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아홉과 비상
- 작성일 2007-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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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과 비상.
나는 눈을 떴다. 시계는 어설프게 6시를 그리고 있다. 6시가 되려면 아직 10분이 남아있다. 10분의 공백. 나는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눈에는 아직 졸음이 남아있다. 무엇을 하며 이 기대하지 않은 여백을 채워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오늘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나도 참. 여느 때처럼 마땅한 계획도 마땅한 일정도 없다. 그냥 그려보는 거다. 시간이 남으니까. 손가락으로 시간을 재본다. 6시까지 8분정도 남아있으니까 약 8분 후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운동을 좀 한 다음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어야지. 아침은 김치 장조림을 반찬으로 하고. 참, 생각해보니 어제도 그제도 같은 반찬이어서 새삼 반찬을 정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8시 반부터 글을 써야지. 마음이 찌릿하다. '글‘을 써야지 이 생각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오늘은 해낼지도 모르지. 그 벅참을 써낼지도 모르지. 아무튼 햇살이 맑다.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는 파란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창가를 지나 내 이부자리 위까지 건너온 햇빛까지. 아침 운동하기엔 정말 좋은 날씨다.
시계는 요란스레 울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갰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집밖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운동을 산책로를 걸으면서 나는 불현듯 어제의 꿈을 생각해냈다. 꿈의 꿈. 나는 꿈속에 서있었다. 그게 어디였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꿈’과 같이 서있었다. 형태도 모양도 색깔도 없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아팠고 저렸으면서 동시에 벅찼다. 그 무언가가 내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몇 개월의 사이를 두고 꿈은 차차 변했다. 그 무언가는 조금씩 조금씩 뱃속에서 꿈틀거리더니 내 몸을 빠져나갔다. 그것은 꿈속의 일이었음에도 나는 내장기관 중 하나가 밖으로 튀어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그 이후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화가 일었다. 매일 밤마다 꿈은 계속 됬는데 처음에는 몸 밖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 것은 어느샌가 저 먼 언덕위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한번도 뻗은 적은 없다. 꿈속의 나는 결코 현실의 나를 배반하지 않는거다. 현실속의 나처럼 꿈속의 나도 용기없는 겁쟁이다. 그 한뼘을 뻗지 못하고 날려버렸다. 하지만 나의 모든 예상을 멋지게 뒤엎고 그게 꿈이 아닐 수 도 있잖아? 나는 내게 반박해봤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 가라앉았다.
샤워를 하고 아침상을 차렸다. 상이라고 할 것도 없다. 반찬은 장조림과 김치가 전부. 밥도 어제 먹다만 딱딱히 식은 찬밥. 예전에는 이런 반찬은 줘도 안 먹었다. 나는 한 반에 딱 한 명 있을까 말까한 손에 물 몇 번 안 묻혀보고 곱게 자란 그런 부류의 아이였다. 나는 밥을 할 줄 몰랐고 사과를 깍는 법도 몰랐다. 그런 주제에 편식은 심해서 어제랑 똑같은 반찬을 주면 그 날은 젓가락도 들지 않았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식사를 챙겨주지 못하고 밥을 사먹으라고 돈을 주고 가도 전화기를 들지 않았다. 시켜서 먹는 음식은 입에 잘 안 맞으니까. 이유는 그게 다였다. 그렇게 까탈스러운 나였는데 지금은 식은 밥도 곱게 곱게 먹고 있다. 다 없으면 먹게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이 곳에 와서 실감했다. 식은 찬밥을 힘들게 한 덩이 떼어내서 입으로 넣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고요함만이 존재하던 공간에 요란스러운 전화벨 소리는 이질적이고 거북스럽다.
