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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TT)

  • 작성일 2006-12-14
  • 조회수 380

 


티티(TT)

 

 

또르륵. 구슬하나가 굴러왔다. 이제 막 낮잠을 자려고 아니 그 낮잠의 문턱을 넘어가려고 하는 그 시점이었는데 시쳇말 한다면 요상하게 생긴 구슬하나가 또르륵 굴러와 내 콧잔등을  주인 허락없이 간질거리고 있었다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무거운 눈꺼풀을 하나씩하나씩 들어 올리려다 그냥 오른쪽 눈만 빠끔히 뜨고 그 요상하게 생긴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은 콧잔등아래 있었기에 확대경으로 보는 것처럼 자세하고 정밀하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구슬은 동그란 원형이 아닌 수십 개의 작은 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은 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그 구슬은 연한 푸른빛 혹은 연한 노란색을 띄며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 구슬을 말똥거리는 정신으로 길가 혹은 산책로 혹은 대로변에서 마주했다면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대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난 무척 졸리고 피곤한 상태였기에 범상치 않은 모양의 그 구슬에 대해 별 감흥을 가질 수 없었다. 그저 그 또르륵 굴러온 구슬을 입 바람을 불어 반대편으로 날려 보내고 다시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서 맴돌 뿐. 난 가벼운 마음으로 구슬을 향해 정확히 조준하여 입 바람을 날렸다. 솔직히 정확히 조준한건 아니었다. 작은 구슬이었기에 그저 가볍게 생각하였다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헌데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들어 한쪽 눈을 뜨고 구슬이 날라 갔을 만한 방향을 찾아보았다. 없었다. 아니 있었다. 여전히 내 콧잔등 아래에. 멀끔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의아했지만 심호흡을 깊게 하고 구슬을 향해 한번 더 입 바람을 날렸다. 훅. 이번에 긴장한 탓인지 바람이 헛 날렸다. 난 다시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고 더 세게 바람을 날렸다. 아니. 이럴수가. 꿈적하지 않았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손이 떨려왔고 머릿속에선 띵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렇게 떠지지 않던 왼쪽 눈까지 떠졌다. 이 작은 구슬에게 내 입바람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이번에 똑바로 앉아 숨을 골랐다. 그리고 폐 깊숙이 숨을 몰아넣었다.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난 폐가 가장 빵빵하게 차오른 느낌이 드는 순간 구슬을 향해 정확히 조준하며 바람을 날렸다. 훅. 바람을 불자 책상 위에 있던 간이 계산서와 볼펜. 거래처사람들이 주고 간 명함 몇장과 날 흠모하던 놈팽이 몇 놈들이 던져주고 간 사탕과 초코렛들이 사정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오래토록 많은 숨을 내보내자 머릿속에서 쥐가 나는 듯 가벼운 현기증이 찾아왔다. 난 전부터 빈혈증세가 조금 있었다. 아니 빈혈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건강하고 튼튼해 보이지만 속빈 강정이라고 빈혈 때문에 여름엔 길가에서 쓰러질 뻔 한적도 여러번 있었고, 그럴때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상가건물의 계단으로 피신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간혹 타이밍을 놓쳐 벽을 잡는다는 것이 건물에서 나오는 남자의 가슴을 만져 오해를 산적도 여러번 있었지만... 암튼 난 빈혈이 있었다.

숨을 고르고 눈을 떳을 때도 여전히 구슬은 그대로였다.


“누구냐 넌”


어느새 난 그 무생물인 구슬과 장외경기를 하는 듯한 태도를 비췄다. 마치 보이지 않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기분이랄까. 인간 대 무생물과의 경기. 하지만 벌써 난 2패를 당했다.

다행히 사무실 직원들은 외근을 나가 아무도 없었고 사장님은 며칠 전 알게 된 별다방(스타벅스)의 홀서버한테 넋이 나가 아예 그쪽으로 출근도장을 찍기에 바빴다. 근 열 달 동안 내가 사무실에 출근해 한 일이라곤 빗자루 질 몇 번과 대걸레 질 몇 번 그리고 오지도 않는 사장님의 책상정리와 물걸레 질 몇 번. 그래도 다행인건 강남의 땅부자라고 소문난 사장님의 부친과 모친 덕에 무능력의 산실인 우리 사무실은 무난히 돌아가고 있다는 것. 사실 이 사무실도 그의 부친과 모친의 전속건물에 속한 하나의 부품덩어리에 불과했다.

“너 가만 안두겠어”

난 몇 년전 유행했던 유행어를 몸동작과 함께 그 구슬을 향해 날렸다. 구슬은 마치 잘 경청했다는 듯 다시금 반짝이는 투명한 빛을 내비치며 내 행동에 대한 화답을 했다.

