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에 괴물이 사는 이유
- 작성일 200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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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괴물이 사는 이유
습한 강바람은 눈을 뜰 새도 없이 얼굴에 어퍼컷을 날렸다. 길을 걸어가던 어린 커플이 뒤집혀진 내 형광색 삼단우산을 보고 키득거렸다. 집에 우산이 이것밖에 없는데 어쩌라는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보슬비가 안경을 적셨다. 주머니를 뒤적거려보지만 잡히는 건 담배밖에 없다. 배가 고픈데, 하고 중얼거렸다. 편하게 입고 올 걸, 학교 선생님들을 만난다고 걸치고 나온 얇은 트렌치코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애초에 박 선생만 아니라면 눅눅한 이불 속에서 과자를 먹고 있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송년회 같은걸 가지 않았더라면…애초에 재희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애초에 담임을 뽑을 때 재희 반을 뽑지 않았더라면…애초에 선생님이 되지 않았더라면…. 가슴이 답답했다.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도 모르는데 꼬일 대로 꼬여서 풀지 못하는 상황까지 왔다.
학교 이사장의 송년 모임에 가는 날이었다. 현관에 앉아서 구두를 신는 도중 재채기가 나왔다. 왠지 모를 오싹함이 온 몸을 휘감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가지는 이상한 기분들을 모두 맞지 않았다. 내가 정말 가고 싶어 했던 신문방송학과 면접을 볼 때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대기자 명단에도 없다거나, 오년 전 임용고시 1차 시험에서도 내 이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명단에 내 이름이 있다거나 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더 좋은 일이 있을지도, 하면서 내키지도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사장은 흰색 레이스를 나풀거리면서 우리를 맞았다. 재희는 거실 끝 안락의자에 앉아서 언제나처럼 반쯤 감긴 눈으로 무료한 듯 창밖을 바라봤다. 우습게도 나의 예감은 맞았다. 이십대 중반에 넘어가면서 쓸데없는 나의 예감들이 하나 둘 씩 적중하기 시작했다. 왠지 재희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날, 정말 재희가 오지 않는다거나, 생리를 할 것 같은데 귀찮아서 생리대를 챙기기 않은 날 생리를 시작한다거나. 어쩌면 내가 여태 무시하고 있던 일들을 하나 둘 씩 인정하는 걸지도. 그때 스카치 캔디 버터 맛을 풍기면서 내 옆에 있던 정 선생이 한마디 했다. 어머, 어쩜 저렇게 이사장님을 안 닮았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수학 문제풀이를 시켰을 때만 볼 수 있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재희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재희를 시키곤 했다. 재희는 길 잃은 강아지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삐죽 내밀곤 했다. 그리고는 칠판을 툭툭 치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나는 재희의 그런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문제를 풀어주고 만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눈빛이었다. 나는 제길,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사는 단칸방의 열배나 됨직한 거실과 주방, 마호가닌지 뭔지 하는 소파와 테이블, 장식장들, 그 안에 장식돼 있는 다이아몬드와 양주들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식탁에 앉으면 아더 왕이 긴 칼을 차고 나와서 왜 갑옷을 입고 오지 않았냐고 하면서 내쫓을 것 같이 넓은 주방이 불편했다.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런 나를 눈치 챈 건가? 국어를 가르치는 박 선생이 도수 높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면서 느린 속도로 말을 했다. 매달 한 번씩 한강 유람선을 타는 모임에 들어오라는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말이 너무 느려서 제일 처음 말했던 단어를 기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나는 거절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내 앞에는 빨간색 랍스타가 있었고, 흰색 레이스가 바람에 흩날리는 홈드레스를 입은 이사장 옆에는 재희가, 이사장이 발라주는 랍스타를 먹고 있었다. 내가 랍스타가 먹고 싶다고 할 때는 먹지 않던 재희였다. 이사장의 포크가 재희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박 선생에게 네, 그럴게요, 라고 대답해버렸다. 이사장의 손에 들린 반짝이는 포크가 움직일 때마다 어디선가 견디기 힘든 분노와 절망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박 선생은 드디어 성공했다는 표정으로 검정 뿔테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최 선생님, 세 번 이상 연달아 빠지면 벌금 물어야 되니까 빠지지 말고 참석하세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빨간색 랍스타와, 반짝이는 포크를 생각하면서, 그저 내가 한 대답을 후회할 수밖에.
