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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예뻤다

  • 작성일 2007-10-03
  • 조회수 2,155

                                                     * 

 

  197만원이면 된다니 얼마나 쉬운 일인가. 여자는 보라색마스카라를 이용해서 눈썹을 밀어 올리며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핑크색 볼 터치로 창백한 얼굴에 포인트를 주며 눈 꼬릴 살짝 올려본다. 역시 핑크계열 립스틱으로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고는 립크로스로 윤기를 더해준다. 투명한 입술이 거울 안에서 열대 과일처럼 대롱거린다. 여자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빈약한 가슴을 커버하기 위해 실리콘이 들어 있는 부드러운 뽕을 브레지어 안쪽에 정성스럽게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오랜지색 새틴프릴 원피스로 한껏 멋을 낸 몸매를 거울 앞에서 쉴 새 없이 돌아본다. 여자의 콧노래가 한톤 더 높아진다. 

  막 방문을 빠져 나가려는 여자는 벽을 바라본다. 여자가 색연필로 표시해놓은 날들을 은근히 들여다본다. 하버드! 여자는 입안에서 계속 중얼거리며 굳은 결의를 다지는 표정이 역력하다. 여자의 움직임은 마치도 무성영화에서 가볍게 떠다니는 찰리체플린을 연상시킨다. 여자는 약속시간이 아직도 멀었음을 상기하며 숄더백에서 통장을 꺼내본다. 통장의 초록색 덮개를 열자 검은 도트로 돈이 빠지고 들어온 숫자들이 정열 되어 있다. 2004.5.9. 197만원이 빠져 나갔다. 여자는 그 백구십칠만의 사람을 지금 만나러 가는 것이다. 이것이 여자의 사랑법이다.  

  신문을 뒤척이던 나는 조그만 박스기사에서 여자의 이혼소식을 보았다. 다분히 사회적인 이슈가 될만한 이혼이었다. 그녀의 이혼 소식을 보며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보다도 먼저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랑이란 단어와 더불어 떠오르는 사람은 그녀와 또 한 사람 나의고모다.

  2004년 여자는 하버드 의대를 졸업했다는 재미교포 출신인 닥터 김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여자가 시집 쪽에 예단으로 건넨 현금만 무려 3억이었다. 물론 더 줄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서초 동에 아파트를 구입하고 차를 사는 것으로 선을 마무리했다. 여자의 결혼 생활은 깔끔했다. 먼지하나 앉을 틈 없이 치우는 도우미아줌마의 솜씨였다. 그녀의 성격도 깔끔해서 남편에게 조그마한 헛점도 보여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사랑으로 만난 결혼이 아니고 보니 더욱 몸가짐이 조심스러웠다. 그렇다한들 여자에겐 힘든 일상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나 사랑에 울고 사랑만으로 결혼 한다지만 여자는 이미 그런 시기를 넘긴 나이였다. 그래서 그의 조건을 물건 고르듯 철저하게 분석하고 따진 것이다.

  족히 50여 번이 넘는 맞선 자리에서 예의상 흘린 미소에도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끈덕진 순수파 남자가 있었다. 여자는 이마에 심하게 굴곡진 주름살을 그으며 그를 외면했다. 지방대를 졸업해서 어렵사리 국내 대기업에 다니는 남자였다. 게다가 홀어머니의 외아들. 여자는 남자의 조건만이 모니터 위를 빠르게 기어 올라가는 증시현황판처럼 그려질 뿐 추호의 여지도 없이 자신을 방어했다. 결혼 정보회사인 예원의 담당 서대리에게 슬쩍 찔러준 돈이 효과를 발휘한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대리는 하버드대 출신인 남편을 소개한 것이다. 모든 것이 간편해지는 세상 얼마 안 되는 월급쟁이 아내로 지지고 볶으며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랑은 살면서 만들면 되는 거야. 여자는 입버릇처럼 혼자 주문을 외곤 했다.

  하지만 여자의 사랑은 역사를 만들지 못했고 모래 위에 올린 성처럼 쉽게 무너졌다. 단지 남자가 하버드대 출신이 아닌 미국 동부 어느 주립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므로 써. 잠시의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여자는 움켜쥔 모 주립대 국제우편을 꾸기며 트렁크에 짐을 챙겼다. 짐을 싼다기 보다는 성을 부수는 일었다. 너무나 한순간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모든 것은 과학적이어야 했다. 정밀해야했다. 적어도 거짓은 없어야했다. 예원 쪽에도 소송을 걸 것이다. 하버드대 출신에 한해서 한번 맞선에 197만원을 지불한 것이지 하버드 의대에서 잠시 수련을 한 적이 있다는 주립대 출신의 남자를 만나기 위해 지불한 돈이 아니지 않은가. 승소는 자명한 일이다. 아이가 없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여자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이것이 내가 아는 여자의 이혼에 얽힌 짧은 사연이었다. 신문에는 가십거리 수준으로 여자의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기사는 분명 현대인에게 발목을 잡고 질문을 건네는 기사였다.

 

  모 음악학원을 운영하는 L모씨는 결혼정보회사에서 하버드대 출신이라고 남편 K씨를 소개받아 결혼했다. 결혼 후 알고 보니 하버드대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수련의라는 사실이 밝혀져 이혼 신청을 한 상태다. 결혼정보회사에도 곧 손해배상을 청구할 할 것이라고 한다.

 

  여자의 이름이 정확히 기입되지 않고 L모씨라고 나왔지만 그녀의 이혼 소식임을 나는 금방 직감했다. 예원의 서 대리는 나였으므로. 여자의 사연이 담긴 박스 기사를 읽고 난 내 머릿속엔 고모의 추억이 간절했다. 그것은 이제는 추억이란 보석 같은 개념으로 상기해 날수 있는 일들이 됐지만 그땐 정말 곤혹스러운 유년의 악몽 비슷한 것이었다. 물론 그 악몽을 통해 나는 사랑이란 단어의 신비한 빛깔을 고모란 모습으로 관통하게 되지만 말이다. 이것 한 가지만큼은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고모는 사랑을 했다고.

