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귀마개 벌레

  • 작성일 2006-07-27
  • 조회수 888

 

 < 단편소설 > 귀마개 벌레

                                          

                                                         화이트울프

 

 

 

 그의 귓속에는 벌레가 살고 있었다. 양쪽 귀에 한 마리씩. 그는 왼쪽 귓속의 벌레를 레프트(Left), 오른쪽 귓속의 벌레를 라이트(Right)라고 불렀다. 그보다 적당한 호칭을 찾을 수 없음은 물론 언제부터인가 그의 어휘력이 극심한 가뭄에 허덕이게 됐기 때문이다. 고생스럽게 발아시킨 단어를 정성들여 재배하려고 할 때마다 먹구름 같은 메뚜기 떼가 급습해 그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십년 전 어떤 점쟁이가 종원에게 죽었다 깨어나도 작가가 못될 테니 포기하라는 예언을 한 후 생긴 이상증상이었다. 점쟁이의 예언은 그의 심장에 말뚝을 꽂았고, 그는 관 속에 갇힌 드라큘라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여자친구에게 보기 좋게 차인 전력이 있는 종원은 그가 아니다. 회사의 부도로 인해 졸지에 백수신세로 전락한 종원 역시 다른 사람이다. 진짜 종원은 점쟁이의 예언과 더불어 정신적 자살을 감행했다. 원룸에 처박혀 은행잔고를 계산하며 라면이나 끓여먹는 종원은 유령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유령인지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점쟁이를 향한 증오가 유령의 혼을 쥐어짠다는 것밖엔. 점쟁이의 예언이 엉터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장장 십년에 걸쳐 신춘문예며 각종 문예공모에 응모했건만 번번이 낙방이었다.

 컨디션이 안좋거나 우울할 때면 귓속에서 점쟁이의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에 흰 칠을 한 여자 점쟁이는 호각을 불고 드럼을 두드리더니 아예 확성기를 들고 떠들었다. 팔자대로 살아. 넌 문운도 관운도 없어. 점쟁이의 비웃음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되풀이되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그런대로 참을만했다. 하지만 백수가 되자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전철에서도 거리에서도 그 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쳤다.

 귀마개 모자를 구해 귀를 막아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귀마개를 통해 점쟁이는 천둥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는 홧김에 귀마개 모자를 의류수거함에 버렸다.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스포츠용 귀마개를 구입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폴라폴리스 소재였다. 며칠 내내 착용한 탓에 귀 뒷부분에 뾰루지가 났다. 폴라폴리스 귀마개는 보온성만 충족시켰을 뿐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인터넷에서 실리콘 귀마개에 대한 광고를 접하게 됐다. 귓구멍에 쏙 끼우면 찰싹 밀착이 되면서 완벽히 소음을 차단해주는 최신 귀마개였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구매했건만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방음효과는 그저 그랬고 걸핏하면 귀마개에 귀지가 묻어났다. 시판하는 귀마개에 의구심이 생긴 그는 귀마개 대용으로 이어폰을 사용하기로 작정했다. 밀폐형 이어폰을 사느라 돈을 들이는 것은 낭비의 우려가 있었다. 서랍 속에 넣어두고 한 번도 쓰지 않은 MP3 플레이어를 꺼냈다. 여자친구가 그를 차버리기 전 생일선물로 사준 MP3 플레이어. 경매 사이트에서 팔아버릴까 하다 아까워서 그냥 두길 잘했지. 이 MP3 플레이어의 번들 이어폰이 그의 구세주가 됐다. 컴퓨터에 저장해둔 MP3 파일을 다운받아 MP3 플레이어의 배를 빵빵히 채웠다. 볼륨을 높이고 음악에 집중하는 동안은 점쟁이도 그를 들볶지 못했다.

 구인구직 사이트를 드나드는 횟수가 줄고 소설 습작에 몰두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는 십년 전의 자신, 점쟁이 얼굴에 복채를 던지며 욕을 한바가지 퍼붓던 스무 살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면 뭐하나. 시덥지 않은 습작은 매번 사망선고를 받았다. 맞춤법이 틀리기는 예사고 띄어쓰기도 부정확했다. 그의 감성은 낙화해버렸다. 서른 살의 청년이 아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그의 안에 살고 있었다. 노인은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넌 인생을 헛살았어. 예언 따위 잊어버려. 네 강박관념이 널 망치고 있어. 그의 폐는 이미 그을음으로 침착되어 노인의 충고를 호흡할 수 없었다.

 MP3 플레이어는 배터리가 닳아 소모될 때마다 재충전이 필요했다. 그는 귀차니즘의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배터리를 포옹한 충전기의 빨간 불을 지켜보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심사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그가 절실히 원하는 것은 이어폰이지 MP3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MP3 플레이어를 서랍으로 퇴거시키고 이어폰만 귀에 꽂기로 했다. 이어폰은 귀마개로 거듭났다. 그는 볼일을 볼 때나 잠잘 때도 이어폰을 착용했다. 이어폰의 잭은 셔츠의 가슴주머니에 살짝 집어넣었다. 귀마개로 변신한 이어폰은 그의 일부가 됐다. 단 목욕할 때만은 예외였다. 이어폰을 욕실 수납장 안에 넣어두고 샤워하거나 머리를 감노라면 가끔 점쟁이가 킬킬거리곤 했다.