이놈의 비는 방향 감각이 없어.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돌려서 강바람을 맞았다. 커플티를 입은 어린 커플 한 쌍이 내 앞을 지나가면서 쑥덕거렸다. 이봐, 난 자살 따위나 하러 나온 게 아니라고, 하고 중얼거렸다. 담배 한 대만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 이사장의 저택에서도 그런 마음이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싶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지하철을 타야할 정도로 넓은 저택은 너무 답답했다. 게다가 강아지처럼 아, 하며 랍스타를 먹는 재희라니. 나는 이사장의 눈에 포크를 꽂아버리고 싶었다. 나는 11인치 코르셋을 착용한 중세부인처럼 답답했다. 어디론가 가서 이 끈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우산이 다시 뒤집어 졌다. 얼굴에 부슬비가 떨어졌다. 손으로 스윽, 닦아냈다. 왼쪽 뺨에 부풀어 있는 흉터가 잡혔다. 얼음판에 부딪혀 생긴 상처였다. 빨갛게 붓고, 세수를 할 때마다 얼굴이 쓰리더니, 어느 순간, 때처럼 까맣게 딱지가 앉았다. 알아서 떨어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뜯어내고 뜯어냈다가, 결국 완전히 아물지 않고 흉한 얼룩처럼 흉터가 남았다. 재희는 내 흉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바다에 떠 있는 귀여운 섬 같아. 없애지마. 나중에 내가 눈이 멀어도 선생님 얼굴만 더듬어서 알아볼 수 있게. 기특한 녀석, 이라고 중얼거렸다.
일 년 전, 재희 반을 처음 맡게 되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재희에게 개인 수학 보충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사장의 권유였다. 이사장은 재희 담임을 맡게 되자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넓은 거실과 식당이었고, 재희는 이제 막 도서관에서 돌아온 최고의 모범생처럼 거북스럽게 착했다. 학교에서도 그런다면 오죽 좋으련만. 두 시간 동안 이어지는 뷔페식 코스의 식사를 하는 동안 이사장이 쉴 새 없이 나에게 했던 말을 정리하면 재희의 특별 과외를 맡아 달라, 였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재희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였다. 우선 이사장한테, 아들 관리부터 하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건 이사장의 부탁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지금 재희가 뭘 하는 알 수 없다. 재희의 이야기를 못 들은 지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겠다. 재희의 이야기는 또래의 아이들과 다를 바는 없었다. 진실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이없는 사귀는 여자들의 이야기나, 이사장의 남성 편력이나 선생님들에 대한 비웃음들. 낮은 재희의 목소리와 이상하리만큼 단정한 말투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재희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공기를 울리면 나는 벤치에 온 몸을 기대고, 재희의 손을 잡고, 갓 구운 식빵을 죽죽 찢어 먹었다. 재희를 만나는 동안에는 내가 담임인 것도, 재희가 학생인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와 닮거나 닮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그게, 사랑이었을까? 어딘가로 사라질 신기루처럼. 입 속에서 녹아버리는 와플 속 생크림처럼.
와플집이 사라졌다. 그곳은 정식 가게가 아닌 컨베이어로 대충 판을 막아놓은 곳이었다. 그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였고, 시끄러웠다. 나는 언제나 그 집 앞을 지나쳤다. 언제나 달콤하고 뜨거운 와플 굽는 냄새가 나를 멈춰 서게 했지만 생크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에는 용기를 내서 꼭 먹어야지 생각하지만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다음을 다짐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와플집을 지나친 건 며칠 전이었다. 그곳은 여전히 붐볐고, 와플의 뜨거운 냄새는 여전히 좋았다. 왠지 오늘이 아니면 영영 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는 스무 살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프라다 가방을 든 여자는 방금 만나고 온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유난히 목소리가 컸고, 한 여자는 웃음소리가 너무 컸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가방을 괜히 뒤적거리다가, 핸드폰을 열었다. 재희에게 문자를 보낼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가벼워보인다거나, 내가 관심이 있는 걸 알아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희가 보낸 문자를 하나하나씩 읽어보고 지웠다.
방금까지만 해도 하늘을 가득 채웠던 노을은 천천히 자신의 흔적을 없애고 있었다. 하늘은 내 손안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 있었고, 더불어 습한 새벽의 공기가 내 머리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여자 둘은 일제히 와하하, 하고 웃었다. 둘은 혼자 줄을 서 있는 나를 웃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왠지 내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돌아서서 집을 왔다. …그게 마지막일 줄이야.