                               *

  고모는 보라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고 있었다. 보라색 스커트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 반바지였었다. 고모가 반바지를 뜯어내더니 재봉틀 앞에 앉았다. 그리곤 드르륵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반바지는 금세 미니스커트로 둔갑했다. 유난히 살이 뽀얀 고모의 오동토안 허벅지가 햇살에 넘실거렸고 고모는 잰 걸음으로 읍내로 향하고 있었다.

  “고모 어디 가는 겨?”

  “응, 삼촌네 청소해주러.”

  “작은 엄마는 어쩌고 우리가 청소하는 겨?”

  “작은 엄마는 .... 그럴 일이 있어.”

  읍네 한씨네 문간방에 신접살림을 차린 작은 아버지는 신혼임에도 자주 부부싸움을 했고 싸움의 부피가 치열한 날은 작은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럴 때면 고모는 작은 집에 가서 청소를 해주고 부엌살림을 돌봐주곤 했다. 내 작은 키로 인해 시선이 고모한테 돌아갈 때 마다 고모의 엉덩이가 보였다. 고개를 높이 들면 쌍갈래로 땋은 고모의 머릿결에서 윤기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얼굴로는 꼭 다문 얇은 입술과 그 위로 오뚝한 콧날과 쌍까풀이 없어도 예쁜 반달 같은 눈이 보이기도 했다. 고모는 예뻤다. 어린 아이가 어떤 잣대로 그녀를 예쁘다고 했을까 의문도 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영락없이 홍콩배우 공리를 닮았다. 우윳빛 살결과 침착한 태도와 단아한 얼굴의 느낌이 온통 그녀를 빼 닮은 듯 하다.

  장이모우 감독의 작품인<붉은 수수밭>이란 영화를 봤을 때 난 공리와 고모의 얼굴이 사뭇 겹쳐지는 것을 느낀 기억이 있다. 중일전쟁 당시의 중국 산시성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스크린 안에선 빛을 발한 공리였다. 꽃이 저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듯 고모란 꽃은 고등학생임에도 피어올라 아가씨 티가 완연했다.

 “문순아! 문댕아!”

 “너 거기 안서. 주것써.”

  삼촌과 오빠가 장난을 치면 고모는 꼭 화난 투우 같았다. 삼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큰 키로 잔뜩 성이 나서 앞 뒤꼍을 뛰어 다니며 삼촌을 몰고 다니곤 했다. 다급해진 삼촌은 안방 뒷문을 와장창 열고 앞문으로 신발도 신지 않은 흙투성이 발로 내 다름 치곤 하였다. 잡히지는 않고 계속 해서 놀리는 삼촌. 고모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들고 있던 빗자루를 안방에 앉아 있는 내 머리 너머로 집어 던졌다. 하지만 앞마당에서 혀를 쭉 내밀고 손가락까지 쫙 편 체 볼에 엄지를 비비며 놀리는 삼촌을 맞추기에는 어림도 없는 던지기 실력이었다. 고모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저렇게 이쁜 고모를 단지 문순이란 이름에서 가운데 자만 끌어다 ‘문댕이’라고 놀리니 화가 날 법도 했다. 그렇게 털털한 성격의 고모였지만 고등하교 이학년 무렵부터 부쩍 말이 없어졌다. 그 무렵 여고 상업과에 다니는 고모가 학교와 부기 학원을 오가려면 너무 늦은 시간이라 밤길이 위험하다며 할머니는 서둘러서 자취집을 잡아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 화근이 되고 말았다.

  “영아란 년이요. 성님 영아가 말 여유.”

  할머니는 입에서 꽃게처럼 거품을 물고는 한 여자의 이름을 악에 받쳐서 부르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기 전 고모는 밤에만 볼 수 있었다. 학교가 파하고 돈이 필요하다며 저녁 무렵 집에 오곤 했는데 돈만 주면 아무리 깊은 밤에도 자취집으로 돌아간다고 걸음을 서두르곤 하였다.

  “일곱 모퉁이 돌아가는 길 무서워서 어떻게 갈 겨?”

  “그냥 가면 돼 그러니까 돈 좀 일찍 주지.”

  식구들은 고모가 대문을 열고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것을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들 농사일 일에 지쳤고 굳이 데려다 주지 않아도 된다는데 고모를 따라 나설 어떤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일곱 모퉁이 길가에 펼쳐진 공동묘지를 생각하면 오금이 절였다. 일곱 모퉁이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었다. 한번은 근처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가 밤늦게 택시를 타고 오다 기사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고 하기도 했고. 우시장에 다니는 할아버지를 노리는 강도가 있을 법한 곳이어서 아버지가 아무리 늦은 밤에도 장날은 꼭 마중을 나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줄지어 사열하듯 반원을 그리고 있는 공동묘지는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 지게 하는 곳이다. 언젠가 아버지는 밤길에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런 말의 뜻을 이해하기엔 나는 어린 나이였다. 그런 곳을 고모는 혼자 가겠다고 한다. 고모는 용감했다. 어떻게 그 밤에 혼자서 그 산 옆 길, 공동묘지 옆을 지나 시내로 간단 말인가, 정말이지 고모는 용감했다.

  고모가 돈을 가지러 오는 일은 잦아 졌고 그 즈음 소파동이 나서 우시장 거간이던 할아버지의 사업이 쇠락하고 있었다. 집 안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어서 돈을 장만해 놓지 않으면 뜰 방에 다리를 쭉 뻗고 울기도 했는데 그런 고집스런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얼마 자나지 않아서 고모가 그토록 자주 돈이 필요했던 이유가 학원비 때문만도 학교에서 필요한 도서나 문구류를 사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들통이 나고 말았다.

