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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

  • 작성일 2007-03-30
  • 조회수 556

# 눈동자 / 이름

 

 

엄마는 이태째 돌아오지 않았다.

 

* * *

 

겨울

눈이 흩날렸다. 밤기차가 철로에 몸을 지탱하여 흔들릴 때마다 낮은 조도의 객실 조명이 흔들렸다. 아이는 기차 바퀴가 회전하는 소리에 맞춰 하나에서 열까지 센 후 거꾸로 세었다, 반복했다. 눈은 기차 유리창을 집요하게 두드렸다. 이토록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을 아이는 도시에서 본 적이 없었다. 기차를 타는 것도 처음이었다. 자신이 거대한 철마를 타고 있는 상상을 했다: 말발굽 소리가 날 때마다 숫자로 기합을 하며, 엄마를 태우고 초원을 달렸다. 그것만으로도 눈 내리는 밤기차 여행은 충분히 흥분할 만한 것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의 영상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이는, 유리창을 두드리는 눈 때문이라 생각했다. 엄마의 영상도 흔들리는 사람들처럼 창에 있었다. 엄마의 영상을 두드리는 눈의 색깔이 희미했다. 무채색임에도, 밤에 훼손된 흰 눈은 무채색으로도 온전하지 못했다. 흰 눈 같은 엄마의 얼굴마저 빛을 잃었다. 아이는 찬찬히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넓적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신발을 벗고 의자에 발을 올려놓았다. 몸을 웅크렸다. 엄마는 아이의 움직임에 잠시 눈을 뜨더니, 이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아랫배가 천천히 부풀어올랐다가 수축했다. 아이는 다시, 바퀴 회전소리에 맞춰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 셈은 서서히 리듬을 따랐고 엄마의 숨결과 얽혔다. 아이는 엄마의 숨에서 미열을 느꼈다. 숨결과 체온의 규칙적인 자극 속에서 안온했다. 졸린 눈으로 간간히 고개를 들면, 자꾸 뒤로만 기어가는 시골풍경이 보였다. 산간마을에 조그맣게 빛나던 전기등은 고요에 묻혔다고 쉽사리 잊어선 안 된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아이의 들썩임에 잠을 깬 엄마는 그것이 요정의 불빛이라 했고, 아이는 믿었다. 사람들은 깊은 숨을 몰아 쉬며 잠들어 있었다. 아이도 서서히 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기차는 역을 건너 역을 넘었다. 역을 다시 건너, 다시 넘었다. 경적 소리로 정적을 찢으며 밤을 뚫었다. 산의 터널은 여러 번 기차를 삼켰다가 뱉었다. 기차는 요정의 세계를 건너고 넘어 어딘가로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날이 밝아오자, 기차는 조그마한 역사(驛舍)가 있는 허름한 역에 잠시 섰다.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그 역에 내렸다. 싸늘한 공기가 아이의 볼을 사정없이 때리던 적막한 아침의 역이었다. 먼 곳에 여럿이 사이 좋게 들러붙은 산은 떠나가는 기차를 조용히 배웅하는 듯했다. 기차는 멀어졌다. 아이는 기차가 멀어져 가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차가 보이지 않고도 한참 동안, 철길이 놓인 풍경을 바라봤다.

“인석아! 이제 그만 가야지.”

엄마는 몇 번이나 불러도 꼼짝하지 않는 아이 앞에 쪼그리고는 아이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어깨에 조그만 책가방을 메어주며, 가자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했다. 그녀는 양 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아이를 다시 불렀다.

역을 벗어났다. 아이는 가끔 멈칫거리며 역을 돌아보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자신을 제대로 좇아오지 않는 아이가 걱정스러운지 아이를 살폈다. 하지만 아이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낯선 먹먹함을 엄마로서도 눈치챌 수는 없었다. 갇혔다가 풀려난, 해방감과는 분명 달랐다. 해방감이라기보다는 서운함에 가까웠지만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지극히 섬세하고 규칙적인 것들의 보살핌. 아이는 바퀴의 회전소리와 경적소리, 조명의 흔들림 속에서 그런 것을 느꼈다. 처음 기차를 탄 느낌이었다.

모자는 길을 물어 버스를 탔다. 낡은 버스는 몇 안 되는 손님이 올 때까지 기다렸고, 느릿하게 걸어오는 노인 몇을 더 태운 후에야 천천히 출발했다. 이른 아침 읍내에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 한둘만이 보였다. 도로를 탄 버스는 속도를 내다가 줄이기를 반복하며 리듬을 탔다. 길에 바짝 붙어 힘겹게 산을 탔다. 산은 눈 위로 긴 흔적을 남기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산의 고개를 건넜다. 버스를 몰던 아저씨는 겨울 치곤 따뜻한 날씨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느끼기에 산을 덮은 겨울은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이는 어느 산의 중턱에 내렸다. 눈 덮인 드넓은 길 위에 남겨졌다. 추위를 심하게 타던 아이는 이미 추위에 질려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풍경이 낯설었다. 엄마의 두꺼운 코트 속으로 자꾸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럴수록 더욱 추웠고, 엄마는 밭은 기침을 했다. 아이는 코트로 비집어 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버스아저씨가 거짓말쟁이라고 마음에서부터 열렬히 비난했다. 모자는 입김을 내뱉으며 걸었다. 부자연스럽지만 끈끈한 몸의 연대 때문이었을까. 냉혹한 추위는 결코 깊지 않았다. 냉혹한 추위에 단련된 풍경만이 깊었다. 산벼랑 아득히 먼 곳에, 눈덩이가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꽂혀있었다. 곧 잘릴 것만 같이 위태로운 눈 저 편에 산장 하나 보였다. 아이의 외숙부 집이었다.

