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향기
- 작성일 2006-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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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향기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지난번에 어렵게, 용기 내어서 말했듯이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아마도 나의 행동에 현주씨는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런 선택은 나 혼자만의 지극히 이기적인 판단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나를 그렇게까지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현주씨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말로는 다 하지 못한 길고 고독한 나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 중학생 때였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그 때 동성애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철부지였습니다. 그저 여학생들 보다는 남학생들과 더 잘 어울리는 성격을 가진 평범한 청소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또래는 그렇습니다. 남학생이 여학생과 어울리면 당장에 둘이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부끄러운 소문이 났습니다.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여학생들과는 전연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작은 호기심이나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사춘기 시절 특유의 은근한 설렘도 없었습니다. 이성에게 끌리지 않는 성격을 조금은 이상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또래보다 약간 덜 성숙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여전히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고로 진학하면서 나는 자신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악기 다루는 것을 좋아해서 바이올린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예고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독학이라도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로 실업고에 들어갔습니다. 비싼 과외를 받는 다른 누구에게도 연주 실력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나는 악기 연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감정의 표현이 특히 풍부했기 때문에 비록 독학이었지만 빠르게 실력이 늘어갔습니다. 종로의 몇몇 음악 학원에서 테스트를 받아본 결과 나이에 비해서 기교가 성급하지 않고 곡의 해석능력도 꽤 수준급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음악적 감성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이유가 오직 나의 노력과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도움이 약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뚜렷한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사춘기인데도 여학생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이 없는 이유도 역시 그런 천성적인 음악성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이올린의 울림통만큼이나 작게 찢어진, 좁은 생각이었습니다. 반대로 나는 남학생에게 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때를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비틀어진 정체성은 확실히 남학생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는 물론이고 점심을 먹을 때, 숙제를 할 때, 주말에 교회에 갈 때도 남자 친구와 함께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에 교회에서 아이들끼리 선물 교환을 할 때도 생각해보면 나는 늘 남자 아이에게만 선물을 줬습니다.
한 번은 같은 반 여학생을 울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 여자 아이는 남몰래 나를 좋아했었나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빠져나간 늦은 오후에 여학생 하나가 교실에 남아서 혼자 울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나는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게 다름이 아니라 단지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에도 놀랐습니다. 아니, 놀라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별로 감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떠밀려서 교실로 들어서고, 여자애와 나 이렇게 둘 만이 교실에 남았던 때에도 나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습니다. 엎드려있던 책상에 커다랗게 눈물자국이 났을 만큼 슬픈 일이란 게 무엇이었을까요. 교실 밖에서 웅성거리던 아이들의 장난 끼 섞인 소음이 운동장 먼 곳으로 메아리치고 있을 무렵, 한 여름의 교실이 그렇게 싸늘할 수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매미소리가 들리니까 팔이랑 다리에서 쭈뼛한 소름이 일었습니다. 여자 아이는 계속 울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내 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습니다. 눈은 토끼처럼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고 살구 색 볼은 퉁퉁 부어서 너무 익어버린 복숭아 같았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었습니다. 교실 뒷문에 서 있었던 나는 그대로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발바닥은 쥐가 난 듯 찌릿했고 발 빠른 생쥐들은 허벅지와 허리를 타고 올라와 뒷목을 조여 왔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많은 단어들 가운데 이런 상황에서 쓸 만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차라리 간단한 말이라도 해서 입안의 이 묵직한 공기를 내뱉고 싶었습니다. 그 때 조금만 늦었더라도 아마 질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생각에 그 말은,
“왜 우니?” 라는, 바보 같은 말이었습니다.
“넌 바보니?” 하고 여자애가 나의 첫 질문을 정확하게 평가해줬습니다.
어차피 바보가 되었으니 더 나빠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질문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왜 울고 있냐고?”
이번엔 좀 길고 고상한 문장이었지만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확실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습니다. 여자애는 여전히 훌쩍거리는 채로 힘들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모르니? 왜 그리 눈치가 없어? 수업 끝나고 매일 마다 학교 정문에서 기다렸단 말이야. 지난 주 화요일 비오는 날엔 우산이 없어서 비를 다 맞고 서 있는데 너는 어쩌면 모른 채 하고 그냥 가버릴 수 있어?”
