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플데이
- 작성일 200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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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매달려 소중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그때 난 내가 빠르게 늙어서 모든 것이 변해도 나만은 까딱없는 안정된 삶을 살길 바라고 있었다. 아픔도 불살을 젊은 같은 것이야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나에겐 그저 꿈같은 것이리라. 라고 생각했었다. 거울을 보면서 늘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난 복도 없지. 타고난 게 그래. 그러니까 언젠가 아무렇지도 않게 죽어 버릴지도 몰라. 라고 질책하며 늘 자조적인 웃음으로 거울 속에 비친 퀭한 눈의 나를 바라보았다.
“방세는 언제 낼 거야 처녀?”
“저 처녀 아니거든요?”
뜨끔거리며 놀라는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그대로 방문을 닫아 버렸다. 그렇게 내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아주머니는 가지고 있던 마스터키로 내 방문을 열었다. 원룸이라는 것이 안 좋은 이유가 이렇게 아무 때나 주인 들어오고 싶을 때 마음대로 들어와 하고 싶은 말을 하던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가도 누구하나 뭐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 방세는 언제 낼 거냐고?”
“돈이 있으면요!”
돈이 없다는 게 내가 가진 가장 큰 문제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마땅히 할일을 찾지 못한 탓도 있지만 솔직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나는 그저 빈둥거리며 방안을 훑고 다니기 일 수였고, 핸드폰이란 것은 어느새 귀차니즘에 메게체가 되어 지 멋대로 울려대다가 지 멋대로 꺼져 버린 지 오래이다.
나는 혼자다. 이제 정말 혼자다. 그 사람이 떠나버렸으니 정말 혼자다.
냉장고를 열어 젖혔다. 어딘가에서 썩은 냄새가 폴폴 올라오는 것이. 한참을 뒤적거리니 핏물이 흥건한 고깃덩어리 하나가 보였다. 욱하고 올라오는 토기에 화장실로 향했지만 먹은 게 없으니 넘어올 것도 없었다. 얼룩이 잔득한 거울을 보니 눈이 퀭한 내 모습이 보였다. 살이 약간 빠진 듯 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얼마나 지났다고 몸이 벌써 이렇게 외롭다고 진저리를 치는지. 자극과 반응은 단순하기도 했다. 자극과 반응은 정말 기가 막히기도 하다.
썩은 고기를 어떻게 처리를 할까 망설여졌다. 생각 같아선 변기 속에 쳐 넣어 버리면 좋겠지만 그러다가 변기가 막혀버리면 그건 더 큰일이었다. 만지기도 싫은 그 썩은 고기는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려고 했다. 그렇게 냉장고를 열지도 못하고 하루가 지나갔다. 당연히 물도 마시질 못했다. 월세를 내지 않는다고 가스까지 끊어 버린 아주머니 때문에 물을 끓일 수도 없었고 사 놓은 생수는 다 냉장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핸드폰을 열었다.
부재중 21통. 전부 은하에게서 온 것이다. 전화를 걸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냉장고 고기 치우라고 전화를 걸기엔 은하에게 너무 미안했다. 부질없는 내 컬러링을 21번이나 들었을 은하. 그래 한 달에 구백원씩 나가는 컬러링부터 아니 필요 없는 핸드폰부터 끊어야겠다. 이제 통장엔 정말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어 생수라도 사려고 밖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은 막 집으로 들어가려고 열쇠를 꺼내고 있었다. 옆집에 사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가끔씩 베란다 너머로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여자 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사람은 남자였다.
“저기요!”
마음보다 몸이, 몸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실로 오랜만에 내 뱉어본 실재 음성이다. 늘 항상 시끄럽다고 생각한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나의 입들이 수없이 나를 조정해왔기 때문이다. 정말 이대로 이렇게 살다 죽을 거니? 그래 이제 좀 사람처럼 살자. 그래 밥 먹자. 씻자. 이렇게 나를 조정해왔다. 결국 말처럼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지만.
약간 놀란 모습의 그 사람도 나를 처음 보는 눈치다. 그는 차근차근 나를 쳐다보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놀란 눈동자는 더 커다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금 헝클어진 머리에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에 화장기 없는 퀭한 눈을 하고 처음 보는 그 사람을 불렀으니까. 그것도 며칠은 굶은 모습을 하고는. 쓰레빠에 맨발로.
“나 좀.. 도와줄래요?”
남자들은 모르는 여자들에게 친절하다. 그 사람은 뭘 도와줄까요. 라고 묻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가자는 엉뚱한 여자의 말에 금세 예스 하고는 따라 들어왔다. 이상하게 난 이 사람이 변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엉망진창인 집을 조금 두리번거리는 그 사람을 내가 쳐다보자 금세 또 안본 척 하고는 묻는다.
“뭘 도와드리면 되죠?”
웃을까. 냉장고 속 썩은 고기 좀 처리해달라고 한다면
“냉장고에 뭐가 썩었는지 냄새가 나는데 토악질이 나서 도무지 냉장고를 열수가 없어요. 이러다가 굶어죽겠어요.”
웃었다. 내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작게 웃고는 다시 내 얼굴을 본다. 그리곤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키가 큰사람이었다. 내 키도 작은 편은 아닌데 나보다 이십센치는 커보였다. 까만 피부가 사람을 참 건강하게 보이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선 술 냄새가 났다. 아마도 밤새 취해 놀다가 들어오는 길이 아니었을까. 썩은 고기란 말에 피식거리며 웃었지만 화를 내며 돌아가 버리면 어쩌지.
내 걱정과 기대와는 다르게 그는 입고 있던 티셔츠 팔을 둥둥 걷어 올리고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또 그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원룸인 관계로 어디하나 마땅히 피해 들어갈 곳이 없던 나는 욕실 안으로 숨어버렸다. 무엇을 하는지. 그는 계속 복시락 거리더니 한 참후 내가 있는 욕실 문을 두드렸다.
“나와요. 다 치웠어요.”
그가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통에 조금 덜하긴 했지만. 냄새는 여전했다. 아차차 배란다로 숨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덜 창피했을 텐데. 그는 그 고기가 담겨있을 법한 까만 봉지를 들고 한손에는 행주를 들고 있었다. 냉장고 안은 깨끗했지만 그가 들고 있는 나의 행주는 이제 몹쓸 것이 되어버렸다.