나는 하얗게 자국만 남은 자리를 한참이고 바라봤다. 나중에, 라는 건 없었다. 뜨거운 와플내음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제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무엇이든 눈앞에서 내가 놓쳐버리는 게 싫었다.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집 앞이었다. 그 집을 둘러싼 공기는 매일 드나드는 집처럼 친숙했다. 나는 그 집 담을 한 바퀴 돌았다. 덕수궁 돌담길처럼 높고,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또각거리는 내 구두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와플이 사라진 밤 치고는 괘씸하게도 너무 조용하고 평온했다. 봄은 왔지만, 내 마음속은 아무도 없었고, 향긋한 와플냄새는 사라졌다. 나는 어느 순간 희미한 자국만 남기고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나는 아등바등하면서 살고 있었다. 나는 발 앞에 놓은 돌멩이를 힘껏 찼다.
“아, 씨발.”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무인도에 갇혀 있다가 십년 만에 사람을 처음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오랜 숨을 참듯, 어머, 하고 말을 뱉었다. 사람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재희였다.
“너는….”
재희는 내 입을 막고, 말을 이었다.
“아무소리도 내지 마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의 손에서는 아직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는 희미한 담뱃잎 냄새와 새교과서 냄새와 김치찌개냄새가 났다.
“어딜 가는 거야? 지금 영어 과외할 시간 아냐?”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재희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입을 열었다.
“꼰대 만나러 오셨어요? 꼰대 지금 집에 있기는 한데, 거지같은 음악 감상이라나 뭐라나 여튼 건들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그냥 가세요.”
아, 내가 이 집에서 느낀 친숙함은 단순한 친숙함이 아니었다.
“근데 다리는 왜 그래?”
“아까 떨어지면서 조금 놀랐나봐요. 아파죽겠어요.”
하며 재희는 내 팔짱을 끼고, 오토바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이거 네 거니?”
“…잠깐 빌린 거예요.”
하며 재희가 말을 끝내자, 바람 한 점이 불어와서 우리 주위를 일렁이게 했다. 어디선가 묻어온 뜨거운 와플냄새가 났다. 재희는 씩, 하고 웃었다. 와플만큼이나 상큼한 웃음이었다.
“…타세요.”
재희는 머뭇거리는 나를 오토바이에 태웠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은 쌀쌀했다. 하지만 춥다거나,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바람이 되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와플집이 사라졌다는 사실마저 깜박했다.
“선생님은 왜 선생님이 된 거예요?”
오토바이에서 내린 후 재희가 처음 뱉은 말이었다. 주위는 익숙하지만 낯설었고, 재희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참을만한 낯설음과 경계심이었다.
“…그냥, 그래야했으니까.”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분위기 괜찮죠? 나 여기 온 거 꼰대한테는 비밀이에요.”
주위에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누워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공중 화장실 옆에서 파전을 부쳐 먹고 있었다. 좁은 광장에서는 노숙자들이 잠을 자거나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이나 노숙자들은 서로에게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노숙자들은 꽁초를 주워서 피우거나, 남긴 음식물을 주워 먹기도 했다. 구석에서는 디스코 복장을 한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우리 옆에서는 자리를 잡고 와인을 병째 마시고 있었다. 한 사람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아주 심한 음치였다. 모든 게 소란스러워보였고, 무질서했다.
“나쁘진 않아. 여긴 자주오니?”
“여기 사람들은 아무도 나한테 신경 쓰지 않거든요. 이사장 아들이라고 말도 안 되는 아부하는 새끼들도 없고.”
하며 재희는 피식 웃었다. 학교나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편안한 웃음이었다. 재희는 말랑말랑한 젤리처럼 변해서 쿡 찌르기만 해도 흐물거리며 쓰러질 것 같았다. 한동안 재희와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
“원래 나를 좋아하는 여자는 싫지만, 선생님은 인정해줄게요.”
재희의 말투는 친구들에게 장난을 걸 때와 비슷했다.
“그 쓸데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하고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해.”