“땡큐“

나도 모르게 구슬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잔잔한 호수에 날라든 돌맹이의 파장같이 괘심했던 구슬이었는데... 어느새 그 구슬이 조금씩 좋아하기 시작했다. 어쩜 무료하기만 한 내 모습을 사무실 어느 한 구석에서 지켜봐왔을 구슬의 눈엔 조금 불쌍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처음엔 나도 내가 이렇게나 무료하게 하루를 보낼지 몰랐다. 휴학계를 쓰고 나올 땐 적어도 1년이라는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 두고 보자. 캠퍼스에 앉아 시시덕거리며 노닥거리는 계집애들을 바라보며, 혹은 멋스럽게 차려입고 모델 뺨치게 잘생긴 남자애를 옆에 낀 체 세상모르게 활짝 웃고 내 옆을 스쳐가던 여자애를 바라보며, 너희가 오늘 헛되이 보낸 하루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워한 내일이였다는 명언을 새기며 두 주먹 불끈쥐던 나였는데 지금 보면 그녀들보다도 내가 더 무료한 오늘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그 구슬도 눈이 달렸다면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지간히도 무료해 보인다고. 하지만 난 이 지독한 무료함을 떨쳐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건.


적어도 내 안엔 희망이라는 게 있었다. 다만 그 희망이 아주 얇은 유리 같아 깨지기 쉽다는 사실을 아주 후에 알았을 뿐. 희망은 얇았던 만큼 품안에 품기도 쉬웠다. 그 희망을 단단히 여미고 있어야 했는데 내 품이 가벼웠기에 희망은 금세 누군가에게 들키기 쉬웠고 내 희망을 얕잡아 봤던 누군가에 의해 내 희망은 산산조각 되고 말았다. 곧 그 조각을 안고 있던 내 몸과 마음엔 크고 작은 생채기가 생겨났고 난 피를 흘리며 작고 날카로워진 그것들을 온몸으로 감춰야 했다. 내 희망이 사라진 걸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래서 더욱더 날 꽁꽁 싸매야 했는지 모르겠다. 내안의 피를 모조리 흘려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난 그 조각들을 버릴 수 없었다. 



“콩나물 사와“

출근하려 현관을 나서는데 내 뒷통수를 향해 오빠의 목소리가 꽂혔다. 고개를 돌리자 속옷바람의 오빠가 거실 벽에 기댄 체 무심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콩나물국 먹고 싶나”

오빠는 대답대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그냥”

“그냥이 어딨어. 먹고 싶으면 먹고 싶은 거지.”


오빠의 표정은 무심해 보였지만 그건 내 100%에 가까운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신경질나, 왜 그래. 먹고 싶으면 말해. 바쁜 사람 불러 놓고 뭐하냐”

난 거칠게 대꾸하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냥. 뭔가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나는게 콩나물이잖아.”

“지랄한다.”

난 대충 말하고 서둘러 현관문을 닫았다. 문을 닫자 동시에 눈물이 떨어졌다.

‘바보’


마당으로 나오자 마당 한구석에 오도카니 놓인 오빠의 오토바이가 보였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았지만 난 그 오토바이 쪽으로 걸어갔다. 솔직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오토바이를 만든 사람이었다. 어쩜 난 싫어를 넘어 증오에 가까운 속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녹이 슨 오토바이의 체인장식과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핼맷은 많이 낡아 보였다.



“멋지지 않냐”

“뭐하는 시츄에이션이야”

“이게 바로 튜닝의 절정판이지. 아는 지인의 소개로 특별히 최신식으로 했다.”

“지인. 지랄한다. 얼마줬어.”

“큰 거 한 장”

“만원”

“얘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그럼, 십만원.”

그때 오빠는 날 원시인보듯 바라봤다. 난 혹하는 맘에 내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인 백만원을 불렀고, 오빠는 그제서야 평정을 되찾은 얼굴빛을 띄었다.

“미쳤어. 제정신이야. 나 엄마한테 일러야지”

그때 오빠는 순식간에 내 입을 틀어막고 내 손에 파란 지폐 몇장을 찔러 주었다. 합의금이었다. 순간 난 만원짜리 몇 장에 잠시 얼떨떨해졌고, 오빠는 이내 튜닝 된 오토바이에 올라 탄 채 그보다 더 요란뻑적지근한 색채가 돋보이는 핼맷을 쓰고 내 주위를 몇 바퀴 돌더니 배기가스만 잔뜩 남기며 대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오빠는 그 오토바이를 자신의 특급 보물 1호로 선포했다. 그리고 오빠의 오토바이 사랑은 파리의 낙상은 물론이거니와 거울의 기능까지 갖추게 될 정도로 윤내고 광내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 오토바이의 튜닝 값을 대신 내어준 아빠에게조차 젊은 시절 기분을 추억하게 만들 기회를 허락지 않았다.


“몇 시간 좀 빌려줘라”

“싫어요.”

“자식, 거 참 되게 추접하게구네. 얌마 너. 그럼 안돼”

“저도 안돼요. 이따 애들하고 만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그 전에 좀만 타자고. 참 자식 너 왜 그래”


“아빠, 오토바이 못 타시잖아요.”

“야, 나 잘 타.”

“에이, 못 탈것 같은데요.”

“야, 너 내 자식 맞아”

“아쉽게두요.”


가끔은 모든 게 다 거짓이라고 말해줬음 좋겠다. 내가 태어난 것도 내가 보고 있는 것도 내가 느끼고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자는 것도 다 거짓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누군가 그려놓은 유화 속 한 장면처럼 물이 잔뜩 묻혀진 그런 붓으로 쓱하고 문지르면 금세 존재가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존재. 그런 내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음 좋겠다.



