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친구에게..
- 작성일 200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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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친구가….
그 친구가 있어서 난 행복했고, 난 울고 웃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멀리멀리 가버렸어요. 세상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그만 가버렸어요.
사람들은 그녀를 싫어했거든요. 그녀를 나쁘다고 손가락질 했거든요.
난 그녀를 벼랑끝에 매달아버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그러는 당신들은 얼마나 잘난거죠?
*****
야심한 밤. 달과 별마저 잠이 들 것 같은 어둠이 짙은 시간.
별은 하늘에서 작은 불빛을 깜빡깜빡거리며 작게나마 땅을 비추고 있고
달은 어제와는 사뭇다른 모습으로 구름에 가려 제대로 빛을 내고 있지 않아보인다.
그런 하늘의 풍경과는 대조되게 밝은 땅 위. 나이트, 노래연습장, 호텔, 여관.
저마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거리를 밝게 물들이고 있다.
가슴팍이 드러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찔한 느낌이 들게하는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얼굴
에 허연 파우더를 덕지덕지 찍어바르고 입술은 장미보다 더 붉게 물들이곤 요염한 걸음걸이
로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눈초리를 보내고, 그 여자들에게 매혹을 느낀 남자들은 그 여자들
에게 다가가며 한마디씩 건낸다.
술에 쩔어 비틀비틀 거리는 남자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전신주를 붙잡고 한바탕 쏟아내는 남자들도 간혹 볼 수 있다.
2차 3차를 외치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양복차림의 아저씨 무리들도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으
며, 빨간,파란,노란색 등 색색깔로 머리를 물들이고 가슴팍에는 '라이터' '설운도'등 가지각
색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소위 삐끼라고 불리우는 남자들이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
잡으며 달콤한 말로 현혹하고는 발걸음을 나이트클럽 안에 머물게 한다. 낮보다도 훨씬 화
려해보이는 거리. 낮에 그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과는 사뭇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낮 못지않
게 북적북적거리며 코끝을 찔러오는 술냄새, 담배냄새가 속을 거북하게 만든다.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을 연출하는 그 거리는 이런저런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여느 코미디 프로보다 훨
씬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 이 곳의 풍경이 바로 그러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리저리 구경
을 했다. 세상 사람들은 도대체 몇종류나 있는 것일까? 낮이면 낮이라 바쁘고, 밤이면 밤이
다 바쁘고. 이 거리는 항상 쉬는 날이 없는 것 같다. 이런 곳에 살게 된다면 분주하게 움직
이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러워 미치지 않을까?
내 이름은 정어리. 어리라는 이름은 참 이쁜데 성을 붙여 부르면 참 웃긴 이름이다. 정어
리…. 우리 부모님은 참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건만 안타깝게도 정어리라는 생선으로 인해
난 항상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곤 한다. 비린생선, 어리버리 등등 정말 괴상하고도 이상한
이 단어들이 바로 내 별명이다. 그렇지만 난 내 이름에 대해 후회한적은 단 한번도 없다.
적어도 세상에 단 한사람만은 내 이름가지고 놀리지 않으니까. 내 친구 휘림이만은 내 이름
을 가지고 놀리는 유치한 행위는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게 내게 있어 가장 큰 위안이 된다.
"으음. 올 때가 됐는데…."
평소같으면 이런 거리에 나오지도 않을 나지만 오늘은 특별히 이 야심한 밤에 바깥을 나왔
다. 엄마나 언니들에게 걸리면 무진장 혼날것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휘림이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나와버렸다. 혼나는 건 나중일이고 우선은 휘림이와 신나게 노는게 나을 것 같단 생
각이 들어서였다. 사실은 이런 밤에는 바깥에 나와본 적이 단 한번도 없는 나다. 자랑은 아
니지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난 꽤 장래가 유망하다고 사람들이 관심이 많다. 엄마는 날 얼
마나 애지중지 하시는지 학교를 마치면 무조건 집으로 가야만 했고, 어려서부터 바깥에 돌
아 다닌 적이 거의 없는 나인지라 내가 바깥에 돌아다니는 것이 익숙치 않아
매일 집과 학교, 학교와 집을 왕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건 다 겉만 그럴싸한 핑계거리고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실, 집에 잔뜩
쌓여져 있는 학습지와 참고서를 공부하기 위해선 바깥에 나갈 시간따윈 있을 수가 없다. 그
걸 다 풀지 않으면 엄마는 날 재우려 들질 않는다. 그렇다. 말로만 엄마가 날 애지중지하는
것이지 사실 난 엄마의 대리만족의 도구일 뿐이다. 그저 엄마의 대리만족 도구라 생각하면
기분 나쁘니 좋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
"야!!"
한참 휘림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작게나마 휘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먼치서
뛰어오는 휘림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친구다.
