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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는 왜 죽었나

  • 작성일 2007-05-17
  • 조회수 403

 

나르시스는 죽었다. 언제나 슬픈 얼굴로 눈물만 흘리던 나르시스는 죽었다. 조금씩 부서지더니 어느 날 사라졌다.

“날 사랑하니?”

나르시스는 언제나 조용히 물었다. 난 그럴 때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들을 했던 걸까. 나르시스는 내 대답에 씁쓸히 웃곤 했다. 그 웃음이 기쁨인지 비웃음인지 알 수 없다. 그저 그 웃음을 보며, 단지 안도를 했던 것 같다.

“넌 날 사랑하니?”

어느 날엔 나르시스에게 되물었다.

“난 나의 별을 잃고 싶지 않아. 더 찬란히 빛나게 하고 싶어. 나에게 별은 너야.”

알 수 없는 말. 난 사랑하냐고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 난 그게 듣고 싶었다.

“모르겠어.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널 사랑하니?”

나르시스는 오히려 되묻는다. 당연한 말. 난 날 지독히 사랑한다.

“난 날 너무 사랑해. 그만큼 널 사랑하고 있어. 넌?”

내 말에 나르시스는 웃는다.

“넌 날 사랑하지 않아. 난 곧 부서질 거야.”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니, 난 나르시스를 사랑한다.

“넌 날 사랑하는 법을 잊었어. 난 부서져가.”

아니, 난 똑똑히 알고 있다. 모르는 건 나르시스. 난 나르시스를 사랑한다.

“난 널 사랑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쩌면 나보다 더.”

“아니, 넌 감당할 수 없어. 겁쟁이. 넌 날 버릴 거야.”

언제나 이런 식. 나르시스는 항상 두려워했다. 내가 버릴 거라 했다. 내가 품은 별 까지도.

결국 나르시스는 죽었다. 아니, 죽은 것이 분명하다. 나르시스가 사라진 후, 나는 부서져가고 있다. 나르시스가 죽었기에 부서지는 거다. 왜 죽은 걸까. 알아야 한다. 점점 부서지고, 스러져가는 날 위해서라도. 어쩌면 나르시스를 살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르시스는 왜 죽었을까.


1. 꿈

보름달. 별. 검푸른 밤하늘.

밤하늘의 푸르름은 낮의 그것 보다 더 아름답다. 가끔은 밤바다 보다 눈이 부시다. 그 검푸른 밤하늘엔 별이 박혀 있고, 달도 박혀 있다. 나는 나르시스에게 손을 뻗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나르시스는 없다.

나르시스는 언제나 울었다. 꿈을 꿀 수 없게 되었다며 울었다. 나에게 별이 떠나려 한다며 울었다.

“별을 가둬 둘 수 있니?”

나르시스는 물었다.

“지금 내 안에 별은 있어. 내가 있는 한 별도 있어.”

난 당연한 듯 대답한다. 나르시스는 슬픈 표정을 짓는다.

“움직이지 않아. 불꽃도 꺼져 간지 오래야. 이제 곧 널 떠날 거야.”

“아니, 할 수 있어.”

“……. 몰랐구나. 이미 꺼져버렸어.”

나르시스는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하던 날 떠올린다.

그 즈음이었다. 나르시스는 날 떠났다.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떠났다. 사랑할 수 없을 거라며 떠났다. 나르시스가 떠난 후, 차가워진 가슴은 가라안지도 붕 뜨지도 못했다. 결국 차가워진 가슴 속에서 별은 부서져 내렸다.

하늘을 본다. 별이 반짝인다. 별을 보며 생각한다. 내 가슴에 별을 묻어두면, 나르시스는 돌아올까.

별을 가슴에 박는다. 별이 빙그르 돈다. 불꽃이 인다. 닳고 닳은 가슴에도 별은 불꽃을 피운다. 별은 더 세게 돈다. 불꽃이 더 세게 인다.

별을 가슴에 박고, 주위를 찬찬히 돌아본다. 차가운 바람이 휙 불어온다. 나르시스가 원한 것이 이것이었을까. 그때 별은 왜 멈춘 걸까. 알 수 없다.

