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 작성일 2006-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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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이 글을 아버지에게 드려야 하는지 드리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 됩니다. 아버지는 항상 글을 무슨 ‘글자 나부랭이’ 취급을 하셨고 - 아버지에게는 글을 쓰는 재능이 있으셔서 제 이름으로 몇 번 대회에 글을 보내시고 상을 받기도 하였는데 왜 재능이 있으면서 신문이 아닌 모든 글을 혐오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아무짝에 쓸모없는 3살박이의 낙서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셨기 때문에 이 글 또한 그런 취급을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제 마음이 아프리란 점에서 아픔을 감수하고 글을 써야 하나 쓰지말아야 하냐가 고민입니다. 거기서 저는 좋은 해결책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글을 쓰되 아버지에게는 보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글을 쓰려던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어버리는 감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저의 정신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저의 결심이 흔들리는 일은 아마 없을 것 입니다.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보험도 들어놓았겠다 이제 솔직하게 말씀을 드린다면 저는 아마 다짜고짜 ‘저는 아버지를 증오했습니다’ 라고 말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말해놓고서 슬며시 부정하는 이유는 그만큼 저것은 중요한 사항이며 아버지를 아프게 해드릴 것이고 또한 그로인해 저를 아프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아버지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저는 철저하게 탐미주의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 사회가 조장하려는 인식이지만, 저는 미적 기준에 합당한 아버지를 매일 보고 자라온 자식이기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 미에 대해 상당히 높은 비중을 두고 있는데 -제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모두 美라는 기준과 가까운 것을 보면 알 수 있을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또한 아버지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가끔 저는 아버지가 지금의 어머니가 아닌 조금 더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을 했다면 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고모같은 사람이요. 아버지는 아버지 가족이 모두 크고 서글서글한 눈을 가지고 있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사람을 확끄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미’ 에 실증이 나서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었다고도 생각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만약 아버지가 조금 보편적인 미에 실증이 나지 않으셔서 아내를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으로 골랐다면 나는 조금 더 미적 기준에 합당한 인간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만일 제가 외견적으로 아버지를 닮았다면 아마 좀 더 아버지를 좋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를 굉장히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만일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그러니까 저를 가지기도 전인 결혼상대를 생각할 때 알았다면 아버지께서는 아마도 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좀 더아름다운 사람과 결혼을 했으리라고 슬쩍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얼추 반 이상은 맞으리라고 예상해봅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위하시니까요. 저는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한 적이 솔직히 얘기하자면 몇 번은 있습니다만 그런 생각을 반박하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계속 관철하지 못했는데 어릴적에 제가 품었던 생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중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저의 어릴적 생각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때면 자신이 천재가 아닌 것이 조금은 억울한 느낌마저 듭니다. 만약 어릴 적의 생각이 난다면 좀 더 타당하게 내 자신을 설명할 수 있을 텐데요. 나는 신기하리만치 어릴 적의 기억이 단편적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를 어릴 적에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제 단편적인 기억속에서 아버지는 저를 굉장히 좋아하셨고, 저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고, 또한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못난 저도 굉장히 예쁜 아이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리지만 충분히 걸을 수 있는 나이이고 아직 우리가 차를 가지지 않았던 때 할머니집에서 저희 집까지 매일 안아서 데리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별로 놀라지 않았던 것이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러셨을거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 종종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에 들곤했는데 그 때마다 신기하게 일어나보면 아버지 옆에서 자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놀래곤 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저를 안아다 아버지 옆에 누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전 종종 아버지에게 안겨서 방으로 가기 위해 다른 곳에서 잠에 들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좋아했던 우리가 언제부터 ‘증오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것일까요. 