그리고 재희의 손을 잡았다. 연필 외에는 어떤 것도 집어본 적이 없는 손바닥이 닿는 순간 내가 미워하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희는 순간 입을 비죽 내밀고는 내가 잡고 있는 손을 꽉 잡았다. 주위는 시끄러웠지만 조용했고,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자음과 모음들이 돌아다녔고, 어지러웠다.
“왠지 어딘가에 내 진짜 엄마가 있을 것 같아요. 김인숙이 무명시절 동거했던 남자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나라던가 말이에요. 혹시 알아요? 어디선가 몰래 나를 찾고 있는 건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미안하지만 이사장님하고 너 분명히 닮았어.”
“그 뚱땡이 아줌마랑 내가 어디가 닮았다고 그러세요. 아, 기분 나쁘게.” 재희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선생님이 나한테 한 말 중에서 제일 맘에 안 드는 말이네. 재수 없어.”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학교 선생님 중엔 제일 낫네.”
하며 웃었다. 저기가 아닌 여기를 바라보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재희는 지금 만나고 있는 무용학과에 다니는 여대생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여대생을 클럽에서 만났고, 나이는 좀 많지만 몸매가 좋아서 만나주는 거라는,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도 모를 말들이었다. 그때의 재희는 그 나이 또래 애들이 가지고 있는 허영심과 잘난 척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어떤 고등학생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목소리였다. 재희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어디선가 모두들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달콤한 와인과 머쉬멜로의 향기가 나를 기분 좋게 했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볼펜을 감쌀 정도로 큰 손과 수학 문제를 풀면서 머뭇거리는 표정에 가슴이 아프기 시작한 게.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항상 창가에 앉아서 조는 모습과 재희의 손목에서 나는 옅은 담배냄새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게. 쓸쓸한 웃음이 보고 싶어서 실없는 농담을 시작한 게.
내 삶에 재희를 추가하고 싶었다. 재희의 감촉과 즐거움과 슬픔과 기쁨과 웃음과 또 무엇과 무엇을. 그리고 재희의 삶에 나를 추가하고 싶었다. 습관처럼 보내는 소소한 문자들, 한밤에 일어나는 일상적인 대화들, 서로에게 마음을 조금씩 비추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들. 그 모든 걸 재희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재희의 팔에 팔짱을 끼고, 날씨 좋은 골목을 거닐다가, 벤치에서 재희가 담배를 피우면 어깨에 기대서 손으로 그늘을 만들고 하늘을 보고 싶었다.
사흘째 재희가 학교에 나오지 않던 날 아침이었다. 재희가 이틀 째 학교에 나오지 않는 다는 것만 빼면 별다른 것이 없는 날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출근을 하려고 부산을 떨었고, 날씨는 적절하게 따뜻하면서도 쌀쌀했고, 하늘에는 뿌옇게 황사가 껴 있었다. 다만 나는 밤새 기억나지 않는 무서운 꿈을 꾼 사람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재희가 이대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희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밥 먹듯이 빠지지는 않았지만, 두어 달에 한번정도는 나오지 않았다. 재희는 간단한 꾀를 썼다. 온 몸을 볼펜으로 꾹꾹 눌러서 피부병처럼 보이게 한다거나, 눈을 비벼서 눈병처럼 만들었다. 놀랍게도, 그런 간단한 속임수에도 이사장은 속아 넘어갔다. 그리고 이사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재희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왜 학교 가기 싫은 건데?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재희의 답은 간단했다. “그냥, 놀고 싶어서.” 였다. 재희는 밖에 나가서 가상의 여자인지 진짜여자인지 모를 여자를 만나고, 나에게 문자를 보내곤 했다. 문자 내용은 간단했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는데, 여자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다, 라는 내용이었다. 어떤 날은 날라리 고등학생이었다가, 어떤 날은 대학생이었다. 하지만 재희의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재희의 눈가에는 예전 기생들만 가졌을법한 살굿빛 도화 살이 어려 있었다. 재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위에 여자애들이 줄을 섰고, 매일 선물과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거기에 대해서 재희는 최소한의 예의만 보이면서 맘에 드는 여자애들과는 만나기도하고, 그러다가 싫증나면 다른 여자애를 만나기도 하면서 지냈다. 재희가 조금씩 커갈수록 도화 살도 비례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는 인근학교 여자애들까지 재희를 만나러 학교에 찾아오곤 했다.
