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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풍(國風)81

  • 작성일 2007-10-30
  • 조회수 851

국풍(國風)81

 

 

 

1

 

청수장 아래 정릉은 여름이 다가오는데도 더운 바람 한 오라기 불어오지 않았다. 북한산 바로 아래 있으면서도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바람이 흔하지 않았다. 1981년, 나는 국민학교 2학년 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해 5월은 유난히 더웠다. 우리 집은 그 시골 같은 정릉동 산 1번지 동네 중에서도 한참 깊숙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말 할 것도 없이 더웠다.

오후 시간이란 늘 그렇듯이 별로 할 게 없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더 그렇다. 어른들은 몇 명씩 집에 모여들어 잡답을 나누는 게 일이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와보니 그 날도 어머니는 누구와 얘길 나누고 계시는지 마당에 들어서자 말소리가 들렸다. 공터 아래 은행나무 집에 살고 있는 대학생 형 목소리다. 형과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서 누룽지를 뜯어먹고 있었다.

민석이 학교 갔다 왔구나, 이거 먹어 봐, 오돌오돌하고 고소한 게 맛 좋다.

형이 먼저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꾸벅 목인사만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민석아, 형아가 너 진짜 재밌는 데 데려간다고 온 거야. 일루 나와 봐.

설마 또 청수장 계곡물에 발이나 담그고 오자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방문을 열고 얼굴만 삐죽 내밀었다. 어디 가는데요? 형은 옆에 두었던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내 얼굴에 내밀었다. 부채였다. 플라스틱으로 살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넓게 붙인 동그란 부채. 형은 내 얼굴에 대고 부채질을 했다. 어머니도 똑같이 생긴 부채를 들고 있었다.

여기 그림 봐, 탈춤 추고 있는 거. 되게 재밌겠지?

탈춤요? 별로요.

너, 탈춤 추는 거 본 적 있어? 엄청 재밌는 건데?

많이 봤는데요.

어디서?

그거 우리 학교 옆에 국민대학교에서 질리도록 봤어요. 형들이랑 누나들이랑 매일 마다 해요. 농악놀이 같은 것도 하고요.

형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하하하, 하면서 크게 웃었다.

아, 풍물패 애들이 하는 거 봤구나. 이건 걔네들이 하는 거 하고는 달라, 엄청 재밌어. 사람 두 명이 커다란 사자 탈 하나 안에 들어가서 막 재주도 넘고 그런 거야. 테레비에서 봤지? 북청 사자놀이 뭐, 그런 거. 알지?

탈춤이라면 작년에도 신물이 날 정도로 보고 또 봤다. 학교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민대학교 옆이다 보니 일부러 가서 보지 않아도 문만 나서면 빤히 보이는 게 탈춤이고 풍물패였다. 북이며 장구, 꽹과리 소리가 워낙 크다보니 교실에 앉아있어도 다 들렸다. 또래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면 온종일 저런 것을 배우는가 보다 생각했다. 형은 큰 소리로 계속 말했다.

이거, 여의도에서 하는 거야. 너, 여의도 알지? 국회의원들 일하는 데. 그리고 순복음 교회도 있잖아. 알지? 응?

한 번도 안 가봤는데요.

녀석, 그럴 줄 알았지! 형아 하고 같이 여의도 가자. 사자놀이 하는 것도 보고, 먹을 것도 많이 사먹고, 알았지?

엄마도 같이 가요?

당연히 어머니도 같이 가지. 그러니까 너도 같이 가자. 응?

네, 라고 짧게 대답했다. 형은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허리를 구부리고 신발을 신는 모습을 보니 여전히 무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대문을 열고 나갈 때도 걷는 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느 날인가부터 애들은 형을 펭귄이라고 놀렸다.