모른 채 한 게 아니라 정말 몰랐던 것인데 그 말을 도저히 입 밖으로 내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부터 뭔가 묵직한 덩어리 하나가 목젖에 닿아서 속이 매스꺼웠습니다. 나는 최대한 여자애를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입안에 걸렸던 묵직한 덩어리는 꽤 성의 없는 부유물처럼 툭 튀어 나왔습니다.
“난, 몰랐어.”
“잘도 몰랐겠구나? 내가 너 좋아한다는 건 전교생이 다 알 정도로 소문이 나있는 것도 몰랐겠네?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학교 앞 분식집이랑 문방구에 가서도 한 번 물어 보라고. 너만 몰랐단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러고 보니 소문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나는 여전히 여자애가 흘리고 있는 눈물과 떨리는 목소리가 무엇 때문인지 도대체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조금은 알 것도 같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답답하게 억억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니까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나는 그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냥 너 혼자 일방적으로 좋아한 걸 나더러 어쩌라고? 장단이라도 맞춰줘야 하니? 난 그런 거 관심 없으니까 그만 울고 집에 가!”
기대했던 결과와는 정 반대의 효과가 났습니다. 여자애는 더 큰소리로 울었고 급기야는 반대쪽 복도를 지나가시던 선생님 한 분이 그 소리를 듣고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교실 뒷문을 젖히고 도망치듯 뛰었습니다. 복도를 꺾어져서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온 건물이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야, 이 바보새끼야!”하는 칼 같은 목소리가 등허리 한 가운데를 찢었습니다. 나는 순간 멈췄다가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로 나는 중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 우리 학교 최고의 바보로 소문이 났고 이후로는 여자애든 남자애든 나에게 별로 말을 걸어오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 때문에 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믿었습니다. 밤에 이불을 덮어쓰고 흘렸던 진득진득한 눈물은 남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우정의 선물이라고 일기장에 썼습니다. 지극히 내성적인 감수성을 지녔던 나는 그 남자애에게 한 마디 고백도 못 해본 채로 중학교를 졸업해야 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더욱 외톨이가 된 나는 상급학교로써는 드문 남녀공학에 있었으면서도 그 흔한 미팅 한번 해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학생과 여학생이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패로 갈려 앉아서 유치한 농담이나 하는 것을 아주 우습게 봤습니다. 대신에 나는 바이올린에 더 매달렸습니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 실기 시험을 보려면 적어도 알레그로 비바체 이상의 빠른 곡 두 어 곡과 갖가지 난이도 있는 기교가 섞인 파가니니의 곡 몇 개 정도는 눈을 감고도 연주 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을 해둬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결정적인 기회를 만났습니다. 의심만 하고 있던 나에게 확실히 동성애자라는 단어를 알게 해 준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이었습니다. 김인석이라는 친구였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는 1학년과 2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인석이와 나는 마음도 잘 맞아서 2년 내내 짝이 되었습니다. 교실에서는 물론 옆자리에 앉았고 점심을 먹을 때나 점심을 먹고 나서 운동장에서 놀게 될 때도 우리는 손발이 잘 맞았습니다. 체육시간에 테니스를 배울 때도 우리는 짝이 되어서 좋은 호흡을 보여줬습니다. 우리는 체육 중간고사 실기 시험에서 나란히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은 게 계기가 되어서 더욱 가까워 졌습니다. 나는 서울 수서동에 살았고 인석이는 안양이 집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시험기간엔 서로의 집을 번갈아 가면서 시험공부도 같이하고 한참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컴퓨터 오락 '레밍즈'도 재미있게 했습니다. 인석이는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나보다는 약간 더 컸습니다. 살결은 부드러웠고 손가락은 가늘었습니다. 피부는 잘 익은 코코아 열매 색깔이었습니다. 입술에 닿으면 단 맛이 날 것 같이 짙은 갈색의 살갗은 온 몸에 아름답게 입혀 있었습니다.