아마 그 책임은 전적으로 제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른이었고 그만큼 변화가 적지만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사이의 변화의 책임이 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애써 아버지를 싫어하게 된 순간을 떠올리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면 노력할 수록 떠오르게 되는 것은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행복한 아이였었나 하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위하셨는지는 저의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을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결코 윤택하게 사는 편은 아니었는데도 제가 방학만 되면 40일 중에 2일을 제외하고 전부 산으로 바다로 계곡으로 놀러를 다녔습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매일 놀러를 가는 것이 불만이 될 정도로 말입니다. 그때 저는 40일치 일기를 모았다가 마지막날 한꺼번에 쓰곤 했는데 -그때부터 저의 미루기 근성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장 일기에는 ‘사실 나는 방학내내 놀러를 다녀야만 했고 2일밖에 집에 있지 못했는데 그중 하루는 지친 몸을 푸는데 썼고, 하루는 이 일기를 쓰는데 쓰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쓴 모든 일기는 순식간에 지어낸 이야기 임을 고백합니다. 솔직하게 고백하니 용서해주세요’ 라고 항상 쓰곤 했습니다. 그 얼마나 복에 겨운 소리인지요.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지는 앨범을 통해서도 잘 나타납니다. 사실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눠가질 두명의 자매가 더 있습니다. 아버지도 잘 아시겠지만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그 사실을 정말 알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똑같이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고, 둘째는 아버지의 외모를 닮기 까지 했는데도 아버지는 이상하게 저만 좋아하셨습니다. 제 앨범은 6개도 넘었고, 둘째의 앨범은 2개가 채 되지 않았고, 막내의 앨범 역시 한개를 겨우 넘길정도였습니다. 거기서 애정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혹여나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실 때도 그 사실은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만큼도 술에 강한 편이 아니셨고 그래서 술을 조금만 마셔도 취기가 도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 어떤 사회적 체면에 갈구되는 몸이셨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주량을 과신하고 그 때문에 언제나 술을 마시기만 하면 만취상태가 되어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렇게 만취상태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에게 ‘아휴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어가지고’ 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는데 아버지는 그 말이 틀리기라도 한 듯이 반박하려고 ‘내가 술에 취해도 우리딸 못알아볼까봐. 내가 이래도 우리딸이 영미인지는 안다’ 라며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술에 취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똑같은 말을 반복하셨는데 ‘그래 술에 취해도 영미는 알지’ 라는 말이 대부분을 이루었습니다. -이일은 저도 잊고 있었던 일인데 동생의 일기장을 읽어보던 중 발견했습니다. 둘째 경미는 잠귀가 밝은 편이어서 그만 그걸 듣고 만 것입니다. 어린 그 아이에게 그것은 좀 크나큰 상처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애정의 차이가 드러나나 고민해야 했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어도 잘라낼 때는 가려서 자르게 된다라는 말이 정말 같았습니다. 현관문을 열때마다 보이는 거실의 앨범진열장이 제게는 커다란 고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6개의 앨범은 언제부터인가 전혀 늘지 않게 되었는데 아마 그때부터 아버지와 저의 사이가 벌어진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확실히 중학교때 쯤이었습니다. 중학교는 확연히 초등학교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남녀공학과 여학교의 차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많은 새로운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사춘기를 겪었다고 생각이 되는데 그와 동시에 세상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제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또래라고 분류 된 아이들이 제가 보기에는 한없이 동생같았고-유치했고- 바보같았습니다. 저는 어릴때 많은 책을 읽은 까닭에서인지 남들보다 이해력이 조금 뛰어났고, 책을 한번만 읽고 또는 아예 보지 않고 시험을 쳐도 성적이 괜찮게 나올만큼은 요령이 좋았습니다. 그런 제가 다른 아이들 눈에는 조금 신기하고 존경스럽게도 보였는지도 모릅겠습니다.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놀면서도 상위권의 성적을 받아내는 저의 존재는 어쩌면 희망이거나 이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멍청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한참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저와는 달리 그들은 그런 고민없이 해맑았고, 고작해야 교복을 줄이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특출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쯤 둘째인 경미는 곱셉 을 배우게 되는데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경미에게는 곱셈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곱셈을 해야 했을때 아버지는 신이나서 회사를 다녀온 지친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밤 가르쳐 주셨는데 말이지요.