형의 다리가 그렇게 된 건 작년 가을 때 일이었다. 그럭저럭 공부를 좀 했던 형은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며 좋아했다. 경영학과에 들어갔으니 나중에 커다란 회사의 사장이 될 거라며 동네가 다 들썩거렸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형은 매일 마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공부 때문이 아니라 술에 절어서 늦었다. 동네 사람들은 형이 공부는 안하고 데모를 하고 다닌다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다가 어머니는 내 귀에 대고 작게 말씀하셨다. 데모를 하다가 경찰한테 잡혀가면 매를 맞는다고. 형도 그렇게 된 것이고, 이건 비밀 얘기라며, 아무에게도 말 하지 말라고 하셨다. 학교 선생님한테도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반 정도만 믿고 나머지는 거짓말이거나 그냥 나를 겁주기 위해서 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자주 아이들을 속이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나는 어른들이 하는 말을 다 믿지 않았다. 차라리 아이들끼리 모였을 때 나오는 말이 더 진짜 같았다.

 

 

2

 

월세인지 전세인지 모르겠지만, 우린 집이 없어서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가서 살았다. 우리가 살던 집은 주인집을 빼고도 세 집이나 더 얹혀 있었다. 우리 집은 그 중에서도 대문과 가장 가까운 쪽에 있었다.

주인집 형도 대학생이었는데, 어른들이 얘기 하는 걸 들어보면 그리 대단한 학교는 아니라고 했다. 이 형은 자기도 대학교 2학년이라면서 나를 보면 우린 동급생이구나, 하고는 허허허 웃었다.

얼마 전부터 집이 시끄러워졌다. 주인집 형이 대학생들만 참가할 수 있다는 가요제에 나가기 위해서 노래 연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집은 아저씨를 빼고 아줌마, 누나, 형이 모두 뚱뚱했다. 아저씨는 키가 작고 몸매가 다부졌는데 아줌마는 그와 정 반대였다. 키가 아저씨 보다는 머리 하나 정도 더 크고 몸집도 커서 마치 씨름 선수 같았다. 누나와 형 모두 아줌마를 닮아서 뚱뚱했다. 그 중에서도 형이 가장 뚱뚱하고 키가 컸다.

형은 원래 자기처럼 뚱뚱한 사람 중에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많다면서 네모난 LP 음반 몇 장을 보여줬다. 외국 사람이었는데 말 그대로 몸이 산처럼 컸다.

이 사람이 파바로티라는 가수인데, 세상에서 제일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야.

조용필은 날씬한데 노래 잘하잖아요. 노래하면, 조용필이 최고라던데요?

물론 우리나라에선 그렇지. 하지만 이 세상이란 게 얼마나 넓고 큰데. 미국, 소련, 불란서 사람까지 다 합치면 파바로티가 최고야. 내가 만든 노래 한 번 들어 볼래? 너도 이번에 여의도 간다며? 거기서 이번에 대학생 가요제가 있는데 형도 나갈 거야. 잘만 되면 가수 데뷔해서 TV에도 나가고 그럴 거야. 그러니까 노래 한 번 들어 봐.

나는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형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기타를 엄지손가락으로 디리링 훑더니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형이 직접 작곡한 곡이라 그게 뭐였는지 지금은 가사도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노래를 너무 못 불렀다는 건 기억이 생생하다. 국민학교 2학년이던 내가 듣기에도 좀 거북한 창법이었는데 어떻게 저런 실력으로 가요제에 나가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알게 되었는데 그 때 형은 한대수의 창법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형의 노래 연습은 이른 봄부터 시작 되었다. 특히 주말엔 거의 하루 종일 그 노래를 불렀다. 나는 형이 부르는 노래가 듣기 싫어서 종일 밖에 나가 놀았다.

 

 

3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 원래 어른이 되면 밤마다 술을 마시는 건 줄 알았을 정도로 아버지는 매일 술에 절어있었다. 그나마 일요일엔 일을 나가지 않을 때가 많아서 집에 계셨는데, 그런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만 잤다. 커다랗게 코 고는 소리만 빼면 꼭 죽은 사람 같았다.

그렇게 자다가 저녁이 되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술을 먹고 들어오셨다.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가 전라도 사람이라서 성질이 못됐다고 말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라도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자, 어머니는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보여주셨는데, 거기 분명히 본적이 ‘종로 1가’라고 적혀있었다.