“걸레로 닦든지 휴지로 닦아야지 행주로 닦으면 어떻게 해요?”
“네? 아.. 행주는 뭐 삶거나 빨면 되니까.”
“아니 그걸 삶는다고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아.. 죄송해요.”
짐짓 당황한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성격이 불쑥하고는 튀어 나와 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행주 어쩌고저쩌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냥 그때의 난 한참동안 벙어리 노릇하며 살았던 게 억울해서 누구 에게건 나도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 소리치고 싶었던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쏘아대고 나서는 참 속이 시원해졌으니까.
만약 그가 내 톡톡 쏘는 말투에 대고 같이 톡톡 쏘아 댔다면 난 그가 들고 있던 고깃덩어리를 뺏어 그의 얼굴에 던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그 자리에서 펑펑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며칠을 굶은 탓에 한참 화를 내고 나서 현기증이 올라왔다. 말을 하다가 갑자기 바닥으로 주저앉은 나를 보고 놀랐는지 그가 내 어깨를 잡았다.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져요!”
“괜찮아요?”
“이 손을 놓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는 행주와 고깃덩어리가 담긴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유유히 내 집을 나갔다. 도와주고서 괜히 욕만 먹은 꼴이 되었다.
그가 가고 나서 나는 깨끗해진 냉장고를 보고 얼룩진 그가 잡았던 내 어께를 보고 한참이나 웃어야했다. 실로 오랜만에 겪는 짜릿함이었다.
그를 사랑하게 된 건 순전히 희고 청명한 그의 피부 탓이었다. 어쩜 그렇게 사람이 흰지. 새하얗게 웃는 치아 또한 나의 누런 이와는 비교가 될 만큼 깨끗했다.
임용고시 때문에 교육학 학원을 다녔었는데 그렇게 밤 10시에 학원이 끝나고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까만 하늘에 별이 하나도 안보이고 달 또한 어디 숨었는지 보이질 않는 것이 좀 이상하긴 했었다. 그래 맞다. 비가 왔다. 다른 건 다 젖어도 되지만 그날 본 모의고사 시험지에 빼곡히 적어놓은 내 필기자국들이 번지면 안 되는 거였다. 시험지를 접어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날따라 작은 가방이라 구겨 넣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 그땐 몰랐다. 그게 행운이었다는 거.
추척추적 내리던 비는 점점 거세졌고 생각만큼 버스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있는데 누군가가 씌워준 우산에 내 몸은 더 이상 젖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런 까만 하늘빛 속에서도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나는 마치 달빛 구름 속에 있는 것처럼. 포근하면서 눈이 부셨다.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이 꼭 누가 나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것 같았어. 그러니까 덫은 니가 놓은 거야. 내가 걸려든 거고.
덫에 걸려든 이 남자. 그래 뭐든 괜찮았다. 내가 쳐 놓은 덫은 너무 똑똑해서 정말 진주를 잡을 줄 아는 덫이었으니.
“한지수. 너 죽으려고 그래 정말?”
전화를 하다하다... 은하가 찾아왔다. 처음에 이 방에 꼭 쳐박 힐 쩍에 은하에게 말했었다. ‘내가 나타날 때까지는 나를 만나러 오지 말아줘’ 나에겐 정리? 그래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무언 갈 털어내고 무언 갈 다시 빨아 말리고 내 맘속에서 심한 청소를 하던 중이었는데 생각보다 그 시간이 길어졌다.
길길이 날뛰며 나를 타박하는 은하를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이게 뭐야?”
“뭐가?”
“문 앞에 붙어있던데..”
그리 크지 않았지만 속이 빵빵한 봉투였다. 나에게 온 건지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다. 화를 내다 말고 봉투를 발견한 은하는 그것부터 뜯어보았다. 나온 건 작은 쪽지 하나와 초록색 노란색 행두 한 쌍이었다.
[옆집 남자입니다. 죄송했습니다.]
또 웃게 만든다. 엉뚱한 옆집 남자는. 행주와 쪽지를 잡고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는데 갑자기 너무 배가 고팠다. 어제 오늘 에너지 소모가 너무 많았다.
-난 부모님에 않계셔요. 그런데 어쩔 땐 그게 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길러주시던 목사님께서.. 아 제가 교회에서 켰거든요. 제 친구들은 제가 다 목사님 딸인 줄 알아요. 그 목사님께서 제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때 세상에 혼자 남겨진듯해서 미친 듯이 울었어요. 사람들은 조그만 게 어디서 그런 눈물이 쏟아 나오냐고. 일주일이 넘게 방에 쳐 박혀서 아무것도 먹질 못했죠. 그래요. 아무것도 넘길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부모님이 계시다가 돌아가시게 되면 너무 슬프잖아요. 난 그걸 견딜 자신이 없어요.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죠.
왜 그런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지. 실로 난 그런 이야기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심장이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짐짓 어두운 얼굴이 더 걱정이 되었다. 저 붉은 입술에선 어떤 말들이 튀어 나올까.
시계를 차고 있던 그의 손이 입가로 올라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 손은 그대로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날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조금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고 초조했고 떨렸다. 으레 이런 말을 꺼내면 사람들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처음엔 동정 받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가시 돋은 말들을 내 뿜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영악해진 나는 그걸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소녀가 되어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동정어린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일까. 아니 그것하고는 확실히 달랐다. 그가 동정이라는 타이틀을 두고 나를 만나준다면 나는 기꺼이 거절하겠다.
-사람들은 모두 슬픔 덩어리들이야.
그가 말을 꺼냈다. 그의 입술이 붉은 게 아니라 그의 흰 피부에 상대적으로 그의 입술이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그 순간에도 빛이 났다. 쓰다듬던 손은 그대로 내려와 무릎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나의 손을 감싸 안았다.
-사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어느 순간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이 어쩔 수 없는 슬픔들을 안고 태어나잖아. 그걸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어. 사랑이 있을 때 헤어짐도 있고 슬픔도 있다는 뜻이니까. 난 사랑이 슬픔이라고 생각해.
그는 진지했다. 부모님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 그러니까 나는 슬플 일이 없었다는 것. 그것은 곧 사랑할 존재가 없었다는 뜻이 되었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는 나에게 슬픔이 되는 것일까.
-나는 너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이 되어주고 싶어.