“여기서 외할머니, 외삼촌 말 잘 듣고 있으면 엄마 금방 돌아올 거야. 알았지?”

엄마는 외숙부의 산장 앞에서 아이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는 손이 얼얼했지만, 평소처럼 투정부리기에는 엄마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인다고 느꼈다.

“엄마는 어디 갈 거야?”

물론 슬픔을 느꼈다고 해서 그 슬픔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을 만큼 조숙하진 않았다. 천진하게 물으며, 사방에 쌓인 눈에 시선을 두었고 겨울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는 아이에게 웃어 보였다.

“엄만 잠시 미국 갔다 올 거야. 가까운 곳이니까, 금방 올게.”

아이는 미국이 기차가 잠시 서는 역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미국역. 적막한 아침의 역에서 조금 더 가면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며칠 후 돌아올 줄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겁이 나긴 했지만, 산장에는 외할머니가 있었다. 외숙부와 외숙모도 있었다.

“외숙모 말 잘 들어야 해.”

엄마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 말을 하면서 자꾸 눈물을 훔쳤다. 눈자위가 벌겋게 충혈되었다. 검푸르던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옅어졌다. 그 안에서 아이가 울었다. 외숙부는 엄마의 짐을 들고 있었고, 외할머니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외숙모도 고개를 숙이고 마당에 서 있었다. 엄마는 쪼그린 채 아이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지만 그뿐이었다. 밭은 기침이 더 심해졌고, 입술은 심하게 부르터있었다. 아이에게 끝내 입맞춤하지 않고 자신의 짐만을 들고 떠났다.

희미해져 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유려한 산의 곡선 위에서 출렁였다. 생눈판을 걸어가는 그녀의 홀몸이 뉘엿뉘엿 산의 언덕 아래로 숨을 때, 아이는 자신의 눈동자에 걸린 흑백사진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툭, 떨어진 눈덩이가 치열하게 뻗은 가지에 잘렸고, 아이의 가슴이 아렸다. 아이는 문득, 미국역이 훨씬 더 멀 것이라 생각했다.

 

“밥을 잘 먹어야, 엄마가 빨리 온다.”

아이는 외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특히 외숙모가 미역국을 끓여주면, 반드시 깨끗이 먹었다. 단어의 연관성을 잘 모르던 아이는 ‘미역국’을 먹으면 ‘미국역’이 가까워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홀로 지어냈던 것이다. 일종의, 기도였다.

외숙부는 엄마가 아름다운 나라로 갔다고 했다. 미국은 너무나 드넓어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곳이라 했다. 그는 거실소파에서 아이에게 무릎의자를 해주곤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간혹 텔레비전에서 백인이나 흑인이 나오면 “저 사람들이 사는 동네란다.”라고 운을 뗀 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아이는 흑인과 백인이 사는 허름하고 아주 큰 역을 상상해보았지만, 아름다운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보다 아이에겐 거실에 놓인 흑백텔레비전이 인상적이었다. 도시의 텔레비전은 늘 쇼윈도 건너편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텔레비전을 켜는 방법을 몰라 한참 망설였다. 브라운관에 비친 아이의 모습은 브라운관의 곡면을 따라 넓게 퍼졌다. 거울에 비친 모습보다 훨씬 못난 얼굴이 방그레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가 사는 마을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텔레비전은 거울로도 쓸 수 없는 애물단지였다.

“미국도 텔레비전에 다 들어가요?”

“미국은 너무 커서 텔레비전에 다 들어가지 않아.”

외숙부는 엄마가 사는 곳이 우리가 있는 곳과 가장 가까운 쪽인데 불행히도 그 쪽까지는 텔레비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마다 밭은 기침을 했다. 평소답지 않게 이야기는 자주 끊겼다.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다리는 순간에, 늘 그는 일을 해야 한다며 2층 서재로 올라가버리곤 했다. 외숙부의 서재는 현수 방 맞은 편에 있었다. 소설가였던‐아무도 그를 모르고 그의 책도 찾아볼 수 없는 걸 보면 소설가 지망생이었을 수도 있는‐외숙부는 밥 먹거나 읍내에 나가는 때를 제외하곤, 하루 대부분 서재에서 지냈다. 아이는 그가 무엇을 하는 건지 잘 몰랐다. 글을 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일을 하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했다. 외숙부는 늘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저, 서재에 책이 빼곡히 꽂힌 게 신기했다, 외숙부가 엄청난 부자라고 생각했다. 천장에 닿을 듯한 책꽂이는 위압감을 주었지만 아이는 이내 익숙해졌다, 눈을 감았다, 종이냄새를 느꼈다. 냄새는 섬세하게 코를 비집고 들어 가슴에 잔무늬 새겼다. 외숙부의 흰 종이에서는 늘 잉크냄새가 났다. 잉크의 잔향(殘香)은 아이의 코 끝에 검은 자국을 남길 듯 생생했다. 마음의 잔무늬 잎맥으로 흘러 든 외숙부의 냄새가 검게 굳었다. 타액 같이 어색했지만 역시 익숙해졌다. 수많은 책들도 오래되어 희미한 잉크냄새 뿜었다. 색이 바랜 바람[望] 냄새 은은하게 흩날렸다. 때때로 흔들리는 나뭇잎 같았다. 바람에 휘둘려 늘 불안정하지만 가지에 붙어있기 위해 애쓰는 단풍잎이거나 날카로운 침을 품은 침엽이었다. 외숙부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외숙모는 그가 서재에 올라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외숙모가 참지 못하고 타박하면 외숙부는 마지 못해 펜을 놓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면 2층은 아이의 차지였다. 아이보다 두 살 많은 현수는 읍내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주중에는 읍내에 사는 인척 집에서 하숙을 했고, 주말에나 산장에 왔다, 2층은 자주 비었다. 외사촌 현수 방을 쓰는 아이는 서재에서 현수 방까지 빠르게 왕복하는 것을 놀이로 즐겼다. 서재는 외숙부 텔레비전은 외숙모나 외할머니 차지여서, 아이는 대개 2층이나 밖에서 놀았다.

