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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06-03-04
  • 조회수 456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대해서 어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야.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하는 때가 있어. 그것은 파스텔 톤으로 수수한 색으로 점철되어 있어. 감정은 누구보다도 기이하고 신비로워. 이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이었어. 지금 내 키는 크고 있고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누군가와 닮아가는 것 같아. 10센티 위의 공기는 그렇게 달콤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거든. 유통기한이 임박한 초콜렛처럼 쌉싸름한 맛. 그리고 다 이해하고 수긍해. 얼마나 아름다워. 비가 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적셔. 내가 사는 건물을 적시고 그 아래 조명등 하나 없는 길을 적시고 천장을 투과해 침대 밑 깊숙한 곳까지 적셔.

'손을 내밀어 봐. 창을 열고 손을 내밀어서 만져봐. 어떤 느낌일 것 같아. 어떤 기분일 것 같아?.'

                        
1
방에는 커다란 창이 있다. 미닫이 문인데 내 머리보다 팔 하나 더 뻗어야 할 만큼 큰 창이다. 그래서 방안에는 온통 빛 투성이다. 해는 창의 어디쯤 걸려 있고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고는 그 모습은 어김없이 언제나 각인된다. 해는 노랑색인 것 같기도 하고 붉은 색인 것 같기도 하지만 뭐라고 정확히 언급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고 그는 누구보다 독보적인 자태로 모든 것을 압도한다.
내 키는 작다. 168센티미터로 높은 책꽂이의 책을 고르기 위해서는 발 밑에 무엇인가를 두고 밟고 올라가야 한다. 망가진 전구를 갈대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자를 두고 올라간다. 상자는 연한 노랑 색으로 끝 부분이 닳아 있긴 하지만 딱딱한 재질로 성인 두 명이 올라가도 끄떡없이 튼튼하다.

초인종 소리.

큰 창으로 보이는 하늘이라는 게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비가 오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이든 상관없이 보이지 못했던 부분을 더 보여주는 것 같다.
맞은 편 건물에 방에는 어떤 사람이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는 종종 속옷차림으로 이곳 저곳을 왔다갔다하는데 그러니까 그 얼굴이라든지 목소리라든지 전혀 알 수는 없지만 우연히 그 모습이라도 마주치면 그는 천천히 손을 흔들거나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다. 아마도 그러지 않을 까. 그럴 떈 살짝 커튼을 치지만, 물론 그건 관음증이라든가 정신질환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보여서 쳐다보게 되는 것이니까. 하고 싶은 말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시 방으로 되돌아와서 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비가 온다. 손을 뻗는다. 비는 적시고 있다. 내 손을 적시고 내가 사는 건물의 머리를 적시고 바닥을 적시고 우산을 적시고 소리를 팽창시킨다.

초인종 소리.

'두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어. 하도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되더라. 살아 있는 거 보니까 마음이 놓이긴 한데 이유라도 물어보자. 왜 나오지 않아?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비가 오잖아. 나는 우산이 없어서 밖을 나갈 수가 없었어. 알지? 비가 오면 옷도 젖고 내 낡은 신발에는 물이 고일거야. 어디든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던 거지. 그래서 창을 보고 있었어. 지나가다 아는 사람을 보면 우산 좀 가져다 달라고 말하려고 했거든.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갈 수 있는 거지. 같이 우산을 쓰면 되니까.'

'우산이야 있지만 그래 너 주고가도 되지만 지금 나오라고는 하지 않을 게. 괜찮아 질 때 그 때나 나타나, 네가 쓴 우산은 그때 돌려줘. 나는 갈게. 근데 그거 아냐? 나는 그런 우산 없어도 하나도 두렵지 않아. 비를 맞는 것도 신발에 물이 들어오는 것도 신경쓰이지 않아. 다만 그런 상태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그칠까봐 겁나. 그런 식으로 주목받긴 싫거든. 내 얼굴을 내가 생각해도 우스울거야. 그럼 난 간다. 그런데 너 키가 좀 큰 것 같다. 내 고개가 다 아프다.'

'잠깐 기다려 내게 줄게 있어. 이건 내 성의니까 받아줘. 내 책. 너 줄게. '

'고마워 잘있어.'

'잘 가. 우산 잘 쓸게.'

그리고 비오는 소리만 들릴 때 우산이 별 쓸모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말이 맞았어. 오히려 우산이 없었으면 젖어 볼 수도 있는 건데 말야. 신발에 물이 들어가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내게는 그런 게 필요없어. 우산 다시 가져가.

2

처음에는 그러니까 3년 전이었어. 그는 나보다 20센티미터는 큰 키를 휘청이며 어슬렁대고 있었어. 그러니까 난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한 냉소적인 표정을 띄고 어딘가를 활보하고 있었다는 얘기야. 그것은 교정이 될 수도 있고 근처의 술집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관심이라는 게 없다는 것은 누가 누구를 보는 것 자체가 심드렁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만났어도 지나쳤다고 말할 수 밖에. 그에게도 어떤 문제가 있었겠지만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복잡하던 시기에 아무리 큰 키를 휘청이더라도 마찬가지로 관심이 없었어. 무엇이 그런 냉소적인 태도로 남게 했을 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썩은 이 때문인 것 같아. 아주 어릴 때 어금니가 썩은채 그때 가끔 통증을 유발시키고 있었거든. 내 신경을 건드리고 뿌리까지 썩어서 그 고통은 비로소 정점에 달하고 있었지. 발을 비비거나 그런 짓도 하지 않았을 까 싶어. 그리고 그는 어딘가로 사라졌고 나도 잠시 어딘가로 사라졌어. 거기가 어딘지 자세히 묘사해 줄 수는 있지만 얘기하고 싶지 않아 간과할거야. 그러다가 3년 후에 다시 만났는데 그는 여전히 휘청이고 있었고 난 이제 예전보다는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제서야 그 큰 키가 휘청이고 있다는 것과 내 키가 그보다 20센티나 작다는 것이 신경쓰이기 시작하더라고. 그는 담배를 피다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커다란 소리로 트름을 하고는 나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어. 그리고 잠시동안 교류하는 거야. 그 사이에 오고가는 많은 정보들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순간은 영원으로 지속되지. 그 뒤에는 언어가 등장할테지만 우린 아직 처음이라서 말을 아낄 필요가 있어.

'그러니까 위로가 필요해. 많이 좋아했지만 너는 그만두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었는데 배신했어. 아니, 배신이 아니고 내가 잘못한거야. 자기 혼자 생각하고 멋대로 상상하고 그래놓고, 그렇지만 난 배신당한 것 같아서 그래서 네 위로가 필요 해. 나를 위로해줘. 내가 얼마나 많이 좋아했는 지 알잖아. 네가 위로해줘야 해. 그래야지 안정될거야. 내가 널 위하는 만큼.'

그리고 우리는 하드를 사먹었어. 처음이라 말은 없고 공간만이 늘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지. 언어 없이도 충분히 좋은 그런 순간이 지속되고 있었지. 한 입 베어 물고 조심스레 말을 꺼네.

'맛있어요?'

'맛있어.'.

그리고 한 몇 분있다가 그는 뒤 돌아 가버려. 나는 앞으로 가고. 좋아. 그런 거 마음에 들어.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풀이 막 자라고 있는 때였거든. 나는 플라토닉한 느낌을 유지한 채. 앞 뒤로 팔을 흔들지 자 이제 그에 걸맞는 음향이 들려.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번쩍 거리는 불빛들과 소소한 바람이 불어. 기분 좋다. 기분이 좋아.
그 뒤로 우리는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지. 수업이 틀린대로 항상 가는 식당에 머물거나 책을 빌릴 때 운동을 할 때도 기묘하게 그 자리에서 만났어. 그리고는 별 얘기 없이 하드를 먹거나 캔음료를 뽑아마시거나 손을 흔들었지. 그럴 때의 표정은 어땠을 까. 아마 보지 못 할 정도로 나쁜 모습은 아니었을 거야. 그런데 말은 필요한 거잖아. 음료수나 하드는 한 두 번 정도면 다 먹어버리니까 말야. 무언가 얘기를 해야하는 데 어려워서. 못하겠더라고. 그러나 용기를 냈지.

'저녁은 먹었어요?
같이 먹어요.'

'먹었어.'

'그럼, 다음에 같이 먹어요.'

'그래.'

그리고 헤어졌지. 같이 먹어요를 바로 붙여 하는 게 아닌데 후회하긴 했지만 그런 말 실수 때문에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잘 된 일이야. 말 그대로 식사는 다음에 먹으면 되는 것이니까. 실은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어. 그 자판기에서 계속 음료수를 뽑아 마시고 있었거든. 자판기마다 음료수맛이 틀리더라고 그게 궁금한던 중이었어. 그래 기발한 생각이지. 게다가 우연히 그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여러모로 좋잖아. 난 등을 피고 어깨를 뒤로 젖히고 턱을 당긴채 교정을 내려가 멀리서 해는 빛을 다하고 조금씩 자신을 거둬들이고 있지. 아름답지 않아. 하루하루가.