여보세요. 오랜만에 성대를 울려 목을 타고 올라오는 목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이 이질적이다. 이상하다. 딸. 엄마야. 엄마의 전화였다. 엄마가 전화를 하면 긴장을 하게 된다. 등에는 잔소름이 돋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전화는 반갑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너무 예뻐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질투도 하나의 이유였다. 음,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엄마는 눈도 정말 크고 코도 정말 높고 얼굴도 조막만하고 몸통도 아담한데 나는 눈도 작고 코도 낮고 얼굴 살도 정말 많아서 이렇게 밖에 못 낳아준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했고 같이 나가면 ‘엄마가 정말 예쁘시네’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묘한 열등감을 느꼈다. 원래 여자는 예쁜 여자를 질투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거리감이다. 나는 큰 딸이다. 큰 딸. 지겨운 짐이다. 엄마 뱃속에서 내가 ‘먼저 태어나고 싶어요 엄마 제발 먼저 내보내주세요 부탁이에요’ 이런 것도 아닌데 엄마는 나에게 어린 나에게 너무나 많은 기대를 걸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엄마의 눈에서 거리감과 부담감을 느꼈다. 엄마 있잖아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ㅡ 이런 일을 얘기 할 그런 사이는 못되었다. 엄마를 너무 좋아해서 항상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는 친구들을 보면 이해가 안갔다. 엄마 좀 없으면 어때. 뭐가 달라지니. 그런데 지금 연락이 오는 사람은 고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친구 2명과 중학교 친구 2명. 그리고 엄마 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연락이 잦은 사람은 엄마였다. 나는 그것이 종종 슬퍼지곤 했다. 지독한 혈연. 정말 진득한 인연이다 혈연이라는 것은.
뭐 어찌됐든 좋다. 나는 지금 이 생활에 만족하고 지금 나에게 만족한다. 잘 지내. 엄마는 잘 지내? 나는 엄마랑 전화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아서 되도록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 잘 지낸다. 다들. 너도 잘 지내고? 네. 잘 지내요. 저기. 큰 딸. 이제 그런 생활 그만하고 그냥 돌아와. 일 년 공부해서 검정고시 보고 그 다음해에 수능 준비해서 대학 가자. 됐어요. 생각 없어요. 나는 일부러 매정하게 말했다. 그럼 그렇지. 한달에 한번 꼴로 이렇게 엄마는 내 발목을 잡았다. 사실은 엄마가 아니라 우리 가족 전부 일지도 모른다. 우리 가족들 중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단언한다. 아무도 없다. 내게 거신 기대가 컸던 아빠는 ‘됐다 이제 다시는 널 딸로 보지 않으마’로 나를 아빠의 마음에서 정리 해고시켰고 동생들은 자퇴한 큰 언니를 부끄러워했다. 가족 모두들 내가 돌아오길 바라는 걸 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돌아갈 수 없다. 가족들 중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하긴 책도 일년에 한번 읽으면 많이 읽는 사람들인데. 그럼 어떻게 할껀데!!!! 니가 얘야? 너 이제 열 아홉살이야. 내년이면 스물이고 남들 다 대학 가는데 넌 안갈 거야? 아우 내가 정말 속이 터져서. 저런 걸 두고 큰 딸이라고 남들은 다 하는 공부 너는 왜 안하는 건데? 엄마의 말은 청산유수로 터져 흐른다. 이대로 가다간 엄마의 목소리로 귀가 터질 것 같아서 나는 전화 코드를 뽑았다.
학생이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나의 운명과 나의 꿈’을 위해 자퇴서를 내기 전에 남들처럼 똑같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야간 자율 학습하는 생활을 했을 때 나는 그래도 꽤 괜찮은 학생이었다. 친구들과의 대인관계도 좋았고 선생님에게는 성실한 학생으로 불렸다. 상도 곧 잘 탔었다. 나는 18살의 중간 그러니까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며칠 전인 6월 20일 날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아빠 엄마 모두 내게 졌다. 엄마는 울었고 아빠는 때렸다. 아빠에게 뺨을 맞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닥 놀라진 않았다. 아빠가 날 때리는 건 당연하게 여겨졌다. 아빠는 내게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전교 등수 5개의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 모의고사 성적이 470을 넘는 , 적어도 한달에 한 번씩 상을 타오는 딸이 아빠의 술 안주 자랑거리였다는 걸 나는 잘 알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아빠의 눈을 잊을 수 없다. 아빠는 울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렴 제발. 아빠의 눈을 가득 채운 그 , 그 액체. 곧이라도 뚝 떨어질 것 같았던 그 것들. 나는 정말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다. 자퇴서를 냈을 때 모든 선생님들이 왜 이런 결정을 했니라고 물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글을 쓰고 싶어서요.”
그 순간부터 옛 담임선생님이 된 그 늙은 할아버지 선생님은 자퇴서를 책상에 올려놓으며 내게 말했다. 미친년이라고.
흥. 나는 그 모든 상황에 게의치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사람마음은 사람마음대로 되는게 아니어서 마음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엄마니까 이해해줄줄 알았어. 나는 왠지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엄마가 반응이 궁금해서 이기도 하고 정말 내 진심이기도 해서. 눈물이 찔끔 나려는 걸 참고 창밖을 바라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툭 툭 툭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괜시리 반갑다. 이제는 글을 써야겠다. 나는 책상으로 향했다.
