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여름이었다.
- 작성일 2007-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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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넌 왜 할미한테 인사도 안 혀?” 마루에 앉아 있던 늙은 노인은 먹던 옥수수를 입 밖으로 후두둑 흘리며 말한다. 그의 손녀가 방금 돌아온 것이다. 손녀는 진탕 젖어 걸으면서 물을 뚝뚝 흘린다. 손에는 방금 잡았는지 팔딱거리는 초록색의 개구리가 들려있다. “더워서 안했어.” 그러고는 마루에 걸터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스무 살을 넘겼다. 그녀는 시골 사람답지 않게 얼굴이 하얗고 예쁘게 생겼다. 그녀는 내 먼 친척이다. 그녀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 정신이 이상하거나 머리가 모자라다. “미친년” 그녀는 노인의 말을 빌리자면 미친년이다. 그녀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이름 모를 벌레, 지렁이, 개구리, 닭, 뱀들을 좋아한다. 그녀는 나를 싫어한다. 그녀의 손에 뒷다리 하나를 잡힌 개구리가 발악을 한다. 하얀 배가죽을 보이며 뒤집혔다가 초록색으로 다시 뒤집힌다. 이미 다리뼈는 부러진 것 같다. 그녀는 개구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그녀는 하늘을 보는 듯, 전봇대에 위태롭게 걸려있는 까치집을 보는 듯, 그 멀리 날아가는 새를 보는 듯, 나를 보지는 않는다.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아련하게 내 기억을 자극한다. 분명히 알고 있는 익숙한 멜로디다. “옌-서라, 도련님 공부 하시잖여. 저- 나가 놀어” 노인은 어떤 이유에선지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른다. 도련님이라는 호칭이 거북했지만 딱히 막을 방법이 없다. 노인은 옥수수를 다 먹고는 마룻바닥에 떨어진 옥수수 알알을 주워 먹고 있다. “저, 이거 더 드십시오. 속이 안 좋아서 그런지 먹고 싶지가 않습니다.” 나는 내 옆에 놓아진 누런 옥수수를 노인에게 내민다. 사실 거북한건 노인과 나의 관계 인지도 모른다. 이 집은 원래 나의 증조부 집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형인 백부는 출가해 서울에 백모와 시골에 첩, 두 집 살림을 살았었는데 이 노인은 그 첩의 생모이다. 증조부님이 돌아가시고 이 집은 백부님이 물려받았고, 백부는 이 집을 첩에게 주었다. 그러나 첩은 딸을 낳고 죽었는데 그 딸이 바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녀인 것이다. “너도 하나 먹을래?” 내 물음에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니 나를 한번 앙칼지게 째려보고는 나간다. 손에는 초록색 개구리가 여전히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따지자면 사촌뻘인 것 같지만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그녀의 존재도 알지 못했고, 지금 여기 있어도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노인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했다. 언년이, 양순이, 칠순이, 미자 등등의 이름을 내뱉긴 했지만 그녀는 기분이 내킬때면 어떤 이름에도 대답을 했고, 내키지 않으면 목이 터져라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놓았던 편지를 다시 잡는다. 노인은 내가 종이를 잡자 슬쩍 옥수수 바구니를 당겨 하나를 덥썩 집어서 먹기 시작한다. 매미가 우는 소리, 후두둑 옥수수를 먹는 소리를 뚫고, 햇빛이 물웅덩이에 반사되 튕겨나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화창한 여름 날이다. [ ...무언가를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아 말한다는게 점점 무서워져요. 내가 정말로 내 입을 빌어 나의 얘길 하고 있는걸까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진심이란 것 자체가 무색하게도 아예 지워지고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요. 누군가 대화를 하고 있을때면 나 자신이 제 3자가 되어서 나를 위한 대사를 써주고, 저는 그 대사를 열심히 그 상황에 맞춰서 연기할 뿐인 것 같아요. 내가 지금 무얼 느끼고, 무얼 생각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사가 지금 상황에 더 적합한지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찾아서 내뱉고 있어요. 물론 지금 이 순간도, 이것이 저의 진심인지 아닌지조차 저는 알 수가 없어요. 심지어는 혼자 생각을 하고 있을때도 이것이 진정 내 생각인지 의심해버리고는 말아요. 그리고, 오,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도 여태까지 전 많은 대사를 늘여놓았어요.