주민등록증에 있는 본적이 서울이면 서울 사람인 거야.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 모든 게 다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날 밤, 술을 드시지 않고 집에 오셨다. 그 대신 손에 막걸리 한 병이 들려 있었다. 냉면 대접에다가 막걸리 한 병을 다 부어서 마시고 아무 말 없이 주무셨다. 그날 밤엔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가족 모두는 아침에 일어나서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다. 나는 여전히 누워계신 아버지 머리맡에 서서 내려다봤다.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죽어 있는 것 같았다. 별로 슬프지 않았고 - 그렇다고 해서 다른 느낌이 들었던 것도 아니다. 아무 느낌이나 감정이 들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는, 아버지 짐을 모두 꺼내 공터에 가서 태우자고 했다. 그 때 알았다. 아버지가 원래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광주일고를 나왔고 전남대를 졸업했다. 장롱 깊은 곳에서 꺼낸 작은 서류가방 안에는 학교 졸업장이며 상장, 성적표,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프로야구 경기가 있을 때면 해태를 응원하셨다. 당신은 돈 쓰기를 인색해 하셨는데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시작되자 오천 원을 들여서 나를 해태 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에 가입시켜주셨다. 해태 타이거즈는 홈런왕 김봉연과 잠수함 투수 방수원이면 게임 끝이었다. 김봉연은 경기 때마다 보란 듯이 홈런을 날렸고, 호리호리한 방수원의 괴상한 투구 폼 앞에서 상대 팀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삼진 아웃 당했다. 야구장에서 해태 경기가 있는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잠도 자지 않고 TV를 봤다. 술도 드시지 않았다. 나도 해태가 좋았다. 특히 오리궁둥이 타법으로 홈런을 날리는 김성한을 좋아했다.

선동열이 등장했을 때 아버지는, 저 투수가 아빠 학교 후배다, 라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전라도 사람이었다. 구청 직원에게 돈을 넣어서 주민등록증에 있는 본적을 서울로 바꾼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옛날엔 그랬어. 전라도 사람이라고 하면 취직도 잘 안됐거든. 일자리가 있어야 먹고 살지. 전라도에선 광주일고에 전남대학교 나왔다고 하면 당시로썬 굉장한 엘리트인건데, 서울 올라오니까 어딜 가도 취직이 안 되더라. 그래서 바꿨지. 그땐 돈 주고 본적 바꾸는 사람이 많았어. 작은 회사에 취직이 됐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본적 바꾼 걸 늘 속상해 하셨어.

 

4

 

1980년에도 오월은 더웠다.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단 한 가지 익숙한 게 있다면, 담 옆 국민대학교에서 데모하는 모습이었다. 데모는 대게 오후에 시작했지만 어느 날은 아침부터 요란했다. 시끄러운 풍물소리가 교실 창문을 흔들 정도로 울리면 이제부터 데모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신호가 들리면 아이들도 좋아했다. 데모가 시작되면 경찰차 소리가 날 것이고, 경찰차 소리가 풍물 소리를 압도할 즈음이면 최루탄 발사되는 소리가 펑펑펑 들리기 때문이었다. 최루탄이 발사되면 수업도 거기서 끝이었다. 눈이 매워서 도저히 뭘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선생님은 가정통신문에, 최루탄 때문에 눈이 맵더라도 절대 손으로 눈을 비비지 마세요, 라고 써 주셨다. 아이들 사이에선 최루탄 묻은 손으로 눈을 만지면 장님이 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건 나비 날개를 만진 손으로 눈을 만지면 장님이 되는 이치와 똑같다고 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은행나무집에 사는 형은 다리를 절지 않았다. 나는 형에게 정말로 최루탄이 묻은 손으로 눈을 만지면 장님이 되는지 물었다. 형은, 나비 날개는 모르겠지만 최루탄은 당연히 그렇게 된다고 겁을 주었다. 그럼 왜 경찰은 대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느냐고 물었다.

그건 말이야, 경찰 중에 나쁜 사람이 있어서 그래. 군대도 마찬가지지만 경찰도 위엣 사람이 명령하면 밑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따라야 하거든, 그거 알지? 경찰 중에 대학생을 엄청 싫어하는 높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명령을 해서 학생들한테 최루탄을 쏘는 거야. 학생들 눈을 멀게 하려고.