 어느 날 목욕을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중 귓속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물이 찬 것처럼 양쪽 귀가 멍멍했다. 수건을 의자 팔걸이에 걸친 후 새끼손가락으로 왼쪽 귓구멍을 후볐다.

 “아얏!”

 남자의 비명소리. 환청치곤 너무 또렷하다. 이번엔 오른쪽 귓구멍을 쑤셔봤다.

 “아얏!”

 첫 번째 비명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 얼른 새끼손가락을 빼냈다. 손가락 끝에 녹색 껌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이어폰 솜이 귓속에 끼여 있었나 보군. 뭐? 솜이라고? 이어폰의 솜은 검정색 일텐데. 그는 벌레 털듯 손을 탈탈 털었다. 녹색 껌이 의자의 상판 위로 떨어졌다. 황당하게도 껌은 동그랗게 말려있던 몸을 쭉 펴고 그를 노려보았다. 껌이 입을 열자 카랑카랑한 노인의 음성이 투덜거렸다.

 “날 거칠게 다루다니 넌 예의도 없니?”

 그의 입안에 연신 침이 고여왔다. 휴지를 갖고 와 껌을 치우려고 했다. 그 순간 왼쪽 귓구멍에서 우렁찬 노인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만두지 못해? 이 나쁜 놈아.”

 그는 얼어붙었다. 왼쪽 귓구멍에서 녹색 껌이 뛰쳐나왔다. 껌은 공중제비를 돌더니 의자의 상판에 매끄럽게 착지했다. 두 개의 껌은 의자의 상판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제야 껌이 아닌 애벌레의 형체가 선명해졌다. 두 마리의 녹색 애벌레들. 목소리 톤만 다를 뿐 손가락 마디만한 키와 몸에 박힌 황금색 반점까지 똑같다.

 “너희는 어디서 왔니?”

 부지불식중에 튀어나온 질문에 자신도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말하는 벌레들. 그들과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종원. 상상조차 못했던 일들이 현실을 비집고 들어와 대대적으로 번식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우주의 먼지에서 태어났어.”

 오른쪽의 벌레가 순순히 실토했다. 왼쪽의 벌레는 심드렁하게 부연 설명했다.

 “황사에 실린 우주의 먼지가 네 귓구멍에 들어가서 우릴 낳았지.”

 어제 아침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인출하려고 외출했던 기억이 났다. 지독한 황사에 맞서 옷깃으로 코를 막았었지. 그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목청을 높였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의자의 상판에 궁둥이를 비벼대던 왼쪽 벌레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넌 네가 보는 세상이 진짜라고 확신하니?”

 그는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낯선 남자가 눈을 뜬다. 자신은 침대에 누워있는데 그 남자는 기지개를 켜고 눈곱을 뗀다. 자신을 일으켜달라고 부탁해도 남자는 듣지 못한다. 남자의 귓속에 꽂힌 귀마개가 주위의 소리를 강력히 흡수하여 진공상태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세상은 그의 시야에서 약간 비껴나 있다. 초점을 맞출 수 없다. 눈앞의 벌레들을 눌러 죽여서 그 뇌를 터뜨린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의 뇌가 오작동을 일삼으며 또 다른 벌레를 잉태할지도 모른다.

 “좋아. 너희의 출신성분을 인정해줄 테니......”

 반 박자 쯤 뜸을 들인 후 그는 착 가라앉은 어조로 요구했다.

 “용건이 끝났으면 떠나줘.”

 벌레들의 녹색 몸빛깔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격분한 그들은 사정없이 비난을 퍼부었다.

 “인간은 손님을 이런 식으로 접대하나? 우린 지구에 연고지가 없어.”

 “우리의 뇌신경이 너의 뇌신경과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돼. 만일 우

  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네 신상에도 이롭지 않을 걸.”

 이것들이 벌써 지구인의 습성에 동화됐단 말인가. 뻔뻔스럽게 협박까지 한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우주에서 온 너희랑 지구에 사는 나랑 무슨 신체적 관

  련이 있다는 거야? 근거 없는 거짓말엔 안속아.”

 그의 논박이 끝나자마자 벌레들의 우주생물학에 관한 강의가 개시됐다. 장황한 이론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요지는 분명했다. 벌레들의 뇌를 형성하는 영양분이 다름 아닌 종원의 뇌에서 공급되었고, 그로 인해 종원과 벌레들의 뇌의 메커니즘이 긴밀한 상호보완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뜻밖의 충격에 이성을 잃은 그는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왜 하필이면 내 귓속이야! 돼지나 황소 귓속에서 양분을 섭취할 수도 있었잖

  아.”

 오른쪽 벌레의 통통한 뺨에 볼우물이 패이며 풍만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열등한 제자를 교화하려는 스승처럼. 그는 한 풀 기가 꺾이고 말았다. 오른쪽 벌레가 미소를 거두며 철학적인 발언을 했다.

 “우리가 어떻게 카오스의 행보를 추측할 수 있겠어? 혼돈일수록 질서를 낳는

  법이지.”