그 말들이 왜 그렇게 슬프게만 들리는지. 슬프지 않게 살고 싶다는 나와 그리고 사랑을 슬픔이라고 불렀던 그. 둘 다 서로 사랑의 모순 된 면만을 바라보던 게 아니었을까.
-지수야. 넌 이미 나에게 가장 큰 슬픔이 되어버린 것 같아.
날 사랑하고 있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처음부터 슬펐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헤어 나오지도 못하게 만들 거면서.. 그 말들이 그대로 박혀 빠져 나오지도 사라지지도 않게 만들 거면서.
은하가 사다놓은 음식들은 대부분이 냉장고로 들어가야 마땅할 것들이었다. 유통기안이 얼마 남지 않은 우유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이게 곧 썩어서 또 그 옆집 남자를 부르게 되지는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그 사람이 준 행주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 그를 잊고 웃어본 건 처음이라는 것. 이러면 안 되었다. 나는 쉽게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쉽게 잊힐 그 따위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내 사랑은 시간이 가면 무던하게 잊힐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고 나서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향했다. 꽉 채워지지 않았지만 금세라도 냄새가 날 듯 한 모양새에 꼭지를 돌돌 말아 가지고 나가던 길이었다. 그랬는데 무슨 심통인지 그 옆집 남자 집 앞에 그 쓰레기봉투를 그대로 두어 버리고는 다시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또 웃음이 났다. 그리고 다시 생각이 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 그를 잊고 웃어본 건 두 번째라는 것.
가을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추워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엔 혼자여도 힘든 적이 없었다. 혼자 뭐든지 열심이었다. 추워지는 날엔 내 몸을 녹일 따듯한 코코아를 찾았고, 더운 날엔 내 속을 비워줄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외로운 줄 모르고 텔레비전을 보며 즐거워했고, 수많은 연인들 속에서 혼자 영화도 잘 볼 줄 알았다.
지금은. 혼자 서는 게 두려워진 건 순전히 나를 길들여 버린 그 사람 탓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어느 순간부터 야옹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아이 울음소리 같은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그가 만들어준 돌고래 모양의 목각인형을 손안에 쥐면 금세 괜찮아지곤 했는데. 어.. 없다.
“화장대안 서랍 속 그래 거기”
고양이는 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머리칼이 쭛빗서는 느낌. 미칠 것만 같다.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그 사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수시로 찾아오는 머릿속 고양이 소리도 어쩔 수가 없다. 도무지.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은 그 사람이 내게 용돈을 주었다. 뜬금없는 봉투 속 십만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바라봤더니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더니 피식하고는 웃는다.
-아르바이트. 월급 받았거든.
식수통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라고 했다. 손에는 굳은살이 배이고 아프다는 어께는 항상 파스투성이였고, 어쩌다 한번은 다리를 절룩거리기도 했던 그런 아르바이트였다.
-얼마나 번다고..
-너 사고 싶은 거 사. 많이 못줘서 미안해.
내 손이 참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가슴 아픈 이 돈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그길로 통장을 하나 만들어 저금을 했고, 그는 때때로 나에게 용돈을 주었다. 남자친구에게 받는 용돈. 그 느낌도 꽤 괜찮았다.
사랑이라고 느끼는 순간순간 뭉클한 것이 가슴에서부터 뜨겁게 나를 자극했다. 문득문득 못 견디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기도 하고, 품에 안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듯 안고 잠을 청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 내 머리칼 한올한올까지도 사로잡혀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던 나는 그를 만나고 무서운 것들이 참 많아졌다. 눈물이라고 흘려본 적 없는 나는 그를 만나고 나서 차츰 습해져오는 눈에 익숙해져야했다.
그가 준 용돈들을 꼬박꼬박 모아 놓았었다. 나도 나름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그의 돈들은 그대로 통장 속에서 쌓여갔다. 비록 높다랗게 쌓이진 못했어도.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같이 살아보고 싶었다. 하마터면 내 입에서 먼저 ‘같이 살자’라는 말이 튀어 나오려는걸 참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랑해.
-응?
-사랑한다고.
-알고 있어. 나도 사랑해.
목마름이었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그렇게 내가 내건 덫에 그가 걸려버린 게 아니라 내가 걸려들고 있었다. 그가 내민 그의 손아귀에서 한 치도 틈도 없는 그의 공간에 꽉 막혀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좋았다. 그 막혀버린 아늑함 들이.
“남에 집 앞에 이런 걸 두다니요? 어째서..”
옆집 남자는 내가 버린 쓰레기 봉지를 들고 있었다. 소심하긴 그걸 또 누가 버린 것인지 찾아보려고 이리저리 뒤지다가 발견한 전기요금 영수증을 보고 쓰레기 주인이 나라는 것을 안 것이다.
그가 문을 열고 나를 봤을 때 난 거의 실신 상태였다. 초인종 소리에 줄어들긴 했지만 그놈의 고양이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턱 끝까지 흘러 이미 눈물들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지 오래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 보는데도 창피한줄 모르고 흐느낌 없는 나의 눈물들은 그에겐 들릴 리 없는 나의 귓속의 괴물소리는 계속되었다.
“잡아줘요..”
“네?”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보았다고 이런 얼토당토한 부탁들을 두 번씩이나 하게 되었는지. 그것도 고맙단 인사도 못 받았던 그였다. 쓰레기라면 어제 내가 버리려고 나가다가 그의 집 앞에 두고 온 것이 문제였다.
“고양이..”
“고양이요?”
“고양이 좀.. 잡아줘요. 무서워서 죽겠어요.”
이젠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흐느낌 없는 눈물은 이제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바닥에 앉아 엉엉 울고 있는 나를 그는 당황한 듯 잠시 바라보다가 내 집을 이리 저리 살피기 시작한다. 정말 고양이가 있다면 정말 잡아 줄 듯 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까만 사람이었다. 여름 내내 무엇을 했는지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와 대조되는 피부가 하얀 그 사람이 떠올랐다. 참 이상했다. 전혀 느낌이 다른데도 그는 그를 떠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고양이 소리는.. 않들리..”
“어서요! 난 죽겠단 말이야!”
그는 또 놀라서 멈칫하더니 이젠 아예 집안으로 들어와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에겐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인대도 불구하고 침대 아래며 욕실이며 베란다를 꼼꼼히 살펴 보았다. 그렇게 한참 후 그는 나의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켰다. 그리곤 나를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아무 거리낌 없이 나는 유유히 그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집으로 향했고, 구조가 거의 비슷한 그의 원룸 침대에 누웠고, 그는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려놓고는 불을 켰다.