이번에도 나는 절반만 믿고 절반은 믿지 않았다. 형은, 대학생들 눈이 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지는 거라고 했다.

왜 사람들을 못 살게 해?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에 과자 열 개가 있다고. 사람도 열 명이야. 똑 같이 사이좋게 나눠먹으면 좋겠지? 그런데 그 중 어떤 욕심쟁이가 혼자서 다섯 개를 먹고 싶었던 거야.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서 말이지, 몇 사람 눈을 멀게 했어. 그러면 안 되는데. 눈이 안보이니까 과자가 눈앞에 있어도 그게 뭔지 모르는 거야. 욕심쟁이는 옳다구나 하고 과자 다섯 개를 혼자서 먹어버렸어. 그러면 안 되는데. 형은 말이지, 그런 욕심쟁이하고 싸우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이건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 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그런 말을 하고 형은 학교에 갔다 오겠다면서 대문을 열고 나갔다. 책가방도 없이 그냥 갔다. 오월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나무 마루는 따뜻했다. 나는 거기 누워서 한참동안 하늘에 날아다니는 구름, 새, 꽃씨들을 봤다. 형은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어둑어둑 해질 무렵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저녁 밥 대신 라면을 끓여먹자고 하면서 찬장 높은 곳에 있는 누런색 삼양라면 상자를 꺼냈다. 거기엔 라면이 아주 많았다. 맨날 이렇게 라면을 먹을 수 있으니 우리는 부자구나, 라고 생각했다. 물이 끓기 시작할 때, 라면 봉지를 뜯어서 하얗고 구불구불한 라면 덩이를 냄비에 넣는 모습까지 나는 자세히 봤다. 냄비 안을 보니 라면 말고도 빨갛고 작은 개미 몇 마리가 둥둥 떠 있었다. 냄비에서 구자로 개미를 건져내는 건 항상 내가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내가 개미를 다 건져낼 때 까지 기다렸다가 스프를 넣었다. 라면은 아주 맛있었다.

 

 

5

 

아버지는 여의도에 가기 싫다고 하셨다. 나는 몇 번 더 졸라봤지만 여의도에 가는 일요일엔 고교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라고 잘라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 하고 나만 가기로 했다.

이제 삼 일만 있으면 여의도에 가서 신기한 것을 많이 보게 된다. 탈춤도 보고 가수들의 춤과 노래 공연도 있다고 했다. 주인집 형의 노래 연습도 강도가 높아졌다. 내가 보기엔 말할 것도 없이 탈락이 분명 했지만 형은 분명히 자기가 일등을 할 거라며 - 일등이 아니라면 적어도 무슨 상이라도 받을 거라며 장담했다.

동네 누나들은 여의도에 조용필이 온다면서 들떠있었다. 모르긴 해도 조용필한테 수 십 통이나 엽서를 보낸 누나들이 우리 동네엔 많았다. 답장도 오지 않는 연애편지를 왜 보내느냐고 물었더니, 누나들한테 꿀밤만 얻어맞았다.

용필 오빠 노래를 ‘나 어떡해’ 같은 거 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 우리 용필 오빠는 일당 백 이기 때문에 그룹사운드 음악은 유치해서 안 해. 혼자서 스파트-라이트를 받으며 절규 하듯이 노래하는 그 모습이라니! 너 같은 꼬맹인 이해도 못 할 거다, 이거야.

하지만 어머니는 팝송을 좋아했다. 나도 집에 있으면서 거의 팝송을 들었다. 조용필 노래는 거의 듣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는 팝송을 양키 노래라고 하면서 싫어하고 가요를 좋아했다. 특히 송대관을 좋아했다.

만약에, 여의도에 송대관이 온다면 보러 가겠지만, 송대관이가 그런데 오겠어? 미국 가서 언제 다시 한국에 올지도 모르는데.

아빠, 근데 송대관은 왜 미국 갔어요?

그거야 살기 힘드니까 간 거지.