아직 서로에 대해서 잘 몰랐던 때, 나는 인석이에게 일부러 목욕탕에 같이 가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 때 인석이의 등을 밀어주는 척 하면서 맨 손으로 만져봤던 그 벨벳감촉의 연한 살의 느낌은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인석이가 내 등을 밀어 줄 차례가 되자 인석이 역시 때수건이 아닌 맨 손바닥으로 은근슬쩍 내 등과 엉덩이를 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나는 인석이와 친구 이상의 어떤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인석이는 아는 게 많고 조숙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공부를 하려고 인석이네 집에 갔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고백했습니다. 새벽 1시 정도까지 같이 공부를 하다가 대충 씻고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잘 때였습니다. 나도 그랬지만 인석이도 잠이 오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인석이는 커다란 눈을 멀뚱히 뜬 채로 천정을 보며 말했습니다. 잠꼬대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렇다고 하기엔 음성이 너무 또렷했습니다.
“난 3학년 올라가면 연기학원에 다닐 꺼다. 탤런트 될 거야.”
부엌 어딘가에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말소리 하나하나에 리듬감을 주었습니다. 나는 파가니니의 복잡한 변주곡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바흐의 평균율을 머릿속에서 따라가고 있었는지 몽롱한 상태였습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넌 얼굴도 잘생겼으니까. 너처럼 눈이 크면 화면도 잘 받는다고 하잖아.”
“하지만 키가 좀 작아서 걱정이야. 백 팔십은 되어야 하는데. 너는 뭐 할 거야?”
갑자기 나는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그 목표를 잊은 적이 없었는데도 막상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을 하자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있다가 숨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바이올린을 해야지….” 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언젠가 음악실에서 연주하는 거 몰래 엿들었는데, 굉장하더라.”
“그랬어? 언제?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게 더 많아. 감정은 좋은데 개인레슨을 받지 못하니까 기교면에서는 많이 딸려.”
“그렇지도 않던걸? 평균율을 연주할 때는 마치 두 대의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것처럼 독립적인 멜로디라인 연주가 생명인데 네 연주는 정말 대단했어. 실제로 음악실 문을 조금 열고 네가 연주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누군가와 이중주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거든.”
나는 바흐의 평균율을 머릿속에서 악보로 그려봤습니다. 두개의 멜로디와 하나의 반주 선율 - 연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바흐는 다중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할 정도로 각각의 음 진행에 있어서 개별적인 느낌을 강조했습니다. 하나의 멜로디가 앞서가면 다른 하나가 따라옵니다. 그러면 반주의 묵직한 선율은 저 멀리서 손을 흔들어 배웅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낮은 음역대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반주를 맡았던 선율이 제 2주제로 변주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맨 먼저 주제를 끌고 나갔던 고음의 날카로움은 가느다란 실타래가 되어 두 번째 주제를 감싸줍니다. 두 선율이 번갈아 가면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지금까지 주제 선율을 졸졸 따라오기만 했던 수줍은 중간 음은 이제 두개의 주제 멜로디를 교묘하게 섞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합니다. 평균율에서 각각의 멜로디와 반주는 서로 다른 인격체를 가졌습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대화하고, 제시하고, 이해하면서 커다란 그림을 그려가는 게 바흐의 방법입니다. 나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나는 내 안에 싸우고 있는 서로 다른 나의 멜로디를 조율하며 내 몸을 이해시킵니다. 그리고 온 신경을 바흐의 다중인격에 집중하면서 연주할 때 풍겨져 나오는 옅은 송진 가루 향기를 맡습니다. 그 향기가 힘이 되어서 손가락은 바이올린 위에서 우아한 춤을 춥니다. 그러면 손가락과 활을 잡은 손목은 서로 다른 생명이 되고 송진의 향기는 내 몸과 손과 감은 눈과 수줍음과 자의식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고요함 속으로 가두어버립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전혀 의외의 질문을 했습니다.
“음악 많이 들어?”
“연주는 못해도 듣기는 많이 들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거든.”
“의외인 걸? 요즘 애들 듣는 거 보면 대게 서태지나 듀스, 아니면 현진영이잖아. 나머지는 시시콜콜한 발라드나 듣고.”
인석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목소리가 내 귀에 더욱 가깝게 다가왔습니다. 인석이의 목소리는 주제를 따라가는 중간 음이었습니다. 가늘지도, 징그럽게 굵지도 않은 인석이의 목소리가 내 귀에 닿아서 귓바퀴 안쪽의 하늘하늘한 솜털을 자극했습니다. 한참을 말이 없던 인석이의 목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극적으로 변주했습니다.
“나, 너 좋아한다. 아주 많이.”