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으며 다그쳤을때 아버지는 영미랑은 달라서 못 가르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단순히 아버지가 저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문득 깨닫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더 사랑하는 이유가 내가 곱셈을 더 잘배워서가 아닐까하고. 다른아이들과는 다른 이 특출난 능력 -지금에와서 보면 별 보잘 것 없는 능력이지만-때문이 아닐까하고요. 저의 그 의심은 어느 정도 타당한 근거들을 갖춰 갔습니다. 아버지는 시험성적을 내게 물어보고는 결과를 꽤나 흥미롭게 들으셨습니다. 반등수가 적힌 성적표를 보여드리면 기쁘다는 듯이 저와 제 동생 모두에게 용돈을 주셨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자 모든 것이 명확해져갔습니다. 저는 5살 때 글자를 읽을 줄 알았고 생일선물로 받은 200여권의 동화책과 과학전집 위인전 따위를 읽어나갔습니다. 둘째는 8살 때 겨우 한글을 떼었고, 막내는 7살 때 한글을 뗐죠. 그리고 둘은 동화책은 겨우 읽었지만 과학전집과 위인전은 잘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7살 때 구구단을 다 외웠지만 동생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제 안에 존재했던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제가 더 사랑을 받는데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위에 말씀드린대로 아버지를 닮아 미형이었고, 막내는 어렸을때 인형이라고 오해받았던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에 반해 저는 그저 두루뭉술한 얼굴에 쌍커풀도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습니다. 예쁜 순으로 친구를 사귀었던 저에게 있어 이 사실은 아주 크나큰 의문이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라면 저는 우리집의 천덕꾸러기였어야 했으니까요. 아버지가 저를 저의 남보다 조금 똑똑하다는 능력 때문에 더 사랑하셨다고 결론 내리게 되자 저는 그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순수하게 좋아했던 제 마음이 배신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 머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만약 내가 둘째와 뇌가 바뀌어 태어났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으셨겠지!’ 어린 저는 상처를 받았고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반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고 추천시험에 가지 않았던것도, 잘다니던 아버지와 함께 교회를 옮겨버린것도 그 반발감의 하나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도대체 어떻게 반항하는 저를 다뤄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업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너무 예뻐서 뭐라고 혼내지 못하시고 그저 참을 수 있을만큼 참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에게도 한계가 존재하고 그 한계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그 일은 제 생각보다 조금 빨라 놀라고 말았습니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떼를 쓰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이면 아버지는 한 번에 모든 것을 들어주셨기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떼를 써본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밤 저는 떼를 쓰게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도저히 허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계속 떼를 쓰는 저를 아버지는 감당할 수가 없으셨고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옆에 있던 것을 잡아 제 쪽-정확하게는 제가 맞지 않을만큼만 제가 있는 쪽의 땅-을 향해 던지셨습니다. 아버지가 예전부터 화가나면 무엇이든 던지는 버릇이 있다는건 잘 알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를 향한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에 저는 적지 않게 놀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저를 또는 아버지를 놀라게 했던 것은 아버지 옆에 있던 그것은 우연히도 거울이 달린 선반이었고, 성실한 거울은 제 본연의 성질을 잊지 않은채 딱딱한 바닥에 부딪힌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는 사실입니다. 거울파편들은 저를 향해 날라왔고 아버지의 힘이 제법 세었기에 벌거벗은 제 다리에 박히기도 했습니다. 거울파편이 박힌 다리에서는 이내 붉게 피가 맺히기도 했습니다. 사실 꽤나 그럴듯한 효과를 연출한 거울조각은 정말 연출된 영화소품처럼 별로 아프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연출된 영화가 관객들에게 엄청난 리얼리티를 가지고 다가가는 것처럼 아버지도 공포영화의 관객마냥 새하얗게 질리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너무 놀라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작은 동물처럼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저는 조용히 제 책상에 앉아 유리조각을 빼내며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아빠가 다시 돌아오셔서 내게 사과를 하고 부탁을 들어주시겠지하고요. 커다란 유리조각은 쉽게 빠졌지만 작은 유리조각은 도저히 손으로 잡히지 않아 계속 휘젖게만 되어서 상처는 점점 벌어지고 맺혔던 핏방울은 어느새 질질 흐르는 정도가 되었을때 방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아버지는 문여는 소리에 우는척 책상에 엎드려 있던 제게 다가오셔서 제 손옆으로 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내밀어 만원짜리 두장을 조심스럽게 놓고 나가셨습니다. 만원짜리 두장이요. 그것은 아마 당시 아버지 지갑에 들어있던 모든 돈이었을 것입니다. 비상금도 만들 줄 모르는 아버지에게는 더욱더요. 뒤따라 들어온 어머니는 유리를 줍고 핀셋으로 유리조각을 빼내시고 약을 발라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어머니가 한것인지 제 동생이 한 것인지 분간이 안 갈정도로 패닉에 빠져있었습니다. 