순간 불꽃이 꺼져가기 시작한다. 별의 움직임도 둔해진다. 왜…….

별은 차가워진 가슴에서 부서져 내린다. 그리고 차가워진 가슴도 부서져 내린다.

나르시스는 이렇게 말했겠지.

“불꽃에 말라버린 거 아냐? 네가 날 죽인거야.”

정말 난 말라버린 걸까. 내가 별을 부숴버린 걸까.

별의 불꽃을 모아 날 태워야 할까.


2. 타협

사람들은 저마다 책을 읽는다. 한 줌 흙도 남지 않을 머릿속에 최대한 많이, 최대한 꾸역꾸역……. 누군가의 책에선 눈물이 흐르고, 누군가의 책에선 피가 흐른다. 그리고 누군가의 책에선 오물이 흐른다.

일렬로 늘어선 책장, 일렬로 늘어선 책, 일렬로 늘어선 책상, 의자, 백열등, 사람들……. 그 그림의 가운데를 잘라 포개면, 하나가 된다. 다른 모습, 내용, 생각……. 교묘히 중첩된다.

‘너와 난 다르다. 하지만 너와 난 하나다.’

애매한 틀 속에서의 동상이몽, 이상동몽.

난 나르시스를 찾는다. 무너져 내린 내 별도 가슴도 나르시스를 찾으면 될 것 같은 막연함이 있다. 그리고 부서져가는 날 위해서도 나르시스가 필요하다. 나르시스는 죽었을까. 죽었지만, 아직 살아있다. 아니, 날 떠난 순간 죽었다. 그래, 분명 죽었다. 그러니 찾아야 한다. 왜 죽었는지.

나르시스는 도서관이 싫다고 말했다.

“이 곳은 네가 좋아하는 별을 키우는 곳이야. 왜 싫지?”

도서관은 별의 생산소, 근원지. 더욱더 반짝이게 빛날 힘. 나르시스는 그 곳이 싫다고 했다. 마지못해 날 따라와도, 악취가 난다며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묻곤 했다. 왜 싫은 걸까.

“별? 넌 네 별이 이곳에서 빛이 나니?”

별. 별은 내 안에 있다. 난 빛이 나게 닦아 주고 싶은 거다.

“내 별은 아직 내 안에 있어.”

내 대답에 나르시스는 힘없이 웃으며 말한다.

“……. 네 별은 희미해.”

희미하다. 희미하다? 희미하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별은 아직 내 안에 있다. 별은 내 것이다.

“그럼, 저들은 뭐지? 저들도 별은 있어.”

“…….”

나르시스는 내 대답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잠시 날 바라만 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도서관을 휙 돌아본다.

“저 아이들을 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아이 둘을 가리킨다.

“저 아이 중 한명은 자기를 사랑하지만, 한명은 별 조차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아이 둘 다 자신을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난 그저 그 모습이 좋아 보인다.

“저 둘은 어린아이야.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어. 저들에겐 놀이터와 장난감이 더 어울려.”

“그러다간 도태돼.”

나르시스는 또 다시 쳐다본다. 그의 눈에 내가 박힌다.

“저 중 한 아이는 별이 반짝여. 자신의 별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 꺼져 가면 자신을 태워서라도 빛나게 만들 거야. 하지만 다른 아이는? 있어야할 별이 애초에 없어. 저 아이는 곧 부서질지도 몰라.”

이상한 말.

“난 모르겠어. 내 눈엔 같아.”

시간이 흘러 나르시스를 찾는 지금. 도서관에 그 아이들은 아직도 책을 읽고 있다. 그때도 보이지 않았던 별이 지금에 와서 새삼 보일 리는 없다. 그때 나르시스가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그 두 아이 중 한 명은 몸에 금이 가 있다. 나처럼 부서져 가는 거다. 처음부터 차가웠던 가슴을 안고.

“저기.”

난 부서져가는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날 쳐다본다. 아이의 눈에는 내가 비춰지지 않는다. 초점 없는 눈. 그 눈에는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혹시, 나르시스를 아니?”