날이 점점 풀렸다. 마당에는 군데군데 얼룩처럼 눈물[雪水]이 고였다. 산봉우리에 걸려있던 겨울은 봄잠을 자기 위해 땅으로 숨어들었다. 눈석임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새싹이 자라났다. 바람이 선들거렸고 산들거렸다. 날씨가 마음을 풀어주는, 잔풀나기 한창인 봄이었다. 남실바람이 날릴 즈음 외숙부는 가끔 아이를 데리고 읍내에 나갔다. 읍내는 텔레비전에서 비치는 모습보다 빈천해 보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나마 활력이 넘치는 읍내는 아이에게 신나는 곳이었다. 그는 읍내로 가면 우선 책을 한아름 샀다. 그럴 때 꼭 동화책 두 권을 사서 아이와 현수에게 선물했다. 아이가 읍내에 나갈 때마다 현수는 링거주사를 맞고 있었다. 몸이 많이 야위었고 아이보다 작았다. 늘 아파 집에 오더라도 침대에 누워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주 쓰러졌고, 주말에도 산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잦았다. 외숙부와 함께 현수를 만나고 나면, 아이에겐 동화책이 한 권씩 생겼다. 외숙부는 현수에게 들른 후엔 반드시 장을 보았다. 장을 보면서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뻥과자를 반드시 챙겼다. 할머니는 그것을 구석에 두었다가 현수나 아이가 방에 들를 때마다 내어 주었다. 뻥과자는 늘 아이와 현수의 차지였다.

외숙부는 아이에게 군것질거리도 사주고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도시에 있을 때부터 영화관은 뭐 하는 곳일까 궁금했지만, 도시에 살 때 엄마는 늘 바빴고 아이는 시내를 홀로 다니기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시골영화관에서 보는 철 지난 영화였지만 아이에겐 아주 훌륭했다. 아이는 텔레비전 화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스크린에 압도됐다. 커다란 화면 속에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아이는 자신과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총을 쏘며 사막을 누비는 모습에 마냥 설렜다. 영화화면에 미국을 다 담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틈만 나면 영화를 보자고 외숙부를 졸랐다.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큰 소리나 웅장한 화면에 놀란 아이의 울음, 짭조름한 팝콘 톡 쏘는 콜라의 맛도 아이를 즐겁게 자극했다.

아이는 죽은 사내를 생생한 화면에서 보기 전까지는 영화관에 자주 갔다. 봉머리에 낮달이 걸린 날, 영화화면 속 남자의 흑백 몸에선 구더기가 끓었다. 주름진 흰 밥알들이 살아서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구더기가 자신의 몸에 기어올라 떨어지지 않을 듯해 소름 끼쳤다. 그때 사내의 치켜 뜬 흰 자가 클로즈업 되었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까지 오로지 흰자로만 덮여 있었다. 아이는 혼란스러웠다. 흰 바탕색으로 가득 채운다면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눈동자가 없는 눈이 전연 아름답지 않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눈동자가 없어요!”

울면서 소리치고 말았다. 아이를 영화관에서 업고 나온 외숙부는 웃으면서 달래주었다.

“인석아, 사람의 눈동자는 영혼이란다. 죽으면 영혼은 하늘나라로 떠나잖니. 그러니 당연히 눈에는 눈동자가 없는 거야. 잊어라.”

그러나 아이는 남자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사막 한복판에 놓인 시체의 그림자가 흰 눈과 강렬하게 대비되었다. 눈동자가 열기에 녹아 흘러내린 것 같다고 느꼈다. 끔찍했다, 영화를 보자고 외숙부에게 다시는 조르지 않았다. 엄마의 죽은 모습을 화면으로 볼까 두려웠다.