  내가 왜 그 곳을 따라 나선 걸까. 아니면 할머니의 말이 너무도 실감나서 내가 봤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논산시내 대교 동 다리 옆 고모의 자취방 문을 활짝 열어 저친 할머니는 입김만 세게 불고 있었다. 굳어 버린 듯 서 있는 할머니 앞에 펼쳐진 방을 살며시 들여다봤다. 고모의 자취방이라는데 핑크색 커튼이 한가운데 빨랫줄을 이용해서 쳐져 있고 이불은 방바닥에 깔린 상태 그대로였다. 고모는 어디에도 없었고 방 옆에 딸린 부엌살림이며 방안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살림들은 신혼 방 그것이었다. 고모는 분명 혼자서 자취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여자 친구와 자취하고 있는 고모 방에 남자 속옷이 널려 있던 걸까. 그날 이후 고모는 집으로 급히 짐을 챙겨 할머니 손에 끌려왔고 할머니는 분을 참지 못하고 고모의 머리채를 흔들었다. 그래도 학교는 보냈다. 고모가 학교에 가고 나면 할머니는 다리를 쪽 펴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다가 내가 학교에 갔다 오거나 옆집에 사는 큰 할머니가 놀러오면 넋두리를 시작하곤 하였다.

 “영아란 년이 말 여유 성님 영아가 말 여유.”

 “아, 영아가 누구여?”

 “아! 문순이 하고 같이 자취했던 영아가 말 여유. 가가 문순이 한티 그 머스매를 소개 시켜줬다는 구만유. 내가 문순이를 얼마나 아꼈는디 아들 많은 집에 딸 낳고 인물 이쁘지, 속도 깊어서 내가 저를 얼마나 아꼈는디. 고등핵교까지 갈켰는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걸 어쩌것나 자네가 참아야지.”

 “참어 유 전 문순이 가한 티 주거도 못 줘 유.”

  할머니는 굳은 다짐이라도 하는 냥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입을 앙다물었다. 며칠 후 고모는 할머니의 잔소리와 식구들의 차가운 눈총을 감당하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할머니는 급하게 옷을 갖춰 입고 길을 나섰는데 저녁 무렵 돌아 온 할머니의 손에는 고모의 손목이 잡혀있었다.

 “야! 이것아 ! 누구 미치는 거 볼려고 그러는 겨. 거기가 어디라고 그 집에 가서 있을 수가 있는 겨?”

  고모는 커다란 눈에서 달기 똥 같은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내팽개치고 항복할 기세는 전혀 없어 보였다. 고모의 불장난 같은 사랑의 열병으로 집 안은 평지풍파속의 나날이었다.

  그즈음 우리 집을 따사롭게 움켜 안고 있던 대나무가 한 두 그루 씩 녹색의 온기를 잃고 누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변소에 다녀오다 대나무 밭을 건너다보며 그것이 불길하다며 부르르 떨었다.

  할머니는 고모가 아이에게 어렵사리 주어진 귀한 장난감처럼 한쪽 손에 움켜 쥔 채로 가만히 있어 주기를 바랐지만 고모는 할머니의 뜻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어렵게 고모가 졸업하던 날 할머니는 급히 서울 사는 작은 아버지를 불러 고모를 가지고 있기 불안한 짐짝이라도 부리듯 서울로 올려 보냈다. 고모가 서울로 올라간 것으로 한동안 집안은 잠잠해 졌다. 그 고요는 오히려 불안으로 엄습해 오기도 했다.    

 “내가 가한 티 가면 가만 안둔다고 단단히 일렀다. 바보도 아니고 이 노릇을 어떻게 한다냐, 사랑이 밥 믹여 주는 것도 아닌디 그렇게 그 녀석 한티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니 쯧쯧.”

  할머니는 콩을 고르다가도 한숨을 내쉬었고 도라지를 수북이 쌓아놓고 한쪽 날이 달아버린 과도로 껍데기를 박박 빗겨내면서도 온통 고모의 안부를 염려하는 눈치였다.

                                 *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할머니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 녀석 아직도 안 갔는지 샛돌에 갔다 오니라.” 가방을 마루에 내려놓고 빠른 걸음으로 집 앞에 조금 높은 둔덕인 샛돌로 향했다. 한 남자가 우리 대나무 밭가에서 까치발을 디디며 우리 집 마당 쪽을 염탐하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못생길 것도 없는 얼굴에 특별한 것이 있다면 갈색 빛 도는 머리를 단발로 가지런히 자른 것이었다. 장발이 유행하는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시골 어른들은 남자가 그런 머리를 하는 것을 질색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자 그도 이내 나를 발견하고는 살짝 웃어보였다. 나는 어떤 표정도 그에게 지어 보여줄 수 없었다.

  “가 갔디?”

  “.....”

  “아니 아직도 있던 디”

  “가가 왜 안가는 겨. 문순이하고 결혼 시켜달라고 허여. 미친놈 내가 저 주려고 키운 줄 아남. 어림없는 소리지 암 어림도 없고말고. 그것도 남자라고 문순 이년이 환장 한겨. 생긴 거 하고는……쯧쯧.”

  할머니는 혀를 길게 찼다. 늘 그렇게 말이 걸은 할머니에게 남자는 어떤 욕을 먹었는지 안 봐도 짐작이 갔다. 뜰 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계속 고모를 달라고 하다가 할머니의 분부를 받은 아버지에 의해 끌려 나갔다고 했다. 정말이지 그들은 지독한 사랑을 하고 있다 싶었다.

  그즈음 고모는 서울에서 화장품 외판 사원이 되었는데 그 직업이 아가씨들한테 선망의 대상이어서 제법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다고 했다. 고모의 예쁜 외모에 회사에서 살뜰히 가르쳐준 서울 말씨며 친절한 몸동작으로 거래하는 아줌마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곳저곳에서 좋은 선 자리도 들어온다고 했다. 고모는 과연 그 남자를 잊은 것일까? 가끔씩 그런 의문이 나를 따라 다녔다.