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죠. 그러나 믿어주세요. 당신에게만은 대사를 내뱉어도 즐겁다고 느껴요. 당신과의 대화는 때때로 나를 아주 지치게도 하고, 나는 그럴때면 당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물론 당신은 저를 쫓아 오지 않으실거란걸 알지만) 당신과의 대화로 힘을 얻을때도 많답니다. 그건 진심인거겠죠? 제 진심을 상대방에게 물어보다니, 이런 저에겐 질리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저의 기분은 이러하답니다.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었군요. 죄송해요. 아마 이곳은 너무 덥고 또 너무 습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잘 지내세요. 물잔에 담겨 있는 얼음따라서 녹아버리고 싶은 날, 히미코] 그녀에게서 한달만에 온 편지는 이러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답장을 쓰고 있던 중이다. 그녀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때 사귀었던 지인이다. 나에게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1년정도 지난 여름이었다. 그날 그녀에게서 첫 편지가 왔다. 자신을 히미코라고 소개한 그녀는 나와 같은 대학에서 같은 수업을 들었다고 밝히며 편지를 보내왔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이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묘한 형태를 띄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일본을 찾아갈 일이 한번도 없었고, 억지로 그녀를 만나러 가지도 않았으며, 그녀가 정말 그 대학의 학생인지조차 확인해 본적도 없다. 그녀는 10년간 오직 그녀의 편지로만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인물이며, 형체를 띄지 않고서 내게 각인되어 있는 유일한 상상체이며, 이제는 오히려 나의 일부인 듯도 한 것이다. 나는 펜을 들어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히미코씨의 편지를 보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에게 입력된 대사는 몇가지나 될까’ 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분석해보면 제가 내뱉는 말은 어떤 규칙성, 혹은 공식같은 것을 가지고 상황과 상대에 따라서 산출되는 단순한 식의 연산결과 인 것은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별 다를 일 없고, 변함이 없는 저같은 사람은 계속 같은 상황과 상대를 만날 때마다 같은 대답을 할터이니, 반쯤 고장난 녹음기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게 입력된 대사는 극히 적겠지요. 그러나 히미코씨와의 편지에서 저는 여태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거나 만나보지 못한 상황과 접촉하게 됩니다. 공식과 규칙성으로는 도저히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더 열심히 대사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안쓰던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쓰면 조금 더 감동을 하지 않을까 고민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대사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여태까지 히미코씨에게 했던 말중에는 과장, 혹은 생략된 거짓이 있을지 모르나 그것들은 전부 진심어린 거짓 대사 인것입니다. ...] 굵은 알의 옥수수를 먹으며 노인은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내가 글을 쓰며 편지에 집중하자 아예 노골적으로 뚫어져라 본다. 편지의 내용을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노인이 일본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노인은 내용을 알겠다기 보다는 그저 나를 신기해하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아니라면 글자라는 그 자체를. 문맹일 가능 성은 높다. 나는 몇십년 전 지식인의 흉내를 내며 문맹을 깨치자라는 구호를 외칠 마음이 추호도 없었고 짐짓 그 호기심에 가득 찬 노인의 관심을 무시하고 글을 이어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은 문장이 꼬이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펜을 놓는다. 아까 그녀가 바라보고 있었을지 모르는 먼 곳을 바라본다. 지나치게 환하고 더운 날이다. 갑자기 더위가 느껴져 근처 냇가에라도 가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노인은 내 갑작스런 행동에 놀랐는지 따라 일어서려다가 만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다. “잠깐 바깥 좀 걸어보고 오겠습니다” “아이구, 다녀오셔요.” 