“……. 예. ……. 봤어요.”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눌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한 템포 느리게 대답을 한다.

“그래? 언제?”

“언제인지는 모르겠어요. 내가 여기에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는 걸요.”

제자리. 나르시스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르시스를 어떻게 보게 되었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다.

“찾아왔어요.”

“찾아왔다고?”

나르시스는 날 떠나 왜 이 아이에게 간 걸까. 궁금해진다.

“예. 슬프게 날 쳐다보며 울었어요.”

“그래? 자세히 좀 말해줄래?”

아이는 귀찮다는 듯, 인상은 쓴다. 난 못 본 척, 재촉한다.

“한 손에는 작은 유리 시계를 들고 있었고, 한 손에는 유리 열쇠를 들고 있었어요. 왜 우냐고 물었는데,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대요. 자길 사랑하러 간다고 했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별이 없다며 자기와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난 또다시 재촉한다. 아이는 또다시 인상을 쓰며 말한다.

“저에게 별을 가지지 않으면, 부서질 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시계를 보여줬어요. 그 시계 이상해요. 초침만 있는 거 있죠?”

“초침?”

기억이 난다. 나르시스는 항상 한손에 초침만 있는 시계를 들고 있었다. 예전에 한번 물어봤던 것 같다.

“예, 초침. 이상해서 물어 봤더니,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러면서, 멈추게 할 수 없어서 가둬둬야 한댔어요. 아닌가? 보호해야한댔나? 유리집 뭐라 한 것 같지도 한데…….”

아이는 귀찮은 듯 했다.

“어디인지는 모르고?”

“…….”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날 쳐다만 본다. 아이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모르는구나. 미안. 시간을 빼앗아서.”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시 책을 읽는다. 어깨너머로 훔쳐본 책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유리시계, 유리열쇠……. 뭐지?

나는 도서관을 나오며, 다른 아이의 책도 훔쳐보았다. 그 아이의 책에는 무언가가 빼곡히 써져 있었다.

“아이야, 그거 무슨 책이니?”

지나가는 길에 묻는다. 저게 별과 관련 있는 걸까? 저 아이의 책엔 왜 무언가가 쓰여 있는 걸까.

“나에 대해 써져 있어요.”

“그래…….”

나. 나……. 나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유리시계. 그러고 보니 나르시스가 항상 지니고 있던 유리시계가 보이지 않는다. 유리시계를 가지고 어디로 간 걸까. 유리집은 뭐지? 갑자기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가기 직전. 도서관을 둘러본다. 아까와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다.

일렬로 늘어선 책장, 일렬로 늘어선 책, 일렬로 늘어선 책상, 의자, 백열등, 사람들……. 그 그림의 가운데를 잘라 포개면, 하나가 된다. 다른 모습, 내용, 생각……. 교묘히 중첩된다.

 어디선가 악취가 난다. 악취를 찾는다. 말끔한 차림의 학생. 그 곁에 다가가 책을 본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의 책엔 얼룩만이 있다. 악취는 심해져 간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도서관을 나온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악취를 견뎌내는 건지, 못 맡는 건지 모르겠다.

나르시스를 찾기 위해 발을 옮긴다.

살아있는 걸까. 난 부서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르시스는 죽은 거다. 아니라면 날 찾아와야 한다.

갑자기 답답해진다. 무엇을 잘못 한 거지? 저 도서관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이건, 얼룩진 빈 종이이건 간에 말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살기위해 살아갔는데, 온전히 날 더 사랑하려 했는데……. 별과 가슴은 부서지고 이제 나도 부서지려 한다. 별을 품기엔, 난 날 사랑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도 별을 품고 불꽃을 내며 물(物) 속에 뛰어 들고 싶었다. 하지만 물(物)은 가슴을 얼게 만들었다. 차가워진 가슴은 불꽃에 말라갔고, 마르면 마를수록 더 차가워 졌다. 별을 잃는 게 두려워 다른 방법으로 날 사랑하려 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법이 틀렸던 걸까. 별은 부서졌다. 아니, 실은 별을 감당 못하고, 차가워진 가슴에서 내가 부서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물(物) 안에 들어가기 위해선, 내가 차가워져야만 했다. 그래야 날 사랑할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별을 부서버린 거였다. 그걸 잊고 있었다. 다른 별을 품어도, 여전히 무너내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견디지 못한 가슴이 부서질 때까지 난 잊고 있었다. 나르시스의 말이 맞았다. 난 겁쟁이다. 내가 그를 버린 거다.