 

여름

장마로 붉덩물이 며칠 째 빠지지 않고 휘몰아쳤다. 현수는 많이 아팠다. 외숙부와 외숙모가 도시에 있는 큰 병원으로 현수를 데리고 갔다. 산장엔 할머니와 아이만이 남았다. 밤마다 세찬 비가 창문을 두드렸고 거친 바람이 마당에 몰아쳤다. 현관조명이 흔들렸다. 그때 2층 현수방을 스치듯 지나간 물체에 가려 빛이 꺼졌다, 켜졌다. 방 안에 스미던 빛의 변화에 아이는 비 쏟아지는 밖을 살폈다. 짙푸른 녹색으로 익지 못한 활엽이 보였다, 검은 빛이 나무에 붙어 잎처럼 흔들렸다. 사람 윤곽을 하고 온 몸을 발작하듯 떨었다. 바람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나뭇가지를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아이가 보기에 그것은 그림자 같았다.

“나는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그림자는 속삭였다. 바람을 뚫고 여리게 퍼져 창문 틈 비집고 들어온 속삭임이 물결의 파장처럼 겹쳐서 커졌다, 작아졌다. “나는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아이를 향해 웃는 듯했다. 아이가 느끼기에, 형상을 지니지 않은 검은 물체였지만 분명 아이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웃었다. 아이는, 무서웠다.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 필사의 말마저 나오지 않을 만큼 숨이 막혔다. 비명을 지르며 1층으로 내려갔다. 할머니만이 지키는 1층이 텅 빈 듯 조용했다. 할머니는 비명소리를 들었는지 방문을 열고 나와 아이를 감싸 안았다.

“이상한 걸 봤어요! 이상한 걸 봤어요!” 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야, 아가야. 이 할미가 항상 네 옆에 있을 거야. 이젠 걱정 하지 마라.”

할머니는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둘이었다.

현수는 보름 후 죽었다. 아이는 죽은 그의 눈에 눈동자가 없는 걸 떠올리곤 자꾸 소름이 끼쳤다. 긁었다, 돋아난 돌기가 톡톡 터지며 작은 핏방울 생겼다. 흰 밥알 같은 벌레와 눈동자 없는 흰자가 끔찍했다. 그래서 할머니와 외숙모가 장례문제를 두고 다툴 때 속으로 할머니를 응원했다. 현수가 하얀 재 되어 산에 흩뿌려질 때, 아이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외숙부가 직접, 현수를 산의 바람에 태워 보냈다. 할머니는 아이를 껴안고 흐느꼈다. 하지만 현수를 보내는 자리에 외숙모는 나타나지 않았다.

외숙모는 현수의 물건을 치우지 않았다. 방 안에 가득 쌓인 그의 동화책들. 대부분의 책에는 ‘김현수’라는 이름이 삐뚤삐뚤하게 적혀있었지만, 현수보다 아이가 주로 읽었던 책들이다. 하지만 현수가 죽은 이후로 아이가 동화책을 뒤적이면 외숙모는 책을 낚아채곤 했다.

“이건 형 거란다.”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이의 양 팔을 꽉 잡았다. 그러다가 숨을 고르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때 아이는 보았다. 외숙모의 눈동자는 무섭도록 번쩍이는 달빛을 뿜었다. 아주 잠깐 심한 격랑이 일었다, 어미들개와 새끼들개가 피투성이인 몸으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그림자 걸린 바다에 메밀꽃 일었다. 어미는 포효했다. 붉은 울음이 예리하게 날아가 달에 꽂혔다, 꺾였다. 꺾인 울음이 들개모자 우뚝 선 칼벼랑을 멀리 둔 채 추락했다. 놀란 달이 날카로운 빛으로 들개의 온 몸을 꿰뚫으려 했다. 절벽의 비좁은 공간에 달빛이 떨어졌다. 들개모자는 벼랑턱을 빠져 나와 도망쳤다. 긴 줄기의 달빛이 새끼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새끼들개가 외마디 비명에 붉은 울음을 간단히 꺾고 달빛에 실려 올라갔다, 달에 먹혔다. 도망치는 어미의 온 몸에서 붉은 울음이 쏟아졌다. 홀로 들판에 남겨진 어미 들개는 붉게 뒤덮인 몸뚱어리로 맹렬히 달빛을 뚫어내려 했다. 붉은 울음이 분수처럼 쏟아지다 울음에 울음이 쌓였다, 꽃이 되었다. 신음소리 땅 위로 바람처럼 흘렀고, 밤바람을 탄 몸뚱어리 모래처럼 날렸다. 몸뚱어리 잃었다. 그럼에도 들개는, 들개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자는 외숙모의 눈동자 한구석에 마련된 여백을 용케도 찾았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어미들개의 그림자는, 간신히 외숙모의 눈동자에 숨었다. 눈물이 흘러내릴 구멍을 들개의 그림자가 채웠다. 어미는 몸에 꽂힌 채 꺾여버린 붉은 장미를 힘겹게 핥았다.

들개의 그림자를 발견한 후부터 아이에겐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눈동자의 색깔은 저마다 조금씩 달랐다. 백인의 눈동자와 흑인의 눈동자가 달랐고, 외숙부의 눈동자와 외숙모의 눈동자가 달랐다. 한 사람의 눈동자라도 매 순간 조금씩 변했다. 아이는 할머니의 눈동자 색깔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가장 깊은 밤이었다. 맑은 흑빛 거울처럼 잡티 하나 없어서 아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걸 즐겼다. 하지만 외숙모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자주 할머니의 눈을 피했고, 할머니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거실은 자주 비었다. 아이는 할머니 방을 예전보다 더 자주 찾았고 할머니는 뻥과자를 내어주었다. 엉덩이를 두드리며, ‘내 아기, 내 아기.’ 노래 부르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아이는 방긋 웃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현수 생각에 가끔 눈물 지었다.

