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웃기는 여자
- 작성일 200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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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웃기는 여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소나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었던 이 비는 나를 공중전화박스에 그대로 가둬 놓았다. 잠깐 전화를 한다고 들어갔는데 때마침 정말 신기하게도 영화 같은 굵은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더니, 이내 샤워기로 뿌려대듯이 비가 몰아쳐 내렸다. 기분이 이상해서 잠시 모든 생각을 잊고 비를 멍하게 보다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공중전화기는 먹통이었다. 원래 고장이 났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이 바보는 전화 한답시고 들어왔단 말이다. 그렇다고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바람까지 동반한 비가 위협적으로 공중전화박스를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공중전화박스가 날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졸 틈도 없이 가슴을 졸이며 바깥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억수같이 내렸느냐 하면, 무식하게 거리를 내달려 집으로 향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꼭 이런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람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내달리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 빗속에서는 사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맞은편 카페에 사람들이 개미처럼 몰려들어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왜 이렇게 비가 오는 거야?’, ‘태풍이 온 모양이에요’, ‘어제 일기 예보에서는 틀림없이 여름 날씨라고 했단 말이야!’, ‘구름 하나 없는 깨끗한 지도였었는데, 어이없게도 오보였나.’겨우 자리를 잡아 차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굳이 듣지 않아도, 나는 모든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 생각하는 것들은 어차피 다 거기에서 거기였다. 마치 찍어낸 것처럼 우리의 생각도 찍혀서 그래도 입 밖으로 뱉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반복이다.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꽉 박힌 생각. 다른 것은 떠올릴 수조차 없는 일정량의 감정. 사람들은 그 일정량의 걱정이라는 틀 속에서 막무가내로 튀어나오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비단 이 카페에 사람뿐이랴. 지하철역 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사람들도, 집 안에서 따뜻하게 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도,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미치광이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하아.
지친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덥지근했다. 공중전화박스 안은 안전하다, 라는 안심의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나에게 달려드는 것은 끈적끈적한 땀이었다. 기분 나쁜 습기와 뜨거운 입김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이 끈끈한 느낌은, 아, 생각하기도 싫은 장마철에 그 느낌이었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느낌이다. 젠장, 젠장! 어눌한 욕이 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흩어지고 나는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선풍기 딱 한 대만 있으면 좋겠다. 하기야 이런 좁은 구석에 선풍기가 들어갈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거 한 대만 바라보아도 서늘한 것이 시원만 하겠다. 그러나 선풍기는커녕 자연 바람도 없다. 아, 몰라. 이런 생각하면 더 괴로워지고 더위는 더할 거야. 순간적으로 확 빗줄기를 뚫고 달려 나갈까 했으나 이내 충동을 억눌러 버렸다. 미친 짓이다. 어린 나이에 대머리가 되고 싶진 않다. 나의 인생은 다리미로 쫘악 펴진 비단길, 뭐 가끔은 가시밭길도 있겠지만, 어쨌든 젊음은 찬란하게 아름답다. 빛이 번쩍번쩍 나는 꿈이 깃든 젊음이여! 저 새가 난다고 비웃을 수 있겠는가. 아니, 절대 비웃지 못하리라! 비웃는 것은 오직 꿈이라는 배경이 든든히 있는 젊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런 특권이다. 견디자. 구불구불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윤기 있게 빛내며 꽃향기를 휘날릴 내일을 기대하며 견디는 거다. 내가 허리까지 어떻게 머리카락을 기르고, 얼마나 정성스럽게 다듬었는데! 고작 순간적인 충동으로 모든 걸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충동을 억눌러라. 욱하는 순간, 꿈의 한 귀퉁이가 잘려 나가는 것이다. 지금 참으면 내일 머리를 돌돌 말 수가 있다. 참자, 참자.
그러나 인내란 놈은 얼마나 쓴 것인가. 반짝반짝 빛나는 젊음이란 놈은 또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 몇 십 분이 지나 눈을 꽉 감고 뛰는 사람, 어디에서 구했는지 우산을 펼쳐들고 걷는 사람이 족족 눈에 뜨이자 나는 또 울컥 하고 말았다. ‘내일 미용실에 가야하는데.’ 이 말은 이미 의무처럼 옹알거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나 말의 유효기간이 짧은가. 자신에게 걸었던 최면은 얼마나 나약한가.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금방 그 의미를 잃어버리니 말이다. 허나 나는 기다린다. 어찌되었든 기다린다. 어제 새로 산 옷을 적시고 싶지 않아서라도 기다린다. 저번 달에 아르바이트해서 겨우 장만한 옷이기 때문에 물이 닿아서는 안 된다. 드라이를 해야만 하는 고급스러운 옷이란 말이다. 게다가 얇은 손목에 착 휘감기는 시계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방수도 안 되는 시계이기 때문에 보나마나 고장 날 것이었다. 참자,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그 말, 나는 한 번도 동의 안 한 적이 없었다.