 그 개똥철학에 수긍하는 것도 잠깐, 이들을 쫓아내기 전엔 발 뻗고 잠자기 틀렸다는 위기감으로 그는 신경이 곤두섰다. 작전을 바꿔 회유책을 써보면 먹혀들까?

 “난 세상 제일의 귀마개를 구하지 못해 고민이야. 너희와 놀아줄 시간이 없

  어.”

 벌레들의 호기심이 증폭됐다. 그들은 귀마개에 얽힌 사연을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는 십년 간 편두통처럼 자신의 뇌를 두들겨온 예언을 풀어놓았다. 벌레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어른의 세계에 뜨거운 관심을 표방하는 유치원생처럼.

 “그 여자 점쟁이는 몇 살이나 됐어?”

 “나보다 열 살쯤 많아. 지금은 완연한 중년일 거야.”

 “관념의 고착화라는 말 들어봤어?”

 “너희가 내게 강박증 환자라는 둥 그런 소리를 하면......”

 그는 양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살벌한 어조로 엄포를 놓았다.

 “우리의 뇌신경이 담합해서 종말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

 벌레들은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지구인의 저급한 뇌 운운하며 구조 개선방안을 논의하는 모습이 같잖아서 도저히 봐 줄 수 없었다. 저러다 싫증이 나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가겠지. 뇌의 상호작용에 관한 경고도 현학적인 허세일 뿐이야. 모르는 척 그는 머리를 단정히 빗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뒤 인터넷서핑에 열중했다. 갑자기 양쪽의 이어폰이 동시에 헐렁 빠졌다. 어느새 그의 어깨까지 올라간 벌레들이 입으로 이어폰 줄을 물어서 빼낸 것이다.

 “우리랑 협상할 자세는 됐나?”

 왼쪽 어깨에 앉은 벌레가 성마른 어조로 다그쳤다. 그는 가소롭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벌레 주제에 뭐가 어째? 벌레면 벌레답게 발효톱밥이나 먹으며 꼬물꼬물 기어다닐 것이지 감히 협상을 입에 올려? 벌레들은 이어폰 대신 귀마개 역할을 해주겠다고 자청했다. 종원의 귓속에 살며 원룸을 함께 쓰는 조건으로.

 “내가 거절한다면?”

 그의 말에 벌레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왼쪽 어깨의 벌레가 노골적으로 위협했다.

 “최면을 걸어 널 꼭두각시로 만들 거야.”

 대단한 발상이군. 그는 휘파람을 불었다. 오른쪽 어깨의 벌레가 눈을 찡긋하며 곰살궂게 다독였다.

 “우릴 적이 아닌 아군으로 생각해봐. 결코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거야.”

 공짜로 얻은 장난감 로봇의 가치를 점검하듯 그의 머릿속에서 대차대조표가 작성됐다. 애벌레들의 재롱잔치. 나쁘진 않군. 잘 키워서 심부름꾼으로 부려먹을까?

 “너희를 뭐라고 부르면 좋지? 내 눈엔 둘 다 쌍둥이처럼 보여.”

 벌레들은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슈나우저를 연상시키는 흰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우주의 먼지가 자신의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다니......”

 그는 벌레들을 놀려먹는 게 재미있었다. 인간들을 상대할 때면 속이 체한 듯 더부룩했었는데, 벌레들과 노닥거리면 기운이 넘치고 자신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렇다고 벌레들이 스스로 작명하게 내버려둔다면 그 오만함에 쐐기를 박을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되겠지.