“그거 환청이라는 거죠?”
“...”
“정말 무서웠겠다. 그런 거. 지금도 들려요?”
따끈한 커피는 적당히 식어 먹기 좋았다. 거짓말처럼 내 집을 나오는 순간. 아니 그의 침대에 머리를 누이는 순간 나를 울게 만들던 고양이 울음소리가 그쳤다.
“지금은 않들려요.”
“그럼.. 그거 들릴때마다 놀러와요. 아니 뭐...”
“뭐?”
“그냥 쉬다 가도 좋다구요. 나는 상관않해도 되요. ”
“원래 그렇게 친절해요?”
“뭐.. 조금은.. 당신은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라서..”
도와주고 싶은 사람. 어감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일하던 곳은. 대형 할인마트였다. 앞에서 회사라고는 했지만 그다지 회사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은. 난 그곳에서 물건정리를 하고 물건 홍보도 했다. 처음에 내 꿈은 교사였다. 국문학과를 나오고 국어 교사가 되기 위해 준비를 하다가 미끄러지길 두 번. 더 이상은 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에 선택한 곳이 그곳이었다. 은하는 그곳에서 만난친구였다.
“안사려면 그냥 갈 것이지 이것저것 꼬치꼬치! 도데체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왜 그런거니?”
“그런 적 한두 번도 아니면서..”
“오늘은 좀 심했어. 거의 살 것처럼.. 십분을 넘게 이것저것.. 정말 말도 않통해. 거기다가 물건도 않사. 카트 밀고 가는 뒷통수에 슈퍼타이 던져 버리고 싶었어. 정말.”
또 물건을 한바탕이나 사들고 들어온 은하는 이런 하소연을 털어 놓았다. 으레 그랬다. 나도 일이 끝나고 나면 욕하느라 남은 시간이 다 가곤 했으니까.
힘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한 곳이었다. 정신없이 바쁘니까. 정신없이 돌아다녀야 하니까. 그리고 끝나고 나면 수다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어? 이건 무슨 열쇠야?”
현관문 옆쪽 살짝 걸려있는 열쇠를 보고는 은하가 물었다.
“설마 집 열쇠? 여기다가 걸어 놓으면 어떻게 해?”
“아니야. 집 열쇠.”
“그럼?”
옆집열쇠야.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그 남자의 집으로 피신 간 날. 그가 주었다. 열쇠를 잘 잃어 버렸다가 찾는 습성이 있어서 집 열쇠를 여러 게 복사해 두었다고 하날 주었다.
-여기선 고양이 소리 않들린다면서요. 오고 싶으면 오라구요.
자기 집 열쇠를 건내 주는데. 그걸 어찌 선 듯 받을 수가 있을까. 그것도 잘 아는 사람도 아닌 사람에게.
-내가 도둑이면 어떻게 할꺼에요? 어느 날 당신 집 물건 몽땅 훔쳐서 달아나면요?
-보시다 시피.. 가져가려는 것들은 다 낡은 것뿐이에요. 물론 난 돈도 없는데.
-그러면 아예 문을 열어 놓고 다니지 왜 열쇠를 주는 거예요? 혹시 나한테 맘 있어요? 지금 꼬시는 거예요?
-아니 훔쳐갈건 없어도.. 내집이니까. 문은 잠가야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귀까지 빨게 질게 뭐람. 그는 열쇠를 쥐어 주었고, 난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열쇠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그는 이미 어디론가 나가고 나만 혼자 남의 집에 덜렁 남겨진 꼴이 되었다.
“일 않할거야?”
“응?”
“일.. 니가 온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래. 다시 와”
“아직은. 힘들어 은하야.”
은하가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책꽂이 속 손때 묻은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스멀스멀 베어 나오는 추억처럼. 아직은 간지러운 마음을 숨길수가 없었다.
“엄마가 집에 한번 오래.”
“응?”
“맛있는 거 해주신데.”
“알았어. 고맙다고 미리 말씀드려.”
“너희 어머닌 찾았니?”
엄마. 태어나서 한번도 엄마라고 불러본적이 없었다. 은하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녀를 나의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난 가족도 없는 홀홀 단신이다.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말이다.
“나 엄마 없어. 나한테 엄마가 어딧어.”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그의 부인인 그녀는 그곳을 떠나갔다. 목사님께도 아빠라고 불러 본적이 없듯 그녀에게도 난 엄마라는 호칭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늘 주위에 버팀목 같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마음의 빗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편했다. 그 시절 난 언제 그들이 날 외면할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었다. 핏줄이란 개념을 학교에서 배우면서부터 난 좀더 영악해졌다. 아무것도 이어질 것들이 없는 사람들이 만나면 헤어지는 것도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부도 이혼을 하고 거짓자식들도 언젠간 버려질 거라고. 그렇기에 정 같은 거 주어버리면 않된다고. 하지만 난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죽어 버리고 싶게끔 많이 울었고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던 마음은 어느새 열려있었고 세어나간 정들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은하야 나 고아야. 엄마도.. 아빠도 원래부터 없었어.”
혼자라는 것에 지독하게도 익숙해져 있었는데 난 또 그게 아닌 듯 그 순간순간 지독하게도 외로워진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금세 치유가 되지만 그것은 또 기나긴 흉터를 남겨두기도 한다. 면역력이 생기기도 하지만 사람을 죽게도 만들 수 있다는 거. 알아버렸다. 너무 늦게.
-병원이에요. 한지수씨 되시나요?
이상하게도 나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그는 부모님도 형제도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무리를 해서 그래 몸에 힘이 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단순한 빈혈로 쓰러진 줄 알았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워낙 무딘 사람이기에 침착하며 그가 있는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생수통을 나르다가 쓰러졌어요. 좀더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그의 하얀 피부가 그날따라 더 하얀.. 아니 이젠 투명해 보이기 까지 했다. 붉은 입술도 색이 옅어 많이 아파보였다. 눈을 감고 있으니 그게 또 무서워졌다. 잠을 자고 있을 테지만 난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혈액검사상으로 좀 이상해서요. 정밀 검사를 해봐야 겠어요. 지금은 약간 빈혈 증세가 보여 쓰러진건데 확진결과가 나와야 알것같아요.