오늘 휘림이는 그저 검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그저 평범한 옷차
림을 한 나완 달리 연갈색 짧은 커트머리에 약간의 화장을 하고 나타났다. 살짝 쇄골이 드러
난 옷에 장식품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바지.
손목에는 여러종류의 팔찌가 치렁치렁 걸쳐져 있고, 목걸이와 귀걸이. 말 그대로 악세
사리를 잔뜩 달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혐오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휘림이에겐 정말
잘 어울렸다. 휘림이가 나와 꽤 거리가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휘림이를 향해 열심히 뛰어갔
다.
"휘림아, 휘림아아!!"
"뭐냐? 쏠린다 쏠려. 그 한바탕 쏟을 것 같은 표정 내가 짓지 말라고 그랬지?"
내 딴에는 정말 귀엽게 한다고 귀엽게 한건데 휘림인 뭐가 그렇게 불만스러웠는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휘림이가 싫어하는 짓을 또 해버린걸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휘림이가 그런
표정은 안하는게 낫다고 내게 일러준적이 있는 것 같다.
그때 다신 안그러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무튼 내 기억력은 붕어수준이 틀림없다.
내겐 공부하는 머리와 기억하는 머리가 따로 있는 걸까?
어찌됐건 휘림이의 저 샐쭉한 표정을 풀어줘야 했기에 휘림이를 향해 윙크를 날리며
베시시 웃었다.
"미안~ 그치만 이게 습관이 되버렸는걸? 니가 좀 양해해라."
내가 한 행동이 휘림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걸까? 샐쭉했던 휘림이의 얼굴에 일순간 미소
가 번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굴에서 표정을 싹 지우더니 가볍게 내 머리를 '콩'소리나
게 쥐어박으며,
"됐다 됐어. 내가 저 천하의 어리보기에게 뭘 바라겠냐. 얼른 가자."
휘림이는 내 손목을 낚아채 꼬옥 잡으며 멈추었던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날 어
디론가로 데려간 탓에 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갈 때 가더라도 목적지는 알
아야 할 것 같아 난 입을 떼어내, "휘림아, 우리 어디로 가는거야?"라고 물었고, 휘림인 갑
자기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어디로 가지? 몰라몰라. 그냥 노래방 가서 한판 땡기자."
그러고보면 휘림이는 참 대책 없이 사는 아이다. 어디로 갈지 결정도 안하고 무작정 걸어가
다니…. 그렇지만 난 그런 휘림이가 매력있어 보인다.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휘림이의 그 모
습은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모습 중 하나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도 가끔은 부럽다. 뒷일 생각도 안하고 무대포 정신으로 나가는
것…. 그건 내가 한번도 해보지 못한거니까. 어쩌면 난 휘림이를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른
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친구를 동경하는 내가 우습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휘림
이를 닮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려, 그들에게 외면당하게 된다는
나쁜점이 있지만 그래도 난 휘림이처럼 자유분방하고 활달해졌으면 좋겠다.
"이의없지? 노래방 가는거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휘림이는 저 멀리서 반짝거리는 간판을 쳐다보며 그
곳으로 날 데려갔다. 초라한 외관과는 달리 안은 깔끔하고 심플한 느낌을 주었다. 입구에 들
어서자 노란색 웨이브 진 머리를 하고 있는 종업원 언니가 우리를 반겼다. 휘림이는 카운터
에 바짝 다가서 그 언니에게 서비스 왕창 넣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방 하나를 잡았다.
그 때, 문득 내 뇌리에 스친 한마디가 있었으니, 바로 '아, 지갑!'이였다.
처음으로 밤에 외출을 한거라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거려 안절부절 못한 나머지
깜빡하고 책상위에 두고 온 것이였다.
"저… 휘림아. 나 지갑을 책상위에 두고 왔나봐. 어떻해?"
걱정스러운 표정의 나완 달리 휘림인 여유만만했다. 도대체 얼마나 들고 있길래 저렇게 여
유만만한걸까? 나는 궁금해 물으려 했으나 그 해답은 금방 나왔다.
"니가 그럴 줄 알고 오늘 특별히 많이 들고 나왔으니까 걱정마."
휘림이의 그 한마디에 걱정됐던 내 마음은 어느새 사르르 녹아버렸다. 다행이였다. 내가 돈
을 안 들고와서 이대로 집으로 흩어져버리면 어쩌나 걱정했기 때문이였다. 휘림이는 나보다
훨씬 준비성이 뛰어난 것 같다. 나보다 대단한 사람은 바로 휘림이다.
그런 휘림이가 어째서….
"어리야, 너 먼저 한곡 뽑을래? 아니면 내가 할까?"
"휘림이 니가 먼저 해. 난… 노래 못하거든."
"그래? 그럼 이 언니가 시범을 보이겠어."