 “걱정마. 내가 너희 이름을 정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벌레들이 귀엽게 보이다니. 그는 이들이 불청객이라는 사실을 깜박한 모양이다. 왼쪽 귀에서 나온 벌레는 레프트, 오른쪽 귀에서 나온 벌레는 라이트라고 명명했다. 벌레들은 새로 부여받은 이름을 마음에 들어했고, 종원 또한 흡족했다. 이리하여 벌레들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레프트와 라이트를 육안으로 구별하기란 쉽지 않았다. 눈썰미 없는 사람이라면 우주의 먼지가 숨겨둔 천금 같은 힌트를 놓쳤으리라. 레프트는 숱이 많은 일자눈썹이었지만, 라이트는 가느다란 반달눈썹이었다. 실내가 어두컴컴할 때는 둘의 눈썹이 비슷하게 보여 혼동되는 일이 잦았지만. 성격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레프트가 논리적이라면 라이트는 감성적이었다. 레프트가 수리적 능력이 발달했다면 라이트는 미적 감각이 발달했다. 종원의 좌뇌와 우뇌의 이질적인 기능이 그들의 개성의 색깔을 창조했으리라. 벌레들은 어린이용 요구르트 외엔 입에 대지 않았다. 매 끼니 때마다 어린이용 요구르트를 스프용 접시에 담아주면 그들은 붓처럼 생긴 혀로 핥아먹었다. 지구의 애벌레가 하루에 서른 두 번 배설하는 것에 반해 이들은 오직 잠자기 전 한 번의 배설로 충분했다. 우주의 먼지에서 탄생한 벌레의 배설기관은 놀라울 정도로 진화해있었던 것이다. 배설욕구를 느낄 때는 자기들이 알아서 욕실로 기어갔다. 잠겨진 욕실문의 틈새로 몸을 오므려서 들어가면 되니까. 벌레들은 세면대의 수도를 틀 줄 알았고, 이틀에 한 번은 세면대에 물을 담아서 입욕을 했다. 애완동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지능적이고, 동료라고 하기엔 왠지 거리감을 유발하는 우주생명체. 하여튼 간에 그는 내심 벌레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들이 귓속에 살게 된 후로 점쟁이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온갖 소음을 흡수하고 왜곡하는 능력이 있다고 자랑했는데, 그 말이 허풍은 아니었나 보다. 레프트와 라이트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예전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이어폰의 귀마개 기능은 한계가 있어서, 그는 레프트와 라이트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동거한지 한 달이 됐을 때 그의 은행잔고는 바닥이 났다. 명목상의 친구들과는 연락을 끊은 지 일 년이 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젊은 여자와 재혼해서 주접을 떠는 아버지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하느니 한강에 뛰어드는 편이 나았다. 재취업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의욕이 솟지 않아 습작의 진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휴대폰으로 예금 잔액을 조회할 때 레프트와 라이트를 떼어놓기 위해 그는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휴대폰이란 전자파의 온상이야. 너희처럼 면역이 안 된 우주생물이 전자파에 노출되면 감당 못할 결과를 초래할 거야. 벌레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듯 휴대폰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집안을 섭렵하며 잡담을 나누곤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종원의 사정을 귀신같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벌레들의 뇌와 종원의 뇌가 연결되어있다는 헛소리는 과연 신빙성이 있을까?

 며칠 후 쌀이 떨어지고 냉장고가 비어있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최악의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외로 담담했다. 굶어죽는 기분이 어떤지 궁금했는데 바야흐로 그 의문을 풀 기회가 온 거다. 위장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릴까? 눈앞에 현란한 천체쇼가 펼쳐질까? 게다가 죽음의 동반자가 둘이나 있으니 저승길도 덜 외롭겠지. 레프트와 라이트는 그와 생각이 달랐다. 지구인의 아사에 동참하는 걸 치욕으로 여겼다.

 근처 슈퍼마켓에서 배달 왔을 때 그는 집을 잘못 찾아왔다고 우겼다. 들은 척 만 척 슈퍼마켓 주인남자는 라면 박스, 햇반 박스, 생수 박스, 요구르트 박스를 안으로 들여놓았다. 김치와 즉석식품, 냉동식품, 통조림, 커피믹스 외 화장지, 비누, 치약, 샴푸 등도 추가되었다. 별 희한한 꿈도 다 있군. 그는 벌건 대낮에 꿈꾸는 이유를 레프트와 라이트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귓속은 허전했다. 점쟁이의 희미한 빈정거림만이 그의 고막을 긁고 있었다. 벌레들이 그를 버리다니! 시원섭섭함인지 미련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그는 눈이 뒤집혀졌다. 싸가지 없는 벌레들! 우주폭풍에 휩쓸려 뭉개져버려라. 씩씩거리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우릴 찾았나?”

 “안달하지 마. 우린 떠난 게 아니야.”

 주인남자의 양쪽 귓속에서 레프트와 라이트가 폴짝 뛰어내렸다. 그들은 고무공처럼 통통 튀며 주인남자의 어깨를 타고 내려와 그의 양쪽 귓속으로 점프했다. 동거인들이 돌아온 순간 점쟁이는 벙어리가 되었다. 귓속의 평화가 다시 찾아왔지만, 벌레들에 대한 애착심을 들킨 것 같아 그는 부끄럽고 민망했다. 슈퍼마켓의 주인남자는 벌레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인남자는 배달을 마친 후 살가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종원 혼자만이 머리에 더듬이가 달린 외계인처럼 생경했다.

 “돈이 어디서 난 거야? 은행이라도 털었어?”

 그가 매섭게 추궁하자 레프트가 코웃음을 치며 사건의 전말을 밝혔다.

 “슈퍼마켓 주인의 귓속에 들어가 최면을 걸었지. 주인남자는 네가 전화로 주문

  하고 배달을 시킨 후 대금을 지급한 걸로 알고 있어.”

 허무맹랑한 시나리오군. 요구르트를 먹고 귀마개 역할을 하는 최면술사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하자 라이트가 호기를 부리며 큰소리쳤다.

 “네 생활은 궁핍해지지 않을 거야. 종종 우리가 외출해서 저 주인을 이용하면

  되니까.”

 그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몰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날강도가 따로 없군. 그런 짓은 명백한 사기행위야.”

 벌레들의 체모가 피뢰침처럼 수직으로 치솟았다. 레프트가 불쾌한 듯 코를 킁킁거렸다.

 “우리의 생존행위를 매도하다니 배은망덕한 인간이군.”

 적반하장이군. 남의 집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이 주제넘게 설교를 해? 뇌가 풍비박산이 되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저 벌레들을 영원히 잠재우고 싶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의 분노를 읽었는지 라이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긍정적 사고를 가져봐. 기생충과 숙주의 경쟁은 상호진화를 돕는다고.”