재희의 문자를 받을 때마다, 나는 왜 재희의 연애 상대가 될 수 없는 건지 고민하다가 그만뒀다. 재희가 나를 연애상대로 생각하든 안하든 바뀌는 건 없었다. 어쨌든 나는 매일 비타민과 칼슘을 복용해야하는 여교사이고, 재희는 눈을 뜨면 손가락이 자라고, 팔목이 자라고, 목이 자라고, 다리가 자라는 학생이었다. 자라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의 간극은 엄청났다. 하지만 어쩌다 재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재희가 씨익, 웃어주면, 어쩌면 나는 재희를 마음 놓고 사랑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재희는 지금 어떠한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았고, 재희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사흘은 삼주가 되었고, 한 달이 되었고, 두 달이 되었고,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재희가 없는 학교는 무료하고 따분했다. 어쩌면 재희는 또 다른 와플집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박 선생은 친구 아들 돌잔치에 간다고 하며, 다른 선생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아무리 주의 깊게 들어도 구름에 달 가듯 느린 박 선생의 말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누가 오는지 내가 알 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온 김에 혼자라도 유람선을 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생각은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카츄 풍선을 들고 헤헤거리는 아이들과 커플티를 입은 재희 또래의 연인들 사이에서 유람선을 타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일거면 모두 혼자이던가, 나만 혼자인 건 뭔가 억울했다.
낯선 전화가 걸려온 건 며칠 전이었다. 발신번호는 뜨지 않았고, 어린 듯 한 남자 목소리와 여자 목소리가 한데 섞여서 들려왔다. 주위는 북적거렸고,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누구인지 모를 정도였다. 전화를 받고나서 한참동안 저쪽에서는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끊지 마! …나야.”
재희였다. 나는 한동안 멍하게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이 앞선 것 같았고, 놀라움보다는 반가움이 앞선 것 같았다. 재희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선생님한테는 말하고 가려고 했는데…. 우리 꼰대한테는 말하지 마. 골치 아파지니까. 그건 그렇고…”
하고는, 전화가 끊겼다. 동전이 다 된 듯싶었다. 다시 전화가 온 건 며칠 후였다. 여전히 공중전화였고, 주위는 시끄러웠다.
“…선생님, 여기로 좀 와줘. 여기가 어디나면….”
거기서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른 가출 청소년들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묵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수밖에. 그리고 생각했다. 만나면 진짜 선생님처럼 타일러서 데리고 올 것이라고.
재희가 있는 곳은 어느 항구였다. 바다가 앞에 있으니 항구라고 말하지만 항구라기보다는 흔한 농촌마을 같은 곳이었다. 바다 앞에 떠 있는 배중에서 진짜 움직이는 배는 몇 척 되지도 않았고, 움직인다고 해도 헤엄치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느렸다. 재희가 있는 곳은 그곳에서 더 들어 가야되는 곳이었다. 도로는 놀랄 정도로 울렁거렸고, 좁고, 더러웠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새카맣게 탄 피부에 주름이 얼굴을 뒤덮고 있거나, 봄인데도 겨울옷을 겹겹이 껴입고 있었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무서웠고,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재희는 새카맣게 탄 얼굴로 나를 맞았다. 어디서 산건지 후줄근한 셔츠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아메바무늬의 바지라는 건 재희에게 다가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오는데 힘들었지? 우리 꼰대는 뭐하고 지내? 여기 공기 좋지? 서울하고는 비교가 안 돼.”
재희는 어깨를 으쓱 하면서 웃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선한 웃음이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어?”
“…어쩌다보니, 사람들한테 도망 왔어.”
“…도망? 나한테 그런 말 없었잖아.”
“어쩌다보니, 라고 얘기했잖아. …보고 싶었어. 나 안보고 싶었어?”
하며 재희는 내 손을 잡았다. 재희의 손은 여전히 따뜻하고 상큼했다. 나는 버스 안에서 다짐했던 훈계의 말들을 모두 잊었다.
재희는 마을 사람들이 살다가 버린 폐가에서 살고 있었다. 대문은 애초에 없었고, 마당에는 풀이 무성했다. 현관문이나 안방 문 같은 것도 없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방 안에 있는 배부른 여자였다. 여자는 열여섯에서 열여덟 정도로 보였다. 어쩌면 더 어릴지도 몰랐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눈 밑에는 기미가 잔뜩 껴 있었다. 순진하거나 순박하다는 느낌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음울해보였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이 아니라, 마흔이 넘은 늙은 창녀처럼 흐리고 암울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애는 재희가 오자 몸을 일으켰다가, 나를 보고는 경계를 했다.