휘림인 노래방에 자주 온 모양이다. 날 보며 생긋 웃던 휘림인 익숙하다는듯 노래가 적혀 있
는 책을 뒤적뒤적거려 노래 한 곡을 찾아낸다. 그러더니 날 한번 쳐다보며,
"언니가 시범을 보일테니까 다음은 니가 부를 준비해.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휘림이를 주시했다. 휘림이는 마이크를 가볍게 감싸쥐더니 이내 입을
틔워 노래방 기계가 내뿜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얇고 높은 톤의 목소리.
그러나 맞춤복마냥 반주와 꼭 맞게 부르는 휘림이는 정말 대단해보였다. 노래 부르는 도중
간간히 들려오는 휘림이의 웃음소리는 내 앞에서 부르기 쑥스러운 휘림이의 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겉으론 무지 강해보이는 휘림이지만 속은 나처럼 부끄러움도, 쑥스러움도 아
는 나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어리야, 이제 니 차례야."
노래를 끝마친 휘림이는 내게 마이크를 건내며 빙긋 웃어보였다. 기대에 잔뜩 부푼듯한 휘
림이의 모습은 나에겐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어지는 휘림이의 한마디,
"못해도 상관없으니까 자신있게! 알지?"
휘림이의 그 한마디로 인해 내 마음속에 있던 부담감들은 말끔히 사라졌다.
휘림이는 마법사같다. 휘림이가 하는 한마디면 뭐든 다 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불가능하다고 치부해버리는 일들도 휘림이가 '넌 할수있어.'라고 말해주면 다 할 수 있
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휘림인 참 대단한 아이다. 감히 내가 친구라 칭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럼, 못 불러도 웃지 않기다?"
" 응. "
내가 선곡한 노래는 To my friend. 원티드의 노래였다. 전부터 내가 휘림이에게 들려주고파
연습하던 노래였다. 이 노래 가사가 내가 휘림이에게 하고픈 말과 똑같아서 꼭 들려주고 싶
었다. 이 노래를 연습하며 휘림이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냥 말하기는 쑥스러운 말
이지만 노래로 부르면 한결 나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제가 부를 노래를 사랑하는 내 친구 휘림이에게 바칩니다."
쑥스러운 탓일까? 두근두근거려 입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밤 휘림이에게 불러주려 연습했던 노래인만큼 최선을 다해 부르기로 했다.
이번이 휘림이에게 들려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떼어냈다.
장난 가득한 표정으로 대충대충 들을거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휘림인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내 노래를 들어주었다. 간간히 가사를 틀리고 음정도 불안했지만 그래도 휘림
인 비웃지 않았다. 내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는지 휘림인 계속 날 쳐다보고 있을
뿐이였다. 내 노래가 중간부분에 이르렀을 무렵, 휘림이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휘림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조차 눈치챌 수 없었다. 그저 날 바
라보는 휘림이의 눈빛이 조금 슬퍼보였을뿐….
" 가끔씩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마저 들지 못할 때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있는 함께 웃을 수 있는
이런 너의 마음 항상 고마워♪
혼자라는 생각 들 땐 외로워지고 그땐 눈물이 나고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와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네 곁에 있는 함께 웃을 수 있는 이런 내게 편히 기대 쉬어줘♪ "
내 노래는 끝이나고 나는 조용히 휘림이 옆에 앉았다. 휘림인 잠시 아무말 없이 날 바라보더
니 이내 눈물 한방울을 떨구어냈다. 무슨일이 있는걸까? 도대체 왜 우는걸까? 나는 아무것
도 알 수 없었지만 휘림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무슨일인지 몰라도, 말해주지 않아도 휘림이가 지금 울고있다는건 확실했다.
울지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동안 강해보이려 눈물을 참아왔을 휘림이에게 그런말은 해
선 안되는 것이였다. 아픔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졌을 아이. 항상 옥상위를 걷는 것 처럼 위
태위태한 아이.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금방 떨어져버릴 것 같은 아이. 어른들을 믿지 않는
아이. 어른들이 외면하는 아이….
"아리야, 우리 부모님 결국 이혼한대.
나 같은건, 내 의견따윈 싸그리 무시하고 갈라서버린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한건데….
그동안 쌓아왔던 자존심 깡그리 뭉게버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한건데….
…싫대. 그럴바엔 차라리 죽고싶대.
그런데 말야. 젠장맞게도 그 인간들이 나 같은건 키우기 싫댄다.
항상 수평선마냥 만나지 않던 두 인간의 의견이 처음으로 같아졌는데,
그게 내 뒤치다꺼리따윈 하기 싫대."
"……."
"그렇다면 날 왜 낳은거야? 책임지지도 않을거면 왜 태어나게 한거야?
…그래, 처음부터 기대따윈 하지도 않았어. 날 두팔 안겨 받아줄꺼라곤 생각조차 해본적 없
으니까. 난 언제나 천덕꾸러기였지. 그들에게 난 항상 장애물일 뿐이였어."