 대가리 나쁜 놈들아. 숙주의 입장이 돼봐. 반론을 제기하려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기생충은 벌레들이 아니라 바로 종원이었다. 벌레들이 그를 먹여 살리는 한 그는 인간 기생충이었다. 그 날 밤 셋은 파티를 열었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요구르트가 넘쳐흐르는 접시 안에서 헤엄을 쳤고, 그는 치킨까스와 스파게티로 포식을 한 후 입가심으로 커피를 마셨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깨뜨린 도덕관념일랑 헌옷 버리듯 내팽개치자. 지구의 인습은 종이호랑이가 되어 갈기갈기 찢어졌다. 레프트와 라이트와 종원은 우주의 무법자들이었다. 떠돌이별처럼 고립된 그들의 파라다이스야말로 난공불락의 아지트인 셈이다.

 흥청망청 보낸 날들이 나른한 햇빛 속으로 녹아내렸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그의 귓속에 똬리를 튼 채 단잠에 젖었다. 점쟁이의 조롱이 그치고 심적으로 안정이 되자 그는 습작 원고들이 눈에 밟혀 견딜 수 없었다. 아비를 잘못 만난 죄로 유폐된 자식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양지로 끌어내고 싶었다. 그는 지고지순한 부성애의 포로가 되어 습작 원고를 조심스럽게 손질했다. 벌레들은 그의 작품보다 워드 프로그램에 지대한 흥미를 보였다. 그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면 그들은 그의 귓바퀴에 앉아 골똘히 지켜보곤 했다. 

 “레프트, 지구인은 왜 글을 쓰는 걸까?”

 “라이트, 자신의 결락된 부분을 채우거나 감추기 위해서일 거야.”

 “그러다 뇌세포가 퇴화되면?”

 “기억이 조금씩 지워지다가 끝내 소멸하겠지.”

 벌레들은 도인들처럼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테너와 바리톤의 이중창을 부르듯. 그는 자신의 양쪽에서 재잘거리는 레프트와 라이트가 밉살스럽지 않았다. 벌레들은 그의 침체된 삶에 모터를 달아준 은인들이었다. 수명연장 장치나 정신과 의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이들을 어찌 홀대할 수 있으랴. 황사가 심한 날 외출해서 귓속에 우주의 먼지를 받아들인 것이 생애 최대의 행운으로 여겨졌다.

 집주인이 밀린 집세를 받으러 몸소 행차한 날은 날씨가 화창했다. 그는 도시락을 싸들고 레프트, 라이트와 피크닉을 가고 싶어 좀이 쑤셨다. 집주인 남자가 그 곰돌이 같은 얼굴을 들이밀지만 않았다면, 벌레들과 어울려 파릇파릇한 봄날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집주인 남자의 바퀴벌레 보듯 깔보는 시선 앞에서 그의 우주 무법자로서의 자긍심은 오그라들었다. 그는 아직도 지구에 발이 묶여있었다. 몸속에 축적된 과다지방이 콧잔등까지 스며 나온 집주인 남자의 얼굴은 번들거렸다. 집주인 남자는 지휘자가 단원에게 지시하듯 삿대질을 하며 그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집을 빼달라는 윽박지름이 심벌즈 소리처럼 연거푸 쾅쾅 울렸다. 고막이 터질 지경이 된 그는 레프트와 라이트에게 긴급 구조요청을 했다.

 “너희 본연의 임무가 귀마개라는 걸 잊었어? 저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지 않게

  해줘.”

 벌레들은 부리나케 그의 귓속에서 뛰어내리더니 집주인 남자의 어깨로 돌진했다. 일순간 그는 눈을 의심했다. 벌레들의 옆구리에는 날개가 돋아있었다. 프로펠러처럼 윙윙거리며 위용을 과시하는 날개. 레프트와 라이트는 집주인 남자의 양쪽 귓속으로 들어가더니 귓구멍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집주인 남자의 혈색이 핏빛으로 물들더니 점차 보랏빛으로 변했다. 집주인 남자는 고개를 쳐들고 입을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렸다. 산소가 부족한 어항의 수면으로 올라온 금붕어를 보는 듯했다. 90 Kg을 웃도는 곰돌이가 금붕어 꼴로 벌렁 드러누웠을 때야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쓰러진 집주인 남자의 양쪽 귓속에서 레프트와 라이트가 빠져나왔다. 녹색 몸은 딱딱한 갑옷으로 변했고 황금색 반점은 광채를 뿜어냈다. 뿔만 나지 않았을 뿐이지 풍뎅이와 유사한 외양이었다. 그들은 공중을 선회하며 즐거운 듯 키득거렸다. 그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닭살이 오싹 돋았다. 이러다간 그가 제 이의 금붕어 꼴이 될 판국이었다. 허겁지겁 휴대폰으로 119에 전화를 했다. 흥분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차분했다. 일말의 떨림도 없었다. 119 응급차가 집주인 남자를 병원에 싣고 간 후 그는 허수아비처럼 앉아 먼 산만 봤다. 견장인양 어깨에 부착된 레프트와 라이트는 더듬이를 바짝 세운 채 그의 뇌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귀마개 역할에서 감시꾼 역할로 등급이 상승된 벌레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이유를 타진하는 그의 혀가 두려움으로 꼬부라지고 있었다. 맙소사! 벌레들을 무서워하는 자신의 비루한 꼴 좀 보라지. 그는 자기비하의 늪에 빠질 까봐 겁이 났다. 새로 생긴 다리로 보행연습을 하고 있던 라이트가 거들먹거렸다.