의사가 뭐라고 하는지. 별로 관심은 없었다. 그저 빈혈 끼가 조금 있겠거니. 워낙에 창백해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려니. 금세 일어나려니.
한참이나 단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그의 눈꺼플이 떠졌다. 그리고 활짝 웃어 보이는 입술로 흰 이가 10개쯤 드러나 보였다. 그 모습에 덩달아 웃게 되었고 그의 손을 꽉 잡았는데. 그만 눈물이 주책없이 흐르고 말았다. 그가 말했던 슬픔이 이런 것일까. 나에게 가장 큰 슬픔이 되어 주겠다고 한 그의 말이 생각났다. 마음속에서 체 영글지 못한 말들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사랑해란 말들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 짤리겠다.
-지금 그게 걱정이야? 아픈거 뻥인가 보네. 괜히 걱정 했잖아. 치
-걱정 많이 했구나? 나 괜찮은 것 같아. 잠도 병원잠이 편한가봐. 아주 달게잤어.
-아주 병원체질인가 보네요. 얼른 일어나. 난 여기 싫단 말야.
-응. 알았어. 난 한지수 말이라면 뭐든지 잘 듣잖아.
나에게 동생이 있었다.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을 고아원에 두고 떠났다고 한다. 그게 아마도 동생이 병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자라면서 들었다. 그럼 왜 난 옵션으로 덩달아 버려 버린 것인지. 아픈 동생 옆에 내가 있다면 좀 위안이 되서 였을까.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 여자가 왜 우리 둘다 버려두고 간 것일까. 다시 돌아온다는 말도 않되는 거짓말을 하고선.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동생은 병원으로 갔고 세달만인가 헐덕거리던 숨을 거두며 영원히 잠이 들었다. 세달동안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던 병원. 난 그곳이 지옥같았다. 어린 생명을 송두리체 삼켜버린 괴물. 그것은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병이 아니라 지독한 알콜냄세 가득한 병원인것만 같았다.
그 뒤로 내 이름은 정지수가 아닌 한지수로 바뀌었다. 목사님의 성을 따서.
처음엔 고양이 소리 때문이었다. 그의 집을 찾게 된 건.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으면서도 정말 자기 집 열쇠를 준 것일까 라는 의심이 들었는데 척하니 열린 문 정돈된 남의 집 모습을 보곤 이 인간이 정말 변태사이코가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란다쪽에 오래되어 보이는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방 사이즈가 그리 크지 않은지라 피아노 위에 이것저것 올려놓은 모습이 요즘은 잘 치고 있지 않다 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피아노 뚜껑을 열어 손을 가져다 댔다.
교회라는 곳은 참 여러모로 음악적인 곳이다. 메일 들어야 하는 찬송가이며 교회 목사의 딸이라면 으레 잘 쳐야만 하는 피아노이며 또 노래는 보통수준이상으로 해야만 하는. 그렇지만 난 할줄 아는 건 캐논 밖에 없었다. 다른 것들은 잊어 버리거나 아니면 않배웠거나 악보가 없으면 칠줄 모르거나. 이제와 알았지만 내가 외우고 있는 곡은 딱하나 캐논 변주곡 뿐이었다.
목사님 부인. 그녀. 그녀에겐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머리 큰 아이를 입양하는 것보다 작은 어린아이를 입양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아원에서 나를 자주 본 목사님께서 나를 입양하자고 하셨고, 어린아이를 바랬으면서도 말 않 듣는 나를 꾀나 귀여워 해준 분이였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항상 쌀쌀맞았던 내 도시락 밥 아래 달걀 후라이가 빠지는 날이 없었고, 늘 아침이면 다려져 있던 교복에 친구들은 내 가짜 엄마를 부러워 했다. 그랬던 그녀인데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그녀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이미 목사님이 아프셨을 때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얼마 되지 않아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기고 떠나 버렸다.
“아예 방을 바꾸는 건 어때요?”
“네?”
“이상하게도 난 여기가 편한데.. ”
장난이었는데도 그 옆집 남자는 당황해 하는 모습이 연연했다.
“이름이 뭐에요?”
“내 이름이요?”
“그래요 당신 이름이요. 내가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이름이라도 알아야죠. 난 한지수에요.”
“난 정현재 에요.”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어느새 그가 들어와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케논연주가 끝나고 그를 돌아보니 뒤에 우두커니 서서는 내가 돌아보다 또 어색하게 웃었다.
“당신 조금 이상해 보이는 거 알아요?”
“뭐가요?”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열쇠를. 혹시나 나에게 관심있어요? 그런거에요?”
“관심이 없다면 그러지 않았겠죠.”
“그렇구나. 관심이 있어서 그랬구나. 어쩌려구요? 날 잡아 먹으려구요? 가두어 두고?”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는 입을 가리고 한참을 웃어 버린다. 메고 있던 가방을 침대위에 놓아두고는 그도 침대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덧은 당신이 쳤어요. 처음보는 사람에게 먼저 그런건 한지수씨 당신이라구요. 난 보기 좋게 걸려든거고. 그냥 지금은 당신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조금 감동 받았어요. ”
“난 당신한테 관심 없는데..”
“상관 없어요. 그냥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머릿속으로 한참동안 생각을 하면서도 즐거우니까요.”
“내가 어떤 사람 같은데요?”
“잘 몰라요. 그냥 지금 당신은 좀 엉뚱하기도 하고 화도 잘내는 것 같기도 하고 의심도 많은 것 같고 눈치도 빠르고.. 그리고.. 피아노도 잘치고. 이름은 한지수 라는 것.”
“내가 좋아요?”
태연한척 말하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또 그의 얼굴이 빨개지려고 한다. 으흠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좋다고는 않했어요.”
“아 관심 있다고 했죠?”
“네.. ”
“그게 그거지. 그게 나중에 그렇게 발전 하는 거지 뭐. 그런데 현재씨 나 좋아하지 말아요.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내가 일어나자 이번엔 그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 사람 손을 처음 보았다. 길다랗게 늘어진 손가락. 바르게 잘려진 손톱. 난 참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라고 그의 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그의 뒷머리를 바라보며 아늑할 정도로 감질나는 피아노 소리에 그래 그 피아노 소리에 취해서 그의 어께를 살짝 안아주었다.
차트를 넘기던 의사는 꾀나 시간을 끌었다. 그 말도 없는 무기력한 침묵에 내 심장은 쪼그라드렀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쉽게 말해 백혈병의 일종이에요.