휘림이 눈에선 쉴새없이 비가 내렸다. 지금 휘림이 마음에선 천둥번개가 치고 있겠지? 어쩌
면 홍수가 났을지도 몰라. 정말 나쁜 사람들이야. 이렇게 여린 애를 어떻게…. 자기들이 만
들 어놓고 버리는건 너무하잖아. 그들 멋대로 태어나게 만들어놓고 또 멋대로 버려버리는
건… 이건 아니잖아. 태어나는 것도 선택할 수 없는건데 버려지는 것도 선택할 수 없다
니…. 이건 너무하잖아. 휘림이가 삐딱해진 이유가 뭔데. 휘림이가 저렇게 되버린 원인이 뭔
데. 제대로 떠맡지도 않았으면서 서로 떠넘기려만 들다니….
"아냐. 넌 천덕꾸러기따위가 아냐. 내겐 소중한 사람이야.
내게 있어 넌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자신을 그렇게 비하하지 말아줘."
"아니, 이건 비하하는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거야.
그래, 그 인간들이 왜 그러는지 이유는 충분히 납득이 돼.
나 같은 거 키우고 싶겠어? 너 같이 똑똑하고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딸을 키우고 싶지,
나같이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못하는 딸 따윈 키우고 싶진 않겠지."
"아냐. 아냐."
"괜찮아. 애써 부정하지 않아도 돼.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치만 조금 슬프다. 그래, 아주 조금."
어른들은 이기적이다. 아이들을 자기들이 좋을대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아이들의 의견따윈 싸그리 무시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아이들을 맞추려한다.
아이들은 주어진 그 틀에 맞춰져 살아가고 있지만, 일부 아이들은 숨막혀한다.
그래서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틀에 맞춰져버리면 더이상 자신은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평화를 중시해 나처럼 그저 어른들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휘림이처럼 용기있는 아이들은 그들에게 저항하고 반항한다. 그러다가 그
들에게서 외면받고 천대받는다. 어른들은 그들의 뜻에 맞춰지지 않은 아이는 그저 길가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쓰레기라는건가? 세상에 한가지 종류의 사람만 존재한다면 그건 정말
살아간다 말할 수 있는걸까? 이 세상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건 여러종류의 사람이 있기 때문
에, 그렇기때문에 존재하는게 아닐까?
어른들의 이기심때문에 병들어가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걸까? 아니면 외면하고 있는걸까?
"…휘림아, 아프지마. …아프지마……아프지마…."
"울지마. 이 바보야. 니가 왜 우냐? 나도 안 우는데…."
바보는 바로 너잖아. 거짓말쟁이. 자기도 울면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나는 천덕꾸러기로 취급받는 휘림이 때문에 가슴아
파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휘림인 과연 무엇때문에 그렇게 구슬프게 울었던걸까?
무엇 때문에….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갔다. 우리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울 동안 주어진 시간은 벌써 흘
러가버렸다. 어느새 '밤이 깊었네~'로 시작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는 얼른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눈물에 절어 눈이 불고 난리가 아니였지만 어찌됐건 우리둘
의 울음보는 끝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나저나 우리 학교 가야하지 않냐?"
"학교…가야지."
"미안해서 어쩌냐. 잠시만 놀자고 부른건데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서…."
"괜찮아. 그럼 학교에서 봐."
"응. 나중에 봐."
휘림이와 나. 우리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잠시 후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집으로 가는 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휘림이 일도 그렇지만 당장 집에 들어가서 일어
날 일이 더 걱정이였다.
휘림이에겐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은 일이 생겨버릴 것만 같았다.
…예감이 좋지 않다.
*
*
*
"철컥-"
"너 지금 어디갔다 오는거야! 너 밤새 밖에 있었던거야? 누구랑 뭐하고 있었어? 너 혹시 나
쁜무리와 어울려다니는거 아냐? 요즘 휘림인가 뭐신가 하고 사귀더니 밖으로 싸돌아다니
고…. 혹시, 휘림인가 뭔가 그 애 혹시 나쁜애인거야? 그런거야?(*&^%$#@!"
집에 들어서자마자 현관에 우두커니서서 엄마의 길고 긴 일장 연설을 다 들어야만 했다.
장장 30분. 엄마는 혼자 말씀하시고 자기 멋대로 휘림이에 대해 정의를 내리시며 다신 그애
와 어울려다니지 말라며 거듭 당부하셨다. 아니, 그건 당부가 아니라 협박수준이였다. 일장
연설을 마치신 엄마께선 내가 외박한 것에 단단히 화가 나셨는지 문을 쾅 닫고는 날 거들떠
보려 하지 않으셨다. 때마침 절묘하게도 냉장고엔 먹을것도 없었고, 식은밥은 물론 밥 한톨
조차 없었다. 나는 주린배를 움켜쥐고 부랴부랴 교복을 입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엄마께선
내가 꼴보기도 싫다며 문을 쾅 닫으시고는 내가 학교가는 모습도 보지 않으셨다. 화나도 단
단히 화나신 모양이였다. 엄마의 그런 마음은 이해가 갔으나, 당황되는건 어쩔 수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집을 나서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미친듯이 뛰었다. 이 버스를 놓치면 다음버스는 한시간 반
은 족히 넘어야오기 때문이였다. 엄청나게 빨리 뛰어설까? 다행히 버스는 놓치지 않았다. 출
근시간이라 그런지 버스안은 만원이였다.
