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 작성일 2007-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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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
김씨가 옷을 주섬주섬 입자 아내가 덩달아 잠에서 깨어난다. 뭔가 할 말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방안에는 목쉰 카세트가 반야심경을 읊고 있다. 세수를 마치고 차려온 조반을 김씨가 막 뜨려 할 때다. 아내가 불쑥 종잇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규칙적으로 막 수저질을 반복하던 김씨의 손놀림이 이내 둔해졌다. 헛기침을 한번하고, 수저로 몇 번 국물을 휘젓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내는 다시 확인해보고 싶었는지 가방을 메던 김씨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모아 뭔가를 열심히 말하려 할 때마다 눈이 여러 번 희번덕거린다. 그럴수록 마음을 가라앉히는지 열심히 두 손을 이용해 설명한다. 설명하는 아내의 얼굴에 여러 차례 굵은 주름이 일어났다 가라앉는다. 김씨는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알았는지 천천히 다가가 다독거려 준다.
문을 열자 안개가 덮쳤다. 연립을 벗어나자 상의의 자크를 목 밑까지 올렸다. 동네 아이들이 전신주 밑으로 군데군데 대변을 누었다. 대변에는 아이들이 미처 소화하지 못한 콩나물 줄기들이 보였다. 담장 구석에는 묵은 신문지들이 몰려있거나 담배꽁초들이 납작하게 꺼져 있다.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 대로변으로 나오자 키 큰 가로등들이 스크럼을 짠 안개에 멱살에 붙들려 있다. 한 달 전부터 나붙었던 축축한 의류 대 바겐세일 광고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김씨가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 미아 역에서 현장까지 빠듯한 시간이다. 마을버스는 오지 않고 불량한 안개만 떼지어 다닌다. 이대로 가다간 오야지에게 또 한 소리들을 것 같다. 며칠 전에도 오야지에게 얼마나 호된 말을 들어야 했던가. 타일공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제는 그만 하실 때도 되지 않았냐"며 자신에게 담배 연기를 내어 뿜던 오야지였다. 김씨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것을 그만둔다. 버스가 많은 사거리까지 줄곧 걸어가 곧바로 현장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로 결정한다. 안개를 뚫고 빠르게 걸어가던 김씨, 가끔씩 다리를 매만지며 걸어간다. 자동차들이 정글의 치타처럼 달린다.
현장은 벌써부터 이마에 휴대 전기를 켠 채 석수장이들이 지하에서 돌계단을 부쳐오고 있다. 목수들은 합판이나 각목들을 방으로 옮기며 천장을 측량하고 있다. 슬금슬금 겁부터 나기 시작했을까. 5층부터 작업한다는 이야기를 어제 동료에게 전해들은 김씨는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부랴부랴 위층으로 향했다. 위층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카랑카랑한 오야지의 목소리가 온몸으로 덕지덕지 파리떼처럼 붙는다. 그리고 간혹, 낯익은 목소리들이 오야지의 목소리에 묻혀 조용히 들려온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4층쯤 왔을 때, 김씨는 가방을 벗어두고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 건물을 빠져나온 김씨는 갑자기 건너편 한길에 있던 편의점을 향했다. 김씨는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천 원짜리를 꺼내 소주 두 병을 사더니 그 자리에서 한 병을 조금 남게 마셨다. 그런 후 다시 건물로 들어가 5층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막 오르려 할 때 위층에서 내려오던 오야지와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다. 김씨를 보자마자 오야지의 눈이 세모꼴 변하더니, 대뜸 "영감님, 참 빨리도 왔습니다-잉"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예상을 한 탓일까 김씨는 불편한 미소를 띤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위층으로 향했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시멘트 두 포를 어깨에 메고 올라오던 오야지는 맨 바닥에 시멘트를 던지며 "아! 늙었으면 일을 그만 두고 손주나 볼 일이지 일은 무슨 일을 한다고..." 연신 투덜투덜거린다. "김씨가 올해 환갑이라 안 해부렀소.. 허 참" 참다 못한 김씨가 "미안하게 됐네"를 오래된 버릇처럼 말하려 할 때 "주인님 전화받으세요! 주인님 전화받으세요!" 오야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순간, 오야지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과 당황한 얼굴 반반으로 핸드폰과 김씨를 번갈아 보더니 사납게 핸드폰의 덮개를 열었다. "여보세요.. 아! 예, 형님이세요? 사업 잘되어 가시구요. 예, 예. 저도 덕분에... 형님 저 언제 장가보내 주실랑가요. 제대하고 자그마치 5년이 다 돼갑니다-잉. 이제 그만 형님 처제를 주시지요-잉 헤헤...." 오야지와 마주 서있던 김씨가 얼른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시멘트를 섞고 있는 동료 청년에게 다가가 물을 더 부은 채 알맞게 반죽이 된 것을 확인하고 창문 쪽 벽부터 단단히 바르기 시작한다. 술기운이 조금 느껴진다. "형님 때문에 참습니다-잉. 부탁만 안 해부렀어도 벌써..."