아, 가엾은 나르시스. 어쩌면 아직 살아 있는 지도 모른다. 아, 가엾은 나르시스. 그는 죽었다. 나의 버림에 이미 부서져 내렸다. 그래서 나도 부서져 가고 있다.

별을 품어 볼까. 그럼 부서진 가슴은, 물(物)은…….

나르시스는 내가 버렸다. 아니 버리지 않았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난 그를 잡았다. 아이가 자기를 사랑하러 간다지 않던가. 그건 나르시스 혼자 떠난 것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내 안의 죄책감이 적다 할 수 없지만, 스스로 떠난 것은 나르시스 책임이다. 그래, 나르시스는 떠났다. 나르시스가 떠남으로 난 부서져 가고 있는 거다.

찾아야 한다. 찾을 수 없다면, 부서진 흔적이라도…….

길을 걸어간다. 목적지도 없다.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나르시스를 찾기 위해 나왔을 뿐이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 군중 속 고독. 난 이 세상에 무엇인가. 예전에 했음직한 고민을 꺼내어 본다. 나아갈 곳도 돌아갈 곳도 모르겠다. 나르시스가 있다면 안내를 했을까. 나르시스의 슬픈 얼굴만이 떠오른다. 그저 가야하는 곳이란 작은 내 집인 듯 싶다. ‘즐거운 나의 집’ 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내 사랑, 나의 집.”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그래도 허전함이 차오른다.

진정한 자유. 나르시스. 나르시스가 사랑한 나와 아끼던 별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기에 그는 죽었을까. 참된 자유란,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라던 어느 말처럼 나에게 돌아갈 곳은 비단 집이 아니었다. 나르시스. 나르시스였다. 돌아갈 곳이 없는 난 집으로 돌아가도 노랫말처럼 편하지 않고, 쉴 수도 없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별이 멈춰가던 그 때에도, 불꽃이 사그라져 가던 그 때에도, 차가워져 가는 가슴에도. 나르시스가 있음으로 괜찮았다. 외려 무감각해 졌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갔을까. 나르시스는 살아있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생각에 잠기며 고뇌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처음으로 의심해 본다. 난 나를 사랑했을까. 그래, 난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넌 너 자신을 몰라.”

나르시스는 말했었다.

내 맘 속 깊은 상처까지 다 알고 있다던 내 말에 나르시스가 한 말이었다. 날 사랑하기에 난 그 상처까지 사랑하고 싶다고 했던 내 말에 나르시스가 한 말이었다.

“네 상처는 나도 알아. 그건 네가 입 밖에 내뱉는 순간 너만 아는 것이 아닌 거야. 넌 네 별 조차도 몰라.”

“별? 잘 알아. 내가 품어 왔던 거니까. 그런데 이렇게 멈춰가는 건 어쩔 수 없어.”

“네가 진정 아끼고 싶어 한 건, 네 자신이니? 네 상처니?”

“……. 내 자신이지만, 상처도 싫어.”

자신 없는 말. 나르시스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스스로 상처를 만드는 구나.”

애매모호한 말. 상처……. 난 나를 모르는 걸까. 매일 밤 피눈물 흘리며 좌절했던 난, 그 상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었다. 나도 모를 수많은 가면, 그 어딘가에 상처는 가려져 있다. 그래, 가면의 수만큼, 난 나를 모르는 구나. 진짜 나는 모르는 구나. 믿었던 자에게 외면 받던 그 순간에도 난 웃었다. 집에 돌아와 오열을 하던 건 나였다. 외면, 배신감에 대한 좌절이었던 걸까. 복수에 대한 다짐이었던 걸까. 어느 것이 진실인지도 모른 채, 난 그 모든 것을 묻었다. 난 단지 상처를 두려워했던 걸까. 생각해보니, 내 별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난 내 자신보다 상처를 더 아꼈나 보다. 상처 하나에 깜짝 놀라 움츠렸고, 나름대로 강해졌다 믿었다. 하지만, 믿은 순간과 그 다음이 또 다른 상처내기 하는 걸 지금에야 깨닫는다. 난 참 바보구나.