사람들은 서로 조금이라도 넓게서기 위해 숨이 막힐정도로 조여왔다. 그 때문에 난 햄버거
사이에 끼어진 고기마냥 꽉 끼어버려 그자리에 고정되어 움직일수가 없었다. 숨도 턱턱 막
혀 왔다. 그렇게 간신히 버틴결과 그럭저럭 자리는 넓어지고 마침내 학교에 도착하게 되었
다. 교실은 아이들의 수다에 의해 시끄러워져 있었다. 나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휘림이를
찾았다. 그러나 휘림이가 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으나 휘림이는 오
지 않았다. 벌써 조례시간이 되고 담임선생님께서 앞문으로 들어오셨다.
"오늘 학교밖에서 불상사가 생겨서 선생님은 징계위원회에 가야하니 전달사항은 종례시간
에 다 하도록 하겠어. 그럼, 첫째시간 준비하도록.
…윤휘림 그 새끼는 왜 또 사고를 치고 와서…."
선생님은 그렇게 급히 밖으로 나가셨고, 나는 선생님이 흘리고 간 혼잣말 때문에 눈이 휘둥
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선생님 입 밖으로 나온 이름은 윤휘림이였다. 나는 내 귀를 의
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선생님이 혼잣말하듯 내뱉은 한마디로 인해 아이들이 일제히 웅성
거리는 소리의 내용으로 봐서 확실히 내 친구 휘림이가 확실했다.
나는 뒷일은 생각도 하지 않은채 무작정 교실을 뛰쳐나갔다.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징계
위원회가 열린다는 교원회의실.내가 그 곳 입구를 맞닥뜨렸을 때, 들려오는 소리에 자리에
서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내 귀에 확실하게 들려왔다. 휘림이의 목소리가…. 나는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서 문에 바짝 다가섰다.
"이번 불미스러운 일에 유감을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윤휘림 이 학생은 평소 태도
가 불량한 학생이 아닙니까? 폭력 사건만 줄줄 늘어놓아도 종이 한장은 족히 나올 정도로 사
고도 많이 쳤구요. 그동안 징계로도 이 학생은 반성하지 않은 듯 보이니 이번에야말로 정학
처리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도리에 맞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윤휘림 이 학생 때문
에 학교를 못 보내겠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학부모님들이 태반입니다. 이대로 이 학생을 방
치했다간 우리 학교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 목소리… 담임선생님이시다. 평소 휘림이를 아니꼬워하던 선생님들 중 한 분.
휘림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나서 휘림이가 사고를 안치면 죽어라 꼬투리를 찾던 선생님이
시다. 악질중에 악질. 전교생들이 다 알만큼 대놓고 휘림이를 쏘아붙이는 선생님을 보면 항
상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항상 휘림이가 제발 담임쌤이 이젠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할만큼 심하게 구신다. 휘림이를 바퀴벌레보듯 쳐다보는 선생님의 눈빛은 휘
림이를 항상 상처입히는데 내가 싫어하는 선생님 다섯 분 중 한분이시다.
"잠깐만요. 그것도 그렇지만 우선 이번 사건에 대해 휘림학생에게 자세히 듣는 편이…."
유미선생님. 휘림이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휘림이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선생님이시다.
마음씨도 따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도 차별없이 대하기 때문에 휘림이가 유일하게 자
신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선생님이시다. 항상 객관적인 눈으로 보시기 때문에 처벌이
항상 공정하고 뒤끝이 없이로 유명한 선생님.
나도 힘들면 유미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다른일은 미뤄두고 내 문제부
터 해결해주시곤 했다. 기대면 기댈수록 포근한 선생님이시다.
"박선생, 그만하세요!! 그동안 박선생의 부탁으로 교내처벌로 봐준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 박선생의 부탁으로 그동안 쉽게쉽게 해결하려 했지만 이
번만큼은 안됩니다! 윤휘림 이 학생은 뼈속부터 썩은 학생이예요!!"
학주선생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대놓고 유미선생님에게 면박을 주시는 선생님의 말은 그렇
게 객관적이지 못했다. 과거의 일까지 거들먹거리며 휘림이를 깎아내리는 학주선생님의 말
이 난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일뿐인데 과거의 일까지 거들먹거리며 지금의 휘림이 전체를 판
단하는 행위 자체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휘림이의 목소리였다. 낮고도 강한 한마디….
휘림이의 그 한마디로 인해 잠시 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휘림이가 폭발해버린 모양이였다.
