏴아아 소리를 내며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주혁이 달려간 곳은 주차장 쪽이었다. 주차장 한쪽에는 직원용 자전거 보관대가 있었다. 우리는 옷이 흠뻑 젖기 전에 겨우 자전거 보관대의 지붕 아래에 들어갈 수 있었다. 플라스틱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우리는 자전거 보관대의 프레임에 걸터앉아서는 머리를 털었다. 긴장을 풀고 들어보자 처음 느꼈던 것처럼 빗소리가 거세지는 않았다. 나는 가랑비인 것 같다고 말했고 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 빠르네.”
“효과?”
“봄비 오잖아.”
기막힌 해석에 웃음을 터뜨렸다. 주혁은 삽을 프레임에 기대 놓고는 앞으로 한 걸음 걸어나갔다. 지붕 밖으로 손을 내민 주혁은 낙수를 손바닥으로 받았다. 나는 그 때까지 끄지 않았던 손전등으로 주혁의 근처를 비추었다. 노란 불빛 속에서 빗줄기들이 반짝거렸다.
주혁은 손을 내려 바지에 닦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만에 드디어 봄이 돌아왔어.”
위엄 있는 증인의 역할을 연기하고 싶었지만 조금 전에 터뜨린 웃음 때문에 그러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 봄이 왔군. 뭘 해야 할지 떠오르냐?”
“응.”
“그래? 뭐지?”
주혁은 몸을 내쪽으로 돌렸다. 손전등을 들어올려 그 얼굴 근처를 비추었다. 주혁은 입을 다문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긴 말을 할 모양이다. 나는 손전등 스위치를 만지작거리며 주혁의 말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주혁이 말했다.
“반 년 동안 밤늦게 허름한 실비집으로 찾아와 술 사주면서 월급 받아내라고 악을 써 준 여자라면 꼭 붙잡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어.”
무의식중에 스위치에 올려놓았던 손가락을 꿈틀했다. 손전등이 꺼졌다.
빛이 사라지자 주혁의 실루엣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빗소리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비가 몸을 때릴 것 같은 느낌에 움찔했다.
여자라고? 아, 그래. 나 여자였지. 주민등록등본에도 그렇게 나와있으니 대한민국 정부가 보증하는 여자지. 그런데 저 진화에 저항하는 녀석이 그 당연한 사실을 왜 지적하는 거지? 그런 거 한 번도 지적 안 했잖아. 그래서 나도 나 자신에게 그걸 지적하지 않았는데.
영원히 지적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빗소리 사이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서 뚜렷하게 들리는 것은 내 것이지만 주혁의 숨소리도 약하게나마 들려왔다. 귀가 꽤 예민해진 것 같다. 그 때문에 갑자기 들려온 주혁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선명했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이 봄에 나는 너한테 다가가고 싶어. 네가 허락하는 거리까지. 그 거리가 짧았으면 좋겠어.”
비가 내리고 있어 공기가 습한데도 목이 말랐다. 억지로 침을 삼키고 말했다.
“주혁아. 밀린 월급 받아내고, 그리고 새 직장 구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러려고 봄을 심었잖아.”
“아닌데.”
“아니라고?”
“그런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하고 싶기만 하다면. 나는 그런 것을 하고 싶게 만드는 이유를 찾으려고 봄을 심었어.”
“그 이유가……”
“수희 너였어. 가까이 있는데도 몰랐어.”
주혁이 침묵했다. 할 말을 정리하는 모양이다. 드럼 위에 고운 모래를 뿌리는 것 같은 빗소리가 적막했던 공단 지구를 차곡차곡 채워갔다.
주혁이 말했다.
“백지 상태로 다가올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것도 중요해. 하지만 그 시간을 함께 할 사람이 누구인가도 중요해. 그리고 그건 똑같은 말이야.”
똑같다고?
“지구 위에 나 혼자라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의미가 없으니까.”
뱃속이 화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주혁이 숨어있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탯줄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이 그 어둠 어느 곳에 있었다. 고맙고 고마운 부모님들. 하지만 그 분들은 어둠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또다른 나다. 탯줄이 우리를 잇고 있으니까. 지구 위엔 나 외에 다른 사람도 있어야 한다.