 “지구의 곤충과 비교하지 말아줘. 우리의 변화는 완전변태가 아닌 진화야.”

 “그게 아니라......”

 불덩어리를 삼킨 듯 목구멍이 타는 통증을 감수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집주인 남자 말이야. 저러다 생명에 손상이 있으면......”

 너희를 과실치사범으로 고발할 거야. 입안에서 뱅뱅 도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벌레들의 그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이 과잉방어로 승화됐다고 믿을 만큼 그는 순진하지 않았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순전히 공동체의 생존과 균형을 위해 그랬으리라. 인간 한 명과 벌레 두 마리로 구성된 공동체. 에잇! 엿이나 먹어라. 

 “우리의 능력은 일취월장하고 있어. 인간의 혈관을 압박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야.”

 레프트의 우쭐대는 떠벌임이 그의 예측에 찬물을 끼얹었다. 벌레들은 자신들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집주인 남자를 희생의 제물로 삼은 것이다. 지구인의 나약함을 맛보며 사디즘적인 쾌락을 누리고 싶었던 게 벌레들의 본심이었다. 그 콩알만한 두뇌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이제 그의 의지는 벌레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그가 도망치거나 굶어죽거나 자살하는 것, 그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도 읽을 수 있어?”

 그는 벌레들이 완강히 부인해주기를 애타게 빌었다. 누군가 자신의 뇌구조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큼 소름끼치는 악몽은 없으니까.

 “아니.”

 라이트가 대답하기까지 30초가량 걸렸다. 착시현상일까? 레프트의 일자눈썹이 꿈틀했다. 불신의 그림자가 그와 벌레들 사이로 끼어들어 장벽을 만들었다. 그는 벌레들이 자신의 생각을 훔쳐보지 못하도록 단속하리라고 맹세했다. 그렇지만 무슨 수로? 그의 뇌는 공개된 암호였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그 암호를 통해 지구를 탐사하고 있었다.

 하루는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귓속이 휑하니 찬바람이 불었다. 벌레들이 어디로 갔지? 점쟁이가 활동을 재개한 듯 귓속이 간질간질했다. 벌레들은 그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이었다. 그들의 통제 없이는 그의 삶이 아나키 상태에 침몰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벌레들은 여전히 그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그의 휴대폰을 켜고 각자 여섯 개의 다리를 움직여 종횡무진 메뉴를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그는 배알이 뒤틀렸다. 저것들이 전자파를 무시할 정도로 간덩이가 부었나? 뒤통수에 눈이 달린 양 레프트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기쁜 소식이 있어. 우리의 면역체계는 전자파에도 안전하게끔 강화됐어.”

 그의 얄팍한 속임수는 된서리를 맞았다. 그가 임의로 내린 휴대폰 접근금지령은 허사가 되었다. 한층 과감해진 벌레들은 컴퓨터를 켜고 마우스 버튼을 눌러 프로그램을 작동하는 대담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벌레들의 지적 수준이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그는 아연실색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서라도 벌레들의 급속한 성장에 제동을 걸어야했다.

 “내 휴대폰 요금과 초고속 인터넷 요금은 몇 달째 체납상태야. 너희가 요금을

  내준다면 모를까, 휴대폰과 컴퓨터는 당분간 사용 보류야.”

 레프트와 라이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냉소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휴대폰 이동통신회사에 접속하더니 그의 결제내역을 위조했다. 그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해킹 프로그램을 만드는 법은 언제 배웠지?”

 주눅이 든 나머지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그가 묻자 레프트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너의 뇌에서 정보를 채취했지. 일 년 전 네가 읽은 책‘해커가 되는 법’기억

  나?”

 벌레들은 단순히 귀마개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그의 뇌에 저장된 정보를 암암리에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조만간 벌레들이 그의 뇌를 파고 들어가 그를 조종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석 달 동안 레프트와 라이트는 그를 지원하는 척 하며 실은 그로부터 단물을 빨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너희는 내 개인적인 기억도 열람한 거야?”

 벌레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눈짓을 교환하는 게 그의 눈길에 잡혔다. 라이트가 앞다리로 반달눈썹을 매만지며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우리는 유익한 정보만 습득해. 인간의 개인사는 당연히 제외야.”

 야바위꾼들 같으니.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 벌레들을 향한 본능적인 살의가 그의 목을 옥죄어왔다. 우주의 먼지를 타고 지구로 내려왔든 외계인이 그를 납치해서 귓속에 벌레를 심었든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연한 적으로 드러난 이상 벌레들을 퇴치하고 자기 인생의 주인자리를 되찾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벌레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스타크래프트를 가르쳐주었다. 그들이 게임에 탐닉하는 사이 그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계략을 짜느라 잔머리를 굴렸다. 1초에 5회의 마우스 클릭으로 유닛에 명령을 내리며 레프트가 넌지시 물었다.