3

밤중에 발톱을 깎고 있었을 때였어. 멋대로 자란 새끼 발톱이 그만 양쪽으로 갈라졌거든. 그렇게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걷는데 불편하더라고 그래서 깎아내고 있었지. 손톱을 깎을 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야. 그 친구의 머리는 아주커서 보기만해도 웃기거든. 게다가 말도 얼마나 웃기게 잘하는 데. 그런 친구가 일하더니 좀 달라졌어. 힘들다 힘들다 엄살만 떨더라고. 말로 표현한 이래.

'힘들다. 머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목도 뻐근해.
힘들어 죽겠다. 힘들어 미치겠다.'

웃기지. 앉아서 하는 일로 알고 있는데 말야. 그런 친구가 전화해서는 밥을 사준다는 거야. 돈을 받아서 쓸데가 없어서 내게 쓰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바쁘다고 했지. 그런건 뭔가 이상한 거 거든.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바뻐. 나는 신경쓸 게 많아서 식욕도 없고 다이어트 중이라서 물밖에는 안먹어. 물론 가끔 하드도 사먹고 토마토 쥬스도 마시지만 최소한의 에너지를 위해서 그런 거야. 이 머리로 치밀한 계산을 해서 행동에 옮기는 거지.'

'그러지 말고 나와. 고기 사줄게. 원하는 양만큼 다 먹여 줄 수 있어. 후에 토마토 쥬스를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지. 그러니까 역 앞으로 나와 기다릴테니까.'

'잠깐만.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약속하지마. 30분 뒤에 보자. 난 정말 많이 먹어. 배가 터질때까지 먹을 거야.'

길거리에 많은 음식적이 있었고 닭고기 전문점에 들어가서, 그 자리는 붉은 색 의자와 등이 인상적인 곳이었어. 둘이서 먹을 분량을 시키지. 그러더니 그는 우스운 말투와 표정을 지으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여자친구 사귀었어.'

그녀는 곧 왔고 나는 인사를 하고 보기좋게 미소를 짓고 시간을 보냈지.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나는 그 순간을 즐겨. 불쌍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연인이지만 시뻘건 얼굴한 친구는 하나도 불쌍하지 않아. 좀 더 괴롭히고 싶어지지. 그녀는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야구모자를 눈밑까지 눌러쓴 채로 친구의 손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고 있었어. 배도 부르고 이런 거 좋아하지 않은니까 은근 슬쩍 나가려고 하는데 더 붉은 얼굴로 변한 친구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거야. 그래서 조금 더 두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옷매를 가다듬고 말을 붙이기 시작하지.

'어디서 만났어요?'

참 귀여운 인상이네요. 친구와 잘 어울려요. 라든지 지금 뭐하세요. 라던지 할 수 있는 말을 다 물어보고 나자. 지겨워졌어. 좋은 인상으로 보일 필요조차 없는데 너무 과장되게 행동한 게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일어났어.

'재밌게 즐겨요. 저는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볼 게요. 식사 잘했어. 나 간다.'

'가려고. 같이 나가자. 우리도 갈거야. 가는 방향이니까. 같이 가자.'

'아니야. 아직 초저녁이다. 잘 놀아. 나 간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남은 발톱을 모두 깎고 손톱은 깎지 않기로 마음먹고 샤워를 하고 오래된 흑백 영화를 보다가 은근히 성질이 났어. 그녀가 눈 밑까지 눌러 쓴 모자를 들어올리고 내게 말 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그 눈빛이 어느덧 잠이 든 내 머리 속 어딘가에 영상이 되어 나타났으니까. 찬물을 마시고 이상한 음을 반복하는 티비를 끄고 다시 잠을 청했어.

4

그는 높다란 건물 어느 위층에서 담배를 핀 채 어딘가를 보고 있었을 거야. 그건 사람 일 수도 있고 유난히 밝은 전등일 수도 있겠지만 그 대상에 내가 포함 되지 않으리라는 것 쯤은 짐작할 수 있었어. 그렇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불켜진 높다란 건물 어딘가이지. 그 담배연기도 안개처럼 자욱한 휴게실 근처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아니야. 잘 못된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라 어딘가 왜곡되고 굴절되어 버린 내 사고이지.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어. 그렇게 내 행동에 불만스런 사고를 하고 있을 때. 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친거야. 충분히 먼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마치 그 곳에서는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서로의 눈이, 그래 그건 눈이 었어. 바라보고 잠시동안 시선이 머물다. 안경 알이 빠지는 낡은 썬글라스처럼 사라져버렸어. 난 거미줄에 묶여 있는 것처럼 꼼짝 할 수 없었고 잠시 뒤에서야 비로소 그 끈적끈적한 함정을 벗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지.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는데 옮기는 방향마다 그가 서 있었어. 커다란 키에 담배를 물고 연기는 머리 어딘가에 사방으로 흩어지지. 난 한 번 보고는 머리를 조금 숙이고 인사를 하고 퇴장하는 거야. 그리고 조용하고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와. 너무 피곤해서 잠이 안온다는 표정으로 말을 건네지.

'하드 먹으러 왔어?'

그때 익숙한 바람이 부는 거야. 어떤 느낌의 바람이냐면 굉장히 무더운 한 낮에 마당에서 벌거벗고 있는 애들이 놀다가 더워서 나무 그늘에서 쉴 때 부는 그런 바람이었어.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사소한 일상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오랜만에 그 평안함을 느꼈던 거야. 하드를 입에 물고 한참을 빨아대고 깨물어대다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

'그러니까 전 하드가 먹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에요. 물론 단 것도 좋아해요.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커다란 얼음과자를 물고 있는 것도 좋아하고 무엇을 마시는 것도 즐겨해요.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무슨 말인가하면요. 음, 그건 말이죠. 그건, 음, 그래요.. 우리 동물원에 가요..'

'동물원?'

'코끼리가 보고 싶어졌어요. 코끼리 덩치만한 분뇨도 보고 비스켓도 던져요.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

'다음에. 요즘에는 일이 많아'

'..그럼, 다음에 꼭 같이 가요. 코끼리 보러.'

'그래.'

코끼리같은 얘기는 하는 것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그런 순간에 코끼리가 생각났을 까.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데 말야. 세상에서 가장 한심스런 표정을 짓고 눈은 먼 곳을 보고 계속 생각할 필요가 있어. 곰곰이 따져봐야 해. 시간을 두고 한참을 먹다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어. 그는 높다란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돌아서서 천천히 걸어가. 하나, 둘, 셋, 그리곤 망설이지. 뒤 돌아보면.
높다란 건물, 휴게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창을 내다 보거나 자욱한 연기 어딘가에서 담배를 빨아대고 있지.

담배는 몸에 좋지 않잖아. 담배를 피는 사람이 정상적인 폐를 가지려면 20년이상 있어야 한다고. 그 유해한 연기와 자기위안 같은 것은 어느 정도 비겁한 일이야. 그런 두려움이나 긴장이나 초조함이 그런 것으로 치유되지 않잖아. 치유되지 않는 것을 하는 사람도 좋지 않아. 표정없이 생각없이 휘청대는 것도 나쁜거야. 머리가 텅 비어가지고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마음이 너무 피곤해서 짜증이 나. 화가나서 신경 쓰여. 담배를 피는 머리 나쁜 사람들 같은 거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거 몸에 나쁘잖아. 너무 많이 피면 안돼는 데. 20년이나 걸린다고 그런 나쁜 것이 모조리 빠져나가려면 오랜시간이 필요하다고. 두서없이 생각하고 걸어가고 있었어. 걸음은 더디고 밤은 깊어지고 한적하다. 그런 느낌이었어.

'잠깐만'

그리고는 해피앤딩이야. 그는 어느새 나타나 큰 키를 휘청대며 바지춤을 계속 올리고 있었어. 츄리닝이 너무 커서 자꾸 내려가니까 그것을 올리고 있었어. 끈을 묶을 틈도 없이 땀을 흘리면서 말야.

'지금 가자. 코끼리 보러 가자'

내가 말하지 않았나. 코끼리 분뇨를 그렇게 쉽게 볼 순 없는 거라고.

'좋아요'

5

'내 여자친구는 어때?'

'괜찮아. 귀엽고 손이 작고 아름다워'

'손이 정말 이뻐. 손톱이 반짝거리고 따뜻하고 난 진짜 좋아. 놓고 싶지 않다니까. 게다가 목소리는 얼마나 청아한 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

'잘됐네.'

'그렇지. 아 정말 좋다. 근데 너는 왜 그러냐. 주변에 남자도 없어? 물론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란 게 너무 잘나도 문제야. 실제는 그렇지 않은 데 다른 사람에게 그 모습이 아니라고 강요받게 되잖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해가 안돼.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애인도 있어.'

'애인?'

'남자친구를 사귀었어. 어제 밤에 같이 코끼리를 보러 갔어.'

'코끼리?'