눈이 멀어서, 장님이 돼서 힘들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왜 미국에 갔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 사람만 알겠지. 이런 나라엔 안 올지도 몰라. 왜 오겠어, 이런데.

어제 마을 회관에 칼라TV 한대가 들어왔다. 은행나무집 형은 그걸 나라에서 주는 거라고 했다. 왜 주냐고 물었더니 일요일 날 여의도에 사람 많이 오라고 우리 동네에 하나 준 거라고 했다. 어른들은 TV를 가져온 구청 직원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손도 잡고 그랬다. 그 때까지 우리 동네엔 칼라TV가 한대도 없었다. 흑백TV를 가지고 있는 집도 많은 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빙 둘러 있어서 나는 잘 볼 수 없었지만 TV를 켜니까 모두들 와 하고 소리를 냈다. 멀리서 조용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나들이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 어른들은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하라고 나무랬다.

나도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TV를 봤다. 굉장했다. 신기했다. 은행나무집 형이 TV 옆에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여의도에서 재미있는 행사 많이 하니까 꼭 오셔야 합니다. 가수들이랑 코미디언들도 많이 나와요. 노래자랑도 하고, 풍물도 치니까 어르신들도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여기 칼라 테레비는 여의도에 많이 와주십사 하고 구청에서 주는 거니까 꼭 와주세요. 여기선 여의도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있으니 꼭이요!

더 많은 말을 했지만 사람들은 TV를 보느라 잘 듣지 않았다. 나도 TV에 나오는 가수가 너무 멋있어서 한참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와서 나를 끌고 나올 때까지, 밖이 어두워지는지도 모르고 TV를 봤다. 어머니는 저런 걸 많이 보면 눈이 나빠진다고 했다. 집에 와보니 늦은 시간도 아닌데 술을 먹고 들어오신 아버지가 방에서 주무시고 있었다. 어머니 하고 나는 부엌에서 밥에다가 대충 김치를 몇 개 얹어서 저녁을 먹었다.

 

 

6

 

시월 초인데도 바람이 차가웠다. 은행나무집 형이 경찰한테 잡혀간 게 구월인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떠들썩했다. 형은 경찰이 들이닥치자 아무 소리 없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동네 사람들이 다 구경을 나온 듯 마당이 비좁았다.

형이 나오자 경찰 두 명이 신발도 벗지 않고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잠시 후 경찰은 책 몇 권하고 종이 뭉치 한 다발을 들고 나왔다. 형도 경찰도 아무 말 없이 마당으로 내려와 사람들 앞에 섰다.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어른들은 대문 쪽으로 길을 터줬다. 형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다물고 경찰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형네 어머니는 뒤에 서서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형은 몇 발자국 앞으로 가다가 고개를 돌려서 들릴 듯 말듯 한 소리로, 걱정 마세요. 그냥 조사만 조금 받고 다시 오는 거예요, 라고 말했다.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것 역시 빤한 거짓말일거라고 생각했다. 밖엔 경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터 아래 사는 미장이 아저씨가 형이 자기 앞을 지나가자 뒤통수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들었다.

지 부모가 그렇게 죽을 똥 싸면서 돈 벌어 대학 보내 놨더니, 공부나 할 것이지, 저런 썩을 놈의 자식 같으니.

조용했다. 형네 어머니 역시 소리 없이 우셨다. 경찰차가 떠나자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마당을 비우고 다들 돌아갔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아끌면서, 너도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안하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간다. 빨리 학교 갈 준비 해, 늦겠다, 했다. 아침에 불던 바람은 오후에도, 저녁에도, 다 늦은 밤에도 그칠 줄 모르고 불어댔다.