고작 만원짜리 두장이요? 아버지는 세상에 돈이 최고라고 믿고 있으셨습니다. 그 사람의 척도는 가진 재산으로 평가할 정도로요. 하지만 제가 꼭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가정형편이 어렵든지 말든지 제가 원하는 것은 언제든 가질 수 있어서 용돈이 필요하다고 느낄때가 없었으니까요. 저는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때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너무 놀라서 아버지에게 있어서 최고의 애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돈이었단것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어렵고 힘들게 사신 아버지에게 있어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준다는 것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였겠지만 그것이 힘들게 사신 아버지 덕분에 풍족하게 산 제게는 최고의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밤 끊었던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제 앞에서 단 한번도 담배를 피우신 적이 없으셨죠. 담배를 끊게 된것도 저를 피해 집밖에서 겨우 담배를 피고 있는 아버지를 제가 일부러 찾아가 아버지의 담배를 뺏들어 힘껏 들어마시고 켈록켈록거리며 ‘다음에 담배를 또 피면 나도 또 따라 필거야’ 라는 말도안되는 투정때문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날 다시 피웠던 오랜만의 담배가 결코 맛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쓰디쓴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아버지를 기다린 것은 어머니의 화였고, 도저히 아까의 엄청난 사건과 어머니의 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버지는 전기밥통을 던져서 부셔놓고는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아셨습니다. 기록할만한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외박인데도 불구하고 지갑이 텅 빈채로 나간 아버지는 유흥가에서 위로받지도 못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소주 한병만으로도 충분히 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싸구려 소주 한 병 사실 돈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아버지는 아마 어릴적 저와 자주갔던 놀이터에가 담배를, 맛이 없는 그 담배를 밤새도록 피우셨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날 밤은 아마 우리 둘 모두에게 큰 상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저를 점점 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하셨고 저 역시 아버지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혹시 동화 따위를 싫어하는 아버지라도 카이에 이야기를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는 악마의 거울조각이 눈에 들어가 마음을 차갑게 닫아버린 카이라는 소년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제게 던지셨던 거울이 절대 악마의 거울만큼 귀한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찍혀나오는 싸구려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법은 제게도 효과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거울조각은 빠지지 않고 혈관을 타고 심장에 들어가 아직까지 콕하고 박혀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뒤로 점점 더 제멋대로가 되어갑니다. 마침 세상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러운것인가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데 그와 맞물려 저의 마음은 말로 못할정도로 삐뚤어져 갔습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저를 애지중지 하셨고, 아버지의 눈으로 보기에는 한 없이 어린아이 같은 제가 혹시라도 그 더러운 세상에 상처받을까봐 걱정하면서 세상의 차가움과 비정함을 저에게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저는 그렇게 순수하지 못했고 그런것들 따위는 아버지가 가르쳐 주시기 전에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고 한없이 비정하고 냉정하고 세속적이되라고 저에게 강조했던 아버지가 실제로는 순박한 시골청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동네에 살던 가난한 어린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모두 챙기셨던 것은 현실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부르짖던 아버지였고, 그 선물이 1000원짜리 필통이 아니라 5000원짜리 학용품세트였다는 것에 화를 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던 어머니였다는 점은 저에게 커다란 아이러니를 품게했습니다.-어머니는 헌금으로 아버지 몰래 50만원도 100만원도 선뜻선뜻 내고는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하곤 했지만 아마 제게 말한 것보다 더 많이 낸적도 있었을거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랑 따위는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게 깨닫게 해주었는데 그토록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하나님이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람들이 어찌나 가식적이고 내게 역겨운 관심을 가지는지-가령 이번엔 무슨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을거니따위의- 나는 교회가 구역질이 나는 구더기속의 퍼세식똥통마냥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점점 삐딱하게 행동을 하였고 결국은 교회를 다니지 않기로 결심하였지요. 나는 이것이 꽤나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릴 일이란걸 예상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구미가 맞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교회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셨고 하나님이 내게는 복을 주지 않으신다고 말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의 거센 반대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각기 달랐지만요. 