'응, 코끼리. 밤중에 여는 동물원 같은 것은 없었어. 하지만 우리는 동물원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들었지. 그것이 코끼리의 울음 소리였는 지는 모르겠어. 사자의 울음 소리는 분명이 아니고 원숭이에 끽끽 대는 소리도 아니었어. 어쩌면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는 지도 몰라. 근데 나는 분명히 들은 것 같아. 그 마음 속에는 일정한 운율과 박자로. 규칙적인 코끼리의 울음소리에 몇 번이나 긴장 했는 지. 그렇게 그 주변을 거닐다 되돌아 왔어.'

'좋았어?'

'좋았어. 나는 너무 좋았어. 너무 좋아서 그대로 멈췄으면 했어. 모든 것이 지나치지 않게 더디게 더디게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 그 사람은 내 마음에 안들어.'

'할 수 없지. 다 좋을 순 없는 거야. 그런 얘기는 혼자서 해.'

'그는 잘생겼지만 그게 그 사람의 문제야. 남의 눈을 의식하게 될 걸. 그는 전혀 행복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알 수 있어. 그는 커다란 키에 항상 아래로 사람을 보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니고 있을 거야.'

'그만 하자. 피곤하다.'

친구는 큰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이전과 같은 우스운 표정을 짓고 손가락에 낀 반지를 왼쪽으로 돌리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리더니 이내 조용해졌어. 그는 크게 하품을 하더니 들어누워서는 발가락을 까딱 까딱 하다가 다시 일어서더니 급박하게 물어보는 거야.

'무슨 얘기했어?'

'내가 쓰는 글에 대한 애기를 했어. 우린 그 동안 아무런 대화가 없었거든. 근데 막상 같이 있고 나니까 할 말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어떤 건데.'

'반편이라고 고아원에서 지내는 이상한 성격의 어린아이에 대한 이야기야. 이름이 반편인데 사람들은 그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하지. 반편이는 나와 대화 해. 그러니까 나는 고아원의 운영자이기도 하고 그것을 읽는 독자이기도 하지. 또 그것을 쓴 작가이기도 하고. 반편이는 집을 나오고 싶어 해.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반대하지. 그것은 자신을 버린 어머니부터 정당화하는 것으로 시작돼.'

어머니부터 정당화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돼요. 어머니와 자신은 우주에서 왔는데 사람들과 너무 다른 나머지 자신을 숨길 필요가 있는 거죠.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버리고 그래요. 그 뛰어난 능력을 감추기 위해 땅에 내던진 거죠.

우주인?

그래요 별에서 온 거에요. 별은 멀고 멀리 있고 반편이는 와해된 별을 떠나 지구로 온거죠. 그리고 그 두려움과 낯섬에 대해서 견디지 못하고 지구인처럼 살아왔다고 공공연히 얘기하고 다니죠.
그는 아주 머리가 나빠요. 거짓말도 좀처럼 그럴싸하게 하지 못하죠. 그러니까 반편이죠.. 반편이는 모자란 사람을 일컫는 말이에요.

그래.

재밌죠. 다 쓰면 꼭 보여줄게요. 그건 말이죠. 이해 못해도 상관없어요. 어떤 글을 읽고 그 글이 이해가지 않았다고 해도 전혀 문제 없어요. 단지 그것을 읽으면서 어떤 상상이 가능했으면 좋겠어요. 붉은 색 천이 인상된다던지 한없이 푸른 바다가 연상된다든지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리고 거기에는 조금씩 제가 담겨있어요. 그렇잖아요. 모두가 멋지고 현명할 순 없는 거잖아요. 뭔가를 깜빡 잊을 수도 있고 뭔가를 잃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아름다운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해서 썼어요.

다 쓰면 한 번 보여줘.

나중에 다 되면 보여줄게요.

웃었고 그 웃음은 오랜 시간 각인되고 포장되어서 언저리 기억 어딘가 숨어, 난 가끔 끄집어내서 엉망이된 형상을 추스르고 새롭게 수정하고 다시 저장하지. 그건 비겁한게 아니야. 그런 것 조차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어. 나쁜 것을 걸러내지 않으면 너무 많은 생각 때문에 숨이 막힐거야. 그런식으로 살 순 없잖아. 아 눈이 부셔. 너무 눈이 부셔서 감고 한동안 있었지.
그는 붉고 큰 얼굴이 되어서 고개를 떨구다가는 조심스레 눈을 마주치고 내게 그래.

'잘됐다.'

잘됐다고 말했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 날 친구는 깊은 잠을 자지 못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무슨 꿈을 꾸지 않았을 까. 담배를 피고 있진 않을 까. 폐 깊숙이 어딘가에 연기를 담아내고 있진 않을 까. 그러면 몸에 좋지 않아. 정상인의 폐가 되려면 20년이나 걸린다고 20년이나.

6
그는 말없이 창을 두드리고 창살을 사이에 두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나는 문을 열어주고 그는 들어와 티비를 켜거나 배가 고프다고 말하고. 나는 혼자서 쉴 새 없이 얘기를 끄집어내고 그런 식의 시간들이 계속 됐어. 그러다 말이 떨어지면 음악을 틀었고 무언가를 마시거나 뭔가를 먹거나 그랬어.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감정을 얘기하고 귀를 즐겁게하고 쳐다보고. 우린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어. 거리를 걷거나 카폐에 가거나 서점에 가거나 모두 괜찮았어. 소소한 미풍이 불면 해는 져서 빛을 가리고 우리는 비로소 집 밖을 나서지. 나는 손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고 그는 가만히 있고 거리에는 차도 하나 없어.

'그러니까 나는 선배 손이 좋아요. 선배 손은 따뜻해요. 아주 더운 여름이라도 땀에 젖어 끈적거려도 나는 그게 좋아요. 그런 속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상처도 굳은 살도 새끼 손가락이 어느정도 휘었어도 그래도 좋아요. 그러니까 어디가지 말아요. 그저 그 상태로 내 손을 잡아줘요.
...
모르겠어요. 불안해서 그래요. 결국 녹아버릴 눈사람처럼 위태위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렸을 때 외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어요. 집이 어려워서 그 곳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방에는 낡은 벽지와 전등이 하나 메달려 있었어요. 전등은 굵은 철사줄 하나에 메달려 있었는데 그게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거예요. 옆에서 자고 있는 외할머니 머리 꼭대기에서 위태위태 흔들리는 거예요. 난 너무 무서웠지만 그 전등이 차라리 내게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유요. 그런 건 묻지 마요. 단지 내가 너무 싫었던 것 같아요. 전 키가 작거든요. 뭘 해도 맨 앞에서 할 수 밖에 없었어요. 학교를 다닐 때도 소풍을 갈 때도 맨 앞에서. 앞줄에서 걸었을 거예요. 내 앞에는 나이든 여자라든가 수염이 잔뜩 난 남자 선생님이라던가. 잠을 잘 수도 없었고요. 맞아요. 천장의 전등에 불이 나가도 손 쓸 방도가 없었어요. 아무도 없을 때 교실에 남아서 의자에 올라가 천장에 손을 뻗어봤어요. 하나로 안되면 하나를 더 얹어서 올라가고 그래도 안되면 하나를 더 얹어서 자그마치 20개는 올렸을 거예요. 나는 10센티도 안되는 키를 가지고 사람들의 구두에 밟힐까봐 조마조마하게 여기저기를 피해 살았어요. 그러니까 늙고 행복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외할머니에게 그 전등이 떨어지면 안되잖아요. 아직 아무것도 안했지만 앞으로도 좋지 않을 게 분명한 내가 맞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말이죠. 전등은 떨어지지 않았어요. 외할머니는 먼저 돌아가셨고요. 웃기죠.
그때부터 어떤 것도 올바르게 생각되어지질 않아요. 무엇을 해도 불안하고 나는 내가 지독히 못생겼다는 생각을 했죠.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반편이도 그렇게 등장했어요. 그는 어딘가에서 운동화를 얻게 되요. 누군가 신다가 버린 것을 주어온 거죠. 근데 신발은 아주 작았어요. 반편이의 발에는 맞지 않을 만큼 작은 어린아이의 신발이었죠. 그래도 반편이는 신발 둘레에 쳐져있는 금테가 너무나 마음이 들어서 뒤축을 구겨신은채, 발뒷꿈치가 벗겨져도 아랑곳않고 신고 다녔어요. 그리고는 자신의 발을 탓하죠. 발이 너무 크다고 욕하고 스스로 자해하는 거예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냐면요. 어차피 사람들은 많은 부분을 속이고 있거든요. 단지 그 신발이 작다라는 생각은 하지를 않아요. 아니면 신발이 너무 작다고 얘기해버리죠. 그러니까 반편이가 등장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는 머리는 아주 나쁘지만 모든 나쁜 일이 자신의 탓이라고 울먹이니까요. 그럴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혼자 있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때 오히려 천천히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어요. 자신의 삶을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너는 예뻐. 눈도 크고 키도 작지 않아.

알아요. 근데 그런 게 내 전부는 아니에요. 그 외모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오해를 한단 말이에요. 부담을 느끼고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사고 한단 말이에요. 나는 그런 게 싫어요. 그리고 키가 다 자란 지금에도 전등하나 갈 수가 없어요. 의자를 밟고 올라가거나 그런 것은 싫어요. 손을 머리 위로 뻗어서 전등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보기좋게 교체하고 싶어요.