나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인석이도 그걸 느꼈습니다.
“짜식, 놀라지도 않네?”
당연히 놀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인석이게 당연한 고백을 받았고 나 역시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인석이가 다시 말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그냥 친구 이상이다.”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는 여전히 천정을 바라보면서 인석이에게 물었습니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응. 확실히 그래.”
그리고는 한참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 시간은 넓고 긴 무한한 강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방금 서로의 손을 잡고 안개 낀 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곧이어 두 발이 강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잡은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거친 숨을 들이키자 짙은 물안개가 한 무더기 콧속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비릿한 민물의 향기 - 송진의 향기와는 대조적인 미끄러운 물고기의 비늘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고개를 돌려서 옆을 봤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꽤 가까운 곳에 인석이가 있었습니다. 잠이 든 것인지 인석이는 눈을 감고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나도 따라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곤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 확 밀려왔습니다. 나는 인석이의 입술에 내 입을 맞췄습니다. 인석이의 입술은 적당히 촉촉했고 나는 쓸모없는 장작처럼 비틀어지고 바짝 말라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입술을 맞대고 깊은 고독과 대화했습니다. 다음 순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티셔츠 속에 손을 넣어서 신의 작품을 조심스레 매만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늦게까지 잠을 잤고 인석이네 어머니께서 다그치시는 소리에 겨우 실눈이라도 뜰 수 있었습니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먹은 것처럼 지난밤의 일은 끊어진 필름처럼 헛바퀴만 돌 뿐이었습니다. 그 때 까지도 인석이와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학교 갈 시간 늦겠다며 방문을 탁탁 두드리는 소리에 달콤했던 꿈은 현실의 세계와 빠르게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시합이라도 하듯이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었습니다. 그러다가 인석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웃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는 킥킥 거리면서 참지 못한 웃음을 입에 머금었고 인석이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커다란 눈을 반달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한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요? 인석이는 자기가 동성연애자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아는 선배와 섹스를 한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곧 나도 인석이와 다르지 않은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그 때 - 그리고 그 후로도 - 나는 인석이와 섹스를 한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나는 섹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것만이 인석이와 내가 약간 다른 점이었습니다. 인석이와 나는 서로에게 단순히 좋아하는 것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인석이는 이제까지는 몰랐던 진짜 ‘나’에 대해서 알게 해주었습니다. 나의 겉모습은 실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진짜 모습은 실체의 안쪽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혼란스러웠습니다. 나의 겉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남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진짜 나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그림자뿐입니다. 인석이에게 느꼈던 감정은 남자나 여자로써 느끼는 매력이나 욕정, 호기심, 그 무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화학적인 반응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봄이 되면 싹이 나고 여름이면 열매가 열리는 것처럼 참 당연한 이유로 나는 남자들에게 더 소중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다녔던 교회에서도 나는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오히려 나와 같은 성적인 소수자를 정상인의 범주에서 빼놓기가 일쑤였습니다. 대학 실기 시험을 두어 달 정도 남겨 놓았을 때 어렵사리 만나서 상담을 했던 서글서글한 목소리의 남자 전도사님은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단박에 단정 지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기도 생활을 통해서 변화 된 삶을 살라고 충고해줬습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로 교회 문을 나섰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전도사님은 이년 전에 지방에 있는 큰 교회로 옮겨갔습니다. 비밀을 지켜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전도사님이 가시고 나서 바로 다음 주에 목사님이 나를 보자고 전화가 왔습니다. 나는 목사님을 만나지 않았고 그 주에는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교회 사람들은 물론이고 길을 가다가 만나는 모든 이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강박증에 사로 잡혀서 몇 달간을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 해, 나는 실기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대학교의 높은 담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악기는 보통 천만 원이 넘는 고가였습니다. 비싼 악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놀라운 소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프로의 세계에서는 또 다른 말이겠지만 우리 같은 고등학생들은 특별히 천재가 아닌 이상에야 실력은 다들 거기서 거깁니다. 