                                *

  할머니가 자취집에서 고모를 잡아 오던 날 고모는 사랑방 책상에 엎드려 길게 울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마당에서 고모 쪽으로 언성을 높여가며 안된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야 이년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란 말여. 그런 녀석하고 그 집이 그렇게 좋디? 이 동네에는 그렇게 쓰러지는 집 있덜 안햐. 그런 집에 가서 똥꾸녘 찢어지게 가난한디 사랑은 뭣말라 비틀어진 사랑여. 어림도 읍따. 네가 시방 사랑이 밥믹여 주는 건줄 아는디 아직 굶어 보덜 안해서 철모르는 소리하는 겨. 정신 차려 이것아. 난 너 그 집에 절대 못주니까 그렇게 알어라. 가가 너보다 인물이 잘났냐. 나이가 적기를 하냐. 너보다 열 살은 많은데데다 얼굴은 그게 또 뭐냐 굉이 낯짝처럼 생긴 것이.... 어림도 읍따.”
  고모의 울음 꼬리는 길고도 징그러웠다. 집안 전체를 불안과 걱정으로 몰아넣고도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우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 한편으론 고모로 인해 가족들이 모두 괴로워 하니 고모가 미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음 순간 고모의 한마디에 그들의 사랑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는 끝나지 않을 거란 걸 직감하고 말았다. 어린 것이 영악하게도. 할머니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빨랫줄을 떠받치고 있는 긴 대나무 바지랑대를 움켜쥐고는 고모가 있는 사랑방으로 뛰어 갔다. 그리곤 열려있는 방 안으로 바지랑대를 매몰스럽게 쑤셔 넣었다.

  “만약에 네가 가한 티 가려면 차리라 내 손에 주거!”

  할머니는 성을 참지 못하고 바지랑대를 힘껏 휘둘렀다. 어머니가 급히 가서 말리지 않았다면 고모는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고모는 오랫동안 참아온 숨을 뱃속 깊은데서 끌어 올려 외마디 소리를 내고 가시나무에 머리를 쪼고 죽는다는 가시나무 새처럼 비장하게 외마디로 소리 질렀다.

  "좋은 걸 어떡해!

  할머니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전장에서 막 돌아온 패잔병처럼 얼굴은 납덩어리처럼 굳어 있었다. 어린 내 귀에 그 소리는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들려서 그 후 나는 고모의 사랑을 은근히 응원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좋다지 않은가. 그 집이 가난해도 그가 잘생긴 외모가 아니어도 그가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오로지 고모는 그가 좋다지 않은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모는 분명 속물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쩌면 고모는 정말로 로미오와 쥴리엣처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로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죽음 같은 사랑, 불꽃같은 사랑. 고모는 그즈음 그런 사랑을 하고 있었고 나는 처음으로 살아서 악악대며 완성하려는 사랑의 울분을 목격하고 있었다. 고모는 분명 서울에서 잘 지낸다고 했는데 그 기억은 나뿐 아니라 가족들 에게 불쑥불쑥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그 해 여름이었다. 햇살은 충만했고 실바람은 더위에 찐득한 얼굴을 한번씩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산천엔 매미소리가 그악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마당을 매웠다. 고모가 휴가를 받아서 서울 작은아버지 내외와 사촌들과 함께 내려왔다. 작은 용달차에는 작은 아버지가 큰맘 먹고 사온 대한전선냉장고가 위용을 자랑하고 서 있었다. 서울 뿐 아니라 대전에서 사는 작은집 식구들도 다 와서 집안은 모처럼 왁자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흐르고 모두들 행복한 표정이었다. 삼촌이 가져온 카메라로 우리들은 트럭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어머니가 준비한 보신탕과 백숙을 멍석과 들마루에 나누어 앉아서 질펀하게 먹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들마루 한쪽에는 하얀 티셔츠에 흰바지를 맞추어 입은 고모가 앉아 있었다. 자연스러운 웨이브 파마머리가 고모한테 퍽이나 어울렸다. 우리의 시선은 가끔씩 봄 날 피어난 꽃처럼 향기로운 고모에게 머물렀고 그런 딸이 사랑스러워서 할머니는 미소로 바라 보다 치마폭으로 눈물을 훔치곤 하였다. 여름 한낮 고모는 아름다웠다. 막 피어난 수선화처럼 곱디 고왔다.

  “이제는 괜찮은 겨?”

  넌지시 묻는 할머니의 질문에 고모는 쓸쓸히 웃어 보였다. 어색한 할머니와 고모의 실루엣이 여름 하오의 햇살에 빗살무늬로 출렁였다.  

  “성님 가가 문순이를 달라고 서울까지 왔데 유 글쎄. 그래서 서울 둘째랑 셋째가 다방에서 만나서 타일렀더니 말을 안 듣고 무조건 문순이만 내노라고 난리더래 유."

  “그래서 어쨌다던가?”

  큰 할머니는 걱정 어린 얼굴이지만 주름진 얼굴에 호기심이 동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생기를 띄었다.

  “그래서 둘째가 화가 나서 뜨거운 커피 물을 냅다 얼굴에 뿌렸데요.”

  “저런, 그래서?”

  “그런디도 꼼짝도 않고 문순이만 내놓으라고 노려보더란 거예유. 둘째가 성질이 만만치 않찬아유. 냅데 주먹을 한방 날렸데 유.”

  “저런저런 쯧쯧...”

  “앞니가 한개 나갔다네 유. 그런디도 어찌나 독하게 문순이 만 내 노우라고 하는지 애들이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고 하네 유.”

  “그래 문순이는 어떡하고 있다던가?” 할머니는 윗목에 있던 숭늉 그릇을 들어다 벌컥벌컥 마시고는 창호지가 누런 막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순이는 말이 없어서 속은 모르 것고 지 오래비들이 가가 그랬다는 말을 안 해서 모르나벼 유. 가가 어떻게 둘째네 집까지 찾아 갔나 도통모르 것슈.”

  그리고 며칠 후 고모는 도망갔다. 여기 저기 좋은 혼처도 들어오고 일도 제법 잘해서 직장에서 신임도 받았다며 할머니를 위로 하려고 걸어온 작은어머니의 안부는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 고모는 그렇게 보여주고 떠났다. 사랑 때문에 가족을 버린 고모. 어느 틈엔가 가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모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 했다.