내 침묵과 주혁의 침묵이 다르다는 것은 주혁도 잘 알고 있었다. 주혁은 내 침묵을 대답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해석할 수 없었다.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흔해빠진 기계공이야. 수희야. 그나마 월급은 여섯 달치나 밀렸지. 하지만 만약 네가……”
“내가 허락하는 거리까지 다가오고 싶다고 했지?”
내 갑작스러운 방해에 주혁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조금 후 주혁은 단어 하나하나를 연마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디까지 다가가면 될까?”
왜 시사정보 프로그램에서 봄을 판매하는 기인에 대한 이야기가 보도되지 않은 것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슈를 찾아내는 일에는 저인망 수준인 네티즌들이 그 이야기를 발굴해내지 못한 것인지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주혁과 내가 심은 것이 복숭아 씨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 추측들을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주혁의 질문에 대답했다.
“보이지 않으니까, 만질 수 있는 곳까지 다가와.”
큼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주혁의 묵직한 안전화가 젖은 땅을 때리는 소리다. 갑자기 손전등을 켜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무엇인가가 내 손을 감싸쥐었다. 주혁의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마주잡았다.
<끝>
작품후기 : 본문은 실제 인물이나 단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만, 모든 사실에 대해 건전한 의혹을 품을 줄 아는 훌륭한 성품을 가지셨으며 가용시간도 많으신 분이 있으시다면, 가을을 판매하는 쇼핑몰을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벌써 꽤 덥군요.
건강과 즐거운 글읽기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저자 소개: 이영도
1972년 마산 출생.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발표한 <드래곤 라자>로 판타지 열풍을 일으켰다. 작품으로 <퓨처워커> <폴라리스 랩소디> <이영도 판타지 단편집> <오버 더 호라이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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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슬빛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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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나라공화국의 이야기 요정을 보았니?[레지던시 일기 – 남이섬 호텔정관루] 나미나라공화국의 이야기 요정을 보았니? 하신하 편집회의까지 마치고 마감을 이미 한번 연기한 장편 동화의 원고를 머릿속에 짊어지고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에 올랐다. 배는 물길을 헤치고 유유히 남이섬으로 다가갔다. 나는 저 섬을 거나한 술판이 벌어지는 대학생 MT 장소로, 한여름의 활기와 젊음의 싱그러움이 가득 담긴 노래가 흘러나오는 강변가요제로, 또 유명한 드라마의 한 장면을 찍어 관광객이 북적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원지로 알고 있었다. 이후 남이섬에서 국제 규모의 어린이책 축제가 열린다는 유명세는 익히 들었지만, 직접 참여한 경험은 없었다. 배 안에서 들리는 말들이 서로 다른 걸로 보아 아시아의 다양한 국적으로 짐작되는 낯선 관광객 무리 속으로 조용히 스며 들어갔다. 남이섬에 도착해 배에서 내렸을 때 나는 ‘나미나라공화국’이라는 소인국 안에서 눈을 뜬 거인 걸리버가 된 기분이었다. 언제나 함께하는 물리적인 몸의 무거움에 마감을 넘겼다는 마음의 무게까지 더해져 나는 이미 거인만큼 천근만근이었다. 내가 지낼 숙소인 YUSOF 방의 문을 열자 말레이시아의 그림책 작가 유소프가 그린 코끼리들이 나를 반겼다. 나에겐 2주 안에 원고를 마무리해서 보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코끼리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에 벽을 가득 채운 코끼리 그림은 한없이 천진난만하게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여행의 즐거움에 들떠 남이섬 안을 훑고 다니는 관광객들의 무리에 속해있었던 터라 레지던시 숙소 근처의 한적함은 다른 시공간에 들어선 듯 낯설었다. 관광객들이 배를 타고 빠져나간 밤에는 침묵과 어둠이 숙소 주위에 깊게 내려앉았다. 남이섬을 산책하는 새벽과 저녁 시간에 나는 거인국에 도착한 작디작은 걸리버가 되었다. 화려한 깃털로 있는 힘껏 자신을 뽐내는 공작과 내가 방문을 열고 나오면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와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견과류를 뺏어가는 토끼들. 일정한 동선으로 직원처럼 일하는 듯한 오리와 거위 무리. 뺏어갈 천적이 없는 듯한데도 무언가를 숨기느라 바쁘디바쁜 다람쥐와 청설모, 그리고 마감의 시간 또한 지나가리라며 천천히 흐르는 물과 이 모든 풍경을 내려다보며 감싸주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나는 작고도 작은 사람이었다. 