입시생들 사이에선 불문율처럼, 비싼 악기를 가지고 있는 순서대로 대학에 들어간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악기는 60만 원짜리 스트라디바리 카피 제품이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의 바이올린에서는 확실히 멋진 소리가 났습니다. 비브라토의 가냘픈 떨림은 나의 모든 살갗을 자극했습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레가토, 피를 흥분 시킬 정도로 툭툭 내던지는 대담한 피치카토 주법에 나는 한없이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실기 고사장에 들어서자 예상했던 결과가 나를 더욱더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음표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고 싸구려 악기를 들고 있는 내 손은 부끄러워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준비했던 곡은 모차르트와 파가니니의 곡이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럭저럭 넘겼지만 상당한 연주 기술을 요하는 파가니니는 나에게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8분 쉼표 두개를 빼먹고 중간에 있는 달세뇨를 그냥 지나쳤습니다. 도중에 연주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고 맨 마지막 리타르단도까지 도착했습니다. 음표 밑에 있는 ‘rit…’라는 글자가 눈물 때문인지 흐리게 보였습니다. 연주의 마지막을 알리는 리타르단도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처럼, 보잘것없는 악기를 맨 내 왼쪽 어깨처럼 측은하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재수를 하기도 싫었고 바이올린을 다시 하기란 더 싫었습니다. 그 해 나는 2년제 전문대학에 들어가서 고등학교 때처럼 꽉 짜인 시간표를 이번에는 내 손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인석이는 지방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들어갔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 둘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섹스에 관심이 있었던 인석이는 주말엔 부산과 마산을 드나들며 게이바에서 친구들을 사귄다고 들었습니다. 십 몇 년이 지난 지금, 인석이가 탤런트가 되었다면 TV 드라마에라도 나왔겠지요. 하지만 나는 그 후로 한 번도 인석이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몇 년 전 스포츠신문에서 홍석천의 커밍아웃 기사를 보고 나는 바보같이 인석이가 생각났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나는 그래도 군대를 갔다 왔고 전역 후에는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몇 년 했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서 해결 되지 못한 수많은 문제들은 언제나 나를 괴롭혀왔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싶었지만 사회는 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고 세상에 반기를 들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습니다. 예술을 하고 싶었지만 나의 싸구려 바이올린은 창고에 틀어박혀 있었고 죽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과연 죽음으로 해결 된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만이 나를 가로막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나마 작은 희망이 되었던 것은 이 땅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나처럼 자신들을 숨기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갑니다. 피부색이 다른 것도 아니고 얼굴에 커다란 칼자국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서로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신기한 감각을 가졌습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카페 정모에 나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대게의 경우 나처럼 동성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만 섹스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회원은 남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여자들이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한 여자 분을 만났습니다. 곱슬머리에 키가 작고 통통해서 귀여운 면이 있었는데 얼굴엔 온통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모임에서 몇 번 보긴 했는데 그 때 마다 늘 혼자였고 맥주만 한 병 비우고는 왔던 모습 그대로 조용히 카페를 빠져나갔습니다. 나는 그 여자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무슨 말로 첫 스타트를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 이전까지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거의 없었던 터라 이런 행동은 너무도 부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는 또 다시 여자에게서 ‘바보 새끼야!’ 같은 말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냈습니다.
“맥주를 좋아하시나 봐요? 저는 보다시피 커피를 좋아합니다. 헤이즐넛요.” 첫 마디는 대충 그 정도였습니다. 여자 분은 서있는 나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악수를 하자는 뜻 인줄 알고 당황했습니다. 나는 들고 있던 커다란 머그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손바닥을 바지에 대충 닦았습니다.
“앉으시라고요.” 여자 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의자를 권하고는 손을 다시 거뒀습니다.
“저는 카페에 들을 거의 올리지 않아서 모르실거에요. ‘히말라야’라고 해요.”
“히말라야라, 아이디가 아주 시원시원 하네요. 아, 저 역시 거의 유령회원 입니다. 저는 ‘하루키’죠.”
히말라야는 맥주를 한 모금 먹고 나서 그제서 나를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루키라면 일본 작가 말인가요?”
“네.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단편들을 좋아하거든요. 히말라야는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히말라야는 다시 맥주를,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은 양을 목으로 넘겼습니다.
“오년 전에 오빠가 히말라야 등반하다 사고로 죽었어요.”
“아아, 그랬, 군요.”
이런 건 첫 대화라고 하기엔 너무 무거운 게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화제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히말라야는 마치 준비했다는 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펼쳐놓았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족들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자기가 키우고 있는 작은 고양이 이야기 까지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줘야 했습니다.