…조금만 참지. 조금만 참았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이새끼가? 지금 뭐라고 했어?"
"귀가 썩으셨어요? 보청기 끼시지 그래요? 씨발이라고 했거든요?"
"이게?!!"
"퍽."
결국 맞은 모양이다. 크고도 둔탁한 소리로 봐서 세게 맞은 듯 보이는데….
"씨발 니가 뭔데 날 때리고 지랄이야? 니가 뭔데!!!!"
"퍽!!"
엄청 크고 둔탁한 소리를 끝으로 휘림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서,선생님?!"
안에서 무슨일이 일어난걸까?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졌고, 잠시 후 조용해졌다.
"니가 뭔데 날 때리는건데? 니가 무슨 자격으로!
선생이면 다야? 선생이 학생들 때리는 벼슬자리라도 되냐고?!!!"
휘림이의 악에바친 목소리에 조용했던 안이 또 시끌벅적해졌다.
"보세요. 지금 이게 반성하는 태도로 보입니까?
이런 자식은 몇대 쳐맞아도 고쳐질리가 없어요."
"선생님, 그만하세요! 그쪽은 신경쓰시지 말고 하던일이나 마저 처리하도록 하죠.
시간도 없으니…."
상황은 점점 휘림이가 정학을 먹어야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유미선생님이 안된다고. 그건 옳은선택이 아니라고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냐고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였다. 한 선생님이 떼로 덤비는 선생님들을 막는 건 힘든 게 사실이였다.
"씨발. 씨발 씨발!!!! 알아서 해먹어! 무기정학을 먹이던지 말던지 알아서 하라고!
내 의견따윈 싸그리 무시할꺼면 날 여기 왜 데려왔냐? 내가 쓰레기라고 강조하려고 나 데려
온거냐? 아니면 내가 너희들 바지자락이라도 잡고 그러지 말라고 울면서 사정할꺼라고 생
각한거냐? 그딴식의 생각은 집어치우시지 그래?
난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짓따윈 할 생각이 없거든. "
" 이,이 새끼가?!!"
선생님들의 고함소리와 함께 휘림이가 뛰어나왔다. 휘림인 문 앞에 서 있는 날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잠깐 행동을 멈칫했다. 그 순간, 교원회의실에서 휘림이를 데려가려는지 선
생님 한분이 나오셨고, 선생님이 나오는 것을 발견한 휘림인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으며 어
딘가를 향해 뛰었다. 얼떨결에 난 휘림이와 같이 뛰게 되버렸다.
앞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휘림이와 내 머리칼을 스쳐지나갔다. 바람에 나부끼는 휘림이의
머리칼은 정말 멋있었다. 학교에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휘림인 자리에 서더니 숨을 몰아쉬
었다. 그러더니 날 보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개구진 휘림이의 웃음은 따가운 햇볕따윈 감
히 비추지 못할만큼 눈부셨다. 어른들은 모른다. 휘림이가 얼마나 가치있는 보석인지를….
다이아몬드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 원석은 아름답지 않다. 다이아몬드는 비싼보석이지만 그
것의 원석은 하나의 돌맹이일뿐이다. 지금 휘림이는 다이아몬드의 원석일 뿐이다. 절대 길
가에 널 부러진 돌맹이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그저 지금은 그 원석을 세공해주는 사람이 없
어 사람들이 그 원석의 가치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난 믿는다. 언젠가 휘림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리란걸…. 누구보다 소중하고 가치있는 사람이 되리란걸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휘림아, 너 학교 정학먹으면 어쩌지?"
"그것보다 지금 난 내가 무작정 널 끌고와버려서 혼나는게 아닌가 걱정되는걸?"
"괜찮아. 그거야 나중에 따로 보충하면 되는거니까. 그리고 까짓것 혼나주면 되는거지.
그것보다 니 일이…"
"내 일이라면 걱정마. 학교, 그곳에서 날 정학먹이지 않으면 내가 자퇴할꺼니까. 애초부터
나완 맞지 않는 곳이였어. 답답하고 갑갑하고…. 우리가 로봇도 아닌데 똑같은 생각을 집어
넣으려 하는 곳이잖아. 그곳은 하나밖에 모르는 로봇을 만드는 곳이지, 절대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냐. 그저 한가지의 사실을 주입시키는 것 밖에 모르는 공장같은 곳이니까. "
"……."
"싫어. 이젠 오라고 모시러와도 안 갈꺼야. 중간고사. 기말고사. 이런 것 때문에 머리아픈것
도 싫고. 스트레스 받는것도 이젠 싫어. 더구나 그 보이지 않는 시기와 질투. 자기보다 우위
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남 몰래 욕하지.
그렇게 공부해서 성공하면 모르지만, 만약 성공을 못하면? 그럼 그동안 쌓아온 지식들을 어
디다가 써먹어? 그러다 백수가 됐을 때, 그 많은 지식들이 과연 행복하게 해줄까?
