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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지옥

  • 작성일 2008-01-09
  • 조회수 345

 

 

개미지옥.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람들은 그의 진정성을 알기에 앞서 그가 어떤 세계의 일원인가에 관심을 가졌다. 1926년 미국 일리노이주 알턴 출생. 당시 백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줄리아드 음대 입학. 스물네 번의 그래미상 수상. 40년간 무려 백 여장의 음반을 발표. 내가 처음에 알았던 동전의 앞 면. 
 
  아르바이트생 모집. 음악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굵은 펜으로 직접 쓴, 성의 없게 나열된 글자들. 카페 마일즈. 검정 바탕에 흰색으로 그려진, 트럼펫을 불고 있는 연주자의 모습. 불규칙한 수입으로 주머니는 늘 가벼웠지만, 이번에는 정말 하고 싶은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지금의 돈벌이는 아무래도 오래 매달릴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카페 출입문에 아무렇게나 붙어 있는 구인광고를 다시 읽어 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잡아끄는 글자체. 왠지 카페 안에는 동화책에서나 등장할법한 회색 수염이 덥수룩한 늙은 마법사가 앉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나무로 만들어진 카페 출입문을 열었다.    
  명색이 재즈카페이지 이곳에 정작 재즈와 관련된 음반들은 별로 없었다. 사장이 모았다는 빛바랜 가요 LP음반들, 삼십 대 이상이나 기억할만한 락음악과 재즈음반 수십 장이 전부인 곳. 사장은 내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손님이 뜸한 시간에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적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나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단번에 나를 채용했다. 밤 늦게 혼자 카페를 찾아오는 몇 명의 여자와 어울리는 게 그의 중요한 일과라고나 할까. 일을 하다 보면 진지한 자세로 사장에게 무엇인가를 털어놓는 여자들을 볼 수 있었다. 어찌보면 건성으로 상대방 얘기를 듣는 듯한 사장의 태연스러운 반응이 안도감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음악을 틀고 사장이 없는 시간에는 카운터를 맡았다. 손님들이 주문하는 술, 음료와 신청곡이 담긴 메모지의 전달은 같이 일하는 휴학생 여자애의 몫이었다. 손님이 적을 땐 조용한 음악을 틀어. 오래 머물더라도 자리를 채워 주는 게 나으니까. 사람들이 북적대면 흥겨운 음악을 틀라구. 그래야 술 매상이 쭉쭉 오르는 거야. 그는 나와 대화를 할 적마다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아니, 카페에 머무는 어떤 손님과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작업의 법칙 제1조, 먼저 행동하지 않는다. 제2조, 포획된 물고기는 절대 방생하지 않는다. 사장은 늘 규칙에 충실했다. 황금 보기를 뭐 같이 하라. 말하자면 자신을 먼저 들이대면서 낯선 여자들에게 모험을 하지 말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는 여자에게는 대화의 통로를 늘 열어 두었다. 소통의 소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페 마일즈를 찾는 여자들은 그와 친구, 선후배, 지인 등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유지하거나 탈바꿈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가 특별한 무엇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그는 결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유는 알고 싶지 않았고 사장 스스로도 내게 털어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지나친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나와의 적절한 거리두기에 그런대로 만족하는 듯 했다.
  사장과 반대로 나는 초면인 여자들에게 먼저 호의를 보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장소는 마일즈 카페가 아니었다. 내가 계약직원으로 속한 회사의 지시에 따라 압구정동에서 수원, 혜화동, 여의도 등의 장소가 정해졌다. 예고없이 통보되는 다양한 직업에 대한 사전지식의 습득은 필수였다. 나는 의사, 공무원, 프리랜서 작가 등 그들의 세계를 파악해야 했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와 부드러운 미소를 잊지 말 것. 여자와 헤어지는 시간은 절대 오후 아홉 시를 넘기지 말 것. 마지막으로 여자로부터 복잡한 직업상의 질문이 이어질 경우에는? 분위기 전환을 위한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그런데요. 혹시 재즈를 좋아하시나요? 아아, 관심이 있다구요? 그렇다면 비밥, 쿨, 휴젼, 애시드 재즈 중에서 어떤 장르를? 즐겨 듣는 음악가는? 1990년대 초반, 텔레비전에서는 애매모호한 눈웃음을 무기로 재즈클럽에서 색서폰을 불어대는 근육질의 남자배우가 등장했다. 이에 편승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재즈라는 음악. 몇 달간 선남선녀들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던 드라마처럼 재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 이병기씨, 이번 회원은 초등학교 교사야. 장소는 사당동쪽을 원하구. 연락처는......

