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드네의 실타래
- 작성일 200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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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어젯밤 나는 그에게 그렇게 행동 할 마음은 없었어요. 그냥 싫단 말만하고 그의 방을 나오려 했어요. 그런데 발가벗은 그가 거울속의 그녀를 붙잡았어요. 그와 거울 속 그녀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어요. 있잖아요. 분명 그들이 잘못했는데, 사람들은 내가 잘못했다고 말해요. 더러운 년, 죽일 년 이라고 내게 손가락질해요. 사실이 아니에요. 그건 바로 그들이 자초한 일이에요. 네? 뭐라구요? 어젯밤의 일을 다시 말해 달라구요? 이봐요.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그날도 꿈을 꾸었다. 어두운 미로 속이었다. 나는 오직 앞만 보며 달렸다. 머리가 황소이고 목 아래로는 사람과 다름없는 괴물이 나를 쫓아왔다. 나는 괴물에게 잡히고 싶지 않았다. 숨이 찼지만 참고 뛰었다. 코앞에 있는 모퉁이만 돌면 미로 속을 빠져나갈 출구가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힘껏 달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럴 수가. 길.이.없.었.다. 항상 있던 길이 없고 오르지도 못할 높은 벽만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괴물이 쫓아오고 있었다. 괴물이 그였는지, 거울 속의 그녀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본 듯한 이가 나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소리를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 정말이지 나는 살고 싶었다. 그런데 더 이상 길이 없었다. 나는 발만 동동 굴리며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바로 그때 시커먼 것이 나에게로 뛰어들었다.
“안 돼!”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을 때, 알람시계가 울렸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코 잔등과 이마에 땀이 흥건했고 몸에서 소금냄새가 났다. 꿈을 꾼 것 같았다. 뚜렷하진 않지만 무서운 악몽이었다. 온 몸은 땀에 젖었고 겉옷은 축축했다. 바람이 창문으로 불어왔다. 등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몸의 털들이 쭈뼛하게 섰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았다. 깍지 낀 손을 가슴에 대고 공 벌레처럼 몸을 움츠렸다. 꿈은 꿈일 뿐 현실은 꿈이 아니길 바랐다. 알람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나는 일어나 탁자 위의 알람시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찰칵.
살다보면 가끔 나는 미궁 속에 빠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발가벗은 몸으로 내 키만큼 긴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모순과 불안에 가득 찬 모습으로 거울을 보며 나는 질문했다. 너는 누구? 거울은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거울을 통해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자신을 들여다봤다. 나는 거울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내밀한 시선의 자리를 가졌고, 거울속의 나와 대면해 진정한 자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나의 욕망과 나약한 육체와 변덕스런 마음을 보았다. 가끔 나의 모습이 거울 속에서 불투명한 결점덩어리로 보일 때마다, 나는 맑은 영혼이 되려고 노력했다. 거울을 보는 나와 거울 속 나의 마음이 항상 일치하도록 노력했다. 그래야만 나는 자신에 대해 흡족할 수 있었다. 늘 그런 과정을 통과의례처럼 보내야 나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누군가는 지나치게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알람시계를 끄고 핸드폰 액정화면을 바라봤다. 2006년 3월 1일 정오였다. 나는 왼쪽 벽을 바라봤다. 벽에는 2005년도 달력이 걸려있었다. 두 달 전 이곳으로 이사 왔을 당시, 전 주인이 벽에 걸어둔 달력을 나는 일부러 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전세대주가 달력을 그대로 붙여둔 의미를 찾고 싶었다. 1년 전의 달력을 벽에 그대로 걸어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의미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달력을 그대로 둔 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자주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서 낯선 여자를 본 날마다 꿈속에서 반인반수의 괴물이 나를 쫓아오는 일로 시작되었다. 불행히도 잡혔던 날에는 괴물이 나의 얼굴을 뜯어 먹었다.
‘생각하지 말자. 꿈은 꿈일 뿐 현실이 될 수 없어. 깨어나자. 제발’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 밖을 나왔다. 땀에 젖은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섰다. 꿈속에서 보았던 낯선 여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그녀는 신의 충실한 개처럼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에서부터 검게 칠해진 열개의 발가락까지 천천히 훑어봤다. 그녀의 시선이 나의 발에서 멈추었을 때, 그녀는 검은색 매니큐어를 바른 나의 발가락을 빤히 쳐다봤다. ‘전혀 관능미는 없어, 천박해 보이니 당장 지우지 그래’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두피에 박힌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아낼 때의 짜릿한 기분이 들 때처럼 따가웠다. 나는 열개의 발가락들을 얼른 방바닥으로 구부렸다. 사형장에서 검은 두건을 쓴 죄수의 머리가 하나씩 잘려나가는 것처럼. 그녀는 실눈을 뜨고 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쳐다보듯 경멸과 멸시의 웃음소리를 내면서 나를 쳐다봤다. 그 웃음소리는 나를 비웃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나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당신 누구야?’ 심장이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그녀로부터 매번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동안 그녀에게 나란 사람에 대해 몇 번이나 설명해주었는데, 지금 그녀는 나를 처음 보 듯 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낯설게 대하는 이 불쾌한 태도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아니,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넌 누구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꿈 때문이었다. 매일 밤 꿈속에서 나는 사람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미궁 속을 달린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손을 내밀고 다가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건네주었다. 누구도 나가지 못하는 미궁 속을 빠져나갈 수 있게 길을 안내하는 실타래를.
