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락하고 있다
- 작성일 2005-06-08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387
벌써 몇 십분 째 나는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결국 추상적으로 엄청나게 높다, 라는 수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불가한 위치의 어떤 지점에서 추락하고 있다. 아니, 계속 추락하는 중이다. 모르겠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잠이 든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이지경인 것이다. 혹시나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볼따구니를 비롯한 몸 곳곳을 꼬집어보았으나 아프기만 했다. 결국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 젠장. 결국 난 의문의 추락사라는 지구 역사에 길이길이 빛날 미스터리의 한 사건을 통하여 거듭날 것이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명예로운 죽음 아니겠는가.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죽음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미 '생'이라는 것엔 모래알만큼의, 아니 티끌만큼의 미련도 없다. 언젠간 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그 어마어마한 위치에너지 덕택에 난 장렬히도 한 줌 재가 되겠지. 어차피 인간이 죽으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좀 억울할 것 같다. 죽음을 의식하는 동시에 육체가 완전 소멸해 버릴 테니깐. 대신 엄청난 깊이의 땅이 파이긴 하겠다. 우주에서 떠돌던 자그마한 혜성이 지구에 떨어졌을 때처럼 그런 식으로. 그거 참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군.
하지만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추락엔 그보다 먼저 아사하지 않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이 든다. 어제 저녁 먹은 밥을 제하면 지금까지 한 방울의 물조차 먹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든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생전 겪어 보지 못했던 추락에의 공포는 공복감을 곱절로 만들어 날 욕구불만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준다. 죽으면서까지 욕구 불만에 시달려야만 하는 이 불쌍한 인생이여.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간을 재어보진 못했지만 떨어지고 1시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스카이다이빙을 레저로 즐기는 다이버들은 보통 몇 미터 높이의 상공에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낙하하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1시간 동안 낙하하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세기에 남을만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게다가 믿기 힘들 정도의 반응속도로 내 몸은 벌써 낙하라는 행위에 익숙해져 버렸다. 어떤 환경적 변화에도 민감하고 신속하며 적절하게 대응하는 내 몸뚱아리에 감사하며…… 우선 눈 좀 붙여야겠다. 1시간 동안 떨어져본 사람만이 날 이해할 수 있겠지만, 무지하게 피곤하다.
파바밧.
짜릿한 스파크에 눈이 떠졌다. 얼마나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래쪽엔 드디어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잠시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아, 이제야 죽는구나.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이미 죽는 것은 기정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즉각 완전 소멸이 두려운 나는 저 아래 바닥 중앙에 존재하는, 구멍이 뻥 뚫린 곳으로 떨어지기 위해 몸부림을, 발버둥을 쳤다. 계속 낙하하여 미미한 시간이나마 생존을 보존하려는 내 생존욕구는 처절했다. 바닥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구멍은 점차 크게 보였고, 그와 동시에 내 단잠을 깨웠던 스파크는 점차 빨라지고 강렬해졌다.
끄아악.
견디기 힘든 고통이 엄습해왔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아마 일제시대 받았던 전기고문도 덜하면 덜했지 이것보다 더하진 않을 것이다, 라는 유치찬란한 생각을 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간다. 감내하기 힘든 고통에 의해 생각은 또 박쥐처럼 바뀌었다. 차라리 바닥에 부딪혀 죽는 게 낫겠다. 결국 구멍 바깥쪽으로 떨어지기 위해 다시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어느덧 내 몸은 축구 전용경기장만한 크기의 뻥 뚫린 구멍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의식의 끝을 붙잡고 가까스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멍속의 벽엔 엄청난 굵기의 쇠파이프가 나선형으로 말려 있었다. 전기 에너지였던 게로군. 엄청난 세기와 양의 스파크는 이제 너무나도 빨라져 온몸에 빛이 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보였다. '드래곤볼' 이라는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인 손오공이 초사이어인으로 파워업 한 듯 환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의식은 점차 몽롱해져갔다. 나는 모든 정신력을 총동원해 마지막 남아있는 힘을 끌어 모아 자세를 잡고, 손오공이 그랬던 것처럼 벽을 향해 에네르기파를 날리는 포즈를 취해보았다.
그리고는,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처음 잠에서 깼던 것처럼 허허한 공간속에서 추락 중이었다. 입고 있었던 옷들과 머리카락은 다 타버렸다. 웃긴 말 같겠지만, 진짜 죽을 뻔 했다, 라는 생각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죽는 건 사실이지만 기왕이면 잠자면서 곱게 죽고 싶다, 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그리고 문득 무척이나 뜨겁다는 게 느껴졌다. 온몸의 감각세포가 다 사라져 버린 것 마냥 몸이 뜨거운지 공기가 뜨거운지를 판별해 내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엄청난 양의 열에너지가 느껴졌다.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열기는 점점 치솟았다. 마치 우주에서 자가 발전력을 잃어버린 비행체가 어쩔 수 없는 힘 앞에 무릎 꿇고 태양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거 같았다.
몸의 일부가 서서히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내겐 이미 타들어 가는걸 보고 놀랄 기력도, 고통을 감지할 만한 감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어쩌다 이런 기똥찰만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문득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레. 포. 트. 이제 와서야 수업시간에 내준 레포트를 쓰던 와중에 잠들었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도 공간에서의 3단계 에너지 변환에 대한 내용을 소설로 써보라는 것 이었을 테지. 죽기 직전에야 그런 사실을 기억하다니……. 하지만 그 소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까마득하다. 그래도 만약에 썼다면 이런 식으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벌써 몇 십분 째
……
나는 추락하고 있다.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