또, 자신의 적성에도 안 맞는 공부 죽어라해서 성공했다쳐도 그게 과연 행복할까?
자기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일을 평생 해야한다고 생각해봐. 끔찍하지 않아?"
"……."
"난 날 밀어내는 학교따위는 다신 돌아가지 않겠어.
다른사람이 내 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면 내 스스로 키워보겠어.
학교란 울타리를 벗어나면 분명 힘들겠지. 그래,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은 다 그렇그
그런 사람 취급하니까. 학교란 울타리만 벗어나버리면 분명 난 그렇고 그런 사람 취급 받을
거야. 그건 예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야. 학교에서도 난 그렇고 그런아이 취급받아왔
으니 그 울타리쯤 없어도 난 아무렇지도 않을거야. "
" 난 니가 행복해졌음 좋겠어. 학교를 떠나 니가 행복하다면
난 널 학교가 아닌 곳에 있다해도 괜찮을 것 같아.
부디 너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꼭 너의 그 생각을 세상사람들에게 증명해보여. 꼭 성공해야해. 알았지?"
"응."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가까스로 정학을 면한 휘림이는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그만두게 됐
다. 사물함 정리를 하며 학교를 나서는 휘림이의 표정은 내가 봤던 휘림이의 모습 중 가장
밝았다.휘림인 내게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편지는 자주 주고 받자는 말을 남기고는 학교밖
을 나갔다.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빙긋 웃으며 그렇게 헤어졌다. 그것이 내가 휘림이를 본
마지막 모습이였다.
소문을 듣자면, 결국 휘림이의 부모님은 갈라서게 되고,
휘림이는 멀리 이사를 가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한달의 시간이 흐르고 휘림이에게 편지 한통이 날아왔다.
휘림이가 보낸 편지가 왔다는 걸 안 순간 내 심장을 주체를 하지 못할정도로 빨리 뛰었다.
방으로 들어온 난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 휘림이의 온기가 편
지에 남아있는듯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편지가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봉투 한쪽 귀를
뜯어 편지지를 꺼냈다.
푸른하늘과 넓은 들판이 그려진 편지지였다.
휘림이가 고른 편지지답게 자유로운 느낌이 났다.
이 편지지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동안 스트레스로 답답했던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나는 편지지가 구겨질새라 조심스럽게 편지지 양쪽을 잡아 내용을 읽기 시작했
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야, 정어리, 그동안 잘 지냈냐? 나는 무척이나 잘 지내고 있어.
우리 부모님... 결국 이혼했다.
결국 난 아버지가 떠맡게 됐는데, 새엄마가 자꾸 눈치를 주고 괜시리 내 일에 사사건건 트집
을 잡는거 있지. 알잖냐. 내가 그런거 딱 질색이라는거…. 그래서 아버지에게 돈 좀 뜯어내
서 그냥 독립해서 살고 있어.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방 한칸짜리인데 내가 살기에는 딱 적합한 것 같아. 요즘 난 부쩍 이
런 생각을 많이 하게 돼. 내가 학교를 자퇴한게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일이라고…,
지금의 난 무지 행복하거든. 자유롭고 걸리적 거리는 것이 없고. 옛날은 아침이 오는게 싫었
는데 요즘은 아침해가 뜨는게 너무 좋아. 하루를 시작하는 것조차 행복하니까. 아, 나는 낮
에는 기술을 배우고 있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요즘따라 땀 흘려 일하는 즐거움
을 한껏 느끼고 있지. 어리야, 요즘 공부는 잘되가냐? 아이들이 너 괴롭히거나 하진 않지?
누가 너 괴롭히면 나에게 편지해. 다 미뤄두고 그 애부터 손봐주러 갈테니까. 아함~ 졸리
다. 그럼 부디 너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아, 나 내일부터는 무지 바빠져서 다음부턴 편지
못 보낼지도 모르겠다. 시간 나는대로 편지 보내도록 노력할게.
내게 제일 소중한 어리의 수호천사 휘림이가 보냄.」
휘림이의 편지를 받은 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매일매일이 지옥같다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휘림이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다니….
어쩌면 휘림이에게 학교는 정말 지옥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지옥을 벗어나 자유롭게 배우고 일한다는건 휘림이에게 있어 좋은일인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행복해서…. 휘림아, 앞으로도 행복해야해. 알았지?
비록 앞으로 니 소식을 자주 듣진 못하더라도 내가 보고 있는 하늘 아래서 행복하게 살아간
다고 믿을게. 너라면 꼭 그럴거라고 확신해. 넌 내가 동경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믿고 살았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내가 그 편지안에 또다른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1년이란 시간이 걸려버렸
다. 그날도 1년전에 휘림이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학교를 지각하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나는 황급히 교복을 입으며 밖으로 나갔다.