나르시스. 나르시스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졌다. 가던 발을 멈춘다. 갈 곳은 집이 아니다.

유리집, 유리시계, 유리열쇠. 유일한 단서.

나르시스의 유리시계. 예전에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왜 기억하고 있지 못했을까. 항상 나르시스의 손에 있었던 건데. 나르시스가 소중히 여기고 있던 건데. 난 바보다. 나르시스에게 조르고 졸라서 들었던 건데. 이제야 기억이 난다. 나르시스는 시계가 나라고 했다. 물(物)을 만나 차가워지는 날 걱정했다. 그 시계를 멈췄으면 한다고 말했다. 초침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난 물(物)과 만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멈춰야한다고, 멈출 수 없으면 보호해야한다고 말했다. 왜 이제야 기억을 하는 걸까. 아까 아이도 말했던 건데.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까. 물(物)에서 보호하기 위해 나르시스는 어디로 간 걸까.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머리가 아프다. 몸이 점점 더 부서져 간다. 이러다가는 나 자신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르시스. 나르시스. 나르시스……. 생각이 멈췄을 땐, 버스 정류장이었다.

예전에 버스를 기다리던 주부를 보며, 나르시스에게 물었었다.

“나르시스, 저기 저 사람에게도 별은 있을까.”

나르시스는 그 주부를 보며, 예전엔 있었을 거란 말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별이 없기에 씁쓸하다고 했다.

“나도 그럴게 될까?”

“아마도. 네 별은 희미해져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겠지. 네가 부서지게 되면, 넌 없는 게 돼.”

“항상 무서운 소리구나.”

난 그때 그래도 좋겠다란 생각을 했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어렵다며, 평범해지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나르시스는 그저 웃었다. 생각해 보니, 슬픈 표정이었던 것 같다. 평범함 삶. 대학을 목표로 청소년기를 숨차게 뛰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날 위해 산다며 살아왔다. 사회의 문턱에 발을 하나 걸치며 생각한다. 난 여기를 어떤 표정으로 넘지? 적당한 좌절과 방황 속에 누구라도 그러한 삶을 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키워내며 내 길을 걷게 하겠지. 더 시간이 흘러 그 아이의 아이를 보며, 난 웃을까. 울까. 숨 가쁘게 살았다 생각을 할까. 한 쪽 언저리에 한 숨을 붙여 놓을까. 난 그런 삶을 동경한 거다.

마음이 울적해 졌다. 갈 곳은 이미 사라졌다. 발은 버스 쪽으로 가지 않는다. 마음은 없다. 술이 한잔 생각이 난다. 술 한 병 사가야겠다. 술 한 병 캠퍼스 벤츠에 앉아 기울여야 겠다. 오늘은 보름달. 술 한 잔에 소원을 담아 삼켜볼까. 어림잡아 아홉 소원. 그 모두가 나르시스. 그럼 나르시스는 돌아올까.

어제 밤도 보름달, 오늘도 보름달. 그러고 보니, 요 근래 모두 보름달이었다. 어제도 술을 먹었나? 아무렴 어때. 보름달. 좋다, 보름달이란 건. 하늘을 보며 한 잔. 별을 보며 한 잔. 달을 보며 한 잔. 그 모든 게 나르시스.

예전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한산해진 틈을 타 나르시스에게 물었다.

“왜 사람은 술을 마시지? 이렇게 쓰고 맛없는 걸.”

“쓰고 맛없으니까.”

동문서답. 말장난.

“술은 오래된 역사야. 신화시대에도 존재했어. 어쩜 술은 인류에게 있어선 독주 일 수도 있어.”

“근데 왜 마셔?”