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신발을 벗으며 거울 앞에서 발가벗고 서있는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반쯤 열린 문 옆에서 교복을 입은 계집아이가 고개를 숙이고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침대위에 던져 논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탁자위에 올려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누구야” 나는 담배에 라이터를 가져가며 물었다. 그는 계집아이의 등을 밀었다. “깨끗이 씻겨” 그는 계집아이의 등을 만진 손을 털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는 계집아이를 쳐다봤다. 검은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였다. 쌍꺼풀 없는 눈 위에 짙은 눈썹이 아주 강렬해보였다. 코끝은 둥글고 입술은 분홍빛이 감돌았다. 계집아이가 혀끝을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자, 침이 발린 입술이 더욱 빛났다. “몇 살이냐?” 나는 계집아이의 앞에 서서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아이를 몽롱하게 쳐다봤다. “열여섯 살이에요.” 계집아이는 시선을 발밑으로 향하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맞물려 고리를 만들고 있었다. “가출했냐?” 나는 재떨이에 침을 뱉고 담배를 침에 적시며 물었다. “고아에요” 계집아이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따라와” 나는 슬리퍼를 끌며 욕실로 걸어갔다. 그리곤 욕조 속에 뜨거운 물과 찬물을 받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옷 다 벗고 안에 들어가” 계집아이는 욕실로 들어와 누렇게 닳은 블라우스를 벗었다. 훤히 드러난 계집아이의 가슴에 달라붙은 보랏빛 꽃은 막 솟아오르는 꽃봉오리 같았다. 계집아이가 치마를 벗자, 앙상한 구리 빛의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계집아이는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계집아이는 팬티를 벗었다. 음부에 털은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또래 여자아이들과 달리 신체성장이 느려 보였다. 계집아이는 손가락만큼이나 길고 가는 발가락을 욕조 속에 담갔다. “앗, 뜨거” 계집아이는 발을 물에 넣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발을 욕조에서 꺼냈다. 나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찬물이 콸콸 흘러나왔다. 손을 욕조에 담갔다. 보드라운 물살에 살갗이 간지러웠다. 나는 무표정의 얼굴로 계집아이를 쳐다봤다. 계집아이는 욕조 속에 발을 조심스레 담근 후 몸을 움츠렸다. 나는 욕조 속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아이를 쳐다봤다. 계집아이의 등에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구릿빛의 등에 물과 땀이 몽글몽글 맺혀 있었다. 나는 때수건에 비누를 묻히며 말했다. “일어서” 계집아이가 일어서자, 나는 때수건으로 아이의 목부터 팔과 등 그리고 다리까지 바득바득 밀어주었다. 손바닥에 힘을 줄때마다 아이는 아, 하고 짧은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럴수록 나는 손바닥에 더 힘을 주었다. 욕조 속에 수증기가 피어올라 욕실 안이 뿌옇고 훈훈해졌다. 나는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새벽의 호수 가에서 안개를 맞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욱한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계집아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뭔가 빛이 번적거렸다. 나는 그 빛을 좇아 앞으로 걸어갔다. 첨벙, 이런 호수에 빠져버렸다. 물이 입속으로 들어왔고 몸은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수면으로 오르기 위해 팔을 마구 휘저었다. 발밑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나의 발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안돼, 살려줘!’
“아얏” 그때 계집아이가 소리쳤다. 나는 깜짝 놀라 계집아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계집아이의 검은 눈썹 끝이 올라가 있었다. 아이 앞에서 망신스러웠다. 나는 계집아이의 팔을 세게 붙잡고 힘껏 때를 밀었다. 아이는 “아앗” 하고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수록 나는 손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나는 계집아이의 몸을 바디샴푸로 깨끗이 씻긴 후, 마무리로 장미 오일을 온몸에 발라주었다. 계집아이의 구릿빛살결이 더욱 보드랍고 탄력적으로 빛났다. 처음과 달리 사내아이의 것처럼 밋밋했던 가슴은 금방 터질 것 같은 장미 꽃봉오리 같이 피어 있었다. 나는 헤어브러시로 계집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며 한 손을 살며시 어깨에 올렸다. 물에 젖은 나의 손가락이 아이의 목덜미를 더듬는 순간, 영화 금지된 장난의 배경음악인 로망스가 들려왔다. 나는 갑자기 계집아이를 껴안고 싶었다. 나의 까슬까슬한 살결과 대조되는 아이의 부드러운 살을 만지고 싶었다. 그러면 나도 순백의 영혼처럼 깨끗해질 것 같았다. 음음음.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바로 그때, 그가 욕실 문을 열었다. 그는 욕실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계집아이를 번쩍 들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발을 수건으로 닦고 거실로 나갔다. 그의 방에서 계집아이의 반항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담배 한 개를 입에 물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된장찌개가 올려진 가스렌즈에 불을 켰고, 허리를 숙여 가스렌즈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그의 방에서 “그가 가만히 있어” 라고 연신 소리쳤다. 계집아이는 그럴수록 더 고함을 질렀다. 나는 담배를 한 모금 빤 뒤, 고개를 들어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타임 맨솔의 담배 맛이 입 안을 싸하게 감돌았다. 평소와 달리, 시원했던 박하향이 몹시 맵게 느껴졌다. 계집아이의 비명 소리는 계속 들렸다. 나는 오른 손에 든 담배를 왼손으로 바꿔들고 싱크대 앞을 왔다 갔다 했다. 혼동스러웠다. 그의 방에서 나는 소리가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돌솥에 담긴 된장찌개는 펄펄 끓고 있었다. 나는 가스렌즈의 불을 끄고 필터까지 타버린 담배를 싱크대의 개수대로 던졌다. 계집아이의 비명소리는 끔찍했다. 살아있는 동물이 죽어가는 고통의 신음소리. 그것은 한마디로 절규였다.