[LS코리아]

오늘도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말이 좋아 외근이지 다 사장친구들로만 이루어진 무능력의 공동체 집단은 그야말로 ‘빛좋은 개살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솔직히 이 사무실 안에서 LS코리아가 정확히 뭘 하는 회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막말로 이 사무실을 등록한 사장역시 LS코리아의 이념과 향후 전망에 대한 고민을 티끌만이라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적어도 LS코리아에 출근하는 자의 자부심을 느끼겠지만... 책상에 앉아 텅 빈 사장의 자릴 보고 있자니 푹신한 이태리제 물소가죽의자가 터무니없이 커 보인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 이름은”

“강나연입니다.”

“그래 나이는”

“스물입니다.”

“음. 혼자서도 잘 놀 나이군.”

“네?”

“혼자서도 잘 놀아야 하는데, 가능한가?”

“무슨 말씀이신지.”

“그건 여기 있는 김전무와 박이사 두 사람과 잘 알아서 협의해봐. 우선 사무실을 지키는게 시급하니까. 난 약속이 있어서.”

젊은 사장은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고 양복 자켓과 영화 속에서 보던 007가방 같은 걸 들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

사장이 나가자 그 김전무와 박이사 역시 중간중간 시계를 보더니,

“조건이 뭐지”

“네?”

“근무조건 말야.”

“그냥 월급은 삼백만원정도. 5일 근무에 퇴근시간은 5시정도..."

난 솔직히 LS코리아가 위치한 이 건물자체는 정말 좋았다.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했고 건물역시 제일 눈에 들어왔고 그냥 멋진 건물이라는 건 확실했다. 17층 버튼을 누르며 올라오는 내내 꼭 일하고 싶다고, 사장에게 매달리며 사정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직장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난 지금 그들이 절대 수락할 수 없는 그런 조건을 말하며 그들이 날 내쫒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류가 사무실 내에서 풍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단가”

“네?”

“그 조건만 충족되면 지금이라도 근무 가능하다는 거지?”

“그게. 그러니까... 그렇죠.”

그날 난 면접을 통과했고, 곧바로 근무까지 하게 되었다. 내 책상 역시 어느 디자이너의 예술품에 가까운 모습을 띠었고, 사무용구 역시 일반 문방구에서 만나는 그런 흔한 디자인이 아닌 뭔가 모르게 비싸 보이는 그런 느낌이 팍팍 들게 만드는 그런 종류들로만 집합시켜 놓았다. 대체 어디가서 구했는지도 모르는 것들로 한동안 난 내 정신을 쏙 빼 놓더니, 이젠 처치 곤란으로 날 난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력이 난 지금은 그것들의 구비여부를 사장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왜 이런 것들은 사 놓았냐고. 왜 신청해 놓았냐고. 간혹 오는 택배직원이나 등기소포에 싸인이나 하려고 혹은 다달이 나오는 핸드폰요금이나 국민연금 혹은 건강보험의 영수증 따위를 모아두려고 이렇게 금빛 휘날리는 집게를 신청했냐고, 다달이 그런 것들이 담겨진 소포을 한아름 안고 17층 건물에 오를 택배직원의 노고와 쓸데없이 낭비해야 하는 엘리베이터의 전력을 왜 모르는 척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애초에 일층에 사무실을 차리지 17층이 뭐냐고... 그래서 난 한날 모처럼 물소가죽의자에 기대 DMB폰으로 코메디프로를 보며 세상모르게 웃고 있는 사장에게 물어봤다.

“사장님”

“어”

“왜 17층에 사무실을 차렸어요.”

“전망이 좋잖아”

“전망요.”

“우리 엄마가 건물 지을 때 내가 제일 먼저 찜한 곳이 여기야. 인테리어도 다 최고의 전문가들로만 구성했지.”

사장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저 전망이 좋아서 이곳을 택했다고 말했다. 이태리제 물소가죽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전혀 근엄해 보이지 않는 사장의 풍채를 난 한동안 바라보았다. DMB폰으로 개그프로를 보는 사장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갑자기 사장이 조금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방 홀서버와는 진전은 되고 있어요.”

“별로”

“왜요. 디게 이쁘던데. 학교도 일류고.”

“별로야”

“언제는 천사라며요.”

“성격이 이상해, 말 시키지 마. 지금 집중이 안 되잖아.”

“사장님 오늘 김전무님하고 박이사님 출근안하셨는데요.”

“알아”

“어디 아프신 거예요.”

“아니”

“그럼요”


“중국으로 골프치러 갔어.”


사장은 그렇게 한동안 DMB폰으로 개그프로를 보다 이내 그의 부친의 전화를 받고 발개진 얼굴로 황급히 달려 나갔고, 난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밥을 먹으로 사무실 문을 잠그고 대리석 바닥으로 둘러쌓인 복도를 걸어 나갔다. 구두를 신었다면 또각또각 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겠지만 운동화의 고무밑창은 그 모든 소음을 다 흡수해 주었다.