옷이 말려올려가 배꼽이 보일텐데.

배꼼 쯤 보여도 상관없어요. 바지가 흘러내려가도 좋아요. 단지 키가 좀 더 컸으면 해요.
저기 저 누런 상자도 낡고 낡아서 곧 주저앉을 거예요. 그러면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져요. 다시
10센티미터 크기로 작아져서 방 어느 작은 구멍에 숨어 있을 거예요.

바퀴벌레 구멍에.

바퀴벌레는 싫어하지만 그 구멍 밖에 없다면 바퀴벌레 구멍에도.

그는 보기 드문 얼굴로 보일 듯 말듯한 웃음 짓더니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얘기 해.

괜찮아. 저 상자가 망가져도 내가 있잖아.
내가 대신 전구를 갈아줄게.

나는 배꼽을 들어내고 큰 소리로 웃었어.

7

친구는 모자를 쓴 연인과 헤어진 뒤 침울해하고 있었어. 그는 술을 사들고 집에 와서는 혼자서 마셔대고 있었지. 난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왠지 그 머리가 너무 커보여서 모자를 씌워주고 싶었어. 머리에는 너무 많은 젤이 발라져있었고 그의 청바지에는 뭔가가 묻어서 검어졌어. 껌이 아닐 까 싶었지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중요한 건 그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다는 거지. 그는 거의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싶히 했는데 나는 그 주변을 거닐다 그 모양을 입체적으로 기억하려고 애써.

'우리는 연인 같은 거 아니야. 그저 마음에 맞는 선배일 뿐이야. 나는 그냥 그 손이 좋았어. 휘청이는 키도 좋고 그래서 같이 다니는 친구가 된 거지. 그 이상은 아니야. 왜 그런 말 하냐면 우리도 친구잖아. 얘기를 해야 알지. 우린 상황이 다르지 않은 처지고 나는 그 얘기가 듣고 싶어.'

그는 꾸벅 꾸벅 조는 것처럼 고개를 계속 숙이더니 흐느끼는 거야. 끊어지듯 토해내듯 거친 숨소리와 어깨가 들썩이고는 술잔보다 더 낮은 곳에서 흔들리는 거야. 붉은 피부와 토막난 소리와 전등. 전등이 오래되어서 깜빡이는 것 같아. 선배가 올 시간이 되었는데 창살에 얼굴을 내밀까 문을 두들길까.

'그러지마. 그런 거 안 좋아. 그건 담배보다 더 안좋아. 자신을 그런 식으로 가해하지마. 그녀의 모자는 바람에 날려가고 있었고. 그걸 그녀는 줏으러 간 것 뿐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모자만이 그녀가 염원하던 거야. 그런 친구는 어서 잊어야 해.'

그는 천천히 고개를 약간 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듯 퉁퉁거리지.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왜 안돼는 거냐. 말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어. 목구멍까지 언어가 걸려있어서 토해내듯 하면 할 것 같은데 되질 않아. 억울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어. 나는 손에 땀이 이렇게 흔건하게 젖은 채 이런 좁은 곳에서 술이나 쳐 마시고. 너는 그렇게 보기 좋은 눈으로 더 이뻐져만 가잖아. 근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차라리 산을 없애라면 없애겠지만 이런 건 도저히 할 수 없어. 내 이 큰 머리에 실날같은 뇌조차도 없는 것 같아서 자괴하고 싶어.'

'그러지마.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거야. 나쁜 감정도 정화되고 이것봐 달도 밝아. 좋은 일만 있을 거야. 염원하면 언젠가는 이뤄질테니까. 그런 걱정하지마.'

'좋겠다. 편한소리 할 수 있어서. 반만줘라. 네 감정 그 선배에게 반만 줘.'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바보야.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아. 그 선배 좋아하는 건 좋은데 온전하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나처럼 멍청하게 굴지말고 혹시 모르니까 반만줘. 그 마음 다 주지 말고.'

'그만 마셔라. 뭐라고 생각해도 좋지만 난 키가 작아서 그 선배 어깨에 고개를 기댈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현제는 없어. 그러니까. 네 걱정이나 해. 이게 무슨 모양이야. 보기 좋지 않아. 않좋다고.'

'...나 간다.'

그는 비틀대고는 가로질러 마루바닥 장판을 걸어서는 미닫이창을 열고는 문 밖으로 사라져.

창은 왜 열었을 까 술병과 종이컵과 싸한 냄새. 안좋다. 않좋다고.

8

그 날은 학과 총회가 있는 날이었고 교정에서 마지막 술자리가 있었어. 달이 흐릿해서 옆에 사람이 누군지 조차 분간하기 쉽지 않았지만 모두들 어느 정도 취해서는 좋아하고 있었어. 우린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앉아 있었는데 선배는 내 맞은 편에 있었고 20명 남짓한 인원 앞에는 종이컵과 과자등 이 놓여 있었어. 우린 밤에만 만나는 사이라서 누구도 우리가 친구사이인지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지. 그리고는 여러 가지 얘기가 오고가고. 나는 반딧불이를 기억하고 있었어. 어두운 교정 풀밭에 반딧불이 있으면 어떨까하는 사고를 했지. 그 작은 벌레는 온 교정을 천천히 돌아다녀 내 옆 사람의 겨드랑이를 지나쳐 그 옆의 사람의 무릎 위를 스치고는 여기저기 빛을 흐트러트리지. 그리고 선배는 그것을 봐. 우리는 같은 시선으로 온통 초록색으로 점멸하는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어.

'멋지다.'

그렇죠. 멋져요. 이런 분위기 좋은 것 같아요. 마치 부유하는 부평초처럼 정체하지 못하고 비틀대는 거 마음에 들어요. 깜빡거리잖아요. 나는 더 또렷히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요. 그 눈과 귀 밑어딘가에 스치는 바람과 조용히 웅얼거리는 또 다른 벌레소리와 늘어진 그림자까지 쉬지 않고 기억해두고 있어요.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해요. 그건 일정한 크기로 조그맣고 두드러지게 귓 속을 울려요. 들을 수 있나요. 볼 수 있나요. 그럴 수 있나요.

그는 앉아도 높다란 어깨를 마주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채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어. 그 또는 그녀는 여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깎지를 끼고 무릎을 안고 모자를 눌러쓰고 있지. 눈은 한없이 깊고 이마는 모자에 가려 보이질 않아. 그 눈으로 그를 보고 여린 손가락을 뻗어 손짓하지. 다음에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 그녀는 그의 손을 만지작 만지작 하고 있었을 거야. 그녀는 서늘한 날에도 아랑곳않고 드러난 다리를 보기 좋게 들어올려서 일어서지. 그에게 손을 내밀고 서로 일어나서는 그의 어깨 높이에서 찰랑대는 머리를 뒤로 하고 어딘가로 퇴장 해.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웃고 떠들어대지.

박수소리.

그들은 정신없이 손뼉을 치고. 곧 모두 잊어버려. 그 둘은 그 날밤 어딘가로 사라졌어. 나는 그만 달을 보고는 일그러지고 선명하지 않은 밤을 탓하기 시작해. 그리고 풀에 가릴정도로 작아지기 시작하지. 결국 나는 모래알처럼 조그만 상태로 되어서는 웅얼거리는 거야. 작고 분명한소리로 웅얼대고 있지. 어딘선가 친구가 나타나서는 그 큰 머리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봐. 그리고 우스운 말투로 얘기하지.

'많이 먹었어.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어디선가 반딧불이가 날아와. 한 마리가 두 마리가 되고 세 마리가 네 마리가 되고 무수히 많은 반딧불이가 불을 밝히고 나는 공중에 떠서는 하늘 위로 날아가는 거야. 하늘 꼭대기 달에서 점처럼 작아지는 사람들과 어딘가로 사라진 그와 모자를 쓴 그녀와 이제는 작아보이는 친구의 머리를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돼.

'내가 그랬잖아. 그 신발을 신으면 1000미터 공중으로 공을 차올릴 수도 있고 우루로 나갈 수도 있어. 훌륭한 손톱도 그 상태로 내버려 둬도 되고. 집에 불같은 것은 지를 필요없어. 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씻기 싫어하는 강아지도 데려가기를 수 있을 텐데 말야. 우주인 된 것을 환영해.
너는 그 누군가를 바닥에 던져 놓고 떠나지 않아서 좋겠다. 아직은 별이 와해되지 않았으니까.'

'가자, 많이 마셨어. 집에 데려다 줄게.'

친구는 나를 침대에 눞히고 돌아가버리고 나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계속 토를 해내고는 찬물을 들이키고는 곰곰이 생각을 해. 오늘이 몇 일인가부터 선배가 누군가와 같이 있었는 지를 생각해보고 반딧불이를 기억해보고 반편이를 생각해. 그리고는 아침이 올 때까지 잠을 자는 거야. 눈을 뜨고 잠을 자려다가 모든  것이 껌껌해지면 비로소 하루가 바뀌는 때가 온 거지.
기계적으로 눈을 떴더니 미닫이 창은 열려있고 맞은 편 건물의 방에서는 얼굴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 지도 알 수 없는 남자가 속옷 차림으로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고 있어. 나는 천천히 커튼을 닫고 잠을 더 청했어.