나는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지난밤 정육점에서 사온 돼지고기를 꺼냈다. 고기가 담긴 하얀 비닐봉지는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봉지에 구멍이 났는지 핏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발등에도 핏물이 떨어졌다. 나는 식탁 위에 가스버너를 놓고 그 위에 후라이 팬을 올렸다. 팬이 달궈지는 동안 밥솥에서 밥을 한 공기 퍼 담았다. 하얀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해동된 고기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나는 나무젓가락으로 넓고 얇게 잘려진 돼지고기포를 하나씩 들어 팬 위에 올려놓았다. 핏물에 축축이 젖은 돼지고기가 뜨겁게 달궈진 팬 위 올려지자마자 쏴아 옹그려졌다. 팬에 떨어진 피는 몽글몽글 방울지고 팽그르르 돌더니 증발했다. 붉고 흐물흐물했던 고기는 순식간에 연회색의 단단한 고기로 변했다. 나는 젓가락을 든 손을 놓고 그의 방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매운 냄새가 팬 위에서 올라왔다. 고기는 검게 타고 있었다. 콜록콜록. 매운 연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얼른 뒤집었다.
구운 고기를 반쯤 먹고 있을 무렵, 그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나에게 걸어왔다. 나는 상관치 않고 팬 위의 고기를 뒤집으며 입속에 든 밥알을 오물오물 씹었다. 그는 식탁 위에 쪽지를 올려놓았다. 파란 종이위에 그가 흘려 쓴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오늘 저녁 10시, 청담동 타블루 바” 그는 고기의 비릿한 냄새를 맡고 눈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한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맨 날 고기만 쳐 먹냐?” 나는 겉이 탄 고기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고길 먹어야 힘을 쓰지” 그는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등을 돌렸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젓가락을 놓았다. 그의 방에서 계집아이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에는 고기 탄 냄새가 가득했다. 계집아이의 울음소리는 고기 탄 냄새를 타고 집안을 맴돌았다. 돼지기름을 온몸에 처바른 것처럼 몸에서 비린내가 났다. 우윽, 나는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났다. 그리곤 싱크대의 개수대에 얼굴을 처박고 소리를 질렀다. ‘거기아무도없어요요요’ 지하 동굴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치듯 씹어 넘긴 밥과 고기를 토해냈다. 토사물이 올라올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수돗물을 틀어 입안을 헹궜다. 계집아이의 흐느끼는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나는 젖은 입을 손등으로 닦으며 그의 방으로 걸어갔다. 반쯤 열린 그의 방문 너머로 침대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계집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울음소리가 이불속에서 들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중지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욕실로 걸어갔다. 손에 잡히는 물건은 뭐든 던지고 싶었다. 결국 욕실문의 손잡이를 힘껏 쥐고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쾅. 계집아이의 울음소리는 잔잔히 들려왔다. 나는 욕실에서 비명을 질렀다. 울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욕실안의 모든 수도꼭지를 틀었다. 콸콸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계집아이의 징징거리는 목소리를 삼켜버렸으면 했다.
내게 있어 세상이란 괴물. 더 나아가 세상은 우인(牜人)으로 태어나 미궁 속에 사는 미노타우로스였다. 미노타우로스는 사람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였다. 특히, 세상에 널브러져 있는 인간과 인간이 빚어낸 고통을 안고 사는 자를 잡아먹었다. 나는 거울 속에서 낯선 여자를 발견한 후부터 미궁 속에서 미노타우로스가 쫓아오는 꿈을 꾸었다. 나는 괴물과 싸워 고통이 가득한 미궁 속에서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미궁을 만든 다이달로스의 질투는 너무 컸다. 다이달로스는 오기로 충혈 된 나의 눈빛을 위협 또는 도전으로 느꼈는지 아니면 나의 몸이 괴물의 먹이가 되어 만신창이 다 뜯기기를 바랐는지 끊임없이 미궁을 만들어 내 길을 가로 막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괴물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정말이지 나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몸에 밴 고기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팬티까지 벗고 샤워기로 몸을 적셨다. 몸에 비누칠을 하는 도중에 비눗물이 눈 안에 들어가 따끔거렸다. 눈물이 났다. 수증기가 욕실 안에 가득 찼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뿌옇게 서리가 내린 큰 거울을 손바닥으로 스윽 닦았다. 손바닥이 쓸고 간 자리에서 나는 한 여자의 초췌한 얼굴을 보았다. 거울속의 그녀였다. 바로 그녀가 미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거울 속의 그녀가 준 실타래를 받아야 미궁 같은 세상에서 나올 수 있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쫓아오는 미궁 속에서 도망치다 길이 없는 벼랑 끝에 가면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에게 구원해달라고 애원했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잘못했으니 면죄부를 달라고 그녀에게 애원했다. 그러면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나의 죄를 추궁했다. 나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서 참회했다. ‘오! 신이여! 나를 용서하옵소서’ 그러면 그녀는 나에게 실타래를 주었고, 나는 미궁 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서 실타래를 얻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거울 속의 그녀는 나와 일란성 쌍둥이같이 닮았지만 마음만은 달랐다. 그녀는 내가 하는 것은 모두 싫어했다. 문제는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행동할 때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악몽을 꾸었고 미노타우로스에게 시달렸다. 그래서 발가벗은 몸으로 그녀 앞에 섰다. 눈물에 젖은 눈으로 그녀 앞에서 반성하며 울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녀는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나의 영혼을 자기 손바닥에 놓고 마음대로 주무르며 나의 행동에 사사건건 참견했다. 나는 그녀가 나의 영혼을 가지고 노는 것이 지독히 싫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실타래에 중독되어 버렸다.