“독주니까. 중독이야. 마비시키거든. 부서져 내리는 것에 대한 마비. 혹은 즐거움에 대한 즐거움.”

“뭐야, 어려워…….”

이상한 말.

“나도 잘 몰라. 그저 내가 아는 술이란, 한 잔 기울임에 날 삼키는 거야.”

“그것도 어려워…….”

지금도 그 말의 의미는 모르겠다. 그저, 부서져 내리는 것에 대한 마비. 그건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럼, 나에게 있어서 술은 소망인 걸까.

예전에 회사원을 보며 나르시스는 안타까워했다. 그 사람이 거의 부서져 간다고 했다. 아슬아슬 남은 끈 하나로 버틴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꿈이 없어.”

하지만 그에겐 가족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은 버팀목이야. 놓을 수도 없지. 그래서 더 안타까워. 그는 누구지? ……. 어떻게 할 수 없어.”

“나도 아마 그럴 거야.”

“바보구나.”

난 나르시스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넌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어. 넌 아직 묶인 끈이 없어. …….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쳐다보지 마. 그래서 넌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나르시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의 선택. 난 선택의 폭이 없었다. 별도 마음도 부서지고, 그저 시간에 편승해 평범하길 택했으니까. 그래도 나르시스는 사랑했다. 그는 나, 나는 그. 우리는 하나였으니까.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무언가를 태우면 원하는 것이 나타날까. 근데 무엇을 태우지? 얼마 전에 호프집에서 주운 라이터 하나가 생각이 난다. 그런데 태울 것이 없다. 가방을 뒤적인다. 책이 두어 권 있다.

“취했구나…….”

독백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온다. 난 책을 태워 버리고 싶다. 정말 취한 것 같다. 책을 태우다니…….

“안될 것도 없지.”

내 안의 악마가 말한다. 고민을 한다. 한권은 도서관에서 보았던 얼룩진 책. 한권은 한 때 열광했을 전공 책. 그 두 권을 양 손에 쥐며 고민을 한다. 날이 더 추워진 듯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것 같다. 거울을 꺼내 든다. 거울 안에는 하늘이 있다. 달과 별도 있다. 그런데 나는 없다. 눈을 비비고 보고 또 보아도 내가 없다.

“취한거야.”

고개를 들어 다시 본다. 나무도 건물도 거울 안에 고스란히 들어오지만, 나는 없다. 나는 웃는다. 미친 듯이 소리 내어 웃는다. 정말 미쳐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르시스는 내가 미쳤기에 떠난 거다. 나는 또 거울을 들여다본다. 여전히 거울 속엔 내가 없다. 다시 웃는다.

“그런 건가. 그런 거구나…….”

나는 주저 없이 전공 책을 들어 찢는다. 찢긴 조각을 구기고 불을 붙인다. 한 장, 한 장 불을 붙인다. 다른 책을 소중히 껴안은 채. 영화 ‘투모로우’에서 주인공이 책을 소중히 껴안듯, 다른 책은 안는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한 장, 한 장 찢어 넣는다. 나르시스는 죽었다. 불러도 불러도 그는 오지 않을 것이며, 소망하고 소망해도 내 곁에 있을 수 없다. 거울을 던지려다 만다. 술은 한 잔 정도만이 남았다. 한 잔 따라 목 안에 ‘탁’하고 털어 넣는다. 이번엔 소원도 없다.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고,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눈 감아 버린 건 나. 그 사실 조차 망각해 버린 것도 나. 나르시스는 그런 내 곁에 있을 수 없던 거다. 사랑해야할 상대를 잃어버린 나르시스.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던 나르시스. 나르시스는 존재 했을까. 순간 의심이 든다. 나르시스. 누구지? 내가 원하고 사랑했던 나르시스. 나르시스를 난 왜 찾는 거지?

아, 내 몸이 부서져 가고 있었지. 아, 거울에 나는 비춰지지 않았지.


3. 나르시스의 죽음

‘째깍째깍’

시계소리. 어느새 나는 잠들어 있었다.

“여긴 어디지?”

“물(物) 밑.”