                                *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란히 야매로 이빨 치료를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틀니를 하기 위해 못쓰게 된 이빨을 빼고 온 날은 스테인리스 요강에 피를 뱉어내곤 했다. 둘이서 함께 뱉어내서 그런지 요강 안은 금방 검붉은 피로 흥건했다. 요강에 가득 찬 피를 볼 때 마다 두 분이 저러다 죽게 되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다행히 이듬해 봄 하얀 틀니가 제법 자리를 잡아 어울렸다. 집 안은 고요했다. 특별히 크게 웃는 일도 드물었고 가족들의 공동 관심사라면 텔레비전을 함께 시청하는 것 정도였다. 계절은 쉬 지나갔다.

  한 겨울 대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는 여린데도 다급했다.

 “누구여?”

 “나여, 미진아 문 열어.”

  분명 대문 밖에서 나는 소리는 고모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서 문을 열자 추위에 어울리지 않게 하얀 한복엔 커다란 꽃 자수가 나있고, 쥐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고모가 아이를 이불에 푹 싸서 안고 있었다. 아이를 출산한지 얼마 안 돼 보이는 고모는 석양빛에 드러난 얼굴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몹시도 힘겨웠는지 없던 눈까풀까지 생겼으니 그럴 법도 했다. 옷차림새만 보아선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 않았지만 가난도 고모의 청춘의 한낮의 뜨거운 종소리는 어쩌지 못한 것 같았다. 고모 옆에는 언젠가 봤던 단발머리의 사내가 단정하게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자르고 언 듯 보기에도 품이 작은 듯한 검은 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사내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고 그도 엉겁결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저녁상도 받지 않고 침울한 얼굴로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와 가족들은 추운 소한 날씨에 고모와 아기를 계속 문 밖에 서 있게 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전전긍긍했다. 나는 참다못해 아기를 고모에게서 뺏다 시피 받아서 안고 얼른 할머니 할아버지 앞으로 다가 갔다.

  “봐유, 애가 할아버지를 탁했써유.”

  옹이 박힌 마음의 상처로 인해 고모를 대문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하지만 어린 핏덩이만은 뿌리칠 수 없었던지 고개를 살며시 아기에게 돌렸고 그렇게 자식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 듯이 고모를 용서하고 말았다. 고모와 고모부는 안 방에서 나란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큰 절을 올렸고 나는 한쪽에서 어느 한구석 외가를 닮은 곳이 없는 아이를 토닥였다. 나를 사주해 아이를 안고 들어오게 한 어머니는 급히 다시 밥상을 차렸다.

  후에 고모부는 자주 나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처갓집에서 제일 상냥한 것은 조카밖에 없다며 털털하게 웃어 보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단체로 바닷가에 갔다가 바닷물에 빠져 악어처럼 입이 벌어진 단화 밑창을 정성스럽게 접착제로 붙여주기도 했는데 그런 자상함에 고모가 반한 건 아닌지 잠시 상상해 보기도 했다.

                                *

  그리 될 줄 알았던 일이다. 고모부의 날카로운 손은 고모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고모는 큰 눈에서 눈물만 떨 굴 뿐 ‘아야’하고 외마디 비병도 내지 않았다. 아니 못 냈다. 고모부가 내리친 손바닥이 고모의 볼에 닿았을 때 비수 같은 '짝‘ 소리만 멀찍이서 고모부를 노려보는 할머니의 가슴을 후려치고 있었다.

  “껏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하는 게다.”

  평소 할머니의 신조와도 같은 성실한 웅변이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막막해서 남편에 아이까지 들쳐 업고 온 고모를 할머니는 외면하지 못했다. 고모 내외의 처가살이로의 등장은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고 그래서 할머니는 죽자고 고모의 사랑을 막으려 했었을 터였다. 고모부는 우리 논 1600여 평에 대형 딸기 하우스를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고모는 흙 묻은 작업복을 산더미같이 고무함지에 던져 놓고 안방 아랫목만 차지하고 있으니 대가족 살림에 고모네 가족들 뒷수발까지 고스란히 어머니의 일거리로 돌아간 것이다. 어머니는 날마다 버거워 했고 한숨과 불만은 깊어만 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 어머니의 원망은 고모를 향해 억새풀잎처럼 날이 섰다. 눈치가 없는 건지 고모는 하우스일 외에는 게을렀다. 어머니의 불만이 쌓인 걸 눈치 채기 무섭게 할머니의 서릿발 같은 시집살이도 더해졌다. 그러나 할머니도 가끔은 며느리 보기 미안해선지 아니면 하우스 일을 돕다 뭔가 마음에 맞지 않던지 한 날은 고모부한테 몇 마디 했고 그런 날은 여지없이 고모부는 고모의 귀사대기를 갈겼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이상한 부부였다. 고모는 덩치가 고모부의 두어 배로 불어 있었는데도 절대 고모부한테 한마디 앙칼지게 앙알거리지도 법이 없었고 오히려 고모부의 폭력을 당연시 여기는 눈치였다. 그런 날은 할머니는 안방에 편히 앉지도 못하고 서성였는데 고모내외가 동네 입구에 할머니가 전세로 얻어준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엔 뜰 방에 침을 뱉었다.

  "나쁜 녀석 나 보라고 지 마누랄 때려.”

  성격이 녹록치 않은 할머니는 답례라도 하듯 어머니를 더욱 괴롭혔다. 그렇게 고모가 온 뒤로 고모네 농사일이며 허드렛일에 아무 공도 없이 어머니나 우리가 동원됐고, 어머니의 시름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이 고모네 는 하는 일마다 벌이는 농사마다 풍년이 되는 법이 없었다. 좌절 할 법도 했다. 그런 중에도 고모의 배가 고단하게 불러왔다.

  “얘! 미진아 큰할머니 모시고 오니라 얘가 또 나온다고 하거라.”  