날씨가 많이 추워진 시월 말, 형이 돌아왔다. 갈 때는 경찰이 차로 데려갔는데 올 때는 걸어왔다. 아니, 걸어왔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몸을 휘청거리며 한 손에는 지팡이까지 짚고 왔다. 잡혀 갈 때와는 달리 이번엔 아무도 나와서 구경을 하거나 형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학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종점 근처를 지나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형을 만났다. 나무 지팡이를 짚고 할아버지처럼 등이 구부러져 있었지만 그가 은행나무집 형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형은 땅바닥에 그어 놓은 선이라도 따라가는 듯 시종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나는 형, 하고 불렀다. 멀어서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보다 싶어서 다시 한 번 형, 하고 불렀다. 세 번째로 형, 하고 불렀다. 다시 한 번 혀-엉, 하고, 불렀다. 형은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가까이 가보고 싶었지만 왠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은행나무집 형이 돌아왔다고 말씀드렸다. 저녁에 술을 드시고 들어오신 아버지께도 오늘 버스 종점에서 형 만난 것에 대해 알려드렸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기침을 심하게 하셨다. 세수를 하던 아버지는, 그 자슥, 죽었을 줄 알았드만, 하며 짧게 대답을 하시곤 더 이상 형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겨울 동안 형이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얘기 하는 걸 들어보면, 형이 경찰들한테 매를 맞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혹은 너무 많이 맞아서 아예 정신이 돌아버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다친 쪽 다리를 결국 잘라냈다는 끔찍한 소문도 있었는데, 그런 말들 중에 확실히 믿을 만 한건 별로 없었다.

나는 밖에서 놀다가 가끔 은행나무집 형네 대문을 살짝 열고 형이 있나 없나 살피곤 했다. 대부분 형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아주 가끔 마루에 나와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초겨울엔 몰골이 말도 아니게 수척했지만 봄이 가까워지니까 형의 얼굴이 점점 나아지는 게 보였다. 개나리가 필 무렵엔 마당에 내려와서 비질을 하거나 어머니를 도와 빨래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여전히 다리는 절고 있었지만 아주머니들 말대로 잘라낸 것은 아니었다.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면서 낮선 사람들이 형네 집에 자주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 사람들이 경찰이라고 했다. 왜 경찰 옷을 입고 있지 않느냐, 왜 경찰차를 타지 않고 지프차를 타고 다니느냐, 그런 질문에 어머니는 수사반장 드라마에 나오는 아저씨들도 경찰인데 경찰 옷을 입고 다니지 않는다면서 내 궁금증을 해결해 주셨다. 경찰 아저씨들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형네 집에 와서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나는 2학년이 되었고 그 봄에 형도 다시 대학에 복학했다. 형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갔고 저녁엔 일찍 집에 돌아왔다. 예전처럼 술을 먹고 통행금지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서 들어오는 일도 없었고 외박은 더욱 없었다.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이 마르도록 형을 칭찬했고, 이에 답례라도 하는 건지 형은 늘 웃는 얼굴이었다.

내가 2학년이 되어서도 풍물소리가 나고 최루탄이 터지고 그러면 수업이 빨리 끝나는 일상은 여전했다. 아이들은 가방 속에 마스크나 손수건을 의례 가지고 다녔다. 어떤 애들은 물안경을 갖고 다니기도 했다.

 

 

7

 

마을 회관에 있는 칼라 TV는 저녁 7시부터 두 시간 동안만 켜 놓는다. 그나마도 대부분 할아버지들이 뉴스를 보기 때문에 코미디나 만화 같은 걸 볼 수는 없다. 그래도 나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혹은 아무것이라도 그냥 칼라로 나오는 TV를 보기 위해서 저녁마다 마을 회관에 모여 들었다.

금요일이었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었다. TV에선 뉴스를 하기 전 광고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에겐 뉴스보다 차라리 광고가 재미있다. 미원 광고, 사이다 광고가 차례로 끝나자 여의도에서 열리는 행사 광고가 나왔다. 거기서 나는 그 행사 이름이 ‘국풍(國風) 81’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칼라 옷을 입은 풍물패들도 나오고 팔도 먹거리 장터도 열린다고 한다. 가수가 나와서 노래도 하고, 주인집 형이 그렇게도 기다리며 준비하던 노래자랑 대회도 광고에 나왔다.