심호흡을 크게 해본다. 내가 완성한 글을 읽어보는 것은 한두 번 일이 아니지만 매 번 떨린다. 이것도 아니야. 마음에는 실망감이 스민다. 정말 열심히 쓴건데. 이것도 아니야 라고 내게 평가당한 그 순간에 나의 어제의 노력은 하나의 원고지 꾸러미로 변해있었다. 마음이 애틋했다. 내가 정성스럽게 원고지 위에 새긴 글씨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책상 아래에서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 에는 원고지가 많이 쌓여있었다. 버려진 글들을 모아놓는 상자. 모두 부족하고 어설픈 것들이지만 나는 이 것들을 버릴 수 없다. 뭐였더라. 어떤 소설이었는데 자신의 예술의 완성을 자신의 모자란 작품들을 다 태움으로써 이뤘다는 그런 흔한 예술 소설 이었는데 나는 그 글의 주인공에게 묻고 싶었다. 마음이 애잔하지 않아요? 이렇게 안쓰러운 것들을 어떻게 태울 생각을 하죠? 작가에게 작품은 하나의 ‘아이’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그런 다 태우나요? 뭐 이런 식으로. 상자안의 원고지들을 한번 쓸어본다. 그 모자란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 속 깊이.
새 원고지를 꺼내고 펜을 집는다. 오래 전부터 생각한 이야기를 적으려고 한다.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인데 잘 보면 다 우리 엄마와 나의 이야기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난 엄마에게 쌓인 게 너무 많아서 언젠가 나의 글로써 엄마에게 복수하고 멋지게 글로써 엄마를 어른스럽게 용서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 일을 완성시키는 날인 것이다.
정신이 팟하고 돌아온다. 나는 어느 순간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글을 신비했다. 아니,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신비하다. 처음 몇 문장을 쓰느라 고민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어느 순간부터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한 참후에 내가 글을 완성시킨 것을 알게 된다. 정신이 반 이상 나가 있는 듯한 기분이다. 후아. 다시 심호흡을 한 번해본다. 원고지의 첫 글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어색하고 서투르다. 이번 것은 무겁기 까지 하다. 용서를 쓰고 싶었는데 오히려 분노만 배로 커진 기분이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노력해도 안 되나. 마음이 울먹 울먹하다. 나는 다시 그 상자를 꺼내 글을 넣어둔다. 다시금 애잔한 마음이 든다. 안녕 안녕. 나의 49번째 단편 ‘어머니와 나’가 쓰여진 원고지여 안녕. 다시 태어나면 나보다 훨씬 나은 이의 펜에 쓰여지기를.
시계를 바라보니 1시를 살짝 넘겼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하나 꺼낸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전화기 코드가 뽑혀있는 모양새가 안쓰러워 제자리에 꽂았다. 꽂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하루에 전화가 두 번이라 흔치 않은 일이다. 여보세요. 나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울린다. 여보세요. 누구의 목소리인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엄마의 목소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나는 내심 안심했다. 나야 나. 7개월 만에 듣는 친구의 목소리였다. 반가움과 낯설음이 교차했다. 지금 친구는 고등학교 3학생. 고쓰리이며 쓰리고. 인생을 쓰리게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고쓰리. 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나는 내심 두려웠다. 나에게도 곧 수험생이라는 존재가 다가온다는 것에. 하지만 내게 고3의 생활은 없었다. 고 2이후로 내게 고등학교는 없었다. 응.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잘 지내지? 그건 오히려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다. 응 잘 지내. 넌 잘 지내? 성적은 잘 나오고? 고쓰리한테 성적은 물어보는 게 아니거든. 친구는 전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고 있었다. 근데 있잖아. 아직도 상 탄거 없지? 친구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나는 멈칫했다. 어? 아직도 없어. 나는 그 후로 친구의 목소리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도 글 쓰니? 그냥 포기해라. 친구는 내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친구와의 전화를 마치고 나는 커피를 마시려고 작은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컵에 물을 따르고 인스턴트 커피가루를 붓는다. 커피향이 좋다. 나는 차가운 방바닥에 앉아 비가 오는 창 밖을 바라본다. 나는 어디쯤일까. 