 “괜찮아? 이어폰이 점쟁이의 비꼬는 소리를 막아주고 있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그의 뇌리에 지시등이 켜졌다. 벌레들의 압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을 확보한 것이다. 그는 벌레들에게 애끓는 호소를 했다. 평생 귀마개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너희의 인격을 억압하는 처사다. 강박증의 원인이 된 점쟁이를 벙어리로 만들어 달라. 귓속을 휘저어놓는 점쟁이의 악담이 멈추기만 하면 너희의 자유시간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점쟁이를 징계하자는 그의 주장은 벌레들의 호응을 얻었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마우스에서 다리를 떼더니 자애로운 통치자처럼 선선히 머리를 주억거렸다. 스타크래프트와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생존 게임은 그의 원룸에서도 성황 중이었다. 비열한 책략을 쓸수록 생존확률이 높아진다는 원칙은 전적으로 유효했다. 그가 점쟁이의 집주소를 알려주며 약도를 그리려고 하자 벌레들은 괜한 수고 말라며 더듬이를 흔들었다. 그의 뇌로부터 색출한 정보에는 과거의 궤적이 누락되는 일 없이 샅샅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음 날 오전 11시 경 레프트와 라이트는 점쟁이의 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단서를 남기지 않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그는 정신없이 짐을 쌌다. 벌레들의 손때로 더러워진 컴퓨터는 꼴도 보기 싫으니 버려두고 가는 게 상책이다. 최면의 노예가 된 슈퍼마켓의 주인이 매주 배달하는 식품으로 빼꼭히 들어찬 냉장고도 거들떠보기 싫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지? 그는 의탁할 곳이 없었다. 벌레들에게 길들여진 그의 자립심은 미아가 돼버렸다. 의존해서 사는데 익숙해진 그는 영구적 무능력자로 판정받았다. 벌레들이 진화의 계단을 오르는 반면 그가 퇴보의 나락으로 떨어질 줄이야.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오열이 터져 나왔다. 우주의 진화는 벌레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언제나 준비된 패자였다. 자연도태의 섭리에 순응해야하는. 잡동사니 가운데 털썩 주저앉은 그의 눈에 분무살충제가 띄었다. 병을 흔들어봤다. 내용물이 반쯤 남아있었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는 마지못해 비디오폰의 화면을 들여다봤다. 화면에는 아무도 비치지 않았다. 그가 짜증을 내며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화들짝 놀라 살충제를 침대 밑에 감췄다. 30분 만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벌레들을 어떻게 맞으면 좋을지 속수무책이었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어질러진 집안을 보고도 태연했다. 그들은 싸다 만 짐짝 위에 앉아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떠보듯 물었다.

 “우리가 일찍 돌아와서 네 계획을 망친 건 아니겠지?”

 그는 뜨끔했으나 딱 잡아뗐다. 인터넷의 중고장터에 팔 물건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벌레들은 피곤하다며 요구르트를 달라고 했다. 접시 바닥까지 내려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핥아먹은 뒤 그들은 일의 경과를 보고했다.

 “일에 차질이 생겼어. 점쟁이의 목구멍에 들어가 성대를 건드리려다 실수로 기

  도를 막았지 뭐야.”

 “점을 보러 옆방에서 대기 중인 고객이 신고할 테니 내일이면 뉴스에 나올 거

  야.”

 그는 자신의 기도가 막힌 듯 양손으로 목을 감싸쥐고 캑캑거렸다. 고통에 민감하던 그의 고막은 극도로 무감각해져 있었다. 고막을 두터운 철판으로 교체한 인간만이 체험하는 무미건조함. 점쟁이의 죽음은 그의 내면의 토네이도를 몰아낸 후 화강암을 켜켜이 쌓았다. 트라우마로부터 격리된 안전지대. 유아적 세계로 퇴행하는 청년을 위한 인큐베이터.

 “복수가 이루어졌으니 네 소원을 성취하는데 전념하도록 해.”

 “네 작품이 출판되어 빛을 볼 수 있도록 우리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줄게.”

 그를 독려하는 벌레들의 표정엔 실험동물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호기심이 서려있었다. 미로에 갇혀있던 실험용 쥐의 눈앞에서 장애물을 제거하면 실험용 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실험용 쥐가 미로를 탈출하는 장면을 그려보았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라면 게임의 변수가 아주 없지는 않다. 인터넷에서 점쟁이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후 그는 결심을 굳혔다. 벌레들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그는 소설 창작에 착수했다. 레프트와 라이트는 그의 글을 읽으며 불만스러운 듯 눈썹을 찡그렸다. 진부하다. 맥아리가 없다. 단어 선택이 미흡하다. 정곡을 찌르는 혹평에 의기소침해진 그는 컴퓨터에서 손을 떼고 침대에 뻗었다. 너희가 직접 써봐. 이 잘난 벌레들아. 그는 혼곤한 낮잠에 잠겨들었다. 사육통에 든 풍뎅이에게 곤충젤리를 주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배가 부른 풍뎅이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MP3 플레이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주인님, 내가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 보세요.