타월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욕실 문을 열었을 때, 그의 방에서 더 이상 계집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집안은 조용했다. 나는 그의 방으로 걸어가 침대위의 있는 아이를 보았다. 이불속에서 아이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식탁위에 올려진 파란 쪽지를 들고 화장대로 갔다. 그리고 화장대의 큰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서 그녀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속죄해야 하는가?’ 생각해보면 나의 삶에 있어서 그녀가 조정자는 아니었다. 나는 살다 미궁 속에 갇혔을 때만 그녀를 찾아갔다. 나의 검은 발톱과 손톱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그녀의 도움 없이 어디라도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겨드랑이 밑에 숨겨두었고 자유가 주어지는 순간 훨훨 날아갔다. 날아간다는 것은 그녀에게서 해방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거울 앞에서 위험한 장난을 치는 일이었다. 위험한 장난이란 화장대에서 화장을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짜릿한 쾌감을 주는 놀이이자 유일한 향락이었다.
나는 최대한 거만하고 조소적인 눈빛으로 거울 속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파란 쪽지를 읽어보았다. ‘모 중소기업 사장, 50대 초반, 화장을 짙게 할 것이며 요염하게 행동할 것’ 나는 파란 쪽지를 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그녀가 쳐다보는 거울 앞에서 화장을 시작했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 말하지 않았다. 화장을 하는 순간은 그녀의 의지보다 나의 의지가 더 강했다. 그녀 앞에서 발가벗은 몸으로 눈을 마주하지 않는 이상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녀를 대상으로 흥미로운 놀이를 즐겼다. 화장을 하는 순간만큼은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이나 투덜거림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조롱했던 것과 달리 내가 그녀를 조롱하면 되었다. 그래서 나는 화장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화장을 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나다웠으니깐.
거울 앞에 서서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밤의 고객을 위해 그의 주문대로 최대한 도도한 화장을 했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맨 얼굴을 손으로 쓸며 거울을 쳐다봤다. 거울 속 그녀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화장대에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종류의 화장품이 가득했다. 푸석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나의 얼굴을 보며 화려하게 화장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다양한 화장법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손끝이 떨렸다. 화장품을 쥔 손끝 하나로 고객이 원하는 어떤 여자로도 변신할 수 있었다. 섬세한 화장기술로 섹시한 여자, 지적인 여자, 때론 순수한 감성의 소유자로 보일 수 있었다. 화장을 통해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여자가 가진 가장 행복한 능력 중 하나였다. 물론 거울 속에 그녀는 경악했지만 나는 통쾌하고 즐거웠다.
나는 거울 가까이에 얼굴을 대고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갸름한 그녀의 얼굴표피층 위로 울긋불긋 기미가 박혀 있었다. 눈 밑에는 검은 그늘이 짙게 퍼져 있었다. 휑하니 파여진 두 눈 아래에 광대뼈가 홀쭉하게 튀어나와 기미가 전체적으로 도드라져 보였다. 여자로서 미적 매력은 없었다. 하품종의 인간이었다. 나는 슬슬 그녀의 얼굴에 낙서가 하고 싶어졌다. 먼저, 노랗고 칙칙한 그녀의 얼굴에 그린 색 메이크업베이스를 펴 발랐다. 다음엔 완두콩 한 알만큼의 파운데이션을 찍어 중지손가락으로 꼼꼼히 눌러 발랐다. 그 위에 투웨이 케이크를 발랐다. 마지막으로 파우더를 두드렸다. 가루 파우더는 피부에 닿자마자, 일부는 흡수되었고 일부는 공중으로 날아갔다. 그녀의 칙칙한 피부를 부각시켰던 기미가 파우더에 묻혀 날아간 것 같았다. 거울 속에는 우유 빛이 도는 밝고 화사한 얼굴이 있었다.