외숙모는 인부들을 시켜 무덤을 만들었다. 아이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무덤 위에 십자가 하나 꽂았다. 그 즈음 외숙부와 외숙모의 말다툼이 잦았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현수를 버렸어요!” 원망하는 듯한 그녀의 소리는 앙칼졌다. 가끔 할머니가 끼어들면 1층은 아주 시끄러워 아이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자야 했다. 이러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했다. 천당으로 가지 못한다고도 했다. 누가 어느 말을 했는지 아이는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무덤에는 아무 것도 채워 지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무덤은 그래도 무덤처럼 있었다. 무덤은 현수방을 향했다. 보름이 산의 곡선에 접할 듯 커다랗게 밤하늘을 채울 때면, 십자가의 끝이 달에 꽂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빈 무덤에 꽂힌 십자가가 달빛을 반사하고 반딧불처럼 빛났다.

할머니는 그 무덤을 싫어했다. 그믐이 무더위에 지친 땅을 훑으며 요염하게 이글거릴 때 할머니는 외숙모의 십자가와 성경을 끄집어내 마당에 내동댕이쳤다. 십자가가 달빛에 타, 재 될 것만 같았다. 할머니의 눈에서 그믐달이 이글거렸고, 외숙모의 항변이 짐승의 울음처럼 들렸다. 하지만 할머니의 눈빛과 외숙모의 항변은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외숙부는 둘을 떼어놓으려고 노력했다. 현수방 창가에서 이를 몰래 지켜보던 아이는 조용히 귀를 막았다. 할머니의 울부짖음이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련히 들렸다. 내놓으란 말이야, 내놓아! 비명 같은 소리가 현관문 열리는 소리로 이어지고 2층으로 통하는 복도계단에서 뭔가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로 이어졌다. 아이는 놀라 계단 쪽으로 뛰다시피 가 아래를 살폈다. 할머니가 1층 마루에 쓰러져 피를 흘렸다. 모두가 혼비백산해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외숙모는 성경과 십자가를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할머니의 엄지 발톱이 거의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긴 발톱이 계단에 걸린 채 발을 헛디딘 모양이었다. 살점에 꼭 붙어있어야 할 발톱이 90도로 들려 천정을 향했다. 피는 쉴 새 없이 나왔다. 마루에 들러붙어 자리잡은 얼룩진 피. 아무리 닦아도 끈질기게 남은 피자국은 마치 들개모양 같았다.

한동안 할머니는 다리를 절었다. 현수에 대한 기억도, 절었다. 눈망울에서 빛을 잃었다. 그녀는 외숙부가 사다 주는 뻥과자를 혼자서만 먹기 시작했다. 눈빛을 잃은 후론 가끔 아이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점점 어린 애처럼 굴었다. 아이를 현수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아이는 그녀의 눈망울에서 더는 웃지 못했다. 그녀는 서서히 홀로 지냈고 밖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외숙부가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서재보다 1층 거실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몰래 밖으로 나갔고 가끔은 손과 발이 흙으로 범벅이 된 채 돌아왔다. 한번은 무덤을 파다가 외숙부에게 업혀서 들어오기도 했다. 그 때 그녀는 외숙부의 등을 때리며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외쳤다. 그러던 그녀가 이틀 동안 실종된 후,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외숙부에게 업혀온 그녀는 일주일 동안 앓았다. 의사가 분주히 다녀갔지만 그녀는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아이는 밤낮으로 기도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정성껏 기도하면 이루어져.”

외숙부가 말했다. 설령 그런 말을 듣지 못했더라도 아이는 본능적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이는 할머니마저 현수처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곡예 하듯 나무를 타고 다녔다. 색깔이, 장마가 내리던 밤에 보았던 그림자의 것이었다.

‘난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그림자가 했던 말이 아이의 마음에서 울렸다.

‘현수형…….’ 눈물이 핑 돌았다. 닦았다.

낯설지 않으니 무섭지 않았다. 두려움이 사라지니 더 많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색깔의 농도가 조금씩 다른 그림자들이 밤에 숨어있었다. 놀란 아이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들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고,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바랐는지조차 잠깐 잊었다.

다음날 할머니가 눈을 떴다. 기력이 쇠해 보이는 그녀를 보고 아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가장 깊은 밤이었다. 맑은 흑빛 거울처럼 잡티 하나 없어서 한동안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웃으며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상체를 일으켜 아이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아가야, 아가야. 이 할미가 항상 네 옆에 있을 거야. 이젠 걱정 하지 마라.”

분명, 둘이었다.