히말라야와 내가 형식적으로나마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는 것은 구지 여기서 길게 얘기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3년 후에 결혼 했습니다. 말했듯이 형식적이었습니다. 히말라야의 아버지는 한창 잘 나가는 중소기업의 사장님으로 굉장히 무뚝뚝하고 조선 시대에 살다가 실수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 천 년대에 떨어져버린 것 같은 지독히도 가부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권위와 보수적인 성격을 빼면 지폐로 만든 가죽밖에 남지 않을 것 같은 꽉 막힌 스타일입니다. 그 분은 딸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습니다. 히말라야는 내성적이고 순종의 미덕까지 두루 갖춘 그의 애완동물 같았습니다.
나는 당시에 문예지에 글을 써 내어 약간의 돈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마추어인지라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바이올린에 비하면 상당한 매력을 주었습니다. 나는 프로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글 쓰는 것을 계속 하고 싶었습니다. 히말라야는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국어 선생님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통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목표는 가족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글을 쓰고 싶었고 히말라야는 독재자인 아버지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민주적으로 독립하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는 계획을 세웠고 그것은 우리 두 사람과 양쪽 부모님을 모두 즐겁게 해드리는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히말라야와 나는 결혼했습니다. 물론 형식적인 행사였고 우리는 혼인신고는커녕 한 집에서 살지도 않았습니다. 히말라야의 아버지는 딸의 정상적인 결혼식에 많은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이십 여개의 대형 화환이 들어서서 결혼식장은 마치 성인 오락실의 개업식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또 우리 부모님대로 내가 남자가 아닌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데 두 손을 들고 환영 해주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대충 삼 년 전까지의 일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 후 삼년 동안 그럭저럭 결혼생활을 잘 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형식적인 행사가 끝나고 나자 예상했던 대로 양쪽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끊었고 우리는 지루한 독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히말라야는 변화 같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고지식한 성격이라 나름대로 학교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원하던 대로 아버지로부터 독립했고 히말라야에게는 자유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물론 나도 부모님으로 부터의 독립은 있었지만 고독한 자유는 수백 년 묵은 러시아의 차가운 침엽수림처럼 하늘을 가렸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터넷 카페 모임에 자주 나갔습니다. 그 무렵 아이러브스쿨이라는 동창생 모임 사이트에 재미를 붙이고 부터는 동성애자모임은 거의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학교 모임에서 번개 모임을 가졌을 때 뜻하지 않게도 나를 바보새끼 취급했던 그 여자애를 또 다시 만났습니다.
처음엔 서먹했지만 우리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울보 여자애와 바보새끼 한 마리는 모임이 끝날 때 까지 남아서 맥주를 마셔댔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는 있는지에 대해서 전연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손에 묻어날 정도로 짙은 화장을 한 울보 여자애가 약간은 풀어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습니다.
“그래, 바이올린 해서 대학 갔냐?”
“못 갔어. 아니, 안 갔어. 더러워서 말이지.” 내 말을 듣고 울보 여자애는 갑자기 숨이 멋을 것 같이 꺽꺽거리며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킥킥킥. 세상은 그러니까 정석대로 해야 된다니까. 악기 가지고 대학 갈려면 그만큼 돈을 쳐 발랐어야지. 미술 쪽도 그렇다고 하데. 그런 쪽은 돈 쓰는 게 정석이야. 안 그래?”
동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따라서 웃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어졌습니다.
“정상적으로 하던 비정상 적으로 하던 그게 다 사람들이 정하기 나름 인거야. 그러면 그 사람들은 누가 정상이라고 말하던?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까놓고 얘기해서 돈 쓰는 게 어떻게 정상이야? 안 쓰더라도 소리 좋고 재능 있으면 그걸 점수로 봐야지. 내가 보기엔 시험 볼 때 내 앞에서 팔짱끼고 서있는 놈들이 다 비정상이더라.”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이긴. 네 말처럼 그걸 사람이 결정하니까 우습다 이 말이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쪽수가 많으면 그게 정상이야. 세상이 다 그런걸 뭐.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 눈 두개 달린 놈이 가봐라. 눈 두개 달린 놈은 병신이야.”
울보 여자애는 상당히 취기가 올랐는지 실금실금 웃으며 얘기를 계속 했습니다.