쉽게 말하다니.. 사실상 결혼할 사이라서 부인될 사람이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의사는 결과를 나에게도 말해 주었다.
워낙에 피부가 하얀사람이라 그래서 그냥 피부가 하얀 사람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또한 나는 그 모습에 반해 그를 사랑하게 되었건만.
-그거 고칠 수 있는 건가요?
영화나 드라마. 모든 사람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몹쓸 병 따위 그거 걸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너무 착했고, 밥도 잘 먹었고 운동도 했고 담배도 하지 않았다. 술은 잘 마셨지만 설마 술 때문에.. 그런 바른생활 사나이가 그런 제수도 없이 그런.
의사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부인이나 마찬가지. 그런 내가 불쌍해 보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노력은 해봐야죠.
나쁜사람. 진짜 슬픔이 되어준다더니.
병실에 누워있는 그를 찾아갔다. 눈에선 눈물이 나는데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가만히 두었다면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지만 않았다면 그를 만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또 고통을 맛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난 화가 났다.
병실문을 열었다. 그는 또 나를 보며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의사선생님께 다녀왔어.
그의 표정이 조금 멈칫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 피부가 흰게 아니라 창백한 거 였더라고. 어쩐지 우리 형도 않 그런데 나만 그렇더라고. 곧잘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고. 단순히 빈혈인 줄 알았지. 그래서 운동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따지러 들어온 난 계속 울기만 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픈 사람 앞에 두고 곧 초상이라도 날것처럼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다.
-미안해 지수야.
-...
-사랑하게 만들어 버려서.. 나 같은 거.. 미안해.
-그럼 죽지마..
-지수야..
-죽지마!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듣는다며!
-그래. 그럴게.
정 이란 게 참 무섭다. 사랑 이란 게 참 잔인하듯이. 누군가를 송두리째 가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버린다. 그렇게 또 사랑에 매달리게 되면 희미한 연기처럼 공중에서 분해 되어 서서히 사라져 버리는 건 기억 속 그와의 인연들이 아니라 현실 속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다. 그때 그렇게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 버려 텅텅 비어진 내 속엔 이젠 아무것도 남아있질 못하다. 메일 계속되는 그의 목소리와 다짐. 그리고 환하게 웃던 미소. 자칫 죽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또 다른 말로의 독약이었다. 그라는 해독약이 사라져 버려 치유될 수 없는 중독. 영원히 그와 맞물릴 어긋난 흉터.
“현재씨는 건강한 사람인가요?”
“그럼요. 아주”
“어떻게 증명하죠?”
“난 아픈 데가 없으니까”
“혹시 아무렇지도 않게 있다가 픽픽 쓰러지거나 하지 않아요?”
“전혀요. 아.. 예전에 한번 그런 적은 있는데”
그는 자동차 정비 공장에 다닌다고 했다. 매일 기름 냄새가 났고 매일 땀에 절어 들어왔다. 이상한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점점 더 그의 집에 누워있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낮 동안 그의 집에서 피아노도 치고 냉장고 안을 뒤져 점심거리도 해결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그가 돌아오면 잠깐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일 수였다.
그날은 천둥번개가 치는 날이었다. 처음으로 고양이 소리가 아닌 번개에 놀라 그의 집으로 피신을 갔다. 그는 컴퓨터 앞에서 무얼 하는지 계속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고 난 그의 침대에 누워 그가 하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한번 검사 받아 봐요. 백혈병에 걸린 걸 수도 있어요.”
“난 건강하나니까요”
“그래도 받아 봐요. 나쁠 거 없잖아요.”
“네. 알겠어요. 한지수씨 말씀이라면 뭐든지 들을게요.”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듣는 사람. 참 여러모로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불쌍해 보여서 잘해주는 건가요?”
“뭐가 불쌍한데요?”
“환청 들리는 미친년 같으니까. 냉장고 생선 썩었다고 식음 전폐 한 이상한 년 같으니까”
“관심 가는데 이유 있어요? 난 그냥 당신 캐논변주곡 듣고 감동받아서 그런 건데.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요. 당신이 놓은 덧에 걸린 거라고.”
“두번째에요.”
“네?”
“내가 쳐 놓은 덧에 걸려든 남자. 당신이 두번째라구요.”
“첫번째 남자는..?”
키보드 치던 손길을 멈추고 그는 이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말이 되어 튀어 나와 버렸다. 이상하게도 난 이 정현재 앞에만 서면 말문이 나도 모르게 트여 버린다. 꽁꽁 묶은 말이 토해져 나왔다.
“첫번째 남자는 죽었어요”
-내가 죽으면 지수 니가 얼마나 슬플까.
-하늘만큼 땅만큼.
-그럼 날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는 뜻이야?
-안 죽으면 우주만큼 사랑할 테니까 그런 말은 하지마. 애초부터 당신이 사랑을 슬픔 어쩌구 저쩌구 우울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 기분 나쁘단 말이야.
-정말 니가 좋은데..
-응?
-지수야 난 정말 니가 너무 좋은데.. 좋아서 죽겠는데.. 자꾸만 요즘 들어 자꾸만 열이나고 아파.
그리고 며칠 후 일까. 그는 급성 폐렴으로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처음엔 눈물도 나질 않았다.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이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장례식이 있고 나서 바로 직장을 그만 두었다. 자꾸만 떨리는 손에 마트 안에 있던 그릇과 컵들 하루에도 네 다섯 개씩 떨어뜨려 깨지기 일 수였고, 돈 계산을 잘못해 항의 전화가 온 것도 하루에 두세번씩이었다. 누구하나 나에게 그만두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더 이상 일을 하기엔 무리일 것 같아서였다.
마트를 그만두고 할일 없이 화분에 물을 주고 있을 때였다. 초인종 소리에 나가 보니 그의 어머니께서 와 계셨다.
-아무래도 니꺼 같아서.
그분이 들고 계신 건 작은 목각인형이었다.
언 듯 보면 잘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면 눈도 있는 돌고래 모양 이었다. 선 듯 받아 들지 못하고 멍하게 그 인형만 바라보는 내가 측은했는지 그의 어머니는 나의 손에 그걸 쥐어 주시고는 손을 덧대어 꼬옥 잡아 주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너랑 결혼까지 하고 그랬더라면 안그래도 외로운 너 평생 외롭게 할뻔했잖아.