이십분 정도 지났다. 사람들로 터질 것만 같았던 카페는 홀쭉해졌다. 대신 우산을 들고 오는 사람들과 자동차들로 거리가 붐볐다. ‘마른하늘에 웬 비가 이렇게 쏟아지냐.’, ‘어이가 없더라. 겨우 다 도착해서 가려고 하니까 바로 비가 내리잖아.’, ‘그러게 여름에는 꼭 우산 챙기랬잖아.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른다구.’, ‘햐, 참 억수같이 퍼붓는다.’, ‘소나기인 줄 알고 기다렸는데 그치질 않아서 연락했어. 바빴을 텐데 미안해.’ 등등. 사람들의 입술은 안도감으로 정신없이 움직여댔다. 비를 피한 사람들의 여유와 조금 빨랐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배부른 감정 따위가 몸짓에서 그대로 배어 나왔다. 한편으론 참 부러웠다. 나도 빨리 이 곳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핸드폰은 바로 그저께 분실했고 공중전화기도 먹통이니 별 수 있겠는가. 이 잔인한 비가 그치기를 빌 수밖에.
휘잉, 휘이잉.
바람이 비를 쓸고 공중전화 박스를 갈겼다. 찰싹 찰싹, 후두둑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아득하게 내 귀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날아갈까 조마조마했던 그 소리가 이제는 아늑한 잠의 소리로 바뀌어 버렸다. 졸렸다. 어차피 오래 내릴 것 같으니까 자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에 빠져 들어가는 순간, 내 손등을 무언가가 간질간질 간질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긁는데 무언가가 만져졌다. 순간 정신이 퍼뜩 들고, 거미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비명까지 내질렀다. 끔찍했다. 거미에게 독이 있던가? 그렇다면 놀라게 하면 안 되는 건가? 독침을 쏘던가? 아니면 물던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고작 1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거미인데도 나는 죽을 것 같이 호들갑을 떨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거미도 긴장한 듯이 손등에 가만히 붙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이면 그대로 독침을 쏘아버릴 것 같아서였다. 나는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제정신인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울음을 터뜨려 버렸을 것이다. 정말 무서웠다. 귀신이 나타난대도 이렇게 무섭고 끔찍할 수가 있을까. 적어도 귀신은 손등에서 알짱대진 않을 게 아닌가.
땀을 한 바가지 흘렸을 것만 같은 시간, 그 짧은 시간, 그러나 내게는 턱없이 길었던 그 시간이 흐른 후, 거미는 조금씩 징그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 손등에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로 사뿐사뿐 움직이는 거미의 다리는, 그 느릿느릿한 걸음은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느낌 하나 없이 여유로운 그 형체, 그것에 나는 구역질 치미는 징그러움을 느꼈다. 거미가 어눌하게 투명한 실을, 아니 거미줄을 풀면서 손톱 끝에서 미끄럼틀 타고 내려가듯이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나는 까무러치듯이 박차 일어섰다. 문을 확 재껴버리고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또 용기가 없어져 버렸다. 바람은 더욱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고, 빗발은 더 굵어졌으며 힘찼다. 우박이 내리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내 머리 위에 쏟아지면서 아찔함이 밀려 들어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멍청하게 움직이는 거미를 피해 한 쪽에 서 있을 뿐이었다. 저렇게 사람들은 떠들어대면서 각기 돌아가는데. 나는 무기력한 인간이다. 누군가를 부를 수 있는 힘도, 불러낼 수 있는 힘도,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릴 힘도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고, 설령 안다 하더라도 지나칠 뿐이었다. 재수가 없는 건지, 원래 그래야 하는 건지 몰라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이 주변을 지나가지 않았다. 카페는 사람이 바글바글했었고, 차들은 저렇게 줄지어 서 있는데. 내 눈에는 우산들로 거리가 가득 메워지고 있는데! 왜 그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한 사람 깊게 사귀는 데에만 신경을 써서 잔가지를 치지 않은 게 문제를 일으켰을까. 누구처럼 무조건 다리 벌리고 이사람 저사람 푼수처럼 사겨야만 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다. 설령 이 근처를 지나간다 해도 나를 인지시킬 수 있는 확률은 미미하다. 챙길 사람 찾는데 급급하지, 고작 공중전화박스를 주의 깊게 쳐다볼 여유가 없을 것이다.