 

가을

단풍 색깔이 산을 덮기 시작했다. 색깔이 여물어 가장 깊은 향을 퍼뜨렸다. 산은, 붉은 낙엽을 바람에 흘려 보내기 전까지 신열이 나는 단풍잎을 옹골지게 머금었다. 겨울에 죽임 당하지 않기 위해 색깔 태웠다. 곧 깊은 색깔 품에서 스스로 생명의 끝자락을 놓을 것이다. 복잡하지 않았고 나약하지 않았다. 그 위에서 그림자들은 뜨거워졌다. 밤이 깊어지고 길어지자, 그림자들은 밤의 투쟁을 격렬히 벌였다. 달을 견제하려 하였다. 더 깊은 밤을 향한 욕구가 그들에게 있었다. 그렇게 수없는 세월이 지나면서도 그림자들은 달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달을 먹으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월식으로 인한 승리의 기쁨은 늘 잠깐 동안이었다. 결국은 반역의 그림자 무리들은 패배를 반복했다, 겨울 밤을 기다리며 가을 밤 속에 갇히는 형벌을 받았다.

그나마 안개 낀 으슴푸레한 달밤이면 그림자들은 달빛의 통제에서 잠시 벗어났다. 그래서인지 메숲의 그림자들은 으스름달밤에 심술궂은 장난을 쳤다. 그림자들은 산장의 외벽에 들러붙어 기어 다녔다. 키득거리며 메아리 치는 듯한 소리 반복했고, 산짐승들의 소리를 기괴하게 흉내 냈다. 마당에 모여 현관의 조명등을 자신들의 몸으로 가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반드시, 사나운 들개가 나타났다. 들개는 메숲의 그림자를 경계했다. 그것들이 산장을 탐하거나 무덤가에서 어슬렁거리면 어김없이 날카로운 송곳니 드러냈다. 그림자들은 가끔, 떼로 도전했다. 들개는 홀로 대적했다. 피로 엉겨 붙은 털과 피부병으로 군데군데 드러난 살. 흉한 몰골로도 절대 지치지 않았다. 산장과 무덤을 지켜내려는 맹목적인 움직임은 공격적인 울음을 낳았다. 몰래 지켜보던 아이는 들개가 달을 자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아이는 조마조마한 것이 낫다고 여겼다. 그림자들이 들개와 싸우지 않을 때면 아이에게도 가끔 장난을 쳤기 때문이다. ‘내일 밤에 네 엄마 죽어.’라고, 이불을 뒤집어 쓴 아이에게 속삭이곤 했다. 그 소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물결처럼 퍼져 고막에 부딪혀 메밀꽃 일었다. 고막을 울리고 아이를 울렸다. 아이는 ‘내일 밤이 오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때마다 그림자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 들렸고 아이는 늘 현수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내 동생 못 살게 굴지 마!”라고 외쳤다. 아이는 현수가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밤하늘에 숨어산다고 믿었다.

“현수형을 봤어요.”

“꿈을 꾼 모양이구나.”

외숙부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아니에요. 정말로 현수형의 눈동자 색깔이었어요.”

아이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영혼이 제가끔 달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색깔의 눈동자가 돼. 그래서 비슷한 검정색이라도 아무 눈동자로 바꿀 수 없는 것이지. 하지만 그 눈동자들은 때가 되면 하늘나라로 올라간단다. 하늘나라가 뭐라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눈동자는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검지를 펴 동그라미를 그렸다.

“넌 색과 형태에 민감하구나.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

외숙부는 현수에게 자주 하던 말을 내뱉었다. 아이는 그를 올려다 보았고, 그의 눈동자에서 현수의 색깔을 느꼈다. 다시 보았다. 현수의 그림자는 아니었다. 잠시 스쳐간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이었을까? 아이는 알 수 없었다. 그만큼 현수의 색깔이 생생하게 그의 눈동자에 스몄었다. 외숙부는 기침을 했다. 피를 쏟았다. 아이를 내려놓고 손바닥에 묻은 피를 닦았다. 잘 닦이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에 장미꽃이 날카롭게 새겨진 듯했다. 그것의 가시가 목구멍에 걸렸는지 그는 자꾸만 기침을 해댔다. 그의 얼굴은 뭐든 써 내려갈 수 있을 새하얀 종이 같았다. 외숙부는 점점 엄마를 닮아갔다. 할머니도 그랬다.

늦가을 비가 멈추던 날, 지붕 슬레이트 판을 타고 떨어지던 빗물이 눈물처럼 짰다. 그 날 저녁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속삭였고, 그림자는 산의 숨결을 타고 사뿐히 날아올랐다. 연처럼 바람에 몸을 맡긴 할머니의 그림자.

“할머니!”

흑빛 매끄러운 밤바다 같은 그림자에 비친 아이가 새파랗게 놀란 채 울고 있었다. 그림자는 너무도 맑은 거울이었다, 달에 먹혔다. 달은 아이의 비명에 놀랐는지 사래 걸린 듯, 급하게 밤을 토해냈다. 할머니의 그림자를 삼킨 달이 예전보다 더 짙은 밤을 토해냈다, 할머니는 밤이 되었다. 그녀는 밤바람을 타고 세상으로 퍼졌다. 달이, 밤하늘에 홀로 박혔다. 청아한 달빛은 할머니의 색깔을 제대로 느끼는 데 방해가 되었다. 아이는 달이 할머니의 원수라 생각했다, 언젠가 달을 밤하늘에서 떼어버릴 것이라 다짐했다.