“물(物) 밑?”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상하리만치 이 상황이 놀랍지 않다. 꿈일까. 꿈이다. 주위를 살핀다. 물(物) 밑, 유리집, 유리시계, 유리문의 유리열쇠. 그 가운에 웅크리고 있는 나르시스. 나르시스!

“나르시스!”

내 목소리는 소리가 되지 않는다. 가다듬고 다시 불러 본다. 소리가 없다.

‘째깍째깍’

시계 소리만이 유리집에 울린다. 너무 아슬아슬한 공간이라 시계 소리만으로도 위협적인 울림이 된다. 그 가운데 나르시스는 울고 있다. 울림이 크다 싶은 순간 나르시스의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왜 살지?”

나르시스는 조용히 읊조린다. 유리 공간이 흔들린다. 심장소리가 더 커진다.

“괜찮아. 이제 멈출 수 없는 걸. 저 소리를 가둘 수 없는걸. ……. 난 저 물(物)이 두려워.”

공간은 더 크게 흔들리고,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나르시스! 나르시스! 그만해!”

여전히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나르시스는 지쳤다. 나에게 지쳤고, 나를 지키기 위해 지쳤다.

“정말로 사랑하려 했어. 그런데 이젠 모르겠어. 원하는 것도, 해야 하는 것도. 넌 날 버렸고, 저 밖의 물(物)에 널 동화 시켰어. 애초에 없었으면 몰라도, 함께 해 왔던 날 버리고. 넌 날 사랑한다 착각만 하고 있어. 이제 널 사랑할 수 없어.”

균열은 더 심해진다.

‘째깍째깍’

시계 소리는 더 커진다. 하지만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줄 알면서 용서를 구한다. 나 때문이다.

“나르시스, 미안해…….”

나르시스에게 들린 걸까. 나르시스가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유리집은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째깍째깍’

어디선가 시계 소리만이 들려온다. 하지만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계도, 열쇠도, 나르시스도……. 난 나르시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낯익은 얼굴. 난 그동안 나르시스의 얼굴을 몰랐었나?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들린다. 나르시스를 찾는다.

어디에 있지? 날 사랑한 게 아니었나.


4. 잿더미

“에취”

어느 순간 잠이 들어 있었다. 슬픈 꿈을 꾸었던 듯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순간, 취 김에 책을 태워버린 것이 생각이 난다. 가방을 뒤적인다. 무엇인지 모르겠다. 눈앞에 재가 보인다.

“어떤 거지?”

다른 책을 살펴본다. 다행이도 전공 책은 아니었다. 태운 것은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쓰던 연습장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쥐어박는다. 그러고 보니, 전공 책은 꼭 껴안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온다.

“뭐야, 술 먹고 이런데서나 자고.”

스스로를 책망한다. 왠지 얼굴이 부었을 것 같아 거울을 찾는다. 가방에 거울이 없다. 이상하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 가방에 거울을 넣어 뒀는데. 주위를 둘러본다. 거울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많이 취한 것 같다. 다시 내 머리를 쥐어박는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부스스하고 퉁퉁 부은 얼굴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웃는다. 왜 어제 술을 먹은 걸까. 그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 나 때문이었지. 사춘기 소녀 마냥, ‘난 뭐지?’하는 고민에 빠졌기 때문이었지. 그저 웃는다. 바보 같다.

술도 못하면서 무슨 술을 그리 마셨던 걸까. 쓰린 속을 쥐며 돌아본다. 내 앞에는 잿더미와 소주 두병.

“미쳤어. 이걸 다 마셨으니…….”

혼잣말을 하며,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가방을 맨다. 거울. 거울을 가방에 넣는다.

‘쨍그랑’

가방에 넣는다는 것이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거울은 재 위에서 깨어져 있었다. 조각난 거울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거울에 내 모습이 깨어져 보인다. 씩 웃는다. 여러 명의 내가 날 보며 웃는다. 꿈속에서 날 본 듯싶다. 돌아서려다 멈추고는 가방에서 물을 꺼낸다. 그리고 재 위에 물을 뿌린다.

시야는 점점 선명해 진다. 난 해를 향해 걷는다.


어디로 가는 길일까. 나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