  일주일만에 생긴 일거리. 결혼정보업소‘밝은 미래’김과장의 전화. 나는 업체에서 받을 수 있는 칠 만원 중 선금 이 만원이 내 계좌로 입금된 사실을 인터넷 뱅킹을 통해 확인했다. 그 돈으로 교통비와 커피값을 충당할 것.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던 날, 텅빈 회의실에서 김과장한테 교육받은 사항 중 하나였다. 
- 반갑습니다. 이 훈이라고 합니다.
  김과장은 깔끔한 외자 이름을 내 가명으로 정했다. 다음번에는 또 다른 이름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는 팔동작을 크게 하여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을 여자가 보기 좋게 건넸다. 남성의 몸동작이나 억양을 통해 여자는 상대방의 적극성을 채점할 것이다. 일단 첫인상이 중요해. 사람에 대한 평가의 반 절 이상은 초반 30초 내에 결정나거든. 나는 회의실에서 김과장의 말을 빠짐없이 수첩에 기록했다. 작은 키에 두터운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여자는 석고상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결혼정보업체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녀는 주말장터에 끌려 나오는 가축들처럼 은밀한 곳에 화인(Y �이 새겨졌다. 
  회사에서는 비밀리에 회원들의 등급과 점수를 관리했다. 그것을 토대로 비슷한 점수대의 남녀들이 회사에 돈을 내고 만남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슷한 점수대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몇 점짜리 남자일까? 당연히 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담당 직원을 며칠간 설득한 끝에 매겨 본 내 점수는 100점 만점에 겨우 43점, 말 할 것도 없이 최하위권인 D등급이었다. 하긴, 있는 집안의 자식도 아닌 번듯한 직장 하나 없는 서른네 살의 노총각을 선뜻 배우자로 원하는 여자회원이 몇이나 되랴, 는 자조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 네에, 말투가 시원스럽네요. 저는 최민정이라고 해요. 경주 최씨구요.
  여자의 말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 년 전만 해도 나는 역삼동에 위치한 유료 음악사이트를 운영하는 벤쳐회사의 직원이었다. 이천 년대를 그럴싸하게 장식했던 벤쳐 붐이 시들해지면서 우리 회사도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 직원들은 퇴직금은 커녕 육 개월간 밀린 급여마저도 받지 못한 채, 들개처럼 회사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대표이사라는 작자는 차명으로 회사주식을 깡그리 팔아치우고 캐나다로 잠적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제기랄, 지금쯤  스탠리공원에서 마누라와 함께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겠지. 직장을 잃고 스무 곳이 넘는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들이밀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망해버린 작은 벤쳐회사에서 근무했다는 경력은 재취업을 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낸 세월동안 남은 것이라고는 갑절 가량 늘어난 흡연량과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가래 기침이 전부였다.
  해외 유학생으로 나를 소개한 뒤, 동창녀석을 통해 들었던 미국 동부지역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자 여자는 금새 표정이 밝아졌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남들보다 커다란 키에 희멀건 피부가 전부인 나라는 인간. 여기에 졸업 여부도 불확실한 미국 유학생이라는 포장이 더해져 순식간에 엘리트 미혼남으로 변신하는 복잡한 기분이란.
  결혼과 관련된 이런저런 유도성 질문을 건네던 여자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 각본대로 정중하게 연락처를 물었다. 이 정도 분위기라면 남은 오만 원을 회사에서 받아내는 건 문제가 없겠지. 일주일동안 여자회원의 이 차 민원이 접수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그녀에게 전해 준 휴대폰 번호로 연락이 온다면? 저어. 갑자기 취직이 되는 바람에 도저히 당분간은 시간 내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나중에 꼭 연락드릴께요, 라는 번지르르한 양해의 말을 건네야겠지. 