할아버지들은 아무런 말없이, 표정도 없이 광고를 보고 계셨다. 고개를 숙이고 조는 분도 있었다. 나는 같이 구경 나온 친구 녀석에게 일요일 날 여의도에 간다면서 자랑했다. 그랬더니 녀석들도 모두 간다고 했다. 아마 마을 사람 모두가 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별로 자랑 할 것도 아니고 특별히 나만 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갑자기 화가 났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께 화를 냈다. 은행나무집 형도 밉다고 짜증을 부렸다. 어머니는 나를 달래면서 웬일인지 한숨을 쉬었다. 나하고 어머니만 특별히 가는 줄 알았던 여의도 국풍81 행사에 사실은 다른 아이들과 어른들도 많이 간다는 사실에 대해선 달리 해명해 주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에도 술을 잡숫고 오셨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광주일고와 선린상고가 동대문에서 경기를 하는 날이다. 아버지는 입에서 술 냄새를 토해내며 내게 물으셨다. 민석아, 너, 광주가 이길 것 같냐, 선린이 이길 것 같냐?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른 체 당연히 서울에 있는 명문구단인 선린상고가 이긴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잘 들어라, 야구하면 광주일고, 군산상고야! 라고 집안이 떠나갈 듯 소리 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토요일에도 일을 나가셨기 때문에 야구는 보지 못하셨다. 저녁에 뉴스를 통해서 결과만 봤을 뿐인데, 당신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광주일고는 선린에게 지고 말았다. 그래도 내일은 군산상고의 경기가 있다. 군산상고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며 또 열을 내셨다. 아버지는 국풍81에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으셨다.

 

 

8

 

은행나무집 형한테는 예쁜 애인이 있었다. 나는 그 누나의 이름도 몰랐지만, 하여간 TV에 나오는 탤런트처럼 예쁜 것만은 사실이었다. 형은 가끔 누나를 집으로 데려와서 형네 어머니와 함께 밥도 먹고 빨래도 했다. 형이 경찰에 잡혀가기 전까지 그랬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후로 누나는 오지 않았다. 내 기억으론 아주 추운 겨울 날 누나가 딱 한 번 은행나무집에 왔었는데 크게 싸우고 돌아갔다. 말싸움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대문 밖까지 다 들렸다.

호철씨, 왜 이래요. 다른 동지들은 뭐 다 편하고 행복한 줄 알아요? 그런 우리 모두가 다짐 한 거잖아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기로. 그런데 호철씨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제발 가만 둬! 우리가 뭘 바꿀 수 있지? 뭘 할 수 있냐고? 그렇게 많은 동지들이 다치고 죽고 잡혀갔는데도 뭣 하나 변한 게 없잖아?

형과 누나는 모두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혹은, 악에 바치는 목소리였다. 결국은 누나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난 정말 호철씨와 함께라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커다란 벽이 있어도 그 앞에 주저앉지 않고 단번에 주먹으로 깨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번 시련이 왔다고 해서 포기해버리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호철씨는?

그래! 난 그런 사람이야. 유림이는 아무것도 몰라. 어머니는 아버지도 없이 혼자서 나를 대학까지 입학 시키셨어. 골병이 들고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와도 새벽이면 일어나서 일을 나가셨어. 그런데, 우리가 투쟁해서 얻은 건 뭐지?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알아? 우리가 하는 투쟁은, 애초에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를 잡으려는 거야. 높은 산에 올라가면 무지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천만에! 우리가 하는 투쟁은, 날아오는 총알을 손바닥으로 막으려는 거야. 끝없이 손바닥을 단련시킨다고 총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천만에! 결국은 모두 죽거나 잡혀갈 뿐이야! 이데올로기는 그저 이상이야. 혁명은 환상이야. 아아, 제발 가버려!

한동안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참새를 잡으러 다니는 포수의 총소리가 타-앙 하고 울렸다. 나는 대문에 기대 있다가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또 한 번 타-앙 소리가 났다. 이번엔 형의 몸이 움찔거렸다.

유림아, 제발 돌아가. 걱정할 필요 없어. 정부에서 내가 다친 건 다 치료 해주기로 했어. 그리고 어머니 병원비도 일부는 보조해 준대. 봄이 되면 다시 학교에 갈 수도 있고.