  창호지에 뚫려있는 구멍으로 고모와 할머니의 모습을 염탐하듯 들어대 보고 있을 때 할머니는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문 밖에 서 있었던 참이다. 그 시절도 다들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고모는 독하게도 자기 집 허름한 방에서 아이를 낳고 있었다. 두 번째 분만이라 고모가 힘을 주자 아이가 선선히 나왔다. 영화에서는 분명 아이를 낳으려면 여자 배우가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며 힘을 주고 했는데 고모는 그런 장면을 전혀 연출하지 않았다. 그저 무겁게 다문 입으로 ‘끄응’ 하고 여러 번 힘을 주자 아이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한 아이가 더 있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나는 큰할머니 댁으로 불이 났게 달려가서 고모가 쌍둥이를 낳을 것 같다며 호들갑스럽게 큰 할머니 손을 잡고 내달음 쳤다.

  큰할머니를 불러오면서 나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쌍둥이를 본 일이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가끔씩 집에서 키우던 돼지나 개가 여러 마리 새끼를 낳는 걸 본 일은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부숫골엔 쌍둥이가 없었다. 아니 있었다고 하긴 했다. 쌍둥이도 집안 내력이라는 할머니 말을 언젠가 얼핏 들은 것 같다. 큰집 할아버지가 쌍둥이였다고 했다. 하얀 긴 수염에 무엇이 그렇게 고독한지 말이 없던 큰집 할아버지는 주머니에 침을 넣고 다녔다. 내가 몹시 아팠는지 늦은 밤 할아버지 앞에 업혀간 나를 보더니 주머니에서 침을 꺼내 내 눈에 보이지 않게 움켜쥐고 엄지발가락을 따서 피를 뽑았다. 비명을 지르며 죽을 듯 길길 날뛰어도 손가락까지 침을 맡고야 나는 풀려났다. 채했는지 징징거리던 아이를 헐레벌떡 놀라서 데려간 어머니는 고맙다고 여러 번 머리를 주억거리고는 나를 업고 돌아왔다.

  할아버지의 노년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나는 학창시절 두어 번 쌍둥이와 짝꿍이 된 적이 있었다. 쌍둥이들은 십 분 혹은 삼십 분 차이에도 언니 동생의 구분이 명확했고 신기한 것은 한사람이 아프면 다른 한사람도 시름시름 앓는다. 쌍둥이와 가까이 생활해 보니 그들은 무언지 모를 끈으로 늘 한데 묶여 있지 않은가 싶었다. 그래서 일까 나는 가끔씩 할아버지의 쌍둥이 동생이 세상에 없는 것이 그분에게 그렇게 고독감을 주는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고샅에서 해바라기하는 그 분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치곤 했다. 아무튼 고모가 쌍둥이를 낳는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나는 고모가 위대하단 생각까지 들었고 매, 란, 국, 죽 네 쌍둥이처럼 여러 명의 아이를 낳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큰할머니가 고모의 산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더욱 창호지 가까이에 눈을 들이댔다. 이십여 분이 되었는데도 아이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씩씩해 보이던 고모의 얼굴이 점점 지쳐갔고 이마엔 땀이 흐리기 시작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땀에 절어 이리저리 쓰러지듯 흩어져 있었고 고모는 입술을 악물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잘 한다 조금만 힘을 더 주거라.”

  큰할머니의 응원에 맞춰 고모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외마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할머니들의 손길이 분주해 보였다.

  “그래 나왔다 나왔어.”

  큰할머니가 아기를 거꾸로 들고 등을 치자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큰할머니는 빠른 손놀림으로 옆에 세수 대야에 받아 놓은 따듯한 물로 아이의 몸에 묻은 핏기를 닦아냈다. 할머니는 힘없이 다리를 펴고 있는 고모를 단도리 해주고 깨끗이 씻어주었다. 그런데 수선스럽던 방안에 갑자기 무거운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큰할머니가 할머니의 손짓을 저지 하려고 말류 하는 모습도 언뜻 보였다. 고모는 두 할머니들의 행동을 모르고 방바닥에 쓰러지듯 모로 누웠다.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심상치 않아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작은 구멍으론 도저히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감지할 수 없었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아서.”

  “성님 모르면 가만 기셔유. 자가 애 둘을 어떻게 키우것슈. 지들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디.”

  “.....”

  “엄마 안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고모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고 방안은 평정을 되찾은 듯 했다. 나는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고모가 아들 쌍둥이를 낳은 것이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얼른 집 안 어른들께 전해야지 싶어서 마을을 가로 질러 집으로 달려갔다.

  “고모가...고모가 쌍둥이를 낳았어 유. 아들 쌍둥이 유.”

  동네 한가운데를 성마르게 뛰어가서 고모의 쌍둥이 소식을 전하는 내 얼굴과 달리 쌍둥이의 소식을 전해들은 가족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

  두 쌍둥이를 바라보며 고단하게 누워 있는 고모에게 찾아갔었다. 아이들은 평안했고 고모는 무슨 생각인지 골똘하게 하며 아이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안은 외풍이 쌔서 추웠고 아이들 머리 위에 이불을 높이 쌓아서 외풍을 막고 있었다. 그런 풍경은 오히려 아늑하게 다가왔다. 그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고모 사랑해서 행복했어?”

  고모는 심판대 앞에 앉은 증인 마냥 심각하게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나는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넘겼다.

 “사랑이...”

 “응”

 “그것이....사는데.... 전부는 아니더라.”

  고모의 심장을 녹일 듯 뜨겁게 타오르던 사랑의 장작불이 타닥타닥 여리게 타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질문을 한 중학생인 내가 참으로 성숙하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 날은 영화관에 가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이란 사랑의 종말을 보며 끝없이 운 날이고, 더불어 셰익스피어라는 대 문호를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지고지순한 사랑을 죽인 악당으로 기억한 날이기도 했다.