치이익. 반대편 복도의 끝 쪽에서 누군가 이제 막 사무실의 문을 닫고 나오는 게 보였다. 그 역시 운동화를 신었는지 대리석 바닥을 스치는 발걸음에선 사악사악하는 가벼운 소리만 들려왔다.

그보다 먼저 나온 난 이미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올라오는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역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엘리베이터 문은 내 전신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검정 긴 머리칼은 묶는다고 묶어도 늘 옆으로 흘러 나왔다. 대충 껴입은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보라색의 스니커즈는 이 대리석 건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였다. 난 조금 창피한 생각에 엘리베이터 문이 반사되지 않는 옆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사이 그 역시 엘리베이터 앞에 오롯하게 서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 역시 엘리베이터 가득 비춰지고 있었다.

‘잘생겼다’

하마터면 그에게 내 속내를 들킬 뻔했다. 휴학계를 쓰고 나오면서 마주하던 그 모델같이 잘생긴 남자애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팔짱을 꼈던 어느 골빈 여자애의 웃음소리도 들려오는 듯 했다. 갑자기 채찍질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무언의 경고야’

난 다시 마음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 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남자애가 잘생긴 건 사실이었다. 그러다 정말 그가 연예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우리사무실과 건너편 사무실을 착각한 화물직원이 종종 [나라기획]이라는 상호가 찍힌 우편물을 들고 우리 사무실에 들렀던 적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울시내에서 손꼽히는 근사한 건물에 그런 연예기획사 한 둘 정도는 충분히 들어 올수도 있었고... 난 촌년처럼 붉어진 볼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옆 눈으로 슬그머니 보았다. 보면 볼수록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한숨만 나오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걱정이 일었다. 1평 내외의 그 작은 공간에 그와 단둘이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날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솔직히 오늘 난 머리를 감고 나오지 않았다. 어제 양말 목 부위에 레이스를 다느라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간신히 얼굴만 씻고 나왔다는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혹시 내 머리통보다 하나는 더 큰 그가 위에서 날 내려다보며 내 머리냄새를 맡을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난 괜히 친하지도 않은 박이사나 김전무님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어머, 박이사님이 팩스받으라고 했는데, 깜박했네.”

난 작게 중얼거리며 내 초라한 등을 보이고 우리 사무실 쪽으로 걸어 나왔다.



여름이지만 문득 첫눈이 내렸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다 그 하얀 눈을 맞으며 다 똑같은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그 짧은 시간. 모두가 같아지는 그 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나 할 것 없이 마당에 깔린 그 촉촉한 흙을 밟으며 펑펑 내리는 눈을 맞는 그 순간. 그 순간을 모두 다 맞이했으면 좋겠다.

 

5시다. 오늘도 난 하루의3/2를 대충 까먹으며 시간을 죽였다. 사람을 죽인 건 아니지만. 그런 좁은 범주는 좀 그렇다 쳐도 넓은 범주로 말해 적어도 바늘에 찔리면 피가 나는 그런 생명체에 한해선 도살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죽어있는 생명체를 예로 한다면 난 시간을 엄청나게 죽인 흉악범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무실을 대충 정리하고 사장이 입이 마르게 칭찬했던 전망 좋은 창가로 걸어갔다. 블라인더의 끈을 잡아 올리자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말 사장의 말이 맞았다. 유리벽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자 예전에 오빠와 함께 하던 소꿉놀이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오빠는 여느집 오빠들과는 달리 총이나 로봇보다는 내 마론 인형이나 주방기구에 더 많은 관심을 표했다. 그 당시 오빠는 알게 모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실비아’라는 갈색머리칼의 인형을 남모르게 짝사랑하고 있노라고 말했었다. 나 역시 그런 오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비아는 여는 집 인형과는 달랐다. 그냥 대충 그려 넣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던 타 인형과는 달리 실비아의 이목구비는 선명했고 또렸했다. 정확히 입술라인이 그려져 있었고 눈동자도 정중앙에 위치해 마치 날 바라보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오빠도 아마 그런 사실로 인해 실비아를 특별히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실비아는 여러 번의 이사생활로 인해 그 존재감이 잊혀지고 말았다. 아빠의 직업으로 인해 수시로 짐을 싸야 했던 집안 사정과 내 정신적 피로감에 나부터 위로하기 급선무였기에 실비아의 존재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실비아의 예쁜 눈동자가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년․중으로 깨끗해질 날이 없는 정류장엔 오늘도 전단지와 스티커들이 자리를 잡고 맘껏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이 다이어트와 골프여행 관련 전단지들이었다. 난 버스를 기다리며 내 옆자리에 살포시 앉아 있는 다이어트 전단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딱히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보단 그저 무료한 이 순간에 뭐라도 집고 있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의한 무의식의 표출 같은 것이었다. 전단지 속 잘록한 허리에 줄자를 대며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그 여자의 표정은 낮에 DMB폰으로 개그프로를 보며 즐거워했던 사장의 얼굴과 흡사해 보였다. 하지만 부친의 전화를 받고 붉어진 얼굴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던 사장의 뒷모습이 떠올라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버스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난 전단지를 곱게 접어 비행기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멀찌감치 서서 그런 날 바라보던 남녀는 키득거리기 시작했고, 난 그들의 웃음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비행기를 접었다. 아마 그들은 전단지로 비행기나 접는 내가 마땅히 하릴없는 사람 혹은 더 나아가 광녀쯤으로 생각하며 날 비웃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릴없는 사람이건, 광녀건 나 역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 휴학계를 신청하고 벌써 열 달이 흘렀다. 두 달 뒤면 등록을 하든 아니면 다시 휴학계를 내던 둘 중 하나는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난 지금 아무런 생각도 가질 수 없었다.