나는 묻고 싶었다 나에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 뜨거. 아무도 없는 빈 집에 퍼지는 나의 목소리는 가을비처럼 싸늘하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겠지. 만약 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지금쯤 모의고사 성적은 얼마나 나왔을까. 소설가 대신 다른 어떤 꿈을 갖게 되었을까. 의미없는 물음이다. 나는 학교를 때려치운 대한민국의 자퇴생이 된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중졸이다. 엄마가 애타하는 것도 동생들이 나를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해한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해답은 없을까. 학교를 다닐 땐 계속 글이 쓰고 싶었다. 손이 근질거렸고 항상 머릿속엔 그 무언가가 떠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내 꿈은 하나였다. 글을 쓰는 것. 글을 써야 한다는 그 것. 숙명이었고 나의 운명이었다. 나의 운명을 온 몸으로 수용한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정말 제 운명은 글을 쓰는 게 맞나요. 이렇게 계속 써대도 그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요. 글을 아무리 써도 글쟁이의 자질은 보이질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신이 내 앞에 ‘인생 예정표’를 그려줬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꿈꿀 수 없게. 꿈꾸는 그 근본을 잘라버릴 수 있게.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한권 꺼낸다. 병신과 머저리. 한국 문학 50선이라는 세트집의 제목은 병신과 머저리라는 제목 위에 적혀있다. 붉은 색으로 온통 칠해진 세트집의 책들은 촌스러움을 한껏 과시한다. 중학생들을 위한, 언어영역 점수를 위한 책들을 싸그리 모아 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책을 펴서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간다. ‘나의 아픔은 어디서 온 것인가. 혜인의 말처럼 형은 6.25의 전상자(戰傷者)이지만,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 지금 나는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것인가’ 동생은 말하고 있다. 이번이 딱 10번째 일 것이다. 읽어도 읽어도 어려운 책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구역질나는 책이기도 하다. 어려운 문체와 어려운 내용. 이런 책을 애들을 읽으라고 이런 세트집에 모아놓다니 우습지도 않다. 전후의 아픔을 그린 소설이지만 전후의 아픔은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그려진 것은 오직 패배감과 무력감뿐이다. 좀 더 솔직히 까자면 그냥 어려운 말만 내리 적어놓은 것 같다. 대중과 멀다. 나는 이 사람이 쓴 책들이 왜 문학 교과서에 올라오는 지를 모르겠다. 주구장창 어려운 말들 뿐이다. 그리고 결말도 없다. 흐리멍텅하게 끝난다. 병신과 머저리는 정말 병신과 머저리같은 소설이다. 내가 전후의 아픔을 몰라서 그런걸까. 내가 모자라서? 나는 묻고 싶다. 이청준에게. 당신의 시대정신과 당신의 글들은 너무 어렵습니다. 제가 모자란 건가요?하고. 그래도 나는 그가 부럽다. 그는 그의 글로써 밥벌어먹고 살았고 그의 글 하나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니까.
읽다가 짜증이 일어서 휙 던졌다. 시대 정신 시대 정신. 나는 시대 정신이라는 말을 모르겠다. 소설은 시대를 읽어야 한다. 우리 나라가 가진 보배, 우리 시대가 낳은 대 작가인 ‘황석영’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뭐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게 없으면 진정한 글이 아니라고 하는데 도대체 뭐가 진정한 글이 아닌걸까. 차라리 나는 진정한 글을 택하라고 한다면 ‘재미있는 글’을 택하겠다. 지적인 즐거움을 주는 글들. 시대 정신을 읊으면서 어렵고 딱딱한 문체로 대중을 누르는 글들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그 무궁무진한 환상력을 그린 ‘파피용’쪽을 택하겠다.
모두 나의 판단이겠지만.
언젠가 한번 용기를 내 글을 읽어달라고 어떤 선생님께 부탁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감상적이고 확실하지 않으며 내용이 없다. 나의 글들은 이렇게 종합됐다. '시대 정신과 문제 의식이 필요하구나' 선생님의 딱딱한 목소리였다. 선생님. 이런 스타일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스타일이거든요. 나의 목소리는 가늘었고 미세하게 떨렸었다. 어렴풋이 화가 났었던 것도 같다. 이런 작가들은 오래 못가. 삼류야. 너무 감성적이잖아. 시대를 읽어내지도 못했고 더구나 문제 의식도 없어. 이제 끝났어. 거의 다 끝난 삼류 작가들이야. 그는 내가 닮고 싶어했던 작가들을 모두 '삼류'로 평가했다. 마지막 말은 거의 압권이었다. '여자들 글 쓰는 건 다 똑같지. 하나같이 다 감성적이고 내용도 없고' 나의 글에 대한 평가보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들에 대한 평가가 나를 더 짓눌렀다.