어머니는 하나님의 벌을 받을 거라면서 사지가 부러져서 교회에 돌아오느니 어서 잘못된 생각을 뉘우치고 교회를 나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는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지 않아 제가 무사한것보다 차라리 제 사지가 부러져서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거기서 제가 사귀고 교제해야할 누구누구의 아들을 들먹이며 먼 훗날을 봐 결혼상대를 고르게 될 장소가 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바람난 행동을 하면 나중에 피해를 보는건 제 쪽이라면서 교회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장로집사를 앞두고 있는 아버지의 체면을 좀 생각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아버지는 제가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못하는걸 정말 아주 못마땅해하셨는데 그것은 피아노 반주를 하면 그 누구누구에게 상당히 높은 점수를 얻고 좋은 신부감으로 낙인 찍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피아노를 죽을만큼 싫어했고 아버지는 멍청한데 피아노는 칠줄아는 바보에 저를 비교해가며 그녀석만도 못하다는 모욕을 서슴없이 하셨습니다- 두분의 상당히 다르지만 묘하게 같은 교육방침에 저는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망언을 올리자면 두분의 말씀 모두 옳아서는 안될 소리 같았습니다. 저는 머리가 조금씩 트이기 시작할 때였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결국은 하나의 나약한 인간이고 신이나 체면과 명분 따위에 얽매이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순이 가득하고 결코 나에게 가르칠 만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존경할만한 선생의 수업만 듣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한 시간도 수업을 듣지 않는 질이 나쁜 학생이었는데 두 분은 불행히도 후자에 속하셨습니다. 축복의 날이 되어야할 성스러운 주일은 우리에게 언제나 전쟁을 치르는 날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가지 않겠다고 죽어라 떼쓰는 저와 부모님과의 싸움은 서로를 향한 미움을 낳을 정도로 심한 것이었습니다. 오락실에서 적당히 시간을 떼우고 돌아온 날이면 아버지는 몹시 흥분하여 사람에게 얼마나 체면과 겉치레가 중요한지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셨습니다. “너의 본성과 성품이 어떤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너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겉치레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크고 나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될것이다. 그러니까 다음주에는 누구누구장로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오늘은 넥타이가 참 멋지시네요’ 따위의 말을 건네란 말이다” 저는 사실 그 때 아버지의 말을 이해 못한 것이 아니라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지 않으셔도 저는 이미 겉치레의 달인이었습니다. 넥타이가 참 멋지시네요 따위의 말보다 그 장로라면 아내가 골라줘서 억지로 매고 온 넥타이보다 어제 자신이 새로 산 구두에 더 신경을 쓸것이라는 것을 파악할정도로 말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중요시하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딸인 관계로 배우지 않고도 모두 깨달았고, 오히려 아버지를 능가했습니다. 학교선배들에게 제가 한 온갖 아양과 겉치레들을 아버지가 아셨다면 결코 넥타이가 어쩌고 따위의 말은 건네지 못하셨을정도로요. 제가 그리 잘 알면서도 교회에서 그리 뻣뻣하게 굴었던 까닭은 순전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괴롭히고 저 또한 괴롭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어머니야 어떻게 됬든 저와 서로 사랑을 한 아버지는 저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체면겉치레의 도구로 이용되지 못한 저에 대해 아버지의 취급은 얼마나 냉정하고 차가운 것이었는지요. 저는 그때 깨닫고 맙니다. 저는 단순히 아버지의 체면을 잘 살려주는 능력을 가진 이용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요. 아버지가 저를 제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집에 있는 것들중 제가 제일 자랑할 만 하고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그 사실이 제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아버지로서는 잘 알지 못하실 겁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너 때문에 이 에비가 기를 펼 수 있구나’ 라는 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런 말을 전혀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는 제 자신에 대한 사랑과 독점욕이 엄청났는데, 아버지 마저도 이런 저를 이용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더 공부를 하지 않으려 애썼고, 남들은 성적이 떨어져서 고민이던 그 때에 성적이 오를까봐 걱정이 되곤 하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형편없는 성적은 저 자신에 대한 모욕이 되기에 아버지에게 자랑이 되지 않으면서도 제 자신의 프라이드를 건드리지 않는 적당한 성적을 받기 위한 저의 노력은 눈물 겨운 것이었습니다. -그 눈물이 하품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부연설명을 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한 셈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의 타고난 게으른 천성과 어느 정도 요행과 운은 저를 적정한 성적에서 놀게 해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느 인문계 고3보다 철저하게 놀기만 한 저는 기대치의 성적을 받아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 였습니다. 제대로 푼 문제집이 단 두권인 상태에서 수능을 치른 저니까요. 종종 재미로 전국 1등을 해볼까 같은 생각을 했지만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저의 천성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고3때 기숙사에 들어가게 된 전 신나서 더욱 더 놀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공부하는 제 모습을 시험치는 날 말고는 보신적이 없는 부모님께서는 집에서 제가 놀아도 별로 신경도 쓰지 않으셨지만요. 