잠잠했던 심장이 울컥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새 출발 해.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그분이 돌아가고 나서부터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가 만든 인형을 들고는 한참을 목이 메이게.
내 마음을 처음 흔들어 놓았던 사람이었기에 처음으로 슬픔이 당연하다는 것과 사랑이란 것이 행복하다는 것 그렇지만 결코 완벽한 행복이란 없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죽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가 오면 우산을 씌워주고 아프면 같이 아파주는 혼자인 것에 몸서리 처질정도의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어 버린 그 사람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시도 때도 없이 들리던 고양이 울음소리. 그리고 그가 준 인형을 잡고 잠이 들면 이상하게도 멀쩡했던.
아무리 찾아도 돌고래 인형이 보이질 않았다. 정말 어디로 간 것인지. 그래도 다행인건 오랫동안 고질병이었던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 그 옆집 남자 덕택이지만 왠지 이제 더 이상 그 집에 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덧을 놓았느니 어쩼느니. 여러모로 그는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고, 또한 내가 친 덧에 걸려든 것 같다고 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한번 도 딴 생각이란 것 해본 적 없는데 그 옆집 남자 때문에 희죽거리며 혼자 웃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졌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었다.
“이사라도 가야지 원.”
자꾸만 집세를 재촉하는 주인아줌마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또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를 이 지긋한 집 밖으로 끌고 나온 건 그 옆집 남자와 그리고 카랑카랑한 아줌마의 독기어린 목소리. 그리고 그 죽일 놈의 돈. 때문이다.
공부를 다시 시작해볼까도 싶었지만 우선은 돈이 필요했기에 다시 온다면 환영이라고 했다던 일하던 마트를 찾았다. 평일인지라 사람이 그리 붐비지는 않았다. 우선 화장실로 가서 오랜만에 한 화장이 잘 먹었는지 확인을 하는데 붕붕 떠다니는 분가루들 때문에 얼굴마귀할멈 같았다.
‘쓰러질 것 같네.’
입 꼬리를 최대한 늘려 화들짝 웃어 보았다. 너무 세게 웃었는지 입술이 트더지는게 느껴졌다. 피가 살짝 난 것 같지만 붉은 루즈 때문에 보이질 않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웃는데도 울 것 같은 표정이네.’
만약에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면 정말 건강한지 나보다는 오래 살 것인지 그리고 나를 떠나지 않을 것 인지부터 간을 본 다음에 만날 것이라고 다짐했다.
처음부터 없었던 부모님도 죽어버린 내동생도 죽어버린 목사님도.. 그리고 떠나버린 그녀. 그리고 사랑했던 그 사람. 항상 슬픔은 남겨진 내 몫이었다. 그걸 다 머금고서 살아가야 하는 것도 내 몫의 아픔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아플 거라면 아무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빗장을 걸게 만들어 버린 처절한 상처였다.
로션을 꺼내 분가루가 잘 먹게끔 만들고 나서는 다시 톡톡 파우더를 두드렸다. 입술도 다시 그리고.
점장님은 내가 온다면 좋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주부터 출근하기로 약속을 하고선 은하를 찾았다. 슈퍼타이를 들고 웃으면서 대꾸도 없는 사람들에게 홍보를 하고 있던 은하는 나를 보자 들고 있던 슈퍼타이를 그대로 들고는 달려왔다.
“출근하기로 했어?”
“응. 다음주부터 나오래.”
“잘 생각했어. 우리 찜질방이나 가자 다음주에”
“알겠습니다아.”
그렇게 인사를 하고 은하는 눈치를 보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서 나오는데. 어느 단란한 세 가족이. 한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는 카트 안에 타고 있고 중년의 남자는 카트를 밀고 있고, 옆에서 잡고 있던 여자가 손을 올려 웃음을 가리는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멈칫한 그녀는 남자가 왜 그러냐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유유히 내 옆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옆을. 그저 모르는 사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엄마가 되어줄게.
-난 엄마 없어요. 죽었거나. 도망갔거나. 어쨌든 난 엄마 없어요. 그리고 평생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니가 엄마가 있든 없든. 나에겐 지수라는 딸이 생긴 거니까. 아줌만 너무 기뻐.
그녀는 아이를 원했다고 했다. 나보다는 어린 아이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막상 나를 보고 나서는 기뻐했다고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걸 모르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몸 때문이었는지 몸서리 처지도록 아이를 원했고 그녀의 그런 모성을 가시돋힌 나에게 쏟아 부었다. 늘 까칠 하기만한 내가 뭐가 그리 챙겨주고 싶었는지.
그녀의 집에 오고 나서 일년 뒤 내 생일이었다. 고아원에 있을 적엔 생일 같은 거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월별로 날짜를 하루 정해 그달에 생일인 아이들을 위해 생일상을 차려주긴 했지만 그 월별 날짜가 진짜 내 생일날로 잡힌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인지 진짜 내 생일에 차려진 내 생일상에 난 어안이 벙벙했다.
-넌 이제 한살이야.
-무슨 소리에요? 난 열넷인데
-내 딸 한지수가 된지 이제 일년. 그러니까 난 널 한살로 생각할 거야.
-아줌마. 정신 좀 차리세요. 난 아줌마 딸도 아니고 더더구나 한살도 아니라구요. 아줌마가 아무리 그래도 난 영원히 당신을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을거에요.
-그래 해보자. 영원히. 난 니가 날 엄마라고 불러주는 그날을 위해 살께. 한번 해보자구. 내가 널 버리나 니가 날 엄마라고 부르나. 내기할까?
-얼마요?
-십만원빵!
-좋아. 보나마나 내가 이길걸. 아줌마야.
-요게 버릇없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와의 어이없는 내기에 난 한참을 웃었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또 가슴이 저민 건 아니라고 부정을 했으면서도 그녀와의 내기에서 완패를 해버려서 이기 때문이 아닐까.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처음이었다.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설마 설마 했음에도 그녀는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다. 그걸 내 눈으로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유유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곁을 스쳐 갔다. 평생 내 엄마가 되어 줄 거라던 사람이었다. 엄마라는 말이 듣고 싶어 매일매일 도시락에 달걀 후라이를 잊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다니.