“야, 세상에 바이올린으로 대학 가려고 하는 고등학생들은 여기 강남역 근처에서 술 처먹고 있는 애들 중에서도 수 천 명은 될 걸? 게다가 무슨 천재가 아니고서야 실력도 다 고만고만하고. 전국적으로 그런 애들 수십 만 명이 대학 갈려고 세 살, 네 날 때부터 바이올린 켜고 있을 생각을 해봐. 우리나라에 음악 대학이 수백 개가 되어도 모자랄 판이라고. 킥킥킥. 그러니까 네가 예나 지금이나 바보라는 거야. 킥킥킥.”
“그러는 너는 이제 울보 아니냐?” 바보라는 말을 들으니 나도 옛날 생각이 그렇게 물었습니다.
“거짓말 같이 들리겠지만 말이지, 난 그 때 이후로 한 번도 안 울었단 말씀이야. 킥킥킥. 너한테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지, 세상이란 게 울어갔고 해결되는 거 하나도 없더라. 사람들 하고 같이 살려면 사람들 하고 같은 방향으로 그냥 쭉 따라가면 된다니까. 그러면 반이라도 성공이야. 괜히 딴 데 쳐다봤다가는 본전도 못 챙기는 게 여기 서울이 아니겠어?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이 보면 뭐, 웃을 일도 없지만 서도 울 일도 없는 거더라고. 오비 라거든 카스든 다 똑같아. 아사히나 케이지비나 호가든이나 다 똑같이 먹으면 오줌으로 나오는걸 뭐.”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 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철들기 전부터 방향이 틀어졌으니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계속 가자니 막막하고 무섭고 그런 길에 서있는 사람도 있다고.”
“이거 꽤 철학적이시네? 네가 그렇다는 거야? 하긴 넌 바보니까 말이지. 킥킥킥.”
그래서 울보 여자애는 지금 무슨 결혼정보 회사에서 텔레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이력사항을 만들어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팔아먹는 게 자기 일이라고 비약했습니다.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이 물건으로 보면 스트레스 덜 받는다니까. 그냥 서로 이어주기만 하면 지네들 끼리 지지고 볶고 하다가 맘에 안 들면 또 전화해서 물건 소개시켜주면 돼. 어때, 아주 쿨 하지? 여기선 말이지, 너처럼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바보는 상품가치도 없는 거야. 상품이란 건 말이지, 여기다 갔다 붙이면 척 붙고 저기다 갔다 붙이면 또 척 붙고 그렇게 아무데나 다 철썩철썩 붙어야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거라고. 킥킥킥.”
역시 동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우습지도 않았고 얘기를 듣다보니 고개는 점점 무거워져서 결국엔 탁자에 머리를 대고 그대로 잠들어버렸습니다. 거기서 얼마나 더 많은 말을 주고받았는지 생각이 흐려졌습니다. 눈을 떠보니 나는 강남역 근처 무슨 모텔에 있었고 TV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엔 똑똑 부러지는 글씨체로 ‘너 술은 잘 못하는구나? 전화해.’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줄을 바꿔서 그 밑에는 휴대전화 번호도 얌전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포스트잇을 들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반으로 접어서 주먹에 쥐었습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 또 한 번 깊이 생각했습니다. 물 내리는 버튼을 누를 때 손에 쥐고 있던 포스트잇도 함께 물속에 버렸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내 오물들과 함께 사라져버려도 될 만한 더러운 휴지조각이라고, 내 안의 바보새끼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방법들로 노력을 해왔습니다. 나의 감성은 부인할 수 없는 동성애자이지만 내 이성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사람들은 그저 신이 애초에 만들어 놓은 본성 자체에 충실하고 그것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고독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괴로웠던 사실은 나의 겉과 속이 전혀 다른 두 사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영원히 숨기며 살아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게이바나 카페 정모에도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나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내가 몇 년 동안 혼자 살고 있는 집엔 TV나 라디오도 없습니다. 미디어에선 성을 상품화해서 팔고 있습니다. 게다가 실체는 없고 과대 포장한 커다랗고 달콤한 사람 모양의 사탕들이 나의 감성을 유혹합니다. 나는 그것들을 이겨낼 자신이 없습니다. 나의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은 바흐의 평균율처럼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것들은 제각각 자신이 첫 번째 멜로디가 되고 싶어서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잘 조율할 수 있는 지휘자는 아닌가봅니다.