오직 제가 교회를 가느냐 안가느냐가 최대의 관심사인 것에 저는 조금은 놀랬습니다. 보통 대한민국 고3의 부모님이라면 자식의 대학을 위해 백일기도를 드린다는데 공부 안 하는 것보다 교회에 신경을 쓰신다니요.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는 독서실에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기록을 가지고 말았습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면 저는 그 믿음을 송두리째 배신한 셈이될겁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왜 그렇게 교회를 제가 교회에서 모범성도이길 바랬는지 저는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른바 회사에서 지친 아버지에게는 유희의 장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왕따를 당하신다는 사실을 저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있는 저로서는 아버지의 나이도 먹지 않는 얼굴이 왕따를 당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게 힘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아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물질만능주의를 흉내는 낼망정 진정한 스쿠르지는 되지 못하셨습니다. 성실하고 꾀부리지 않고 상사에게 뒷돈이라는 것도 건네지 못하는 아버지가 진짜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있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20년이 넘게 한 회사에 몸을 담그시고, 회사로부터 돈이 안되는 감사패를 세 번이나 받고 회사의 회보에 모델로 실리시기 까지한 아버지가 승진을 하지도 못하고 감사패따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온갖 뒷수를 쓰고 술을 잘 마시고 여자가 예쁜 가게를 잘아는 그 최씨라는 입사동기아저씨가 승승장구 승진을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사실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섬세한 사람이라서 이 일로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교회란 곳을 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곳으로 선택하셨는지도 모르죠. 저는 그런 아버지의 삶에 낙을 저에 대한 독점욕만으로 앗아가 버린 배은망덕한 딸인 것입니다. 매일 고장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밖에 뱉어내지 못하는 아버지를 끔찍하게 생각했던 당시의 저는 되는 한 가장 멀리 떨어질 수 있고 아버지가 납득할 수 있는 대학을 선택해 왔고 지금 이렇게 아버지와는 차로 다섯시간 정도되는 거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서서히 가라앉았고 이제는 아버지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해를 아버지가 반기실지 저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얼마든지 기꺼이 아버지의 위로에 도구가 되어 드릴 수있지만 그것은 동정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이 커질 수록 제게는 아버지가 불쌍한 사람으로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맹세코 아버지에게 얘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사랑의 표시입니다. 제 삶에 있어서 아버지는 전부가 되시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삶에 있어서 저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거의 매일 전화를 걸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는 -제가 고시원에 있단 핑계를 대어 일요일밖에 전화를 받지 않게 되지만 않았다면 매일 전화를 하셨을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저에게서 찾고 있으십니다. 이용도구였다는 저의 생각은 짧았습니다. 이용도구 같이 작은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 낙, 그 모든 것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돈이 전부라고 생각하시는 아버지에게 월급이 100만원 오르는 것과 제가 장학금 50만원을 받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시라고 하면 아버지는 당연 제가 장학금을 받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돈을 중요시 여기는 이유는 그 돈으로 제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니까요. 아버지는 전화를 하실 때마다 할 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말들을 제쳐두고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를 하란 말을 하십니다. 우리집 가정이 풍족한 편이 아니라는 것, 제가 쓰고 싶은만큼 돈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가 명품가방을 사기위해서 돈을 달라고 해도 빚을 내셔서라도 주시겠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명품과 싸구려의 차이를 알지못하는 천한 신분이기에 그런 얼토당토 않은 요구를 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지 기쁘게 하는지 말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쓴 까닭은 이제는 조금은 저에게서 해방이 되셨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직 사랑스러운 딸이 두명이나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저를 닮지 않은 동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딸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자신을 조금은 돌아봐 주세요. 아버지는 아직도 아주 사랑할만한 매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감히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시지 않을 정도의 한해서 애인을 만들라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을 아버지를 위해서 쓰세요. 저의 그늘에서 해방되어 주세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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