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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그 초록의 숲 속으로 우리는 걸어 들어간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작성일 2007-06-15
  • 조회수 236


  소설, 그 초록의 숲 속으로 우리는 걸어 들어간다.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읽고




  한여름 더위를 방불케 할 정도로 숨이 턱턱 막혀오는 유월이다. 산과 들은 초록의 싱싱한 색채로 활기가 넘쳐나는데도 우리의 일상은 도무지 초록의 대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지치기만 한다. 제 때를 알지 못하는 날씨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더 힘들어 질 것이다. 이상 기온 현상 때문이라고 하니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가한 린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때 만난 이기호의 소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더위를 한 방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잠시도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이끄는 그의 소설의 숲으로 속수무책. 그야말로 무방비상태로 따라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연신 입가에 미소를, 때로는 깔깔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웃어 본 기억이 있었던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웃을 수 있다니. 그게 어디 그리 흔한 일인가. 

  대체로 소설을 읽을 때는 긴장하게 된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자세로,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를 대하듯이 어렵게만 대하게 된다. 그런데 이기호 소설에서는 완전무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치 개그 프로를 볼 때처럼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이 이기호 소설의 매력이었다. 

  피아노 건반을 눌렀을 때  상쾌한 음들이 통통거리면서 악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의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을 읽는 내내 이기호라는 소설가에 대해 나는 이런 정의를 내리고 싶어졌다. 단조의 이야기를 장조를 탈바꿈시켜버리는 재주를 가진 소설가라고. 마치 ‘스타카토로 연주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의 소설 속으로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제 때를 모르는 날씨 때문에 우리는 더 힘들어질 거라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 이기호의 소설처럼 정말로 이 지구가 사라져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는 소설<수인>에서 소설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소설가 박수영은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한동안 자신의 소설을 쓰지 못 하고 자서전을 써 주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수영에게 마침내 소설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소설 한 편을 써 낼 비장한 각오를 하고 강원도 태기산으로 들어가게 된 수영. 일 년 동안 먹을 양식과 생필품들을 옮겨 놓은 수영은 그곳에서 11개월을 지낸 후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런데 나라가 사라져버렸다.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UN의 심사를 받고 세계 각국으로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서 수영은 어떤 나라로 가게될까? 그런데 심판장은 소설가라는 직업은 모집 직종란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아무런 직업도 없는 무직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는 프랑스로 가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계속 소설을 쓰고 싶다고............심판장은 수영이 소설가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라고 한다. 수영은 태기산에서 써 가지고 온 소설이 보관되어 있는 디스켓을 내놓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다고 심판장은 딱 잘라 말한다. 출판되어 있는 소설책을 가져와야 한다는 심판장.

  결국 교보문고에 보관돼 있는 자신의 소설을 꺼내오기로 한다. 그런데 그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안전히 시멘트로 봉쇄되어버린 그곳을 어떻게 뚫고 가서 자신의 소설을 찾아와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방법은 없다. 열심히 곡괭이질을 해서 뚫고 들어가는 수밖에...............수영은 오로지 그 생각 하나만으로 열심히 곡괭이질을 한다. 그러던 그에게 불안감이 찾아오는데.........

  만약에 서점에 자신이 쓴 소설이 없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무엇으로 자신이 소설가라는 것을 증명한단 말인가? 절망에 빠지고 마는 그에게 심판장은 말한다. 이미 증명이 되었다고. 이렇게 두꺼운 벽을 다 뚫었는데 더 이상의 무슨 증명이 필요하겠느냐는 심판장의 말. 수영은 “가로 일 미터 세로 이 미터 크기의 굴”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수영의 명함이 된 것이다. 

  망한 나라의 소설가를 어느 나라에서 받아줄 것인가?  ‘문학은 죽었다’  라고 한다. 망한 문학. 망한 소설가. ‘소설가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가라면 모두들 통과제의처럼 다룬 주제이기도 하다. 다른 소설들과 다른 점은 상황 설정이 독특하다는 것이다.  


  ‘문학은 죽었다.’ 라고들 말한다. 그런데도 해마다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이들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경쟁률이 치열해지는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각종 문예지들은 끊임없이 발간되고, 문예지들로 등단하는 숱한 작가들과 그것을 열망하고 있는 작가 지망생들은 희망 없다는 글쓰기에, 죽었다는 문학에 왜 그렇게도 목을 매달고 있단 말인가!   