그녀가 사라졌다. 나의 손놀림으로 그녀의 존재가 결정되고 있었다. 놀라웠다. 그것은 배우가 무대에 오르기 전 화장을 할 때 맞는 기쁨이랄까. 배우가 내면의 자신을 던져버리고 광기로 가득 찬 사람으로 변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화장을 할수록 거울 속에 있는 그녀의 얼굴은 점점 지워져갔다. 나는 반쯤 사라진 눈썹에 아이 브라운 펜슬로 신경질적이고 도도한 눈썹을 그렸다. 입술에 다크 레드 립스틱을 바르고 입술을 금붕어처럼 뻐끔거렸다. 피치브라운 볼 터치로 양 볼을 불그레하게 물들였다. 나는 밤의 고객이 주문했던 이상형의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그녀를 보며 입술꼬리를 치켜 올렸다. 즐거웠다. 나를 구속하는 자를 지우는 화장 놀이가.
나의 굶주린 지갑이 두툼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고객이 지갑을 열어 내 지갑에 돈을 넣어주는 순간을 상상했다. 행복감에 배가 불러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삿대질을 했다. 나는 고객이 주는 돈을 결코 쉽게 버는 돈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돈은 고객에게 육체의 서비스를 주는 대가로 지급받는 노동료일 뿐이다. 고객은 나의 육체를, 나는 고객의 돈을 서로 상호 교환하는 거래이다. 그렇기에 나는 고객이 잠자리 상대로 나를 선택한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나의 가격이 중요했다. 나는 얼마의 가치로 고객의 방에서 노동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시계를 보았다. 나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 시켜줄 고객을 찾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마무리로 향기가 아주 강렬한 향수를 집었다. 달콤한 향기로 고객을 눈멀게 유혹해서 지갑을 열게 해야 했다. 목덜미와 손목에 향수를 뿌리고 침대위에 꺼내 놓은 재킷을 입었다. 향수가 방안에 진동했다. 환기를 시켜야했다. 오래 살지 않을 집이었지만 집에는 나의 냄새가 나야 했다. 매일 쓰는 비누와 샴푸 그리고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나야 안심이 들었다. 나는 벽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쳤다.
창문이 없었다. ‘아. 깜박했다. 이 집은 창문이 없었지.’ 그래, 햇빛은 들지 않았고 공기는 탁했으며 자연광이 아닌 형광등으로 모든 사물을 감지해야 하는 지하방이었다. 이 집에 살게 되면서 나는 지하의 습기와 음기를 빨아 당기며 살아가는 음지식물이 되어갔다. 그래서 나는 희망했다. 창문너머로 햇빛이 들어와 그 햇빛을 받고 사는 양지식물이 되고 싶었다. 그래, 깜박했다. 언젠가 커튼을 사다 벽에 걸었고, 벽에 네모반듯한 창이 있다고 상상했다. 맞다. 그 사실을 잠시 깜박했다. 나는 다시 커튼을 쳤다.
현관으로 걸어가면서 그의 방에 있는 계집아이가 생각났다. 반쯤 열린 그의 방문을 열어보니, 이불속에 큰 공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볼록했다. 나는 침대로 걸어가 이불의 끝을 잡고 조심스레 당겼다. 먼저, 계집아이의 헝클어진 곱슬머리가 보였다. 아이는 가슴 안으로 팔을 오므리고 모로 누워있었다. 나는 계집아이를 깨우지 않고 천천히 이불을 걷어냈다. 매끈한 곡선이 어깨선을 타고 허리 그리고 발목까지 흘러내렸다. 발가벗은 채 누워 잠든 계집아이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을 쉴 수 없어 침대에 주저 앉아버렸다. 낯설지 않는 모습이었다. 나는 땀에 젖은 아이의 목덜미를 검지로 살며시 더듬었다. 그러자 아이는 신음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소금 내 나는 숨기운을 내게 뿜어냈다. 나는 손가락으로 아이의 이마를 쓸었다. 그러자 아이는 잠결에 몸을 떨더니 등을 돌렸다. 아이는 껍데기 속으로 몸을 숨기는 달팽이처럼 몸을 둥글게 오므렸다. 나는 긴장 되어 손끝이 파르르 떨었다. 뜨거운 피가 머리로 올라왔다.
오래전에 무감해졌던 나의 감각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아이의 모습에서 흑백사진 속에 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 했다. 발가벗고 잠든 나의 모습을. 나는 아이에게서 등을 돌리고 한손으로 입을 막고 현관으로 걸어 나왔다. 신발을 신으려고 발을 뻗었다. 발끝에서 머리로 소름이 돋았다. 눈앞이 꿈속에서 보았던 미로 속 같았다. 현관바닥에 정렬된 신발들의 디자인은 달랐으나 모두 검은색이었다. 특별히 검은색을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검은색 구두를 사 모으고 있었다. 과연 그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길들여진 것일까. 섬뜩한 공포심이 바늘이 되어 사방에서 나를 찌르는 듯 살이 아팠다. 나는 집에서 빨리 나오고 싶었다. 신발을 들고 맨발로 현관을 나왔다. 집밖에서 신발을 신었다. 또각또각. 나는 도망가듯 뛰었다. 그때마다 구두소리가 나의 뒤를 따라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골목길을 걸으며 현란한 네온사인에 현기증이 났으나 이를 물고 뛰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그를 처음 만났던 시간 속으로 아니, 그를 만나기전 고통으로 신음을 앓던 시간 속으로 비디오테이프 돌아가듯 나는 마구 끌려가고 있었다.