무더운 태양아래를 걷기 시작하니 하얀 셔츠에 조금 땀이 벤다. 여기에 온지도 두 달이 지나지만 좀처럼 셔츠와 구두를 벗을 수가 없다. 숙부님이 입던 옷이 있었지만 쑥쑥한 냄새가 나던 그 옷을 걸친 내 모습은 너무나도 부조화 스러워 우습기까지해 입을 수 없었다. 하얀 셔츠에 검은색 구두는 일종의 구분선인지도 모른다. 이 시골이 지금 내게 평안감을 주고, 딱히 불만을 가질만한 요소를 제공하지도 않지만 이 곳에 결코 융화되지 않고 나를 유지하겠다는 마음. 구두를 신은 발이 땀에 저는 것이 느껴져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쉽사리 벗어지지도 않는다. 냇가에 가보니 그녀가 있다. 역시 이름이 없는 것은 불편하다. 약간의 소리를 내어 인기척을 내긴 했지만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녀는 냇가에 앉아 무언가를 돌로 내리치고 있다. 조금 더 다가가보니 예의 개구리다. 그녀는 개구리의 몸통을 손으로 잡고, 아까 부러진 듯한 다리를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찧고 있다. 개구리는 비명을 지르거나 개굴거리지도 않는다. 이미 죽은 것 같기도 하지만 이따금씩 몸을 흔들며 경련을 일으킨다. 잔인해 보일지도 모르는 행동이지만 그녀의 얼굴은 악에 받혀 있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어보이지도 않는다. “뭐하고 있니?” 그녀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개구리를 들고 쪼르르 멀리 가 버린다. 나는 그저 갈 곳이 없어서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 걷는다. 그녀는 뒤를 흘끔 쳐다보더니 냇가를 첨벙 첨벙 건너 반대편으로 가버린다. 그녀를 따라가려면 구두가 젖고, 젖은 구두는 그닥 유쾌한 기분이 아닐 터이다. 나는 냇가 맞은 편에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그제서야 안심했는지 다시 바닥에 앉아 예의 일을 계속한다. 나는 그저 서서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본다. “히미코!” 나는 순간 내 귀에 들린 발음에 흠칫 놀란다. 그것은 10년간 내 뇌리속에 있지만 들어 본적은 없는 발음이다. 익숙하면서도 고막에는 낯선 진동이다. 맞은 편에 있던 그녀는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그 놀란 표정은 갑작스런 외침에 놀란 듯, 자신의 이름을 불려서 놀란 듯도 보인다. 나는 내 입에서 튀어나온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놀라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더욱 놀란다. “히미코, 뭐하니?” 나는 놀라서 감탄사를 터뜨리듯 그 이름을 재차 내뱉는다. 그러자 그녀는 손에 있던 개구리를 놓아주고는 내쪽으로 건너온다. “이제 놓아주어도 돼” 아마도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의도를 잘 알 수가 없다. “왜?” “저 개구리는 나야. 내거야.” 자기것이라는 표시를 해두었다는 건가. “이제 찾을 거야. 살아 남는지 볼거야. 다리가 없어도 살 수 있는거야. 나는” 그녀의 두서 없는 대답에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화제를 돌렸다. “혹시 글자를 읽을 줄 아니? 오빠가 가르쳐 줄까?” 그리고 의도적으로 한번 더 예의 감탄사를 내뱉는다. “...히미코?”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흔들림도 없고, 번들거리지도 않는다. 그 거대한 동공은 소리없이 닫히더니 그녀는 뒤를 돌아서 냇가를 건너 떠나버린다. 2장. 그녀는 곧 없어졌다. 그녀는 결혼을 했다. 불쑥 그는 나타났다. 그는 바보고 힘이 좋은 검은 사내였다. 그는 어렸을 적에 버림을 받았다. 그의 엄마는 그를 놔두고 도망을 가버렸다. 새로 온 엄마는 그를 도살장에 갖다 버렸다. 그는 바보지만 힘 좋은 도살꾼으로 컸다. 그는 그녀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 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히미코에게서도 더 이상 편지는 오지 않았다. 온 동네에 소문이 돌았다. 나는 몰랐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무엇이든지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색이 강하다는 소문이었다. 동네 아낙네들은 수근 거렸다. 첫날밤을 그의 엄마가 가르쳐 주었다. 앞으로는 이게 니 일이야. 라고 말했다. 그 날뒤로 그는 밥만 먹으면 일을 했다. 소나 돼지의 비명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집 주위에서는 그녀의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한번은 참다 못한 도살장에 장씨가 직접 바보 집에 찾아가 그녀 위에 올라가 있는 놈 머리채를 직접 끌고 나온 적도 있다고 했다. 오늘 아침 한통에 편지가 일본에서 도착했다. 