“내가 전에 얘기한 선생님.”
그제야 여자는 나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방 안 가운데에는 하늘이 보일 정도로 구멍이 뚫려 있었고, 가구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이제 설명을 해봐.”
“별로 설명할 건 없어. 어느 날, 여자를 만났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사랑에 빠졌고, 또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사랑해서는 안 될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어. 그래서 도망쳤어. 내가 진짜 사랑에 빠질 줄은 몰랐어. 그런데 말이야. …나 돈 좀 빌려줘. 몇 달 후면 애도 낳아야 되고, 당장 우리 먹을 것도 없어. 계속해서 이런 데에서 살 수도 없고…. 다른 데로 도망을 가야될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알게 된 애야?”
“차차 얘기해줄게. 몸이 좀 불편해. 말을 못하거든. 글도 못쓰고. 내가 보살펴 줘야 돼. 귀엽게 생겼지?”
“…소꿉놀이는 그만하고 집에 가자. 왜 고생을 사서 해? 너희 부모님한테 붙어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잖아.”
“이 애랑 같이 집에 갈 수 있는 거야? 아니잖아. 집에 가면 헤어져야 되는 거잖아. 나는 또 거지같은 학교에 가야되는 거고. 바보같이 헤헤거리면서 살기 싫어. 연애놀이 하는 것도 지쳤어.”
“그럼 연애놀이 안하고 다른 거 하면 되잖아. 뭐 하고 싶은데?”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꼰대 밑에선 내가 하고싶은거 못하잖아. 그냥 이대로 살래.”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네 나이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어.”
하고 이게 가방이니? 하며 재희의 것으로 보이는 루이비똥 캐리어 안에 재희의 것으로 생각되는 짐을 챙겼다. 그때 재희의 숨소리는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재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부스럭대며 꺼냈다.
“나 도와줄 거 아님 여기서 못 나가.”
권총이었다. 재희가 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진짜 총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 아메바무늬 바지를 입고 있다고 해도, 몇 달 동안 막노동에서 페인트칠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해도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재희는 태어나서 가출을 하기 전까지 한 번도 시장에서 산 천 원짜리 티를 입어본 적도 없고, 바퀴벌레를 자기 손으로 잡아본 적도 없었다. 이태리타월이 뭔지 모르는 녀석이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그건 알 필요 없잖아. 빨리, 돈 줘. 그리고 꼰대한테 가선 말하지 않겠다고 말해.”
그때 재희의 눈에서는 살기와 공포가 가득했다. 여기서 지면 재희고 뭐고 다 뺏기고 만다.
“쏠 테면 쏴. 쏘지도 못할 거잖아. 바보같이 굴지 말고 빨리 내려놔. 어떤 멍청한 사람이 너한테 총을 팔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이야.”
흥, 하고 재희는 코웃음을 쳤다. 재희는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폭발음이 들렸다. 진짜 땅, 하는 소리보다는 딱딱한 팡, 이나 빵에 가까운 소리였다. 어깨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느낌이 들었고, 이물감이 느껴졌다.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프다, 는 느낌은 상처가 난 모든 상황에 쓰는 건 아니었다. 손에 생채기가 났다거나 할 때 느끼는 아픔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몸 깊숙한 데에서 뭔가가 샘솟고 있었고, 아픔은 천천히 다가왔다. 한참 후에 나는 소리를 질렀다. 피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재희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이 쐈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재희는 총을 잡은 손을 부르르 떨었지만 총을 놓지는 않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내가 지금 뭘 느끼고 있는지 몰랐고, 왜 이렇게 침착한지 알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가장 공포스러울 때나 가장 슬플 때 가장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그랬고, 지금 이 순간에서도 그랬다.
“지금 내가 너를 신고하잖아, 그럼 너 바로 잡혀가는 거야. 불법무기 소지에, 살인미수로. 알고 있어?”