  이런 현상을 나는 이렇게 해석해 본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고. 그런데 너무 바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차분히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다. 아니 시간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다는 이 냉혹한 현실 앞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쩌면 자기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말들을 토해내지 않고는 배겨 낼 수 없는 지도 모른다. 들어주지 않으니 쓸 수밖에 없다. 말이 아닌 글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픈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를 이기호는 <나쁜 소설>에서 다루고 있다. <나쁜 소설>에는 소설을 읽어줄 단 한 사람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주인공은 무직상태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신이 읽어 줄 소설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 급기야는 거리의 여자 콜걸에게  돈을 지불하고 소설을 읽어주는 해프닝까지 벌이게 된다. 소설을 듣던 콜걸은 아주 ‘나쁜 소설’이라며 욕을 한다. 

  9급 공무원인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 현실의 비루함을 잊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버리는 소설. 그야말로 ‘나쁜 소설’인 것이다. 희망의 씨앗을 던져주기는커녕 절망의 물감만 더 덧칠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무참하게 말이다. 바이런이 그랬던가? “현실은 소설보다 더 기이하다.”라고.


   <원주통신>에서도 작가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한 편의 해프닝 같은 소설이다. 초등학생 때 자신이 박경리 선생의 외손자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겪게 되는 황당한 이야기다. 박경리 선생의 인터뷰 내용을 소설에 삼입시킴으로써 작가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냥 계속 뭘 물어본 거지 뭐.”라고 박경리 선생은 오랜 시간 한 소설만을 써온 까닭에 답을 한다. 기실 이것은 이기호 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대답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할머니, 이제 걱정 마세요>에서도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어린시절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이제는 나쁜 병에 걸려버린 할머니에게 내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할머니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위로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오로지 한 가지 기억만을 간직한 채 아파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나는 그 당시의 사람이 되고, 또 무대를 만들어 할머니와 이야기를 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기억은 한국전쟁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작가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소설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역사다. 소설과 역사 두 가지 이야기를 아주 쉽게 풀어가고 있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또한 마찬가지다. 학창시절의 에피소드로 이야기가 꾸며져 있다. 소설가인 주인공은 소설을 다 써놓고서 제목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결국 소설의 제목을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로 정하게 된다. 그 말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새겨진 말이기도 하다. 학창시절 내내 끊임없이 린치를 당하고, 갈팡질팡했던 자신의 모습을 소설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묘비명에 이런 말을 새기지는 말아야 할 텐데.......

그런데 이 말을 하게 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드는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나쁜 소설><원주 통신><수인><할머니, 이제 걱정 마세요><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까지 이번 작품집에 실린 8편 가운데 5편이 ‘소설’과 ‘소설가’에 관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편수로 보아서도 짐작하겠지만 작가는 아주 작정을 하고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세 작품 또한 이기호 소설 특유의 유쾌함을 잃지 않은 소설들이다. 하지만 그 유쾌한 웃음 뒤에 진한 슬픔이 깔려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눅진한 슬픔에 젖어들지 않고 아주 유쾌하고 통쾌하게 소설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이 앞에서도 말한 이기호 소설의 매력인 것이다. 

  

  그럼 나머지 세 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당신이 잠든 밤에>는 기술도 없고, 학력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변방의 가엾은 청년들 이야기다. 시봉과 진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자리에서까지 해고를 당한 그들이 벌이는 자해공갈단 이야기는 너무 슬픈 이야기지만 너무 재미있다.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이 되게 만드는 시봉과 진만의 이야기 속에서 작가의 능청스러움을 엿보게 된다. 


  <국기게양대 로망스--당신이 잠든 밤에2>역시 시봉에 관한 이야기다. 시봉은 국기게양대에 걸린 태극기를 떼어다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밤마다 국기게양대에 오른다. 그런데 그 일도 결국 국기게양대를 사랑하는 남자에 의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그야말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시봉이다. 안타까운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소설 속에서 시봉은 비참하고 남루한 모습이 아니라 아주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 코믹하게 그려지고 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국기를 떼어다 팔아야만 하는 시봉의 처지가 슬프지만 너무나 희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 시봉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진하게 사랑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이기호의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띠고 있는 한 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이라는 작품이다. 벌써 제목부터가 이상야릇하지 않은가. 주인공은 육군상사인 아버지가 파놓은 지하의 벙커에서 6개월 동안 갇혀 지내게 되면서 흙을 먹을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어버린 주인공. 하지만 작가는 여전히 주인공을 불쌍하고 가엾게 묘사하지 않는다. 소설 어느 구석을 찾아봐도 도저히 슬픈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다. 