붉은 치마를 입은 아낙네가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나는 여기 앉아 있었다. 나는 들어야만 했다. 모든 사실과 꾸며진 거짓과 일어난 사건들을.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아낙네는 얼굴을 살짝 치마처럼 붉힌다. 하도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잖여. 내가 우리 남편도 죽은지 오래고 해서 말야. 떡을 해서 그 바보를 불렀거든. 나랑 한번 자자. 떡 줄테니. 그러니까 그 바보가 그러잖아. 안돼요. 우리 색시랑만 해야되요. 약 2년만에 도착한 편지였다. 히미코는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허여멀건한게 비리비리 해서 난산이었단다. 그 뒤로 히미코를 딱 한번 길가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히미코는 나를 보고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나는 히미코에게 물었다. 왜 뒤뚱거리며 걷는거야? 히미코는 대답도 하지 않고 생기 없이 뒤뚱거리며 걸었다. 다른 아낙이 말을 이었다. 사실은 나도 얼마전에 닭을 잡는다고 집으로 부른 적이 있었거든. 니들도 다들 알잖여. 우리 서방 바람나서 집에도 안 들어오는거. 닭을 잡아서 상에 차려놓고는 나랑 한번 자면 준다고 했는데 군침을 흘리면서도 안된다는거야. 집에가서 색시랑 해야된다고. 그러면서 씨익 웃더니 그 바보가. 색시랑 자면 아기가 생겨. 이러지 않겠어. 에구. 그래서 그냥 보냈지 그때는. 편지봉투에 적힌 글씨는 히미코의 글씨가 아니었다. 밤낮주야로 집구석에 누워서 밥만 먹으면 그 짓을 하는데, 그 비리비리한 년이 견뎠겄어? 그녀는 죽었다. 까만 눈동자가 예쁘던 그녀의 초상집에 나는 와 있었다. 사람들은 흠칫 흠칫 나를 쳐다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쓸 자신이 없었다. 내 머릿속은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 중 나 혼자 피어오르는 향 연기를 전부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 연기에 질식해서 뇌에 산소 호흡이 중단된 것 같았다. 뜯어본 편지는 짧고 간결한 내용이었다. 언니는 자살을 했어요. 히미코에게 동생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나기도 했다. 편지를 뒤져본다면 이름을 발견할지도 몰랐다. 장례식은 이미 늦었지만 언니는 여기에 안치되어 있어요. 낯선 곳의 주소. 편지는 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었다. 편지에는 그 흔한 추신도 달려있지 않았다. 사실 나는 작년 여름 히미코의 집에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그래도 더운 여름을 습한 일본에서 보내고 싶진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서 항상 정기적으로 연락이 온 것이 아니기에 걱정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준비 기간을 전혀 주지 않았어! 2년이라면 충분히 긴 준비기간인지도 몰랐다. 나는 머리를 정리하기 힘들었다. 히미코는 사라지고 주소는 남았다. 그러나 그 주소에 찾아간 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0년동안 나의 수수께끼, 미증유, 유레카였던 그녀는 이제 없었다. 나는 그 주소를 찾아가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타다 남은 그녀의 일부였던 뼛가루를 내 손으로 만진다고 해도 내게 편지를 써주지는 않을 것이다! 내 삶에 의문을 던져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형태가 없던 그녀는 뼛가루의 모습을 뒤집어 쓰고 그 안에 갇혀 버릴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녀를 떠올리면 오래된 종이 냄새, 단정한 글씨체를 연상시키지 못할 것이다. 나는 무덤, 안치소, 기타등등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들밖에 연상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를 찾아 갈 수 없었다. 그녀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지러웠다. 노인이 쾡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바보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바보는 실성한 듯이 울고 있었다.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실 나는 이제 양복이 어울리지 않았다. 덥수룩한 내 머리는 숙부의 늘어진 옷이 아주 잘 어울렸다. 나는 이제 쑥쑥한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내 몸에서도 쑥쑥한 냄새가 풀풀 나기 때문일 터였다. 오랜만에 신은 검은 구두 때문에 발뒤꿈치가 까졌는지 아파왔다. 매미 소리가 유달리 크던 여름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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