9

얼마 뒤 선배는 방을 옮겨서 마침 비었던 내 옆집의 방으로 이사를 왔어. 그는 105호고 나는 104호야. 화장실 쪽 벽이 얇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크게 하면 서로 의사 소통이 가능했지. 그건 일종의 재미였어. 괜히 벽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벽에 귀를 갖다 대 보기도 했어. 그리고는 이내 불 쑥 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밀지.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한동안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다가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나는 그것을 잡고 한동안 그 눈을 쳐다보고 그래, 주변에는 어떤 소리도 묵음으로 처리돼. 폭죽이 터져도 수천층의 건물이 무너져도 끄떡없이 오직 우리 둘만 고립 돼. 그리고 여러 생각이 드는 거야. 그 손과 미묘하게 떨리는 속 눈꺼풀과 이상하게 자꾸만 보이는 그 모자 쓴 여자와 그리고 창살 사이로 완전하게 보이지 않는 그. 따뜻하고 이상하게 큰 손바닥에 슬그머니 손을 빼려고 마음 먹었어. 그는 스르르 빠져나가는 손가락 끝까지 잡아대고 거부할 수 없다는 듯이 곧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 곧 이어 화장실 벽에서 소리가 들리지.

'난 이런 벽에 가려져 있어도. 네가 무엇을 하는 지 알 수 있어. 벽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서 그 벽 뒤에 누가 어떤 모습으로 있는 지를 상상하는 그 표정을 알 수 있어. 곧이어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잠시 흐느끼다가 방 변두리의 낡고 누런 상자를 바라보겠지. 그리고 자신의 키가 얼마나 작은 지를 깨닫게 되는 거야. 고작 천장의 전등도 갈지 못해서 지독한 어둠 속,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만 빛을 발하지. 물론 어느 정도의 시간만 지나면 모두 점멸해 버려. 깜빡, 깜빡 천천히 진행되다가 점점 급박해지고 곧이어 더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어버릴 거야. 그제서야 침대 위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 지 알게 돼. 그 축축하고 습기가 가득 찬 몇 평 남짓한 방에서 초라하고 형편없는 모습으로 창을 바라보겠지. 그리고 오로지 희미한 달빛만이 방을 투영하고 그제서야 비로소 눈물로 지워진 화장을 한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지.'

나는 그것이 그 벽에서 새어나온 소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건 분명한 인상으로 깊이 새겨져서 어쩔 수 없이 104의 문을 열고 105호로 찾아가서 거세게 문을 두들겨.

'선배, 거기 있어요? 거기 있죠. 문 좀 열어봐요. 나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문이 열리고.

'너무 답답해서 답답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요. 내 방의 창살을 떼야 겠어요. 모조리 잘라내고 숨 좀 쉬고 살게요. 도와줘요. 나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서 밤늦게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연장, 그래 연장 빌려주세요. 아니. 선배의 손도 그 연장도 빌려주세요. 창살을 모조리 뜯고 우리 멕주나 한 잔 해요. 피로를 가실만큼 이가 시릴 만큼 찬 맥주를 우리 마셔요. 생각해보세요. 방안으로 들어오는 달빛 정도면 불 같은 것은 전혀 필요가 없을 거예요. 그런 밝은 곳을 선배도 염원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선배는 아니고 모자를 쓴 그녀가 눈 밑까지 창을 누른 채 웃는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얘기해.

'연장은 빌려줄 수 있지만 그이는 없네요.'

그리고는 큰 키를 휘청이며 어딘가로 사라져서는 이상하게 생긴 가슴크기만한 연장을 가지고 와서는 아무렇게나 주는 거야. 나는 그것을 받고 기괴한 소리를 내는 문이 닫힐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다가 뒤돌아서 집으로 돌아와.
문득 창살을 자르려고 하자. 달은 빛을 감추고 일식이 지속돼지. 빛도 없고 사물도 보이지 않는 몇 평 남짓한 방에서 메마르고 건조한 목소리만 울려펴졌어. 그건 누가 옆에서 위로한다고 해도 새어나올 법한 느리고 더딘 울음소리였는데 머리카락은 땀과 눈물로 볼이나 얼굴 어딘가에 붙어있을 테고 눈에는 그 빛이 없는 눈에는 낡고 오래된 상자만이 파스텔 톤으로 점철된 연한 노랑색으로 공중에 떠있어. 그리고 문득 내 키가 얼마나 작은 지에 대해 생각하게 돼지. 곧이어 10센티미터보다 작아져서는 구석에 떨어진 동전 위에 걸터앉아 무릎까지 오는 먼지덩어리에 대해 생각하게 될거야. 이렇게 살 순 없는 건데 그런 것 같은데.

그리곤 갑자기 들리는 노크소리.

'안에 있지, 잠깐 나와봐요.'

10

그녀는 커다란 눈에 속눈썹이 길고 피부가 희었어. 흰 피부는 투명해서 그 안의 핏줄이 모두 보일 것 만 같았어. 살이 오른 얼굴에는 붉게 홍조를 띄고 있었는데 뭔가에 흥분한 것만 같았어.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래, 그 큰 눈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했어. 눈을 계속 비벼서 문대져서 선명한 자국을 남긴 것 같았어. 그녀는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해.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전 당신과 같은 학과 선배에요. 물론 모를 수도 있어요. 그래 그런 거 상관 않해요. 내가 어떤 과인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 지 얼마나 현명한 지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단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어서 찾아온 거에요. 그것 뿐이에요. 잠깐만 시간을 내줘요. '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제 그가 왔다고 들었어요. 내 친군데 되게 우습게 생긴 친구 말이에요. 키는 한 175정도 되고 웃을 때 이가 다 들어나 보이는 친구요. 그 친구가 어제 여길 왔었다고요.'

'글쎄요.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그러니까 어제 저는 자고 있었거든요. 몸이 안좋아서 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 전날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거든요. 글을 쓸까 하다 그냥 책을 읽고 있었어요. 물론 글이라고 해봤자 책에다가 낚서하는 게 다에요. 전 뭔가를 쓰는데 글쎄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죠. 단어 하나 하나까지 고르고 또 고르고 해서 선택한 건데 말에요. 그래서 책에다 기재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책에 줄을 긋는다던가 중요한 부분을 약술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제는 깊게 잠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누가 업어가도 모를정도로 피곤했었거든요. 그래서 누가 왔는 지도 몰랐을 것 같아요. 정말 몰랐어요. 그런데 왜요. 저를 왜 찾아왔데요?'

'어제 그가 찾아왔어요. 여기를 요. 그가 찾아왔는데 옆 집에 살고 있는 그 선배가 지금은 자고 있으니까 나중에 찾아오라고 그랬는데, 아무튼 그래서 맞았데요. 그 선배에게, 그러니까 제 친구는 술에 취해 있었거든요. 술에 취해서 그래서 여기저기를 방황하다가 용기를 낸 거죠. 두려움이란 것은 술에 의해 어느 정도 격감되잖아요. 술이 그래서 비겁한 도구라고는 하지만 전 다르게 생각해요. 그런 수단이라도 동원해서라도 용기를 낼 수 있다면, 현실에 충실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기를 온 거예요. 옆집에 사는 선배에게 맞으면서도 당신을 보고 싶었던 거예요. 아주 시끄러웠을 텐데 전혀 몰랐나요?'

'글쎄요.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그래요. 어렴풋하게 뭔가 접시 같은 것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해요. 근데 그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음향은 아니었을 거예요. 동시에 수백개의 접시가 땅에 떨어져서 모조리 부서지는 그런 종류의 소리가 아니라 단지 접시가 땅에 떨어져 도르르 굴러가다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정도로, 그래요. 아주 소소한 소리 였어요. 위험이 없는.'

'그건 아니에요. 친구는 그래요.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많이 다친 것 같아요. 그렇게 접시가 굴러다니다 예쁘게 멈추는 그런 소소한 일은 아니에요. 걔는 제 친군데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맞을 정도로 못된 친구가 아니에요. 그는 한번도 누군가와 싸운 적이 없어요. 겉으로는 짖궂게 굴지만 그렇게 모질게 굴지도 못하는 유약한 친구에요. 그런데 당신은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는 것 같네요. 당신처럼 키도 크고 예쁘고 눈이 아름다운 사람은 그가 왜 찾아 왔는 지도 도무지 추측가지 않겠죠. 오로지 당신 자신만 관심이 있을 테니까요.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단지 자신만 생각할 테니까요.'

'아니에요. 멋대로 생각하지 마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그가 왜 찾아왔는 지 아세요?'

'글쎄요.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제가 자고 있는데 어제 그가 왔고 그 선배와 다투다가 상처가 난 거군요.'

'친구가 당신을 좋아한데요. 그래서 찾아왔는데 만나보지도 못하고 다투다가 상처가 남고 상흔만이 남은 거예요. 말이라도 건네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술을 먹고 취한 상태에서 용기를 낸 거에요. 그런데 당신은 볼 수가 없어요.. 그것은 술이 깬 다음에도 깊은 상흔을 남기게 될 거에요. 상처를 보고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자책하지 않을 까요. 그럴 것 같아요. 난 가장 친한 친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얘기해주려 온 거예요. 친구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는 지 그거 얘기해주려고요.'