하지만 달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막을 순 없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그림자들도 본능대로 움직이긴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가장 비슷한 밤의 여백을 자신의 색깔로 충실히 채웠다. 외숙모의 눈동자 여백에 숨어사는 들개의 그림자도 이런 이치에 순응하는 것일 뿐이었다. 물론 아이가 그 이치를 깨닫기엔 너무 어렸다. 아이는 그저 밤을 타고 놀러 오는 현수의 그림자를 반겼고, 달의 교만이 싫었다. 그림자의 방문에 맞추어 창문을 열고 커튼을 쳤다. 그러면 아이는 모든 곳을 채우고 있는 할머니의 색깔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 하게 해주세요.’

아이는 기도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망했다. 아이가 보기에, 달은 어떤 것도 베풀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시 기도해야만 했다. 그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달빛이 드는 자리를 피해 앉거나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갈수록 밤은 더욱 튼실히 깊어졌다.

할머니가 밤이 된 후로, 숙모의 눈동자엔 들개의 그림자가 더 자주 들어왔다. 밤마다 들개의 울음이 산장을 메웠다. 들개는 뚜렷한 형상을 지닌 채 2층에 올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붉은 송곳니 드러낸 채 어슬렁거렸다. 현수의 침대에 누운 아이를 바라보는 들개의 눈빛은 공허한 공격성을 띠었다. 아이는 그것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꼼짝 못하는 아이를 한참 바라볼 때면 들개의 눈동자 깊숙한 여백에 외숙모의 그림자가 있었다. 입에 물린 울음이 침을 타고 마룻바닥에 떨어져 울렸다. 송곳니에 맺힌 붉은 선혈도 2층에 진한 흔적을 남겼다. 응고된 피의 색깔엔 외숙부가 토한 피의 잔흔도 섞여있었다. 외숙부는 서재보다 침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이는 현수의 방보다 서재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서재에 있을 땐 들개도 조용했다. 아이는 안락했다. 오줌이 지린 경우엔 참기 어려웠지만, 대개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책 냄새는 수많은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책벌레의 느릿한 움직임을 천천히 지켜보며 행간에 시선 찌르면, 활자들은 깜짝 놀라 더욱 검은 피 흘렸다. 알알이 박힌 활자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삶에 대해 노래 불렀다.

아이는 간혹 외숙부의 소설도 읽었다. 외숙부의 원고지가 책상에 올려져 있을 때면 아이의 시선은 휘갈겨 쓰인 그의 글자를 느릿느릿 좇았다.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 소설이었다. 인물도 기억나지 않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문장만큼은 검은 코트를 입고 돌개바람으로 휘몰아쳤다. 밤바람이 차가워졌다. 암청색 밤하늘 위에서 요요하게 휘감기는 달빛이 글자의 궤적을 훑었다. 글자들은 추웠다, 행간의 숲으로 숨어들어가 그림자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밤으로 위장하지 않은 흰 종이에 제 몸들을 온전히 드러내고는 다양한 방향으로 획을 뻗었다. 외숙부의 획이 달빛과 정면승부하고 있었다. 길눈에 빠져 허우적대던, 글자들이 제가끔 일어서 달을 향해 획을 쏘았다. 조용한 전투였다. 달의 피가 밤이 되어 흘렀다. 글자들이 다치기도 했다. 차가운 달빛에 생눈판으로 변한 흰 종이에서 검은 피 냄새 풍겼다. 활자가 되지 못한 글자는 활활 타고 남은 재처럼 생명력을 잃었다. 아이는, 불안했다.

 

겨울

한동안 눈이 내렸다. 수북이 쌓인 눈이 아이의 키를 훌쩍 넘어서고도 쉬지 않고 내렸다. 눈이 밤마다 달빛을 반사하여 영롱한 빛을 뱉었다. 저건 요정의 불빛이란다, 엄마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추위는 점점 깊어졌다.

외숙부의 기침소리도 점점 깊어졌다. 1층 침실에서 올라오는 잔향(殘響)이 아이의 발바닥을 살짝 두드렸다. 서재에서 책을 읽을 때면 아이는 밤마다 들리는 그의 기침소리에 박자를 맞추었다. 길고 잦은 기침 사이에 짧은 정적이 놓였다. 들개는 그의 피를 핥아주고 있을 것이었다. 짧은 정적이 잦아질수록 들개의 붉은 송곳니에 엉겨 붙은 혈흔의 색깔도 깊어졌다. 들개의 울음도 더욱 붉어졌다.

차가운 눈은 단단한 얼음판이 되었다. 추위는 칼바람을 타고 경박해졌다, 외숙부는 심하게 앓았다. 아이는 낮달처럼 떠버린 그의 얼굴을 보고 영화화면 속 죽은 사내를 떠올렸다. 겁이 났다. 언제나, 떠나 보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울었다. 외숙부는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금방 나아서 같이 놀자고 몇 번이고 아이에게 약속했지만, 아이는 믿기 어려웠다. 할머니가 어긴 약속이 자꾸 생각났다. 의사가 산장을 찾으면, 늘 아이를 내보낸 후에야 진찰을 했고 아이는 아무 말도 엿들을 수 없었다. 문 앞에서, 웅얼거리는 말의 찌꺼기라도 건지려 했지만 아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 세계는 너무도 춥고 어두운 것처럼 느껴졌다. 겨울 해는 얕았고 밤은 너무 깊었다. 하지만 냉혹한 달빛은 결코 깊지 않았다. 그것은 심술궂게도 그림자들을 밤에서 자꾸 덜어내었다. 그림자들은 밤을 살기 위해 달을 닮아야 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믿지 않아야 했다. 짓궂은 장난조차 칠 여유 없는, 한겨울이었다.