 그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꿈을 떨쳐버렸다. 벌레들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집필에 여념이 없었다. 해결사이며 살인범이며 작가인 벌레들. 불협화음의 근원이자 부조리의 상징.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인간의 자아를 마비시켜 사육하려는 벌레들의 음모는 성공하지 못하리라. 한 종원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이 탈고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졸작이라면 그의 작가의 꿈은 유예될 것이며, 걸작이라면 그의 자존심은 끝없이 추락하겠지. 두 개의 패 중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패가 무엇인지 그는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정기적으로 식량과 생필품이 보급되었다. 생활비와 집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벌레들에게 창작활동을 떠 맡겨놓고 종일 빈둥거리며 지냈다. 화수분이 된 그의 일상은 단선율로 연주되었다. 화석화된 시간 속에서 그는 세상에 대한 원근감각을 상실했다. 벌레들이 프린트한 원고를 보여줬을 때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개미 행렬처럼 줄지어 가는 문장들. 개미집을 방불케 하듯 높이 쌓인 복사지들. 레프트와 라이트는 자신들이 고작 한 달 안에 장편소설을 쓸 수 있었던 노하우를 털어놓았다. 그의 귓속에 거주할 때 그의 뇌로부터 수집한 정보 중 모든 소설의 데이터를 간추려 재조합했다고. 회의적인 심정으로 그는 원고를 읽어보았다. 벌레들의 호언장담은 빈말이 아니었다. 데이터의 천재적인 재구성은 작품성과 오락성을 적절히 결합한 잡종 소설을 생산했다. 그 장르는 팩션(Faction)이었으나 저변에는 SF 소설과 판타지 소설의 무늬가 찍혀있었다. 우성 유전자의 집약체. 벌레들은 그런 소설의 가능성에 호의적인 출판사도 추천해주었다. 그는 동면에서 깨어났다. 자신이 하려는 일을 실행에 옮길 때가 온 것이다. 그가 우편요금을 낼 돈도 없다면서 우는 소리를 하자 레프트와 라이트는 그의 주거래 은행 사이트에 접속했다. 해킹과 위조의 일률적인 과정을 거친 후 그의 계좌에는 몇 백 만원의 돈이 입금됐다. 원고를 묶고 원고봉투에 출판사의 주소를 적으며 그는 내일 운이 따라주기만을 간곡히 바랐다.

 새 날이 밝았다. 그와 벌레들은 한 테이블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는 김치 접시를 테이블로 나르다가 벌레들의 머리 위로 김치 국물을 쏟았다. 녹색 몸에 붉은 얼룩이 번진 벌레들은 버럭 화를 내며 욕실로 날아갔다. 그는 침대 밑의 살충제를 꺼내 벌레들이 먹던 요구르트 접시에 듬뿍 뿌렸다. 몸을 씻은 벌레들이 젖은 날개를 털며 돌아왔다. 그들은 살충제가 든 요구르트를 남김없이 핥아먹었다. 레프트와 라이트가 비틀거리다 테이블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그의 기억세포는 몇 번이고 되감기해서 반복재생했다. 그는 빈 요구르트 접시에 벌레들을 집어올린 뒤 욕실로 달려갔다. 벌레들을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리려다 문득 그들의 뇌와 자신의 뇌의 밀접한 연관성이 떠올랐다. 젠장! 욕실을 도로 나와 한참을 서성거리던 그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이 맴돌았다. 그는 벌레들을 밀폐용기에 담고 냉장고의 냉동실에 넣었다. 그가 이겼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은 후 우체국에 가서 원고를 부치기만 하면 그의 인생은 환골탈태하리라. 거울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없었다. 원고봉투를 넣은 가방을 든 손도 하얘져 있었다. 원룸의 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왔다.

 따가운 햇살이 그의 등을 콕콕 찔렀다. 지구의 계절은 6월 말로 치닫고 있었다. 긴 팔의 점퍼를 입고도 와들와들 떠는 그는 다른 별에서 온 관광객인양 이질감으로 함몰되어 갔다. 죽음보다 강한 권태. 권태는 그의 생체리듬을 무너뜨렸다. 가방의 손잡이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졌다. 몇 발자국만 떼면 숨이 찼다. 때 아닌 졸음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원고봉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아무데나 누워 한숨 자고 싶었다. 그의 심장박동은 느려져서 자장가의 곡조를 띠게 되었다. 육체가 함락되자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아집과 미몽의 과부하에 시달렸던 그의 자아는 질량이 증발되어 입자를 방출했다. 냉동실에서 동사한 벌레들의 뇌에서 파생된 미세한 전압이 텔레파시처럼 그의 뇌로 전달됐다. 뇌파가 요동치며 공명이 일었다. 체념을 통해 피안을 넘보는 백조의 노래. 번쩍 스파크가 작열하며 뇌는 의식을 잃어갔다. 카메라 스트로보를 터뜨려 동결시킨 피사체만이 누릴 수 있는 극한의 환희. 그리고 파국. 유한성의 족쇄에서 풀려나 불멸성을 획득한 그는 사라진 별의 잔해를 넘어 은하수를 타고 흘러갔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