열아홉 살의 나는 거울 앞에서 울고 있었다. 나복순씨보호자되십니까나복순씨는위암말기입니다 라고 의사가 말하는 순간부터 나는 두려움에 떨며 거울 앞에서 울었다. 마치 암세포가 나의 몸속으로 전이되는 것처럼 신음을 앓았다. 두려웠다. 감당할 수 없는 나복순의 죽음. 나복순은 가난한 여자였다. 화려한 집들과 달리 나복순이 사는 집은 양철지붕의 집이었다. 쥐가 나무문을 갉아먹고 집안으로 들어와 바스락거리며 벼룩을 키웠다. 비가 내릴 때마다 벽지가 축축하게 젖어 벗겨졌다. 나는 푸른 꽃이라 불렀지만 나복순은 곰팡이라 부르는 것이 집안 곳곳에 피였다. 나는 그곳에서 나복순에게 신세를 졌다. 아니 솔직히 말해 알몸으로 태어나 나복순의 등에 올라타고 살았다. 나복순은 시름을 앓았지만 나는 좋았다. 조금 못 먹고 못 입는 것일 뿐 나에게 가난은 고민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복순이 돈 때문에 죽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가난한 것은 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가난은 죽도록 싫었다. 피가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나복순의 MRA 사진을 보여주며 의사는 힘들겠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했다. 살 희망이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간호사는 나에게 수술 동의서를 권했고 원무과 과장은 돈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나는 청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어 모두 꺼내 보았다. 돈이라곤 주머니에 든 천 원짜리 몇 장뿐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나복순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우리는죽어도함께죽고살아도같이사는거야. 나는 나복순의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말했다. 아파도견뎌등이굽어질때까지살아야해알겠어돈은매달부쳐줄게. 그렇게 나는 나복순을 혼자 두고 병원을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나복순을 등에 업었다. 나는 달팽이처럼 무거운 껍데기를 등에 지고 살았다. 더듬이를 길바닥으로 향하는 달팽이처럼 걸었다. 그러다 길에 뿌려진 전단지를 주워들고 나복순을 생각하며 전화를 들었다.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키는대로뭐든지다할게요대신돈이필요해요. 그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호텔로 데리고 갔다. 그는 나를 발가벗기고 직접 목욕을 시켰다. 깨끗해져야한다고 연신 말하며 때수건으로 떼를 벗겼다. 나는 처음으로 그를 통해 남자를 보았다. 그 후 그를 통해 수많은 남자들을 보았다. 동시에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을 보았고 그 돈을 모았다. 그러나 나복순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병원 중환자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고운얼굴을덮어놨어. 나는 나복순의 얼굴을 덮은 하얀 천을 거뒀다. 엄마. 나는 나복순을 흔들어 깨웠다. 엄마몸이왜이렇게차가워일어나봐. 나는 나복순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엄마일어나우리집에가자. 나복순은 말이 없었다. 엄마왜이래일어나등이굽어질때까지살라고했지누가죽으랬어빨리일어나. 나는 나복순의 가슴을 연신 내리치며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나는 굳어버린 나복순의 손을 놓지 않고 목 놓아 울었다. 사람들이 나복순의 시신을 어디론가 옮기려 했다. 나는 차갑게 굳은 나복순의 손을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나복순의 싸늘한 손은 나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때 나는 보았다. 바닥에 길게 늘어진 검은 그림자. 그것은 나의 등에 올려질 또 다른 껍데기였다. 나의 앞에는 돈으로 온몸을 치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소름으로 느껴진 남자가 공포로 느껴졌다. 남자는 나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차로 끌고 갔다. 그 때부터 나는 달팽이처럼 등에 무거운 껍데기를 또 지고 살아야했다. 매일 질퍽하고 외로운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달팽이처럼 스멀스멀 길바닥에 진득한 액을 흘리고 다녔다.
어느 날 거울을 쳐다보았을 때, 나는 낯선 여자를 보게 되었다. 더 이상 거울 앞에서 나는 윤리적 인간이 아니었다. 무기력하고 감정 없는 마네킹이었다. 낯이 두꺼워지는 만큼 자궁도 황폐해져 갔다. 나는 세상을 살기로 선택한 대신, 처음 보는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하였고, 짜고 비린 돈맛도 알아갔다. 돈은 사람에게 싫다가도 좋아지는 것이었다.
낯선 섹스 파트너로 만나고 돌아오는 새벽길은 피곤했다. 지하방으로 내려가는데 발목이 삐걱거릴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바닥을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날 때마다 바늘이 날아와 등에 꽂히는 느낌이었다. 입이 큰 그림자가 등 뒤에서 따라와 나를 덥석 삼켜버릴 것 만 같았다. 여유롭게 숨을 내쉴 겨를도 없이 열쇠를 문고리에 넣고 돌렸다. 찰칵.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TV가 켜져 있었다. 계집아이는 거실바닥에 앉아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계집아이를 멍하니 쳐다봤다. 계집아이는 입안에 숟가락을 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재킷을 벗으며 계집아이에게 걸어갔다. 침대위에 가방과 재킷을 던져놓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TV소리가 귀 따갑게 들려왔다. 나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껐다. 계집아이가 나를 쬐려봤다. 나는 계집아이의 얼굴로 바짝 다가가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품었다. 계집아이는 기침을 콜록거렸다.