  사춘기가 시작된 나에게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도 사랑이란 것이 어떤 형상인지 깊이 있게 각인 시켜준 것이 고모의 사랑이었다. 그 열렬한 사랑도 생활고 앞에서 여려지고 흔들렸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그들의 사랑은 어떤 굵은 쇠사슬보다 강해서 때론 저렇게 넘어져도 쉽사리 끊어지거나 재미없게 본 컬트영화의 앤딩 자막처럼 허망하지 않을 거란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랑을 시작하기 무섭게 어떤 고난의 과정도 제대로 이겨내 보지 못하고 죽음이란 어설픈 종말로 달려간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도, 결혼이란 것과 삶 안에서 가난과 좌절 따위의 진흙 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고모의 사랑은 더 값진 사랑의 형상은 아니었을까.

 

  얼마 후 한 아이가 죽었다. 나중에 낳은 아인지 처음에 낳은 아인지는 알 수 없었고 침울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고모부가 삽과 가마니를 들고 나갔다가 사위가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아이를 묻었다고 했다. 가족들은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고 가족들에게 얼굴을 안 보이려고 돌아서 어둠을 응시하고 있는 고모부의 쳐진 어깨는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고모는 멍청한 표정으로 칭얼대는 어린 것에게 젖을 물렸다. 고모는 가난했다. 가난해서 병원에서 아이를 낳지 못했고 한 아이를 그렇게 힘없이 잃고 말았다.

  아이가 죽고 난 뒤 고모는 약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누가 등을 밀면 바로 주저앉아 그 큰 눈으로 눈물을 쏟아 놓을 것만 같았다. 딸기 하우스도 별 재미를 못보고 투자비만 손해를 보고 말았다. 부농의 꿈을 안고 처가살이를 하던 고모부는 스르르 힘을 잃고 본가로 돌아갔다. 세월 지나 겨울이면 잠 대신 말로 밤을 꼴깍 새우던 할머니가 뜬금없이 그때 일을 되 뇌였다.

  “내가 죄를 졌다. 그 녀석이 죽은 건 어쩌면 내 탓이다. 그 애기가 간지는 알 순 없지만 문순이는 지 자식이 중했것지만..... 큰 할머니는 나보고 잔인하다고 했겠지만.... 난 내 자식이 중혔다. 그 핏덩이보다도 중혔다. 가네 살림에 쌍둥이라니 그건 재앙이나 마찬가지여. 그래서 내가 업어 놨다. 죄스런 일이다. 근디 큰할머니가 바로 놓터라. 나는 죄인이다. 나때매 어린게 당장 네 죽은 건 아니지만 내가 독한 맘 품어서 죽은 건지도 모른다.”

 ‘페엥’

  할머니는 월남치마 앞자락에 콧물과 눈물을 함께 풀어냈다. 나는 독한 할머니를 이해하고 말았다. 설령 죽은 아기가 이 사실을 안다 치더라도 할머니를 용서하고 말았을 것이다.

                                  *

  그 후 나도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객지로 나왔다. 본가로 돌아간 고모부네는 여전히 농사를 지었다. 한번은 농사가 잘 되서 돈도 좀 벌었다며 고모부가 앞니가 없는 입을 크게 벌리고 함박 웃어 보이며 집에서 키운 매론을 박스 째 가져 와 내 놓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영농 자금을 너무 많이 끌어다 쓴데다 우르과이라운드(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의 제 8차 다자간 무역협상)를 수용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농촌 전역을 휩쓸었다. 농산물을 개방하면 가격 경쟁 면에서 떨어지는 우리 농산물을 재배하는 농가는 자연히 도산할 위기에 놓였다. 농부들은 너나없이 경운기를 끌고 나오거나 농기구를 이용해서 데모에 동참하고자 경작지를 떠나 시가지로 몰려들었다. 농민들의 투쟁은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사투에 가까웠다.

  정부는 그런 농부들의 항의에 쩔쩔맸지만 수년에 걸쳐 표시 나지 않게 문호를 개방했다. 우르과이라운드 협상의 종결은 1993년에 끝났지만 시작은 고무부가 한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에 가족과 본인의 목숨 줄을 걸고 있던 시절이었다.

  고모부네는 우르과이라운드(UR) 반대 투쟁에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 농사까지 망쳤다고 했다. 그즈음 가족들 모임에 나타난 고모의 눈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입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수도 많아져서 아줌마다워졌고 오히려 명랑해 보였다. 그런 고모를 나는 아프게 사랑했다.

                               *

  여자가 승소하는 날 나는 책상을 정리했다. 그동안 내가 관리해 오던 300여명의 고객 파일을 후임자에게 넘겼다. 그들은 모두 남자이거나 여자였고 서로에게 어울리거나 모자란 상품들이었다. 그렇게 꼼꼼히 그들이 원하는 조건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저울질 해 놓은 파일을 보며 후임은 사냥하듯 그들의 파트너를 정해 주말마다 호텔 커피숍에서 딸랑딸랑 종을 울리며 만남을 주선할 것이다. 물론, 이벤트를 통해 등급별로 나눈 단체 모임을 만들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서 세 쌍을 결혼으로 연결시켜주면 천당에 간다는 대학 선배의 농담석인 스카웃 제의에 시작했던 일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4년 이상하면 자신의 독창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시기라고 ‘마지막 손님’이란 소설에서 읽은바 있다. 나는 그 시기를 넘어서 만 7년 째였다. 하필 그녀를 만난 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할 시기여서 였으리라. 회사에 무리를 끼친 것이 미안했지만 어디 이런 일이 한두 건인가. 이 바닥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다. 단지 그녀가 매스컴에까지 오르내린 것이 더 큰 화근이 된 것이다. 짐을 정리해서 박스에 쓸어 담았다. 뒤축이 닳은 실내화는 초록색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버렸다. 이선배가 다가와서 어깨를 쓸어주었지만 억지로도 밝게 웃어줄 수는 없었다. 쿨렁이는 가슴을 주저앉히고 자동차 트렁크에 상자를 힘겹게 내려놓고 꽝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엑셀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이 들어간다.