버스가 왔다. 비행기 역시 완성되었다. 전단지의 빳빳한 코팅 재질 덕에 비행기는 제법 근사한 모습을 띠었다. 난 비행기를 들고 버스에 올라 제일 뒷자석으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난 들고 있던 비행기를 바람에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가볍게 날아올랐다. 핑크빛을 띠는 전단지 덕에 조금 화려한 외관을 띤 비행기는 버스의 반대편으로 한없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문득 콩나물사와‘했던 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온종일 뭔가에 세뇌당한 기분이 들었는데 바로 무의식 속 콩나물의 압박 때문이었나 보다.

난 이내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는 작은 재래시장 쪽으로 향했다.

시장으로 가는 내내 내 머릿속엔 노란 콩나물로 뭘 해먹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콩나물로 국을 끓여야 하나, 아님 누구 말처럼 고춧가루 팍팍 넣고 버무려야 하나, 아님 생태와 함께 매콤하게 무쳐야 하나... 오빠는 콩나물 잡채를 제일 좋아했는데. 엄마가 자주 해주던 콩나물 잡채가 떠올랐다. 오빤 그 잡채하나만 있으면 밥을 몇 공기나 비웠는데, 푹 익힌 익은지 잘게 썰어 넣고 끓여주던 그 얼큰한 콩나물국도 참 맛있었는데... 어정쩡한 자세로 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보는데 장독대라는 간판을 단 반찬집이 눈에 들어왔다. 난 혹하는 마음에 장독대로 향했고 문들 밀고 들어가자 주인 듯 보이는 여자가 감자채 함지박을 들고 이제 막 안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기요. 혹시 콩나물잡채도 팔아요.”

“콩나물잡채. 어떡하나, 그건 이제 안하는데. 그냥 잡채만 있지. 예전에야 했는데 요즘은 사람들이 통 안 사가서.”

“저기, 그럼 주문은 안돼요.”

“왜, 누가 그걸 찾아요.”

난 이내 밝은 표정으로

“네, 가능한가요.”

여잔 잠시동안 입술을 좌우로 비죽거리더니,

“그래요. 너무 귀엽게 말해서 내가 봐줬다. 대신 많이 주문해야 돼요. 알았죠.”

“고맙습니다. 맵고 얼큰하고 달큰하면서 아삭하고 암튼 정말 맛있게 해주세요.”

“어지간히 어렵네.”

난 잡채를 주문하고 콩나물국과 몇 가지 밑반찬도 샀다. 국이 담긴 봉지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낮게 출렁거렸고, 밑반찬이 담긴 봉지역시 치익치익하는 소리를 냈다. 검정봉지가 조금 창피한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들은 사라지고 양손가득 담겨진 그 묵직함이 행복이라고 속삭이는 듯 여겨졌다.


반팔에 청바지라서 좋았다.

내 검정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릴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내 신발의 밑창이 얇아 조금이라도 더 땅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내 양손에 잔뜩 들려진 행복 때문에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릴 수 없다는 게 좋았다.

내 양손 가득 들려진 그 행복을 함께 공유하고픈 사람이 마음속에 살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그날 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마당에선 오빠의 오토바이 시범쇼가 벌어졌는지 요란한 폭죽소리와 함께 잔뜩 힘들어간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 중간중간 아빠의 맘상한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아빤 오늘은 결단코 그 오토바이를 타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듯 오빠의 그 허접한 시범쇼와 더불어 말도 안돼는 그 오토바이 타는 요령을 무던히도 들어주고 있었다. 나 역시 텔레비전을 보는 중간중간 오빠와 그런 오빠의 설교를 벙어리 냉가슴 앓듯 들어주는 아빠 그리고 그 아빠의 운전대 뒷 자석에 태워져 동네를 순회할 엄마의 모습을 보며 마치 가족코미디를 보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한참 설교에 열중하던 오빤 그 설교의 끝을 요란뻑적지근한 핼맷을 아빠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좀 얌전해 보이는 핼맷을 가져와 엄마에게 건네주며 어린양을 피워댔다. 군대까지 다녀왔지만 아빠에겐 늘 공갈과 장난을 일삼던 오빠였는데 그런 오빠도 엄마 앞에선 한없이 얌전하고 착한 아들로만 보이고 싶었나보다.