유연하게 긴 다리를 옮기며 벽을 타는 거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 녀석이 두려움을 알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 같은 데에서 감정이 있다고 하고, 전문가들도 그렇다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없을 수도 있다. 아마 이 거미에게는 본능만이 있을 것이다. 생리적인 것만 표현할 수 있는 본능. 태어났으므로 사는 것이다. 살아야하므로 자신의 생리적 욕구에 충실한 것이다. 이것이 거미의 존재 이유다. 그저 온 세계에 있는 몇 조억의 거미들―그저 그럴 것이라는 예상뿐, 확신은 못하겠지만. 여기저기 숨어서 사는 거미들만 끔찍하도록 많지 않겠는가.―중 하나, 이 거미는 그저 이 표현에 소속될 뿐이다.
비는 계속 내리치는데 바깥세상은 한산하다. 굉장히 홀쭉하다. 사람들도 없고, 그저 그 자리를 비와 바람이 채울 뿐이었다. 스산한 거리, 아무도 없는 늦은 오후의 거리. 어느 소설에서였던가, 얼핏 읽은 것 같기도, 들은 것 같기도 한 이 표현이 참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늦은 오후라고 하기에는 햇살이 맑다는 것, 인정한다. 허나 느낌이 그렇다. 내 마음이, 저 거리가 그렇다. 내 눈에 비쳐지는 거리는 쓸쓸했다. 내 마음도 공허했다. 텅 빈 것 같았다. 일제히 휘몰아쳤던 모든 감정의 파도가 잠잠해진 후에 드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내 앞에 있는 저 바다가 너무 막막해 주저앉아버리고 싶다, 이런 기분. 아, 저 파도가 잠잠해졌으면 좋겠다, 고 했었는데, 이제는 저 파도가 일어났을 때가 더 행복했었구나, 하는 후회. 인간의 가슴에는 청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엄마의 말을 지독히도 안 들었다가 나중에는 괜한 후회로 죄를 짓는 청개구리. 항상 모든 일을 반대로 생각하고, 반대로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결국에는 고통스러워하고 잘못된 방향에 무릎 꿇어버리는, 내 이름을 가진 청개구리 한 마리가 지금도 울어댄다. 내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면 기분 따라, 아주 허무하게 죽어버렸을 것 같은 우울함. 스펀지처럼 우울, 허무, 슬픔, 좌절, 무기력함을 흡수해 녹녹해진 나는 벽에 기대 스르르 주저앉았다. 거리는 여전히 바람과 비에 젖어 쓸쓸해하고 있었다.
공허한 눈빛으로 거미를 따라 눈알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주위가 고요해졌다. 공중전화박스를 신나게 때렸던 비도, 온 세계를 날려버릴 듯 불어댔던 바람도 고즈넉함에 묻혀버린 듯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순간 두려움이 확 나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혹시 공중전화박스가 통째로 날아가 버려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죽어버린 것일까. 심리적 압박감과 답답함에 못 이겨 요절해 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이 곳은 어디인가. 잠겼던 눈이 번쩍 떠지면서, 나는 마치 공포 영화의 여주인공인양 무섭게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아, 비가 그쳤구나!
카페에 시선이 닿자, 나는 드디어 비가 그쳤다는 것은 깨달았다. 언제 퍼부었냐는 듯이 환하게 개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슨 전쟁이라도 치루고 난 기분이었다. 내 속에 있는 그 무엇,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것들과의 동침.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 동침했었다. 분명히.
문을 열었다. 바깥이라고 봤던 그 곳을 이제 직접 밟아 본다. 비에 눅눅히 젖어든 아스팔트가 나에게 길을 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불어오는 상쾌함의 향기. 우중충하게 내려앉았던 내 마음 속의 나를 일으켜 세우려는 듯 시원한 공기가 깊게, 깊게 내 속으로 들어온다.
비는 그쳤다. 그리고 나는 다른 공중전화박스를 찾았다. 친구 녀석에게 꼭 전화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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