형은 더 많은 말을 했는데 작게 말해서 나에게까지 잘 안 들렸다. 누나는 형이 계속 말 하고 있는 중간에 마루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나는 거기까지 듣고 혹시 몰래 엿보고 있는 게 들킬까봐 얼른 뛰어서 공터로 내려갔다.

누나는 그 후로 다시는 은행나무집에 오지 않았다.

 

 

9

 

3번 버스는 종로와 영등포를 거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까지 간다. 차가 막히면 세 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우린 모두 종점에서 탔기 때문에 편하게 앉아서 갔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돈암동까지는 버스 안에 우리 동네 사람들만 있었다. 하지만 종로를 거치면서 버스에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영등포를 돌 즈음엔 완전히 콩나물시루가 되었다. 모두 여의도에 가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렸다. 처음 가보는 여의도였다. 국풍81도 이번이 첫 번째 행사라고 했다. 반응이 좋으면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국풍82’, ‘국풍83’ 이런 식으로 계속 한다고 은행나무집 형이 말해줬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국풍81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 재미가 없었다. 여의도 광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 도대체 어디서 무슨 구경을 할 수 있는지 찾아다니기는 고사하고, 어머니와 떨어져서 길을 잃을까봐 온종일 손을 붙들고 다녀야 했다.

어머니는 작은 탈 인형하고 작대기 위에 조그마한 북이 달려있는 장난감 하나를 사주셨다. 손바닥을 기도하듯 모으고 작대기를 비비면 작은 구슬이 북을 통통 치면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공짜로 나눠주는 태극 문양이 그려진 플라스틱 부채도 받아왔다. 그게 전부였다. 광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진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았고 조용필도 못 봤다. 식당도 초만원이라 우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이리 저리 치이다가 결국엔 다시 순복음교회 앞에서 3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라디오로 야구중계를 듣고 계셨다. 저녁이 다 되었는데 술을 드시지 않은 것을 보니 군산상고가 이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홈런이 네 개나 나왔다고 하셨다. 6회 밖에 되지 않았는데 스코어는 벌써 5대 0이었다. 아버지는 신이 나서 군산상고의 공격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일어서서 두 손을 허리에 대고 큰 소리로 교가를 불렀다. 광주일고 교가였다.

국풍 81에 조용필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송대관도 오지 않았다. 노래자랑에 나갔던 주인집 형은 어떻게 예심을 통과했는지 몰라도 본선에선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다. 대상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받았다. 주인집 형은 밤늦게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 그 학생들은 대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둥, 대회 자체가 잘못 되었다면서 한참동안 시끄럽게 떠들었다.

당장 다음 날부터 형의 노래와 기타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5학년이 되었을 때, 주인집 형은 처박아 두었던 기타를 나한테 줘버렸다. 나는 어떻게 연주하는지도 모르는 기타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여 건성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악기라는 것에 흥미를 가지기까지, 기타는 오랫동안 우리 집 장롱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반면에 노래자랑 수상자 중에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사람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아닌 ‘이용’이었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팝송이 아닌 가요에 흥미를 가지셨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이용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고 하면서 싫어하셨다.

동네 누나들도 그 때 노래자랑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조용필을 좋아하던 누나들 중 대부분이 이용에게 그림엽서를 보내게 되었다.

은행나무집 형은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그 시험을 두 번인가 더 봤다고 들었는데 결국 공무원이 되지 못했고 나중엔 출판사에 취직해서 책을 팔러 다녔다.

다음 해 ‘국풍 82’는 열리지 않았고 ‘국풍 83’도 없었다. 나는 몇 년 동안 아수라장 같았던 여의도광장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자전거를 타러 친구들과 몇 번 놀러 갔다. 광장은 깨끗하고 굉장히 넓었다.

나는 그 날 그 곳을 채우고 있었던 수많은 인파들이 지금은 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며 해가 질 때까지 자전거를 탔다. 어른들은 집집마다 늘어나는 칼라 TV를 보며 국풍 81을 잊게 되었다. 그리고 천연색 화면으로 프로야구, 아시안게임, 팔팔 서울올림픽을 보면서 그 보다 더 많은 기억을 지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