나는 웃으며 그의 방으로 걸어갔다. 인터넷을 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나를 돌아봤다. “고객이 아주 만족스러웠다고 다음에 한번 더하자는데.” 그가 코로나 맥주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목이 뻐근해 손으로 목뒤를 잡고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돈이나 빨리 줘.” 그는 웃으며 서랍에서 돈을 꺼냈다. 나는 그가 건네는 돈을 받아 천천히 돈을 세며 말했다. “쟤, 어떻게 할 거야.” 그는 컴퓨터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며 마우스를 집었다. “너도 이제 쉴 때가 됐잖아.”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봤다. 화면에는 그가 인터넷의 한 사이트에 개설한 [조건부 만남] 이라는 카페창이 떠 있었다. 그는 남자들과 채팅하며 성매매를 알선하는 중이었다. 그는 고객들의 연락처와 아이디를 수집해 인터넷 메신저로 그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등에 올라 경찰의 단속을 피해 집을 옮겨 다녔다. 나는 죽으라 기어서 도망 다녔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며 나는 물었다. “저, 계집애 어디서 데려왔어?” 그는 모니터를 보며 바쁘게 자판을 두드렸다. “인터넷카페에서 채팅하다 지발로 날 찾아왔어. 돈만주면 뭐든 다 하겠다고 하던데.”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피씩 웃었다. 나는 가슴이 뜨끔거렸다. 그는 모니터를 보며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따닥따닥. 나는 뒤돌아섰다. 돈만주면뭐든다하겠다고. 나는 거실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계집아이는 TV를 보며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었다. 나는 계집아이의 아이스크림을 덥석 빼앗았다. 숟가락을 입에 문 계집아이는 성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딜 쬐려봐.” 나는 활짝 편 손으로 복숭아 빛이 도는 계집아이의 볼기짝을 때렸다. 찰싹. 계집아이의 입에 문 숟가락이 방바닥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만 쳐 먹고 어서 자.” 나는 소리를 질렀다. 계집아이는 입술을 내밀고 막 울음을 터트렸다. 손바닥이 화끈 거렸다. 나는 검지로 계집아이의 이마를 툭툭 밀치며 말했다. “울지마.” 아이는 무표정의 굳은 얼굴로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그가 방에서 나왔다. 계집아이는 더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악을 쓰며 “조용히 해 ”라고 소리쳤다. 그는 나에게 달려와 미친년씻고뒤집어잘것이지왜얘를울려 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를 상관 않고 계집아이에게 바짝 다가가 소리쳤다. 조용히해시끄러워죽겠어죽겠다구귀가찢어질것같단말야. 그리고 계집아이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가 굵은 손으로 나의 뒤통수를 쳤다. 네가이집에들어온뒤로귀가찢어질것같단말야. 나는 아이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게미쳤나당장그만두지못해. 그는 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나는 방바닥에 쓰러져 발작하며 고함을 질렀다. 계집아이는 계속 울었다. 그는 한참동안 나를 때렸다.
나는 발작도 고함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는 계집아이의 가는 팔목을 휘어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계집아이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서 웃는 소리인지 싫어서 짜증내는 소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웃음이 났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피가 쓰지 않고 달았다. 혀의 신경세포가 마비됐거나 온몸의 신경세포가 다 죽었음이 틀림없다. 피곤했다. 곤히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나 계집아이의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나는 TV를 켜고 볼룸을 최대한 크게 높였다. 뉴스를 진행하는 여자 앵커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터넷 채팅을 통해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은 성매수자와 성매매를 한 여성 그리고 알선업주가 경찰에 적발됐습니다. 특히 성매수자들이 서울 시 강남구 청담동, 압구정동 등지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의사, 박사과정, 대기업의 직원들이라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성매매 알선업자는 가출한 청소년을 인터넷채팅을 통해 모집했고, 고시원에서 숙식시키며 성인남성들에게 알선을 하고 그 대가를 챙겨왔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TV로 행했다. 경찰서에서 얼굴을 가리고 조서를 받는 범행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성매매 특별법 시행이후, 음성적인 성매매가 더욱 부추겨져서 그동안 정부는 특별단속을 시행해 성매매 불법업소를 적발해왔습니다. 그러나 성매매 여성은 인신매매를 지칭하는 성매매피해와 자발적인 성노동을 엄격히 구분해달라고 시위하고 있어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다시 화면에는 집단 시위를 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언론을 의식해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여성들이 길바닥에 앉아 시위를 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한 여자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기자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우리는 피해여성이 아니라 성노동자다.”
여자는 거세게 항의하며 손바닥으로 카메라 렌즈를 쳤다. 앵커가 말했다.