'글쎄요. 전 몰랐어요. 왔는 지도 몰랐고. 절 좋아하는 지도 몰랐어요. 전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어요.'

'친구는 당신을 좋아해요.'

'글쎄요.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아요.'

'어떤 생각이요. 생각할 게 뭐가 있어요.'

'그 선배와 사귀고 있거든요.'

그녀는 더 눈이 깊어졌어. 그렇게 깊어지다가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될까봐 두려울 정도로 초점을 잃더니 이윽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뒤돌아서 나가더라.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났어. 그녀는 내 키가 크다고 얘기한 것 말야. 아주 작은 데 말야. 그러니까 전등도 갈 수 없고 위험한 놀이기구도 탈 수가 없어. 그 얘기를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함부로 얘기한 것은 그녀잖아. 멋대로 찾아와서 전혀 모르는 얘기나 하고 놀리고 그래도 되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뒤 따라 나가서 그녀를 불렀어. 그녀는 축쳐진 어깨를 하고 걸어가다가 깜짝 놀라 뒤돌아 보지.

'선배!'

'왜, 저는 아니에요. 그저 친구가 걱정되어서.'

'그거 말고요. 가끔 시간을 가지고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요. 어렵고 버거운 일일수록. 더 그런 시간이 필요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는 벌건 눈으로 웃지.

'고마워요.'

그녀는 돌아가서 어떤 행동을 했을 까. 좋아한다는 그 친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 까. 나는 그것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다가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커피잔에 커피를 붇고 기다리고 있었어. 그것은 옳지 않은 짓이었어. 눈 밑 근처 어딘가가 찢어져서 유리 접시처럼 굴러다니다 산산 조각나는 상상. 유약하고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 어떤 건지 생각조차 하기 싫어졌어. 그것은 잘못 된 거야. 그럴 순 없는 거지. 누군가를 해하는 것은 가장 못 된 짓이야. 나쁜 짓이야. 아무래도 안되겠어. 105호에 찾아가서 그녀와 선배와 싸움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어. 그런데.
방에는 커다란 돌이 들어와 있고 창의 유리는 산산 조각이 났어. 커다란 굉음과 함께 미닫이 창을 부수고 머리만한 돌이 집에 들어왔어. 유리 조각은 수없이 흩뿌려져 있고 나는 그 조각조각 난 부분에 어느 구석이라도 반영되고 있는 채 수십 수백 개의 형체로 되어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어. 그리고 투영되는 달빛은 현광등이 미치지 않는 베란다 어딘가에 서늘하게 걸쳐 있었지. 그래, 창살은 모두 제거 된거야. 가슴 크기만한 연장으로 무식하게 하나하나 도려낼 수고 없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거야. 나는 조심스레 발을 내딛으며 창 가까이에 다가가지. 손을 내밀어볼까. 밤은 오래되고 스산한 공기가 감도는 달빛에 손은 푸르게 어른 거리고 아른거리고.

11

그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베란다로 나가서는 담배를 피기 시작했어. 연기는 흩어지고. 창 끝 어딘가에 위태롭게 메달려 있는 유리 조각을 손으로 잡아서 뜯더니 등을 피고 트름을 하지.

'속이 안좋아. 밤에 음식을 먹지 말아야 겠다.'

'상관없어요. 다만 소화만 시키고 자면 돼요. 그냥 자지말고 소화를 시켜야 돼요.'

나는 방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줍고 비로 쓸고 걸레질을 하고 끓이다만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고 그에게 물어.

'그래도 다행이에요. 창살이 없으니까 참 좋죠. 밖에 달도 보이고 낮에는 해도 보일 게고 게다가 지나치는 사람도 확인 할 수 있고 때론 창을 열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아네요. 만일 선배가 저 기 길 아래 있으면 제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러면 선배는 모르는 척 걸어가요. 그리고는 그 상태로 걷다가 멈춰서는 거예요.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와서는 손을 내밀어요. 나는 그 손을 잡고 웃는 거죠. 재밌겠죠..'

'응 재밌어'

'그런데 다치진 않았어요. 손 좀 줘봐요. 이런 말 하면 기분 나뻐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해야 해요. 다치지 말아요. 누굴 때리지도 말고 맞지도 말아요. 그런 거 좋지 않잖아요. 흉이져서 원래 모습이 되지 않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지도 몰라요. 이를테면 회사를 입사했는데 상사라던가 아니면 거래하는 타회사의 임원이라던가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예측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다신 이런 짓 하지 말아요. 전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선배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 말아요. 다시는 네?'

'응.'

'괜찮은 것 같아요. 다행이다.'

그리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다가 앉아서 음악을 듣고 침대에 등을 기대고 선배는 무릎에 눕고.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꺼네.

'반편이의 끝부분이 생각이 잘 나질 않았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생각이 났어요. 반편이와 대화하는 고아원 운영자가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고아원을 철거하기로 결정해요. 반편이는 그런 경영자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래서 단식 투쟁을 하죠. 얼굴이 살이 쏙 빠질때까지 굶고 또 굶는 거예요. 그리곤 빛으로 사는 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요. 실제로는 배가 고프면서 하나도 배고프지 않다고 하는 것처럼 행세하죠. 웃기지 않아요. 그러면 투쟁이 소용없는 거잖아요. 굶으면서 원하는 바를 밝혀야 하는데 굶는 것 자체를 속이니 애초부터 결과가 나올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마 그건 경영자를 생각한 처사 일 거예요.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기엔 그들이 지금까지 너무나도 잘해 주었고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결국 반편이 혼자만 피해를 봐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말이죠. 그리고는 그가 갖고 있는 신발을 발이 작은 아이에게 주고 씻지 않는 강아지를 밤마다 외로워 우는 아이에게 주죠. 그리고는 하나 둘 정리하는 거에요.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지 알아요?'

'모르겠어. 도망치려는 것이 아닐까'

'반편이는 아주 어린데요.'

'모르겠어.'

'반편이는 건물에 불을 질러요. 일일이 아이들을 다 깨워서 아래로 대피시키고 불을 질러버려요. 건물안의 이불을 태우고 커튼을 태우고 벽지를 태우고 가구를 태우고 먹기 싫은 시금치를 불태워버리죠.'

'시금치?'

'네. 시금치요. 아이들은 그런 나물 싫어하잖아요. 아무튼. 그리고는 자취를 감춰버리죠. 그는 불에 타 죽었을 수도 있고 어딘가에 숨어 성장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 자신의 말 그대로 우주로 날아갔을 지도 모르죠. 자극적이죠.'

'응. 극단적이네.'

'그래도 확실한 건 없어요. 단지 금테가 둘러진 신발을 우는 아이에게 주면서 우주로 날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정도만이 명확한 거니까요.'

'좋게생각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바랄게 없죠.. 그가 어떤 생각에 불을 질렀는 지 알아요?'

'잘 모르겠어.'

'눈을 감아봐요. 그 뒤에 그 손을 들어서 내 얼굴을 만져보세요. 선배가 늘 보았던 얼굴과 손이 느끼는 감촉과 하나씩 하나씩 비교해 보세요. 거기는 눈이고요. 그 곳은 코고요. 입술이에요. 부드럽게 쓰다듬어 보세요. 어때요? 보여요?

'응 보여. 웃고 있어'

'네. 웃고 있어요.'

'코는 옅은 숨을 쉬고 있고.'

'네 조용히 쌔근 쌔근 숨쉬고 있어요.'

'그리고 눈은...'

'네. 맞아요. 다 맞아요.'

그 상태로 오랫동안 상대는 눈을 감고 나는 눈을 뜨고 상대를 보고 그의 손은 울고 그 손에 내 눈은 부어만 가고 있어. 붉게 번져서는 흐느끼고 있어.

12
친구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왼손으로는 귀근처 어딘가를 어루만지고 있었어. 그는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대꾸없이 그대로 듣더니 어떤 말을 해야할지 한참을 고르고 있었어. 교내의 나무는 어느덧 붉게 물들고 있었고 스산한 바람이 간간히 불어댔지만 해는 머리 꼭대기에서 그리자만 사라지게 했지 열은 가득이 품고 있었어. 나는 그를 보면서 이야기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반편이가 불을 지르는 결말 부분에 관해서 얘기를 했지. 그는 더 붉어진 얼굴을 하고 그 큰 머리를 갸우뚱거리면서 뭔가 해야 될 말해 대해 고민하고 있었지. 그는 결국 겸심했다는 듯이 평상시와 다르게 조용히 말을 꺼네. 그것은 어떤 익숙한 이미지를 품고 있었어. 그러니까 하룻밤 사이에 고통에의해 백발이 되었다던가 트럭에 깔린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어머니가 트럭을 번쩍 들었다던가 하는 기이한 일에 대한 신비로움을 품고 있었어. 단언컨대 그는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얘기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에 안에 뭔가가 사라졌다던가 변형되었다고 밖에 추측 할 수 없어. 그것은 나를 대하는 그 태도부터 나타났어. 사뭇 진지하게 말을 고르고 단어를 선택하고 하고 싶은 말은 가려가면서 상대를 배려 하기 시작했거든. 그건 겉으론 편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과 자신의 개성을 조금씩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라는 걸 간과한 행동이라고 생각해. 우리는 교내에서 잠시 머물다 학교 식당으로 내려가서 식사를 하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대리석으로 된 계단에 주저앉아 한동안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지.