칠흑같이 고독한 일상 가운데서 현주씨에게 작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겨울부터 입니다. 전에 만나서 말했듯이 그 원인은 현주씨에게서 풍기는 묘한 향기 때문입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쓰고 있는 향수 이름이 무언지 물어봤습니다. 금요일에 물어봤지만 현주씨는 친절하게도 월요일에 잊지 않고 향수 이름을 말해줬습니다. 나는 그날 퇴근하자마자 인터넷에서 현주씨가 알려준 향수 이름을 검색해봤습니다. 결과는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페레가모의 인칸토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대중적인 향수였습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왜 그런 평범한 향수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은 실제로 향수 매장에 들러서 인칸투의 향기를 맡아봤습니다. 그게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엔 인칸투의 여러 가지 버전이 다 구비되어 있었지만 어떤 것도 현주찌에게서 나는 향기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비슷하긴 했지만 정확히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는 고독한 밤이 있었고 밤은 이런 저런 생각들을 고민으로 만드는 마법의 시간입니다. 나는 현주씨에게서 느꼈던 향기와 내가 어떤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까에 대해서 매일 밤마다 고민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그 원인이 향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물론 인칸투의 향기는 달콤하고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종로나 명동에 나가면 수많은 여자들이 그런 향기를 몰고 다닙니다. 그런 여자들에게서는 지금과 같이 묘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고백하건데, 이성에게서 뭔가 특별한 감정을 받은 것은 현주씨가 처음 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남자에게서 받는 느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였던 인석이에게서 받은 느낌과 현주씨에게서 받은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다릅니다. 나는 지금 그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주씨에게도 여러 가지 고민과 고독한 시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어떤 사람이라도 고민 없이 사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나는 동지를 알아보는 특별한 감각이 있습니다. 현주씨의 눈에는 고독한 눈물이 가랑비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아주 잘 보입니다. 아직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고독함에 대해서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현주씨의 향기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겁이 나서 문 밖을 확인 해 볼 마음조차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독한 밤의 창문은, 거기에 잠겨져 있는 커다란 자물쇠는 녹이 슬어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문밖에서 작은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꿈같은 향기만이 나를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나에게는 여자를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대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건 변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현주씨가 지금의 나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주씨의 향기를 대하고 나서부터 나는 다시 바이올린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십 년도 넘은 세월 속에서 악기는 고장이 나서 새로 사야했고 손가락은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았지만 활 털에 송진가루를 묻힐 때 나던 그 향기는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내 코가 그루누이 같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누렇게 타오르는 것 같은 소나무의 그윽한 향기는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봄부터는 교회 문화센터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바이올린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옛날처럼 어려운 곡을 연주할 만한 실력은 못되기 때문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초보적인 수준의 레슨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생활 가운데서도 몇 안 되는 즐거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가명을 쓰고 있긴 하지만 얼마 전부터 두 개의 문예지에 나의 글을 정기적으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장님의 말씀은 내가 쓰는 글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구체화 되고 삶에 대해서 대안적인 철학이 많이 다듬어 졌다고 합니다. 김지하 식대로 하자면 나에게도 ‘그늘’이란 게 생긴 것일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억눌린 현실 가운데서도 내가 긍정적인 태도로 삶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서 히말라야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완전히 커밍아웃한 것도 나에게는 긍정적인 결과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물론 같이 살지도 않고 서로 개인적인 독립의 상태였지만 형식적으로나마 결혼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무언가 묶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그것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밤은 아직도 고독하고 이 어두운 날들이 언제 어디서 끝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아침이라는 새하얀 태양이 어딘가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희망적인 태도로 이 밤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지금 내 옆에는 아로마 향초가 유치할 정도로 예쁜 빛을 하늘거리고 있고 현주씨의 달콤한 인칸토는 아직도 불 꺼진 창문 저 밖에서 조용히 숨죽여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조금 더 바라는 게 있다면 현주씨의 향기가 나를 기분 좋게 만든 것처럼 나의 무언가도 현주씨의 마음 한 구석에서 고은 싹처럼 피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게 부담스럽지 않은 순박한 꽃이라도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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