편지지를 창 밖에 놓아둔 채로….
야간자율학습이다 뭐다해서 죽어라 공부만 하고 온 나는 휘림이가 보낸 편지를 읽으며 기운
을 차려볼까하고 그 편지를 찾았다. 그러다가 창가에 대충 놓여져 있는 편지를 발견하게 됐
다. 나는 대충 던져놓은 편지지를 보며 휘림이에게 미안해하며 편지지를 집어들었는데 아침
과 편지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됐다.
바로, 볼펜으로 쓴 글씨 밑에 또 다른 내용이 있었던 것.
나는 볼펜 바로 밑에 글씨들만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을 읽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내가 사랑하는 어리야, 넌 내가 볼펜으로 쓴 편지를 보면서 내가 행복해졌다고 좋아하겠
지? 히힛, 평생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해. 알았지? 있잖아 어리야. 사실, 나....죽는대.
힛. 평소에 기침을 많이하고 매일 몸이 아프고 나른했지만 감기라고 그냥 넘겼거든.
그런데 오늘 손바닥에 피가 묻더라고.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폐암.
그것도 말기라네? 그동안 삐딱하게 군다고 담배를 피웠더니 폐에 암덩어리가 생겼나봐.
히힛. 믿기지 않지? 이 나이에 죽어야한다는거…. 나도 한동안 실감이 안나더라. 이미 몇몇
곳에 전이된 후라서 가망이 없대. 치료해도 소용없어 보이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살다가 저
세상 가라더라. 의사가 환자에게 그런말을 하다니…. 히힛. 그 사실을 아빠가 알게됐는데 집
에 돈 없다면서 날 내쫒더라. 그 인간이 그럴 줄 알았지. 알잖아. 우리 부모라는 새끼가 원
래부터 책임감 없는거....히히힛....
..그런데 어리야.. 나 죽고싶지 않아.. 나.. 살고 싶어.. 세상 사람들 보란듯이 행복하게 살
고 싶어... 어리야 너 내 소원 알잖아. 죽을만큼 행복하게 사는거.....
...어리야..나..하늘나라 정말 가기 싫어.. 죽고 싶지 않아... 나.. 살고싶어...
나..이제야 행복해졌는데.. 그런데.. 나..죽어야 하는거야? 이거..너무 불공평하잖아...
너무..불공평하잖아... 나 같이 나쁜 사람은... 이 세상.. 살지 말라는거야..? 나 같은
건.. 이 세상에 숨쉬고 있을 자격은 없다는 건가..?
나.. 이만 가야겠지? 어리야.. 내가 죽기 싫다고.. 살수 있는거 아니잖아... 그만.. 포기해
야겠지? 더.. 살고 싶지만.. 더 살 수 없다잖아.... 어차피 가는 거.. 오늘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편지 쓰는 거야..
니가 이 편지를 받아볼 때쯤이면 난 이미 하늘나라로 가 있겠다. 그치?
...하늘에서..널 지켜보고 있을게... 너라도 행복해라..
하기 싫은 일 웬만하면 하지 말고... 알았지?」
…바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바보….
우연히 편지를 창가에 두지 않았다면 나 평생 니가 행복할거라고 믿고 살았을지도
모르잖아. 바보같이, 바보같이 그렇게 믿으면 살 뻔했잖아. 아프면 아프다고 편지에 솔직히
쓰지. 레몬즙으로 내가 못 보게 쓰지말고 솔직하게 볼펜으로 쓰지. 넌 날 보고 매일 바보라
고 그랬지만 정말 바보는 너였잖아.
바보야…, 하늘나라는 좋아? 거긴 널 나쁜아이 취급하면서 막 대하지 않지?
넌 착하니까 천국갔겠다. 그치? 천국은 얼마나 좋은곳이야? 이 세상에서 맛 볼 수 없는 맛있
는 음식들 많지? 하늘나라에선 멋있는 천사들도 많으니까 남자친구도 사겼겠다.
그곳에 사니까 좋아? 나랑 같은 하늘아래 있는것보다 내 위에 있는거 더 좋아?
…그곳에서 너… 행복해?
그 날 이후, 나는 매일 밤 하늘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 지금 내 기분. 내 몸 상태 등….
그리고 꼭 마지막에는 오늘도 하늘에서 날 보며 웃고 있을 나의 수호천사 휘림이에게 한마
디 하게 된다.
'…너도 오늘 하루 행복했니?'
비록, 휘림인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지만 나는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면서 확신한다.
'너도 오늘하루 행복했구나.'라고….
*****
내겐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소박한 소원을 가진 친구가….
그 친구의 소원은 돈을 많이 버는것도, 성공하는 것도 아닌 죽을만큼 행복해지는거…. 딱 그거 하나뿐이였어요. 지금 그 친구는 행복하겠죠? 천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겠죠?
…하얀 도화지니까….
세상이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전에 하늘이 데려가 버린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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