  12살 때 흙 맛을 체험한 주인공은 청년이 되어서 시각장애인인 명희에게 자신이 먹었던 흙 맛을 느끼게 해준다. 자신이 흙 맛을 체험했던 나이보다 한 살 어린 명희는 늘 굶주림에 지쳐있었던 것이다. 명희는 주인공이 만들어준 흙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었다. 주인공은 점점 요리에 흙의 양을 늘리게 되고 결국에는 100% 흙만을 주게 된다. 그러다가 명희 할머니에게 들통이 나게 돼서 둘만의 공간으로 숨어들게 되는데.......

  결국 주인공은 유괴범으로, 그리고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전쟁이 무서워 지하벙커를 파놓았던 아버지 때문에 흙을 먹게 된 주인공이 결국은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는 희망을 제시한다. 명희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주인공이 만들어준 요리의 색깔이 초록색이라고 말한다. ‘초록’이 상징하는 것. 곧 평화가 아닐까? 분단조국의 비극을 아주 희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바로 박인환의 시에 나오는 ‘버지니아 울프’다. 그녀는 작가는 독자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그 선물을 독자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라고 묻고 있다. 그렇다. 독자인 우리는 작가가 주려는 선물을 듬뿍 받을 권리가 있다. 권리가 있는 대신 또한 작가에게 무언가를 해 줄 사명감 또한 있다. 그것은 바로 서로간의 소통의 문제,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작가는 독자에게 가장 커다란 선물을 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독자는 작가가 주는 선물을 받기 위해 소설의 숲 속으로 빠져들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작가가 주려고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정확히 간파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 말이다. 최고의 선물은 바로 독서를 사랑하고 즐겼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말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공간과 연 5백 파운드의 고정수입이 있어야 하며 경제력은 참정권보다도 중요하다.”라고 했다. 작가로서 그것도 여성으로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함축하고 있는 이 말은 시대와 관계없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것 같아 씁쓸하다. 소설가 박수영이 일년 동안 먹을 양식을 가지고 태기산으로 갔던 것이 어쩌면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연 5백 파운드의 고정수입은 아니었을는지........그리고 태기산은 바로 혼자만의 공간이었을 테고 말이다. 


  이기호의 이번 소설집을 살펴보면 ‘소설가’에 대해, 그리고 ‘소설’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드러낸 작품이 많다. 이번 소설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작가 스스로도 말했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첫 소설을 발표한다. 간혹 어떤 작가들은 그 열정이 너무 지나쳐서 첫 소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럴 때 독자로서는 여간 곤혹스럽다. 제2의 소설, 제3의 소설에서 해도 될 말들을 성급하게하려고 하는 몇 몇 소설가들 때문에 독자는 해독하기 힘든, 난해하기 짝이 없는 문자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 독자는 소설이라는 숲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그런 작가와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길을 잃었을 때를 상상해 보아라.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가 말이다. 그 무섭고 두려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은 독자가 몇이나 될까? 아주 모험심이 강한 독자라면 또 모르겠다.

  이기호는 그런 점에서 아주 친절한 작가이다. 독자로 하여금 숲 속에서 길을 잃게 하지도 않고, 결코 헤매게 만들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짐짓 무겁고 우울하고 슬픈 단조의 이야기들을 농담처럼 장조로 연주해 내는 그의 매력 속으로 우리는 언제까지고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 ‘소설가’와 ‘소설’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역사와, 변방의 소외된 젊은이들의 이야기까지 모두 제각각인 주제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은 톤으로, ‘통통통’ 경쾌한 음을 선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그가 지닌 매력이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초대하는 소설 속으로, 우리는 기꺼이 따라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다. 그가 이끄는 소설의 숲에는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초록의 밥상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을 테니까.......   소설, 그 초록의 숲 속으로 우리는 걸어 들어간다.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