이내 오빠에게 오토바이를 몇 시간 대여한 아빠는 오빠의 헬멧을 자랑스레 머리에 얹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빠의 작은 머리통에 비해 조금 큰 머리통을 가지고 있었던 아빤 금세 눈이 중국 인형(못난이인형)처럼 옆으로 겹쳐져 버렸고, 오빠와 나 그리고 엄만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한동안 웃어야했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신이 내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그런 능력을 내게 쥐어 준다면 난 바로 그쯤. 그 정도쯤으로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찰나의 순간으로. 바로 그쯤으로.


오늘도 마당엔 불이 꺼져있었다. 늘 오빠에게 5시가 넘으면 마당에 불을 켜 놓으라고 일렀었는데, 오빠는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는 듯, 혹은 일부러 켜지 않았다는 듯, 내 기분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무슨 말을 꺼낼 때마다 내 발끝을 어딘가를 무심히 내려다 볼 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오빠는 조금씩 말을 하지 않기 시작하더니 아예 입을 닫아 버렸고. 그저 눈동자로만 모든 게 다 내 탓이요. 하는 얼굴로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날 달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현실을 알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직 내겐 집이 있어. 그리고 오빠가 있어. 나이가 어리잖아. 누군가 그랬어. 의지만 있다면 불가능이란 없다고. 난 엄마와 아빠의 시체를 확인하러 가는 그 순간에도 오빠를 위로하는 척 했지만 속으론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위로. 살아야 한다는 위로. 살기위한 위로를 하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헬멧 속 아빠의 터져버린 머리라는 부분을 확인하면서 엄마의 아이보리 색 원피스와 서로 엉켜 찢겨진 살가죽을 두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면서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며 아빠의 퇴직금은 얼마나 될까. 월급날이 멀지 않았는데. 그 월급도 퇴직금에 포함되나......라며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곱씹었던 월급도 퇴직금도 그리고 우리집도... 그 어디에도 우리의 것은  없었다. 다만 타인에게 되돌려 줘야하는 명세서들만 내손 가득 들려질 뿐.

‘밤사이 들어온 사건 소식입니다. 서울 서초구 **동에 사는 강모씨가 몰던 오토바이와 마주오던 트럭이 부딪히는 사고로 인해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강모씨와 그의 부인이 사망했고,  오토바이를 피하려던 스물다섯살 은모군이 중경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현장에 있던 목격자에 의하면 골목에서 갑자기 뛰어든 오토바이의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잡았던 것 같지만 브레이크가 작동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른 소식입니다...’



꿈에도 휴학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나타난 그 목격자의 말에 의해 100% 과실의 책임이 있는 우리 쪽에서 트럭운전사의 합의와 스물다섯의 꽃다움과 맞바꾼 불구의 삶을 보상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 목격자. 누구였을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저 너무 놀라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말. 그 말 한마디 해주면 어디가 덧이라고 나는 걸까. 정 힘들다면 그저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오빠는 여전히 내 탓이오 하는 눈동자로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자신의 탓이라고. 그저 오토바이를 타려고 기를 쓰고 매달렸던 아빠의 탓이오. 그 오토바이를 아빠에게 알려줬던 스승의 탓이오. 그 스승의 스승의 탓... 더 나아가 그 오토바이를 만든 장본이의 탓. 그의 탓이 제일 큰 탓인데... 난 옷을 대충 갈아입고 개수대 앞으로 갔다. 개수대 안엔 거피자국이 진득하게 말라붙은 머그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래도 커피는 마시나보지‘라고 핀잔 섞인 말을 흘렸는데

“누가 왔다갔어”

스탠드 조명을 한껏 받아서 일까. 오빠의 눈동자가 많이 깊어진 듯 그윽해 보였다.

“누구”

“구슬”

“구슬. 왠 구슬. 사람 이름이 구슬이야.”

“아니, 가장 작은 면들의 집합체.”

“왠 헛소리야. 니 배고프지.”

난 장독대에서 사온 콩나물국과 밑반찬 봉지를 반찬통에 담으면서 오빠의 헛소리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오빠 위한답시고 반찬까지 맞추고 창피함도 무릎 쓰고 검정봉지 양손에 들고 바보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시내를 걸어왔건만, 저런 헛소리나 하려는 오빠에게 원기충전이나 해주려고 내가 이러나 싶은 게..

“오빠. 지금 장난해. 다른 오빠들 좀 봐. 아니 다른 오빠들은 필요 없어. 어차피 오빠보단 내가 더 생활력은 강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불 꺼진 마당 무섭다고 불 좀 켜달라는 말 내가 얼마나 더 해야 들어줄래. 그리고 가끔은 청소도 해주면 안돼. 쌀 좀 씻어서 밥통에 넣고 보온버튼 좀 눌러주면 안돼. 세탁기에 넣어진 빨래 전원 누르고 물 높이 맞춰서 좀 돌려주면 안돼. 왜 그래 사람이. 그렇게 입만 닫고 천정만 바라보면 뭐가 나오는데. 그럴거면 아침에 왜 콩나물을 사오라고 했니? 나도 정말 힘들어. 이집 되찾을려고 얻은 돈 다달이 원금하고 이자 갚는 것도 힘들고 내년엔 학교 등록해야 하는데 아직 등록금 마련해놓은 것도 없어서 속상하고 주일마다 타야 하는 오빠 신경정신과 약값도 좀 버거워. 오빠가 내 맘을 알긴 알아. 하긴 늘 이렇게 허공만 보는데...”