“엄마..”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내 입에선 팔자에도 없는 엄마라는 단어들이 튀어 나왔다. 아마도 평생 불러야할 엄마 소리를 토해 내는 듯. 그리고 마른 줄 알았던 눈에서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나를 보고 지수야 라고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바보 같은 사람. 나쁜 사람. 내가 지금 당신을 여기서 이렇게 엄마라고 부르고 있는데도 듣지 못하다니. 말로 되어 나오지는 못했지만 당신이 싸준 도시락을 먹으면서 얼마나 많이 엄마라고 울먹였는데. 나 아닌 다른 아이의 엄마가 되어 그렇게 웃고 있다니.
난 사람들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 같았다. 모두들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리니.
그 남자가 죽고 나서 하나둘씩 모아놓은 알약들은 실상 죽어버리려고 모아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다. 언젠가 한번은 나또한 행복해지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희망에 그저 한줌 쥐었다가 다시 모아 놓기를 여러번이었다. 그런데 그날. 그녀가 철저하게 나를 버려버린 날. 그녀와의 내기에서 내가 먼저 저버렸다는 것을 안 그날. 난 정말 더 이상은 살고 싶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항상 이렇게 두려워하면서도 난 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누구나 다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는 거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정한 듯 굴어서 인지 아무도 내 속에 연약한 눈물들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난 늘 그렇게 강한아이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 진건 말이다.
-넌 가여워. 그래서 내가 슬픔이 뭔지 가르쳐 주고 싶어.
그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철저하게 처절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난 늘 불안해. 겉으론 강한척하면서도 맨날 덜렁거리는거 내 눈엔 다 보여. 그래서 넌 내가 있어야 한다니깐.
교복에 붙은 먼지를 털어주며 툴툴거리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뭐.. 조금은.. 당신은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내 덫에 걸린 두 번째 남자가 말했다.
내가 다시 깨어 난건 삼일만인가. 머리가 깨지듯이 아파왔다. 혹시나 천국일까. 희미하게 보이는 사물들에 난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 아니에요. 병원이에요”
정현재 그 사람이었다. 화병에 꽃을 한가득 꽂아서는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래 이곳은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병원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고 있지만. 여전히 밋밋하게나마 알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그는 꽃 화병을 창가에 가져다 놓고는 그 위에 칙칙이를 이용해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꽃잎에 맺힌 이슬같이 영롱하여라.”
갑자기 무슨. 그는 그대로 누워서는 눈도 다 뜨지 못하고 킥킥대고 웃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내 얼굴이 칙칙이로 물을 뿌린다. 갑작스런 차가움에 눈이 번쩍하고는 뜨여졌다. 놀라움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깨끗해진 시야에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약을 먹고 쓰러져 있던 곳은 내 집이 아니라 그의 집이었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주머니열쇠로 그의 집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누워 약을 먹었다. 다행이라고 하겠지만. 정말 난 몰랐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 그는 내게 전부 다 계획적인 게 아니었냐며 투덜거렸지만 그때의 난 정말 절박했으니까.
“사람은 다 죽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일찍 죽으려고 애를 쓸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나중엔 안 죽으려고 발버둥쳐도 다 죽어 버리게 되니까.”
누워있는 날 일으켜 머리부터 천천히 그가 안아 주었다.
“첫번째 남자가 죽어서 그랬어요?”
“아뇨.”
“그럼 왜요?”
“엄마가 날 버렸거든요.”
“엄마는 자식을 버릴 수 없는데.. 진짜 엄마 맞아요?”
“네. 진짜 엄마에요. 그러니까 죽으려고 했죠.”
진짜 엄마. 일찍 그녀에게 살갑게 엄마라고 불러줬다면 그녀는 차마 나를 두고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갔어도 철저하게 나를 격리시키고 떠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고 그리고 결혼을 인정받았었겠지. 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내가 그걸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와의 내기에서 자신이 졌다고 섣불리 판단하고선 돌아섰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엄마면.. 당신을 버리진 않았을거에요. 버린 척 했을지는 몰라도.”
“버린 척?”
“왜 살면서 그런 척 안 그런 척 해야 할 때가 많잖아요. 당신이 죽지 않으면 언젠간 다시 돌아올 거라구요. ”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
동생이 입원했던 병실에 고아원 근처에서 자란 장미꽃을 꺽어 화병에 놓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병실에 꽃은 안된다며 가로막던 간호사의 말에 할수 없이 버리고 왔었다. 그래서 인지 지금 난 병실에 있는 꽃이 조금 어색하기만 했다.
“검사 받아봤어요?”
“무슨 검사요?”
“내가 건강검진 한번 받아 보라고 했잖아요. 백혈병일지도 모른다고”
“아.. 그거.. 아직 안 했는데. 그런데 난 정말 건강하다니까요.”
“난 나보다 일찍 죽을 것 같은 사람이랑은 다신 안 만나요. 건강진단서 때고 확실히 난 건강한 사람이다 라고 증명할 수 있는 사람. 점집에 가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거라고 점꾀 나온 사람. 그리고 영원히 나 안 떠날 사람. 이렇게 보증된 사람만 만날거라구요.”
조금은 숨이 차올랐다. 머릿속이 아직은 깨끗하지 못해서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 몽롱하고 졸리기만 해서 뭐라고 지껄였는지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눈은 또 명료해서 그의 오만가지 이상한 표정을 캐치할 수는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나도 내 말을 잘 모르겠는데. 약간은 바보처럼 보이는 그 사람이 내 말을 잘 이해했을까.
“난 덫을 놓은 적 없어요. 난 그냥 도움이 필요했을 뿐이었어요. 덫은 현재씨가 놓았어요. 당신이 놓은 열쇠 덕분에 난 이것저것 얻은 것이 많네요.”
“날 받아 드리겠다는 뜻 입니까?”
“난 솔직히 말해서 너무 외로워요. 늘 외롭다고 말하고 다니는데 그걸 알아듣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아니 있긴 했는데 다 죽어버리거나 떠나 버리거나. 근데 현재씨가 준 열쇠 때문에 내가 좀 덜 외로워 졌어요.”
살아있다면 언젠간 다시 돌아올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녀에게 엄마라고 불러줄 것이라고 다짐한다.
살아있다면 반드시 밤엔 꿈을 꿀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꿈속에 목사님께서 나오신다면 아빠라고 불러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꿈속에 그 사람이 나온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훨씬 더 많이 오랫동안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겠다.
‘현실에 충실하세요.’ 라고 그는 다시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난.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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