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다음 수업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했다. 시대정신과 감성. 시대정신과 재미. 문제의식과 시대정신. 시대 정신과 문제 의식으로 파묻힌 남자들의 남자들에 의한 남자들을 위한 글들은 엿이나 먹어라. 어려운 말들로 가득찬 사회를 아프게 꼬지는 글보다는 읽는 이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글이 낫지 않나요. 나는 내내 이 말이 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엄숙함을 이야기하고 계셨던걸까. 소설이 가져야 할 엄숙함? 남자들의 글은 사회를 잘 그리고 좋은 소설이다. 선생님은 이 말이 하고 싶으셨던 걸까. 상상력은 사라지고 사회를 비판하고 꼬집는 날카로운 이야기들을 나는 써야할까. 오래 기억되고 싶은 작가가 되고 싶다면 그래야 할까. 하지만 풀 오스터도, 파엘료 코엘료도, 정이현도 모두 모두 사회를 꼬집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 칭찬을 받으며 멋지게 기억된다. 풀 오스터는 지금도 미국의 거장으로 불리고 파울로 코엘료는 신비함으로 가득 찬 글로 용기와 새로운 시작을 이끈다. 정이현? 정이현은 지금까지 낸 책 3권의 인쇄비로도 평생 즐겁게 먹고 살 정돈데. 아아, 나는 지금도 그 해답을 모르겠다. 아직도 진짜 좋은 글의 기준을 알 수 없다. 그래, 아마도 평생 모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나는 시대 정신과 재미를 모두 어우를 재능은 없어서 뒷걸음질 치는 건지도 모른다. 음. 그래 아마 이게 제일 확실한 사실인 듯하다. 마음이 저리다.
나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 밖은 이제 보랏빛이다. 밤이 나의 집을 어설프게 뒤덮었다. 빗방울은 보이지 않지만 빗소리는 자욱하다. 천재들의 글은 다른걸까. 차갑게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프랑스의 천재로 불리우는 아멜리 노통브의 글 역시 내겐 최악이다. 하지만 그녀는 천재로 불리고 나는 한낱 자퇴생으로 불린다. 나는 재능이 없는걸까. 재능 재능 재능 재능. 나는 언제쯤 진짜 ‘글’을 적을 수 있는걸까. 누군가를 잡고 물어보고 싶다. 할 수 있다면 나는 자퇴서를 낸 그 시점으로 돌아가 자퇴서를 내밀지 않고 교실로 돌아가고 싶다. 지금의 나는 이렇다. 만족하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글을 쓰지만 글을 쓰지 못한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나는 재능이 없다. 나는 진짜 작가가 아니다. 나는 아마도 진짜 작가는 못될 것이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던 그 ‘독자’가 내가 아니었을까. 차게 식은 커피는 맛이 없다. 나는 이제 울음을 참을 만큼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내 길을 모르는 걸까. 어디쯤에서 나는 내꿈을 마주칠까. 빈 집에서 홀로 터뜨리는 울음은 외롭고 추하다. 나는 아직 열아홉. 열아홉의 마음은 곪는다. 곪아 터져 문드러진 그 상처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날개’의 남자 주이공처럼 비상을 꿈꿔야할까. 아니면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의 오영수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이를 먹어가야할까.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 별이 멀 듯 내 꿈도 멀다. 사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 꿈이 글을 쓰는 게 맞는 지도 의문이다. 누군가 내게 해답을 던져줬으면 좋겠어. 기나긴 울음은 너무나 아프다.
나는 빗속에서 서있다. 꿈은 나를 바라보더니 팔랑 거리며 날개짓한다. 꿈으로부터 파란 빛이 보인다. 팔랑거리는 날개짓에서 꿈의 가루가 어슴프레 빗속을 적신다. 지독한 환상이다. 꿈이 날아갈까봐 나는 조바심이 난다. 손을 내밀어볼까. 검은 밤이 파란 가루로 드문 드문 밝아진다. 나는 어설프게 손을 들어본다. 팔이 천근만근 무겁다. 꿈이 날아갈까. 손을 내밀었다. 꿈이 나를 마주한다. 나는 한번도 웃어본 적 없었던 것처럼 웃는다. 그리고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던 것처럼 운다. 지독한 환상이다. 지독히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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