“이것은 법의 실효성에 문제가 제기 되는 문제입니다. 성매매금지법이 시행된 지 일 년이 지나도 성매매행위가 근절되지 않고 유사성행위나 변칙적인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나는 TV를 껐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배가 고팠다. 냉장고 문을 열어 돼지고기가 담긴 하얀 비닐봉지를 꺼냈다. 식탁 위에는 먹다 둔 가스버너와 후라이팬이 그대로 있었다. 팬에 돼지기름이 하얗게 응고되어 말랑말랑 한 하얀 젤리 같았다. 키친티슈로 팬을 닦았다. 가스버너에 불을 켜고 팬을 데웠다. 하얀 비닐봉지 속에는 전보다 핏물이 더 많이 고여 있었다. 고기의 색은 파랬다. 나는 나무젓가락으로 넓고 얇게 잘려진 돼지고기포를 하나씩 들어 팬 위에 올려놓았다. 뜨겁게 달궈진 팬 위에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쏴아 고기는 타들어갔고,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옹그려졌다. 그래, 나는 살아있는 것을 먹어야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고기를 입안에 넣었다. 고기가 질겨 잘 씹히지 않았다. 싱크대로 걸어가 서랍에서 가위를 꺼냈다. 그리고 고기를 잘랐다. 가위질을 할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살짝 힘만 주어도 고기가 아주 잘 잘렸다. 잘게 자른 고기를 입안에 넣고 씹었다. 그때 그의 방에서 계집아이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나는 가위로 고기를 자르며 말했다. “먹어라. 고기를 먹어야 힘을 써. 너같이 마른 얘는 많이 먹어야 해.” 나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숙인 아이가 얼굴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을 놓았다. 고기는 식탁위로 떨어졌다. 나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의 눈 주위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나의 눈에 가져가 더듬었다. 손에 두툼한 것이 느껴졌다. 나의 눈도 아이처럼 부어있었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거울 앞에 서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이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살려주세요.” 이제야 나는 알 것 같았다. 아이는 그의 방에서 좋아서 웃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 아이가 그랬듯 사람은 아프면 울어야했다. 눈물을 참고 견디는 일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나는 참지 않기로 했다.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엄마아.”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미웠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가위를 꼭 쥐고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위에서 발가벗은 채 잠들어있었다. 나는 그에게 사람이라면그러면안돼 라고 소리쳤다. 바로 그때, 그가 몸을 나에게 돌렸고, 나는 그의 몸에서 작은 산을 보았다. 두려워서 오르지 못했던 산. 나복순의 죽음 앞에서 보았던 검은 산. 그 산 때문에 나는 그림자의 늪에 빠져 달팽이처럼 기었고, 거울 앞에서 죄인처럼 살았다.
작고 검은 산, 그림자의 늪과 같았던 돌출된 봉우리부분을 나는 가위로 싹둑 잘랐다. 벌려진 가위가 오므려지는 순간, 작은 산은 폭발하는 화산이 되었다. 화산에서 붉은 용암이 주체할 수 없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붉은 용암이 나의 얼굴과 몸에 튀었다. 나의 몸이 붉게 물들었다. 타들어가는 고기처럼 붉은 숯덩이가 되어갔다. 바로 그때, 아이가 그의 방문 앞에서 나를 보며 울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이에게 소리쳤다. “어서 가.” 아이는 더욱더 크게 소리치며 울었다. 나는 아이의 손목을 붙잡고 현관문을 열며 이 집을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아이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너는나처럼되지마.
아이가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방바닥은 흑장미 잎을 뿌려놓은 듯 했다. 그는 엎드린 채 가만히 있었다. 꿈적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 보랏빛 입술, 나는 발로 그의 팔을 건드렸다. 그는 꿈적도 않았다. 그는 죽었음이 틀림없다. 누가 그를 죽였을까? 계집아이? 거울속의 그녀? 아니면 살인을 권하는 이 사회? 도대체 누가 그를 죽였을까. 나는 그를 쳐다보며 뒷걸음치다 돌아섰다. 그리곤 방을 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그가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악.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그의 손이 나의 발목을 잡았을 때, 그 촉감은 수 백 마리의 개미떼가 나의 발목을 타고 사타구니로 기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발로 그를 몇 번이고 찼다. 나의 발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목에 힘이 풀리도록. 하얀 다리에 피가 묻은걸 보니 발목이 절단됐다 착각이 들었다. 나는 급히 그의 방을 뛰쳐나와 나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는 긴 거울 앞에 서서 거울을 쳐다봤다. 그녀는 나에게, 나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나는 누구야 진짜 너를 보여줘.” 거울 속에는 그녀가 아닌 내가 있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보여 달란말야.” 여전히 거울 속에는 내가 있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비웃지마” 여전히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를 미궁 속에서 구해 주겠다구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거울 속에서 그녀는 아니 나는 웃고 있었다. “뭐야? 내 희망이 미궁 속에 갇힌거야? 이대로 내가 거울 속에 갇힌거냐구” 거울은 답이 없었다. “안 돼! 이대론 안 돼!” 나는 의자를 들고 거울 앞으로 가져가 정신없이 거울을 내려쳤다. 거미줄 같은 검은 선이 거울에 방사형으로 늘어져갔다. 검지로 거울을 살짝 건드려보니 조각난 거울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깨진 거울파편이 발등위에 꽂혔다. 가슴 떨리는 심장의 압박을 느끼며 나는 날카로운 거울조각을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넣어 삼켰다. 철퍽, 나는 거울조각 위에 누웠다. 눈물이 자꾸 시야를 가렸다. 천장을 쳐다보니 형광등 불빛이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햇빛을 봐야해. 나는 이대로 음지 식물이 되기는 싫었다. 나는 창이 없는 커튼을 바라봤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비어져 나왔다. 저 커튼 사이를 치고 나가면 양지 식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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