'신기하다.'

'뭐가?'

'너 원래 토마토 쥬스만 마셨잖아. 요즘에는 항상 커피만 뽑아마시더라. 예전에는 카페인을 문제 삼던가. 잠을 쫓으려고 마시는 것은 단지 정신적 위안을 위한 것이라고 싫어했잖아. 어쩌다 먹게 되어도 다 마시지 않고 버리기 일 쑤 였는 데 말야. 지금은 몇 잔씩 그 자리에서 먹던가, 식사를 하고 난 뒤에도 항상 마시는 것 같아. 얼굴도 피곤해 보이고. 잠은 좀 자냐?'

'솔직히 잘 못 자고 있어.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서 잠을 못 자. 그런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야. 그게 커피 탓도 아니고 단지 커피가 좋아졌을 뿐이야. 그래서 많이 마시는 거고 생각이 많아져서 잠을 못자는 것 뿐이야.'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오늘은 가서 좀 푹 자야겠다.'

그는 잠시 나를 보다가 풀어진 운동화 끈을 리본으로 묶고 있었어. 그리고는 그 상태로 넌지시 말을 건네.

'시카고란 영화 봤어?'

'아니.'

'뮤지컬 영환데 거기서 여주인공의 남편으로 나오는 남자가 있어. 여주인공은 뮤지컬 스타가 되는 게 꿈인 평범한 주부인데 스타로 키워주겠다는 어떤 남자와 바람을 피다가 그만 사람을 죽여버려. 아무튼 그녀는 유능한 변호사를 만나 살인을 포장하고 위장해서 일명 감옥에서 록시허트로 유명해 지게 돼. 뮤지컬 스타로써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거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녀의 남편이 문제야. 그녀의 남편은 착하긴 한데 머리도 좋지 않고 얼굴로 그저 그렇고 많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남자지. 근데 자기 부인에겐 헌신적이야. 그 후 부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닫은 뒤 독백 형식으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거든. 광대의 복장을 하고 셀론판지 맨을 멋지게 불러제끼지.'

'셀로판지 맨'

'어, 그러니까 자신의 인생에 주체가 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노래야. 존재는 하는 데 보이지도 않고 멋들어지게 사물에 색을 입히지만 그 사물은 언제나 그 모습일 뿐 변하는 것은 없는 사람. 형하고 얘기를 해봤는데 그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그것 이었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지. 다른 노래도 좋은 것은 많았지만 현실하고 거리가 멀었거든. 생각해봐. 우리 삶에 셀로판지맨 같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지.'

'맞는 것 같아. 자신의 개성을 상실한.'

'개성을 상실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단지 그것을 사회가 요구하는 거지. 그렇게 부정하고 싶어.'

'근데 그 얘기를 왜 꺼내는 거야.'

'너와 같이 있으면 내가 셀로판지맨이 돼. 할 말도 잃고 본심을 속이니까.'

'본심이 뭐야.'

'그런 거 말 할 수 없어. 차라리 광대 복장을 하고 무대에서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을 택할거야. 어차피 영화내에서도 그 남편은 실제론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아. 상상 속에서 부르는 노래거든. 결국 자기 위안으로 끝나고 마는 현실적으론 불필요한 행위이지.'

'그래. 더는 물어보지 않을 게.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지 모르겠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도 선배와 있을 때. 장식인간이 되거든.'

'장식인간?'

'응, 그러니까 목에 걸면 이쁜 목걸이 인데 안 걸어도 상관은 없어. 하지만 남주기는 아까운 보석 같은 인간.'

'선배가 그래? 이 녀석을 당장.'

'아니야. 그 사람은 그런 적 없는데 내가 멋대로 그렇게 생각해. 결국 마지막으로 귀결되는 문제는 내 키가 아주 작다는 데 있어.'

'아니야. 네 키는 작지 않아.'

'작아. 그런 불완전한 요소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제대로 이것이 내것이라고 말 할 수 없어. 그러면에서 셀로판지맨과 같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키를 크게 하는 방법은 많아. 약을 먹어도 되고 운동을 하는 것도 괜찮아. 아직 모르니까 우유를 마시는 것도 좋고. 그래 수술을 하는 방법도 있어.'

'수술?'

'성장 호르몬이 더는 분배가 되지 않으면 인위적으로 늘리는 수 밖에 없잖아. 그게 수술이야. 다리를 절개해서 뼈를 절개하고 양쪽에 쇠를 박아서 조금 공간을 두고 뼈를 이어. 그러면 그 공간에 다리 뼈가 자라나고 그것이 매꿔지면 키가 크는 거지. 근데 그런 수술을 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거야. 생각해봐라. 생뼈를 잘라서 생살을 잘라서 몸에 쇠붙이를 박으면서까지 키가 크고 싶을 까 말야.'

'그건 너무 잔인한 얘기네. 나는 그렇게 까지 해서 키가 크고 싶진 않아. 더 큰 흠을 가지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잘못된다면 문제는 더 커질거야. 약을 한 번 먹어봐야 겠어. 그게 좋겠어.'

'그건 네 자유지만 너는 작지 않아. 아름다워. 그러니까. 너무 집착하지마. 누구도 너를 탓하지 않아. 그리고 장식인간. 그런 말은 골 빈 녀석에게나 해당하는 얘기라고.'

'하지만. 현재 내 처지가 그래.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해. 누가 뭐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내 생각까지 바꿀 생각은 말아. 셀로판지 맨이 그 삶이 안타깝긴 해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할 거야. 록시허트가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을 때 그 때라면 셀로판지 맨도 그냥 사람이 될 지 누가 알아. 그때는 인간이 되어서 같이 주체가 되고 싶어. 네가 어딘가로 삭제해버린 반편이도 어느 곳에 잘 적응하고 잘 살고 있다는 얘기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나는 진중한 모습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어.

'셀로판지 맨 주제에.'

'장식인간 주제에.'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 엉덩이를 털고 수업에 들어갔어. 해는 머리 뒤에 위치하고 그림자는 어딘가로 길게 늘어지지. 곧 해는 질거야.

13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빨래를 하고 빨래걸이에 걸고 방안 한구석에 건조한 공기를 무마시키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 두 번이 울리고 받으려고 하는데 끊어지고 다시 두 번이 울리고 받기전에 끊어지고를 두 차례 반복하더니 세 번째에는 계속 소리가 울려. 급박히 받았지.

'여보세요.'

'잘 지냈어요?'

누군지 기억이 잘안나지만 어딘가 들어 본듯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귀엽고 앙증맞았고 애교도 넘쳤으며 보이진 않지만 아주 매력적인 표정을 지닌 여자가 연상되는 종류의 그것이었어. 그리고 필연적으로 모자를 쓴 그녀가 생각이 났지. 손을 만지작 만지작 하는 그녀가 연상되었던 거야.

'잘 못 거신 것 같네요.'

'아니요. 끊지 마세요. 긴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당신에게 충고를 하고 싶어서 연락한 거에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무턱대고 충고를 하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기이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만 나 좋다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다만 저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해서 하는 바램에서 알려주려고 전화한 것 뿐이에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만 끊고 싶네요.'

'전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요.'

'무슨 말 하는 지 모르겠네요.'

'그는 가면을 쓰고 있어요. 어떤 것도 관심 없다는 듯이 행동하지만 사물을 보고 기억해두고 자신이 필요로하는 것을 취할 때 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목적주의자에요.'

'선배 얘기하는 건가요.'

'글쎄요.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 수는 없어요. 단지 당신은 어떤 종류에 불과해요. 필통 속의 필기구의 종류 중 하나라던가. 맛있는 먹거리 중 하나라던가. 일종의 장난감이죠. 그건 유통기한이 있는 거라고요. 그전까지는 상하지 않지만 유통기한이 임박하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죠. 갈아치울 필요가 있는 거라고요.'

'그런식으로 돌려말하지 말아요. 다 이해했어요. 선배와 어떤 식의 문제가 있었는 지는 모르겠는데요.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정도로 귀가 얇지 않아요. 게다가 만일 그러한 문제가 있었다해도 저와 선배는 어떤 관계도 아니에요. 단지 친구 정도에 불과해요.'

'그렇겠죠. 부정하고 싶겠지만 당신은 아주 작은 키를 갖고 있고 그는 20센티나 큰 키로 더 높은 공간에서 숨쉬면서 이리저리 휘청대고 있겠죠. 그것봐요. 어울리기나 하나요. 그저 놀이감일 뿐이에요. 어차피 사람 사는 게 어떤 놀이감을 찾아다니는 것이지만 동등한 입장에서 노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는 거죠. 안그래요.'