재희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순간 재희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재희를 겨누었다. 나는 내 앞에서 재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다시 학교에 나오길 바랐다. 수업시간에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눈이 마주치면 눈웃음쳐주기를 바랐다. 쉬는 날에는 공원에 앉아 나와 수다를 떨어주기를 바랐다. 다시 재희의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가, 재희의 등에 얼굴을 대고 따뜻해, 라고 중얼거리고 싶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도망가 버리면 나는 뭐가 되는데? 뭣 하러 그렇게 친절했던 건데? 설명해봐. 여자가 생겼다는 어이없는 얘기하지 말고 너와 나의 이야기를 해봐.”
“선생님은 선생님이잖아.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었는데? 왜 자꾸 꼰대처럼 구는 건데? 갑자기 왜 그래?”
재희는 빼앗긴 총을 찾으려고 나를 붙잡으려고 했고, 나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재희는 나를 발로 차고 위로 올라왔다. 가슴뼈가 으스러진 듯 아팠다. 나는 발버둥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내 한쪽 팔은 아까 총알이 스쳐서 상처가 났고,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게다가 열일곱의 젊은 녀석의 무게와 힘이란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재희는 내 목을 졸랐다. 기침이 쉼 없이 터져 나왔다. 이러다 죽겠다는 공포보다는 짜증이 몰려왔다. 내가 왜 이런 시골에 와서 재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그만 좀 해! 하고 악을 지르며 쥐고 있던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위에는 재희가 누워있었고, 옷은 축축했다. 내 두선은 피로 범벅이 돼 있었고, 주위는 비릿한 냄새가 가득했다. 재희의 무게는 아까보다 열배는 무거워졌다. 재희를 옆으로 밀었다. 철푸덕, 고깃덩어리를 옆으로 옮기는 듯 한 느낌이었다. 재희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옆에는 여자애가 두려움에 질린 듯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여자애에게 총을 쥐어줬다. 그러면 여자애가 날 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손을 바들바들 떨던 여자애는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겨누었다.
차 안에는 질펀한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상처는 쓰라렸다. 목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아팠다. 가로등도 없는 도로를 지나서 어떻게 돌아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 가지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도시에 도착하자, 청소부 아저씨가 거리를 쓸고 있었고,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모를 것들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시의 공기는 여전히 매캐했고, 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때의 재희가 아닌 다른 재희를 생각한다. 재희는 어디 있을까.
유람선은 생각보다 색다르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행기롤 타고 하늘 위를 나는 것이나, 지하철을 타고 지하를 탐사하는 것과 똑같았다. 물 위를 가고 있다는 느낌이나 흔들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했다. 쓰레기 냄새가 뒤섞인 비릿한 강물의 냄새는 구역질 날 것 같았다.
부슬비 속에서도 솜사탕을 먹고 있는 여자아이나 피카츄 풍선을 들고 있는 꼬마. 늙은 노부부 여러 쌍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은 부류는 커플티를 입은 연인들이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어린 학생들은 풍경 보다는 풍경 속의 자신의 연인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에게 밀착돼 있는 상태로 입을 맞출 틈을 노리기에 바빴다.
내가 재희에게 바랐던 건 어려운 일이었을까. 나는 재희에게 나 외에 다른 누구도 사랑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 적도 없고, 나만 만나달라고 애원한 적도 없었다. 그저 재희의 목소리로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것뿐인데, 내 욕심이었을까. 내가 기댈 수 있는 따뜻한 어깨만을 가져달라는 거였는데.
나는 뱃머리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어디선가 와플 냄새가 났다. 달콤했다. 어디선가 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오랜만이야. 재희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여전히 귀여웠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여행하고 다녔어. 프라하, 파리, 상트페테부르크. 나 보고 싶었어? 그리고 재희는 내 손을 잡았다.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마른 낙엽냄새가 났다. 재희는 어느새 난간에 올라가 있었다. 뭐야, 타이타닉이야? 라는 말에 재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는 난간에 걸터앉았다. 나는 재희의 어깨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내가 얼마 전에 만난 여자애가 첼로 켜는 앤데, 걔 만나면서 돈이 엄청 깨졌잖아. 예쁘고 몸매도 괜찮은데 명품이라면 애가 사족을 못 쓰는 거야… 재희의 이야기는 조용조용 하늘로 퍼졌다.
하늘은 맑게 개었고, 햇빛이 머리를 간질였다. 바람은 우리의 등을 밀었다. 나는 얼굴이 가려웠다. 흉터는 사라졌다. 재희는 다시 나를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웠다. 우리는 발꿈치를 들고 하늘로 걸어갔다. 안녕, 모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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