자연의 한구석을 차지한 작은 걸리버는 조용하고 겸손하게 다른 생명체들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며 돌아다녔다. 식당이나 카페, 도서관이나 미술관에는 최대한 관광객처럼 위장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있던 남이섬의 직원들이 “작가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며 반갑게 웃으며 다가온다. 어디를 가든 늘 한 사람쯤은 다가와 혹시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무리 속 위장술이 뛰어난 내가 관광객이 아니라 레지던시 작가라는 것을 남이섬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다. 직원들은 미소를 띠고 심리적 안정을 보장하는 일정한 사회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만, 내가 신호만 보내면 당장이라도 뛰어오겠다는 서비스
- 하신하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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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이야기의 유령 콘셉트는 낙관적인 것이지요? 유령이란 존재 자체가 사후세계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낙관적이지요.[레지던시 일기-서울프린스호텔] 당신 이야기의 유령 콘셉트는 낙관적인 것이지요? 유령이란 존재 자체가 사후세계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낙관적이지요.1) 서윤빈 우선 하나 고백하면서 시작하겠다. 나는 여태 진실한 에세이를 써 본 적이 없다. 일곱 권의 책을 냈으니 적어도 일곱 번은 에세이 내지는 에세이격에 해당하는 작가의 말을 썼다는 뜻인데, 그중에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지 않은 것은 단 한 편도 없었다. 아주 현실적으로 보이는 몇 편의 글에서도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할 거짓말을 섞어 넣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쓸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별로 인기가 없는 사람이고, 인기가 없다는 건 내가 별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일 테니까.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건 작가로서 죄를 범하는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문제는 이 글에서는 거짓말을 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원고 청탁 내용 자체가 호텔 프린스 ‘소설가의 방’ 사업에 선정된 작가의 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소설가의 방’이 10년이 넘는 연식을 가진 장수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상반기, 하반기에 각각 6명의 작가가 머물렀다고 치면 대충 추산해 봐도 여태 120명 이상의 소설가가 호텔 프린스에 머물렀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무언가를 꾸며내어 쓴다면 그들 중 누군가는 분명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깨가 딱딱하게 굳으면서 글이 턱 막혔다. 망상과 기현상 없는 글은 어떻게 쓰는 거였더라? 일단은 내가 벌인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자. 틀렸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유튜브 영상을 몇 편 찍은 것, 장편 소설 원고를 쓴 것, 가능한 조식을 챙겨 먹으려고 애쓴 것 정도가 전부였다. 남들 다 한다는 산책도 거의 하지 않았고, 그렇다 보니 명동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시트를 갈아주는 새하얀 침대의 느낌이 꽤 각별하기는 했으나… 그거야말로 120여 명의 작가가 다 아는 지루한 이야기겠지. 하지만 그게 꼭 내 잘못이기만 할까? 지금 객실에 관해 생각하면 객실의 공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먼지 냄새와 함께 감돌던 어떤 끈적한 기운. 그 기운은 내 몸에 부드러이 달라붙어 나를 잠으로 이끌곤 했다. 혹시 그 기운이 수많은 작가가 거쳐 간 흔적이었던 건 아닐까? 얼핏 깨끗해 보이는 객실의 벽지와 침대 시트에 사실 앞서 머물렀던 작가들의 땀과 한숨, 권태가 지층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작가 레지던시답게 ‘소설가의 방’ 중 한 객실에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 귀신 역시 축적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귀신은 한밤중에 슬쩍 나타나 소설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렇게 속삭이겠지. — 특별한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아. 너도 알잖아. 물론 내 방에는 귀신이 나오지 않았으니 귀신이 정말로 어떤 스타일인지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오해했다면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하지만 나도 서
- 서윤빈
- 202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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