 

                              *

 “냉장고에 웬 오뎅이 이렇게 많아?”

 “니네 고모가 오뎅 장사한다고 주고간 거다.”

 “오뎅 장사?”

 “너 몰랐구나, 고모 트럭에다 오뎅 싣고 팔러 다니다. 부산에서 직접 떼다 안다니는 동네가 없다고 하더라. 이 동네가 친정동넨데도 어찌나 살려고 열심인지 창피한 것도 무릎 쓰고 요즘은 자주 와서 팔고 간다. 돈 주고 파는 물건을 뭐더러 이렇게 많이 주고 가냐고 하면 그냥 씨익 웃기만 하더라. 올 때마다 한사코 내려놓고 가서 그렇게 쌓였다.”

 “그럼 농사는?”

 “맨 날 빗 만 진다고 절대 농사는 안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고 하더라. 질려서 하우스랑 다 넘겨주고 손뗐다더라.”

  나는 어둠이 내려앉는 고즈넉한 고향집 마당을 응시했다. 밤은 사람을 명상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때론 추억을 되 뇌이게 하고 옳고 그름에 한없이 출렁인 낮 동안의 기억을 정확한 저울로 달아 답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는 자주 농부에 대해 생각했다. 농부란 어쩌면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직업인들이 아닌가 싶었다. 그들이 때앙 볕에도 굴하지 않고 소중하게 기른 벼들이 넓은 논에서 푸른 보자기처럼 펄럭이고, 밭작물들이 청동 빛으로 빛날 때면 깊은 고요 속에서 감동은 커져만 갔다. 나는 고모부와 고모가 농부로서 퍽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농사짓는 일을 힘들다 하지 않았고 모를 심을 때 열매를 딸 때 하얗게 웃었다. 그런 그들이 일한만큼 삶에서 풍요를 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도 그렇지 못했고 오랜 노동의 대가는 고작 부채로 남은 것이다. 그러니 본인스스로 농사에서 등을 돌리고 농부였던 그들이 도시의 유랑자의 모습으로 살아내야 한다니 그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 짐작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엄마, 그때 고모부 사우디아라비아 갔으면 정말 열사병으로 죽었을까?” 엄마는 뜬금없는 내 질문에 기억을 더듬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죽긴 왜 죽겠냐. 꼭 양순이 실랑처럼 열사병에 걸려 오는 것만은 아니더라. 저 건너 영란이 아빠도 사우디 가서 돈벌어다 논도 사고 그랬잖냐. 더운 나라고 나매 나라니 물설고 고생스런 거야 당연지사지. 하지만 네 고모가 남편 사랑이 얼마나 끔찍한디 그 때 남편 보내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사랑인가 뭔가 때매 그런 거 아니냐. 그때만 고생스럽더라도 다녀왔으면 살기가 더 나았을 것을.”

  그러니까 아이가 죽고 얼마 후 고모부는 사우디에 가야겠다고 어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포크레인 기사 자격증이 있으니 몇 년 만 고생하면 목돈을 쥘 수 있을 것이고 그 돈으로 땅을 사서 자작농이 될 거라고 호기롭게 떠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큰 할머니네 손주 사위가 사우디에 갔다가 열사병으로 실려 왔다. 그는 대학병원에서 산소마스크에 의존한 체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몇 달을 못 넘기고 죽고 말았다. 그가 공항에 내려졌을 때 이미 살기는 힘들어 보였다고 했다. 집안 어른들이 병원에 가서 봤을 때는 머리카락까지 다 빠져 없더라고 했다. 이국땅에서 얻어온 열사병이란 생소하고도 두려운 병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고모가 고집스럽게 고모부를 주저앉힌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세월 지나서 안 사실인데 큰 할머니 손주 사위의 병은 열사병만이 아닌 암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생각하기도 괴로운 지난날을 떠 올리며 고모 인물이 아깝다고 했다. 그렇게 예뻤는데 이젠 촌부가 다 되었다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고모로 인해 가족 모두가 힘겨운 시절 갈등도 있었지만, 기실 고모는 어려서부터 큰며느리인 엄마가 키우다 싶이 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내려온 고향집이지만 고모의 근황을 들은 것이 허전하면서도 반가웠다.

  이상스럽게 집안 행사에 고모와 길이 엇갈려서 몇 년을 못 만났다. 그러니 나는 상상 속에서나 고모를 만나볼 따름이다. 젊은 사랑만으로 인생이란 긴 터널로 과감히 뛰어들던 고모의 오늘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아프고 쓰린 사막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보는 이들의 눈의 판단일 뿐인지도 모른다. 고모는 지금도 고모부와 함께하고 있으며 그의 불운들 위에 함께 질척인 나날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대신 어묵을 트럭에 실고 뽕짝을 들으며 단단해진 손으로 굳게 핸들을 잡고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고 어느 동네든 골목골목을 용감하게 누비고 있다. 나는 그런 고모가 언젠가 부농이 되어 다시 순전하게 대지를 가꾸고 생명을 살찌우는 농부로 돌아 올 것만 같다. 고모내외가 처음 함께 일구던 그 생명의 땅, 그곳으로 말이다. 그들이 돌아온다면 어쩌면 대지는 비옥한 본연의 풍요를 고모 내외에게 선물할지도 모를 일이다.

  유사이례 수많은 시인들과 문사들 중에는 미래를 노래하고 희망을 노래한 이들이 박수를 받아왔다. 그것은 오늘의 땀의 값은 분명 내일의 희망으로 이어진다는데 뜻을 모은 사람들의 염원이기도하다. 나는 분명 고모가 언젠가는 멋지게 일어설 거라고 믿는다. 더러 넘어지고 더러 아파도 그들이 순수의 날에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쓰린 실패엔 아랑곳없이 다시금 희망을 실고 달리는 고모는 예쁘지 않은가! 더불어 힘들고 어려운 날들 속에서도 아직도 안녕한 그녀의 사랑도 예쁘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