앗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오빠 탓은 아닌데 그저 그 오토바이를 만든 장본인이 가장 큰 탓인데... 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오빠 얼굴 보기가 미안해져 서둘러 내 방으로 들어왔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오빤 왜 그런 말을 해서... 방에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부엌 개수대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저녁을 차려줬어야 했는데... 밥이라도 먹이고 속내를 이야기 했어야 했는데... 솔직히 그렇게 힘들지도 않는데... 오히려 저렇게 대인기피증과 실어증에 걸린 오빠가 더 힘들 텐데... 난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옆으로 밀었다. 어둑해진 하늘 위로 콕콕 박힌 구슬 같은 별들 몇 개가 아른아른 빛나고 있었다.

가장 작은 면들의 집합체... 그게 뭘까.



떠올랐다.

가장 작은 면들의 집합체. 이거였구나. 난 내 콧잔등아래서 내 한가로운 낮잠을 방해한 녀석의 정체를 밝힐 기막힌 단서가 떠올랐다.

그리곤 그날 개수대 안에서 진득하게 눌러 붙어 있었던 커피의 찌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너 혹시 내말을 알아 듣... 아냐. 미쳤지. 내정신이 아니야. 구슬이 무슨 사람의 말을 알아 듣겠어. 내가...”

또르륵. 구슬은 이내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책상 위를 사납게 뒹글었다. 그러더니 이내 그 작은 면들의 집합체가 일제히 분리되어 내 주위로 온통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그건 얇은 LCD화면이었는데 그 화면들 속엔 낯익은 얼굴들로 가득했다.

“저건“

그들이었다. 불구자가 되었던 그 청년... 그런데 화면 속 그는 너무나도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 옆엔 또 다른 남자도 있었는데.... 아니, 이럴수가 그는 아빠의 100%로 과실을 주장했던 목격자였다. 세상에 저런 뻔뻔한 인간이. 볼에서 조금씩 열이 나기 시작했다. 화면은 이내 꼬마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들로 바뀌었고 그런데... 오토바이였다. 정말로. 아빠의 오토바이가 보였다. 오토바이가 골목에서 튀어나와 정확히 아이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썬팅이 진하게 입힌 헬멧 때문에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때 그가 나타났다. 그 청년. 그가 아이들과 자전거를 밀치고 대신 사고를 당했다. 목격자는 넋이 나간 듯 바라봤고 청년은 쓰러져 버렸다. 화면은 거기서 멈췄다. 그리곤 또 다른 면들이 일제히 일어나 슬라이딩 되어 내 시야에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는 트럭 운전사였다. 아빠의 퇴직금과 월급을 송두리째 가져간 인간. 난 그를 비열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화면은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원했던 그날. 다시 돌아간다면 딱 그쯤이길 원했던 시간.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병원 입원실에 있었고 그 입원실엔 그의 부인인 듯 한 여자가 뜨겁고 메마른 숨을 힘겹게 토해내고 있었다. 그는 돈이 없었는지 원무과 앞으로 가 사정을 하는 듯 보였고 이어 걸려온 핸드폰은 집주인인 듯한 여자가 밀린 월세를 내라면 독촉을 했고 그는 비굴하게 전화기에 대고 사정을 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멀리서 달건이들이 나타났다. 아내의 입원비를 위해 트럭을 걸고 대출을 받았는데 기한이 지났나보다. 그는 그날 달건이들로부터 폭행까지 당했다. 그날 폭행을 당한 그날 아내의 수술날짜를 잡아 놓은 그날. 밀린 월세를 걱정해야 했던 그날. 그는 사고를 당했다.

앞 유리 창에 부딪혀 붉은 피가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왠지 편안해 보였다.


탁. 

“골프는 역시 중국에서 쳐야 제 맛이야.”

“그 광활한 필드하며 쭉쭉 뻗은 캐디들 하며 공기는 좀 황사바람 때문에 거친감이 있지만...  그 스파 코스도 좀 허접하지 않냐. 찌질이들만 잔뜩 모아놓곤 테라피라고 해놨는데 별것 없더라. 우리 다음주엔 필리핀 쪽으로 가볼까. 요새 필리핀이 또 트렌드라고 하니까”

김전무와 박이사. 그들은 일주일간의 중국골프투어를 마치고 오늘에야 출근을 했다.

난 슬쩍 벽시계를 보았다. 4시였다. 왜왔을까. 그냥 하루 더 쉬지.

참. 구슬. 구슬이 없었다. 김전무와 박이사가 오는 바람에 잠시 정신을 놓았는데 금세 구슬이 사라져 버렸다. 난 서둘러 구슬을 찾아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어 나연씨 있었네. 참. 내가 나연씨 주려고 선물사왔는데."

책상 밑에서 머리를 처박고 이리저리 살피던 난 문득 박이사의 선물이라는 말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건너편을 바라봤다.

“선물요”

박이사는 007가방을 책상위로 올려놓더니 작은 반지케이스를 꺼내보였다.