국경일 때문인지 창 넘어 인근 공원에는 상춘객이 모여든다. 도로변을 따라 길게 심어 놓은 벚꽃들이 만개해 있다. 만발한 벚꽃 아래로 서로를 보며 웃는 여인들, 흰 블라우스에 꽃 그늘 받으며 유모차를 끌고 가는 일가족도 보였다. 점심을 먹고 휴식시간을 이용해 담배를 태워 물던 김씨. 바지에서 종이 조각을 꺼내 들었다. "성모병원 김영은 301호" 김씨는 볼이 패이도록 담배를 빨다 천천히 내뱉었다. 종이 뒷면을 천천히 돌리자 "월세 30만원"이 적혀 있다. 김씨가 담배 한 개비를 다시 피워 물었다. 창밖에는 아까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붐비기 시작했다. 카드섹션을 펼치듯 만개한 벚꽃나무에서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꽃잎이 휘날린다. 아이들을 위해 젊은 부부들은 사진을 찍어주거나 그들과 함께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씨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소주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 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취기가 서서히 온몸을 휘감았다. 잦은 기침소리도 여러 번 나왔다. 김씨는 다시 고대를 잡고 시멘트를 반죽하더니 벽을 바르기 시작한다. 아직 쉬는 시간이 20여 분 남았지만 작업량을 맞춰야 했다. 오늘따라 시멘트를 바를 때마다 벽에 달라붙지 않고 허물어지기 일쑤이다.
휴식시간이 끝나자 동료들이 올라왔다. 하나 둘씩 벗어 놓은 장갑을 끼고 있다. 데모도 청년은 재빨리 통속에 시멘트를 더 넣고 룰러를 돌리기 시작한다. 미장이들이 도구들을 들고 각자의 위치로 갈 때 양서류 같은 눈의 오야지가 왔다. 오야지는 뭔가 수가 뒤틀린 사람처럼 1리터 짜리 물병을 집어들더니 단숨에 마신다. 그리고 서서히 작업을 위해 장갑을 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오야지의 눈이 한쪽에 이르러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별안간 "작업 시간에 술을 먹어! 김씨! 김씨!" 카랑카랑한 고함 소리가 김씨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시멘트를 붙이던 손이 힘을 잃자 벽면 귀퉁이에 달라 붙어있던 시멘트 한쪽이 와르르르 한꺼번에 떨어졌다. 이에 더욱 화가 치민 듯, 오야지가 김씨를 향해 버럭 버럭 고함을 쳤다. 김씨의 머리가 천천히 땅에 떨구어진다. 고개를 숙인 탓인지 긴 머리카락 몇 올이 이마에서 떨어져 나풀댔다. 창문에는 벚꽃들이 공중에서 하염없이 바리무를 치며 떨어진다. 오야지는 작정이라도 한 듯 사납게 팔을 걷어부치며 다가선다. 김씨는 바지 속 종이만 수없이 매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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