외숙부가 겨울밤으로 여행을 떠나던 날, 들개는 2층과 1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유난스럽게 으르렁거렸다. 아이는 평소보다 숨죽였다. 외숙부의 기침소리는 절정에 올랐다. 짧은 정적이 한없이 길어지더니 끝내 기침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바닥에 귀를 대고, 킁킁거리며 피를 핥아주고 있을 들개를 상상했다. 그 때 아이 옆에서 같은 자세를 흉내 내는 그림자가 보였다. 현수의 그림자였다.

“난 이제 가봐야 해.”

들개의 긴 울음이 들렸다. 다양한 방향으로 날아간, 붉은 울음의 촉이 밤하늘과 달에 꽂혔다. 그 엄격하고 표독스러웠던 울음이 심하게 굴절됐다, 울렸다. 울음의 힘에 밤이 살짝 흔들렸다. 밤하늘에 걸린 달도 놀라 예리한 달빛으로 하늘을 찔렀다. 당황한 그림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창백한 눈벌판에 검은 그림자 알알이 박혔다. 얼음벽에 매달린 채 다시 어둠에 몸을 숨기려던 그림자들은 달빛에 꽂혔다, 달에 먹혔다. 메숲의 그림자들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림자들은 달에 먹히지 않기 위해 서로의 자리를 빼앗고 빼앗겼다.

밤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서재의 창문이 활짝 열렸다. 현수의 그림자는 일어나서 창가로 갔다. 웃었다. 사뿐이 날아올랐다. 아이는 현수의 그림자가 산 너머로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쪽을 바라보았다. 끝났다 생각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책상에 놓인 흰 종이에서 글자가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잉크냄새 피우며 글자들이 뭉쳤다, 사람의 윤곽을 보였다. 그림자였다.

“삼촌!”

그림자는 창 밖으로 빠져나가려다가 아이를 되돌아봤다.

“어떻게, 알았니?”

아이는 적당한 대답을 찾기 어려웠다. 머뭇거리면서도 그림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색깔이 삼촌이에요.”

그림자에서 잉크냄새가 진하게 배어 나왔다. 외숙부의 그림자는 아이에게 다가가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아이는 눈물을 훔쳤다.

“울지 마, 이 녀석아. 자꾸 눈물을 보이면 눈동자가 닳아버릴 수도 있어.”

아이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숙부의 그림자는 다시 창가로 갔다.

“밤바람 차니, 창문 꼭 닫아라.”

그의 그림자는 현수의 그림자를 좇았다. 아이는 창가에서 그의 그림자가 날아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마당에서 들개도 그 방향을 향해 아주 길고도 아픈 울음을 쏘아 올렸다. 세찬 달빛이 들개의 몸뚱어리를 꿰뚫었다. 한겨울 밤 붉은 장미 넝쿨이 들개의 몸에서 연기처럼 피어 올랐다, 달빛을 감고 달까지 자랐다. 달을 관통했다. 붉은 울음이 장미 넝쿨을 타고 올라 달에 번졌다, 달이 취했다. 들개의 눈동자에서 외숙모의 그림자가 쏟아져 나왔다. 외숙부의 그림자를 좇았다.

외숙부의 그림자가 지날 때마다 그 근처에 있던 그림자들의 색깔이 더욱 까매졌다. 깊은 밤의 여백을 튼실히 채우고 있으니 자신의 자리는 노리지 말라는 의미를 지닌, 경계의 색깔이었다. 그림자의 무리를 헤치고 외숙부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곧 외숙모의 그림자도 지나갔다. 들개의 울음은 그들의 행로를 다른 그림자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호위했다. 외숙부모의 그림자가 산의 곡선 아래로 뉘엿뉘엿 사라질 때, 아이는 자신의 눈동자에 걸린 흑백사진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림자들은 잠깐 동안의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밤의 여백으로 몸을 숨겼다. 흰 눈만이 산을 덮고 있었다. 모두, 떠났다. 아이는 눈동자를 잃은 얼굴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눈물은 꾹,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꾸 눈물이 흘렀다.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다, 검은 잉크가 팔뚝에 번졌다.

“엄마…….” 말을 신음처럼 흘렸다.

아이는 외숙부의 말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자꾸 가슴이 뛰었다. 숨이, 찼다. 피가 빨리 돌면서 손가락 끝을 때렸다, 손가락 끝이 아렸다. 손가락 끝에 땀처럼 검은 잉크가 맺혔다. 잉크가 흐르는 손으로 달을 가렸다. 팔뚝으로 잉크가 흘러내렸다. 아이는 눈을 감고 밤의 색깔을 느끼려 했다. 곧 아이의 몸은 잉크로 흠뻑 젖었다. 고개를 돌리자 책상이 보였다. 한참 동안, 휑한 듯, 빈 종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외숙부가 채웠을 궤적을 따라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 * *

 

엄마는 이태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빈 집에 홀로 남았다, 아주 오랫동안,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