모자를 눈썹까지 눌러쓴 여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살아나 웃고 있어.

'그러니까. 모자를 못 벗는 거예요. 당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고 살아야만 하는 거예요. 당신의 모자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 까요. 그 정체를 왜 숨겨야만 할까요. 내 앞에서 손을 만지작 거리고 기묘한 웃음을 짓는 이유는 또 뭐구요. 그렇게 뭔가 삐뚫어져 있는 것은 무슨 이유때문일까요.
이봐요. 정신차려요. 할 말 있으면 찾아와서 얘기해요. 치사하게 벽에 붙어서 속삭이거나 전화같은 거 사용하지 말아요. 그런 모자 벗고 나와서 얘기해요. 네? 알겠어요?'

'...'

그러더니 성급해진 목소리로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얘기해.

'그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 말아. 알았어. 내 모자 신경 쓰지 말고 네 작은 키나 신경 써. 한가지만 얘기해 줄게. 지금 네가 갖고 있는 그 사람의 방키로 문열고 들어가서 침대 옆 있는 서랍장에 두 번째 서랍을 열어봐. 그 속옷 아래에 깊숙이 무엇이 있는 지 보고, 그 상황을 즐겨. 재밌을 거야. 바보야. 멍충아. 네가 그런 삶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니? 예쁜 얼굴에 날씬한 몸매에 쓰잘데기 없는 책만 읽으면 사람들이 너를 우대해 줄 거라고 사고했어? 어처구니가 없다. 차라리 나처럼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이 나아. 난 최소한 그깟 시선에 자유로우니까. 잘있어. 난쟁이야.'

'이봐요. 이봐요.'

전화가 끊어지고 신호음이 수차례 반복되었어. 살며시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을 열고 밤이 오고 있는 것을 바라봐. 그러다가 숨을 거칠게 들이키고는 가만히 있지 않는 어깨를 추스르고는 천천히 일어나서 비틀대고 비틀대고. 키를 들고 문을 열어 회색 벽을 따라서 105호 앞에 도달했어. 문에 오목렌즈에 불은 꺼져 있고. 선배 없는 집에 슬며시 키를 꽂아. 손잡이를 오른 쪽으로 돌리고 신발장에 신을 벗고 바닥을 쓸 듯 한쪽 발을 끌고 다 끌었으면 반대 발을 끌고 비틀대면서 침대방으로 들어가. 온통 빛은 없고 소리없는 정적에 미세한 먼지 공기. 답답하고 답답해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지만 소리를 먹은 채 자주빛으로 붉게만 보이는 두 번째 서랍에 손을 갖다 대지. 그리고는 서랍장을 열고 기묘한 소리를 머무고 반쯤 뽑아져 나왔을 때 눈에는 그의 속옷이 보여. 가지런히 정리되어서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 그 사이 사이를 손으로 더듬더듬 거리다가. 그 밑에 있는 것을 보게 되었어.
그 순간. 방에 불이 켜지고. 어느새 뒤에는 스위치에 손을 갔다대고 표정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선배가 있었어.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감정없는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봐. 그리고는 입을 꼭 다문채 그대로 있는 거야. 나는 급히 서랍문을 닫고 당황해는 표정을 짓다가 그 냉소적인 입을 보고는 아무말도 못하고 천천히 그를 지나쳐 문을 나와.

'미안해요. 미안해. 나는..'

내가 나간 뒤 문은 닫히고 나는 도망치듯 원룸을 나와서 무턱대고 아무곳이나 뛰어.
그리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어. 숨이 가빠 울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는데 그는 자는 지 전화를 받지 않아. 신호음만이 한참을 가다가. 소리샘으로 전환 돼.

'나야, 나, 그러니까 위로가 필요해. 많이 좋아했지만 너는 그만두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었는데 배신했어. 아니, 배신이 아니고 내가 잘못한거야. 자기 혼자 생각하고 멋대로 상상하고 그래놓고, 그렇지만 난 배신당한 것 같아서 그래서 네 위로가 필요 해. 나를 위로해줘. 내가 얼마나 많이 좋아했는 지 알잖아. 네가 위로해줘야 해. 그래야지 안정될거야. 내가 널 위하는 만큼.
난 몰랐어. 우리집에는 전화기도 없는데 전화를 받고 통화를 하고 그 서랍에는 속옷 밖에 없는 데 의심하고 뭔가를 찾고 있었어. 난 너무 걱정되었던 거야. 내가 너무 작아서 그가 나를 잊어버릴까봐. 어떻게든 정당화 시키고, 말도 안돼는 방법을 동원해서까지라도 나는 그와 있고 싶었어. 그러니까.... 나를 위로 해줘. 나는 네가 지금 필요해. 나는 정말. '

우는 소리.

14

방안 구석에 있는 파스텔톤의 단단한 연노랑색 상자를 보고 있다. 그 상자를 보다가 창을 본다. 창은 창살이 없이 매혹적인 하늘을 담고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있다. 큰 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마음에 든다. 비가 오든 아무것도 뵈지 않는 밤이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더 보여주니까.
맞은 편 건물에선 속옷차림의 사내가 손을 흔들고 있고 나는 그것을 묵시하고 약간 커튼을 친다. 잠시 뒤 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비가 온다. 비는 적시고 있다. 내 손을 적시고 내가 사는 건물의 머리를 적시고 바닥을 적시고 우산을 적시고 소리를 팽창시킨다.

초인종 소리.

'두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어. 하도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되더라. 살아 있는 거 보니까 마음이 놓이긴 한데 이유라도 물어보자. 왜 나오지 않아?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자꾸 그러다가는 혼자 밥 먹게 될 거야.'

'비가 오잖아. 나는 우산이 없어서 밖을 나갈 수가 없었어. 알지? 비가 오면 옷도 젖고 내 낡은 신발에는 물이 고일거야. 어디든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던 거지. 그래서 창을 보고 있었어. 지나가다 아는 사람을 보면 우산 좀 가져다 달라고 말하려고 했거든.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갈 수 있는 거지. 같이 우산을 쓰면 되니까.'

'우산이야 있지만 그래 너 주고가도 되지만 지금 나오라고는 하지 않을 게. 괜찮아 질 때 그 때나 나타나, 네가 쓴 우산은 그때 돌려줘. 나는 갈거야. 근데 그거 아냐? 나는 그런 우산 없어도 하나도 두렵지 않아. 비를 맞는 것도 신발에 물이 들어오는 것도 신경쓰이지 않아. 다만 그런 상태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그칠까봐 겁나. 그런 식으로 주목받긴 싫거든. 내 얼굴을 내가 생각해도 우스울거야. 그럼 난 갈게. 그런데 너 키가 좀 큰 것 같다. 내 고개가 다 아프다.'

그는 비에 흠뻑 젖어서 울고 있었는데 비 때문에 그것이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붉어진 눈가와 거친 숨소리와 흔들리는 어깨까지는 비로는 감출 수가 없다. 그는 흐느끼다가 참다가를 반복하고는 내 다리를 본다. 붕대로 감아진 두 다리와 휠체어를 타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다시 흐느끼다가 참다가를 반복하고는 슬쩍 눈가를 닦는다. 그는 원망스럽지만 세상에서 가장 한스럽다는 목소리로 침을 삼키면서 힘들게 서있다. 그는 너무 슬프다는 듯이 눈을 감고는 다시 뜨고를 반복하고는 천천히 얘기한다.

'또 올게. 자주 올게. 밥도 같이 먹고 다시 학교도 같이 다니자. ... 또,, 올게. 다시 올게. 밥도 먹고..
수업도 같이 듣고... .....'

울듯한 목소리로 계속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다.

'잠깐 기다려 내게 줄게 있어. 이건 내 성의니까 받아줘. 내 책. 너 줄게. 책에는 반편이가 써있어. 네가 선물로 그 글을 줄게. 네게 처음 보여주는 거야.'

'....고마워 잘있어.'

'잘 가. 우산 잘 쓸게.'

그리고 비오는 소리만 들릴 때 우산이 별 쓸모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말이 맞았어. 오히려 우산이 없었으면 젖어 볼 수도 있는 건데 말야. 신발에 물이 들어가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내게는 그런 게 필요없어. 우산 다시 가져가.

15

책의 겉표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대해서 어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야.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하는 때가 있어. 그것은 파스텔 톤으로 그렇게 선명하지 않고 수수한 색으로 점철되어 있어. 감정은 누구보다도 기이하고 신비로워. 그건 이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이었어. 지금 내 키는 크고 있고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누군가와 닮아가는 것 같아. 10센티 위의 공기는 그렇게 달콤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거든. 유통기한이 임박한 초콜렛처럼 쌉싸름한 맛. 그리고 다 이해하고 수긍해. 얼마나 아름다워. 비가 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적셔. 내가 사는 건물을 적시고 그 아래 조명등 하나 없는 길을 적시고 천장을 투과해 침대 밑 깊숙한 곳까지 적셔.

'손을 내밀어 봐. 창을 열고 손을 내밀어서 만져봐. 어떤 느낌일 것 같아. 어떤 기분일 것 같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