“이거 대따 비싼거야. 하지만 우리 사무실을 열심히 또 열정적으로 지키고 보살피는 그대의 노고에 내가 하나 사왔지.”

“뭔데요”

“열어봐.”

가장 작은 면들의 집합체. 구슬이었다. 난 박이사를 바라봤다.

“이게 이름이 뭐였더라. 그렇지. 한국말로 가장 작은 면들의 집합체. 소원성취의 그런 개념이 아니라. 그냥 몸에 지니면 마음의 독기를 뽑아 준다나 뭐라나. 사무실 혼자 지키면 괜히 또 울적해서 뛰쳐나갈까봐. 그리고 요가하는 것보다 이걸 지니고 있는게 훨씬 이롭다고 하더라고. 음이온도 방출되고. 암튼 좋은거니까. 몸에 꼭, 아니 출근할 땐 꼭 들고 다녀. 알았지. 사무실 도장 찍었으니까 우린 퇴근한다. 나연씨도 얼른 퇴근해. 참 그건 커피를 좋아한데 그래서 이틀에 한번씩은 커피에 담가놔야 한다더라고. 참 이상해.”

난 박이사와 김전무가 빠져나간 사무실에 오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웃음이 나왔다. 난 실컷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웃어야 할 것 같았다.

실컷 웃다가 문득 오늘 찾으러 가야할 콩나물 잡채가 떠올랐다.

오늘은 정말 아무말도 하지 않고 저녁을 차려야겠다. 아삭하고 달콤하고 매콤하고 아니 무지하게 맛있는 콩나물잡채만으로 한상가득 차려놓곤 따뜻한 밥과 함께 내 놓아야겠다.

사무실 문을 잠그고 복도로 나오자 해가 짧아졌는지 얕은 어둠이 느껴졌다. 난 고무밑창이 내는 사각사각소리를 들으며 걷기 시작했고 이내 맞은편 끝 호에서도 누군가 사각사각소리를 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여전히 엘리베이터 속 내 모습은 그지없이 초라했지만 표정만은 누구보다도 밝고 명랑했다. 내 옆으로 누군가 서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을 때 난 조금 움츠려드는 감이 있었다. 그였다.

“ 강나연”

“네...”

“난 서현수라고 해.  **대학교 다녔지. 휴학한 걸로 기억하는데. 나도 휴학했어. 내년엔 복학하려고. 참 내 정신 봐. 실은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통 안보이더라고. 친구하자. 난 그쪽하고 친구하고 싶은데. 친구 해 줄 거지.”

느닷없이 친구가 생겼다. 그것도 훤칠하게 잘생긴 마음도 착한 남자친구. 돈이 없다는 게 흠이지만... 하지만 그 앤 시키면 뭐든지 다했다. 그와 나의 애정행각으로 인해 오빠의 실어증과 대인기피증도 해결됐고. 난 굳이 그 을씨년스러운 마당을 혼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사무실에서 혼자 노는 지루함 역시 해결됐다. 다만 버스정류장에 앉아 동시에 같은 비행기를 접어 광녀라는 소리보단 또라이 셋트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또 구슬이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구슬을 잊고 지냈는데... 누구에게로 갔을까. 누구에게 찾아가 잔뜩 설은 독기를 빼내고 있을까.

창가로 걸어가 블라인더를 옆으로 밀어냈다. 도시가 들어왔다. 오늘도 이 도시는 끊임없이 자신만의 의사소통이라는 걸 할 것이다. 그게 사건이든 사고든 기적이든. 그리고 그 끊임없는 의사소통은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다.

아빠와 엄마. 소중했던 내 분신이 사라졌지만 그 분신은 또 다른 분신을 가져다주었듯. 사라지고 만들어지고 태어나고... 그때 그 젊은 청년이 다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트럭운전사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만 아빠와 엄마였을 뿐이었다. 다만 엄마와 아빠가 그곳에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로인해 아이와 그 남자의 아내가 살지 않았는가. 사장의 무능력으로 인해 들 갖추어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었다.  누구나 일 수 있었지만, 다만 그곳에 내가 있었고 엄마가 있었고 아빠가 있었고... 다만 그뿐이었다. 오늘도 난 살아있고 내일도 살아있을 것이다. 아니 내일은 내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로썬 내가 살아 있으므로 내가 이 자리에 있으므로 나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다만 그뿐이었다.


처음 상처가 난 날 난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뽀얀 살 깊숙이 들어간 가시에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 가시에 찔렸던 자린 아물대로 아물어 이젠 아무 일 없었단 듯 새살이 돋아 나 있었다. 어쩜 그 자린 처음부터 그런 상처 따윈 없었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상처를 찾아보았다. 흐릿한 선 혹은 점이 찾아졌다. 흔적이다. 기억이 지워진 자리에 남겨진 흔적.

난 지금 그 흔적을 만져보고 있다.

아린기억을 찾아내려고. 아니. 기억은 망상도 될 수 있지만 흔적은 아니다. 흔적은 착하고 순해서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난 문득 흔적이 되고 싶어졌다. 처음부터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흔적. 지금 난 흔적이 되려한다. 나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힘.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힘. 나는 지금 그 힘이 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