나는 상수역 근처에 위치한 카페로 이동하기 위해 사당 지하철역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재즈 트럼페터인 그를 알게 된 것은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였다. 재수생이라는 어정쩡한 신분으로 노량진에 있던 입시학원을 기웃거리던 시절, 나는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새벽 한 시가 돼서야 시작하던, 진행자의 설명이 극도로 생략된 방송에서는 생소한 음악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어떤 날은 음반의 반 절 가량이 통째로 소개되었다. 나는 늘 새벽녘에 잠자리에 드는 성실한 재수생으로 술집 주방일을 하는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내 책상 위에 펼쳐진 참고서에는 전 세계 뮤지션들의 이름과 곡명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밤을 화려하게 수 놓던 트럼펫 소리.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십여 분이 지나자 나는 라디오 스피커에 귀를 밀착시켰다. 이번에 여러분께 틀어 드린 음반은. 방송 진행자는 차분한 어조로 연주자의 이름을 소개했다. 그날 나는 이십 대를 같이 보낼 든든한 흑인 친구 한 명을 알게 되었다.   
  탁자 위에서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던 여자의 손가락. 마일즈 카페 사장이 떠올랐다. 회사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확인했던,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가 단발로 바뀐 점을 제외하고는 사진 그대로의 다소곳한 인상이었다. 초조하신가요? 라는 내 직업과 관계없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 어, 맞네요. 이런 쪽 음악을 좋아하시나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존 콜트레인의 연주곡을 단번에 알아 맞추는 여자. 가방 끈이 긴 여자를 요리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 자네가 자신있는 분야로 대화를 유도하는 거야. 취미가 재즈음악 감상이라고 했지? 그거 참 그럴듯하네. 뭔가 있어 보이잖아? 재즈 그거 말이야. 앞으로 잘 써먹어 보라구. 김과장의 쇳가루 섞인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명색이 투 좝이었지 둘 다 장래성이 있는 직업은 아니었다. 밤 열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계속되는 카페 아르바이트. 소규모 결혼정보회사에 소속되어 민원방지용으로 비밀리에 여자회원을 만나는 일.‘밝은 미래’는 다른 결혼정보회사보다 저렴한 회비를 지불하고 배우자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자연히 이들 중 회사에서 주선한 상대방에 불만을 느낀 회원들이 나타났다. 이런 회원의 입막음을 위해 일회용으로 시간을 때워주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었다. 기껏해야 한 달에 대여섯 번 이내의 돈벌이였지만 일당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반대로 남자회원의 민원을 땜질하기 위해 채용한 미모의 여자 직원도 있었다. 내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우울한 감정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저기요. 유감스럽지만 저는 43점짜리 남자인걸요. 오 만원의 성공수당을 벌기 위해 나는 그녀들에게 밝고 건설적인 미래를 보여줘야 했다. 언제 금이 갈지 모르는 유리벽 안에 갇힌 원앙새를 찾으려는 사람들. 결혼이라는 지뢰밭에 뛰어들기 전, 그 바닥에 깔린 수 많은 폭탄들을 제거하려는 이들의 몸부림이란.
  두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반갑게도 그녀는 나를 능가할 만한 음악애호가였다. 나와 눈을 맞추면서 연신 작은 머리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우리 회사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홉 시 종이 울리면 나는 멋진 드레스를 입은 신데렐라의 모습을 뒤로 하고 시간 당 오천 원짜리 아르바이트생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그녀가 건네 준 연락처가 적힌 메모지를 검정색 반지갑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 당분간 부탁 좀 할께. 너무 갑작스런 이야기라 부담이 크겠지만. 
  예전의 무뚝뚝한 말투는 분명 아니었다. 붉게 충혈된 사장의 눈자위가 카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너만 알고 있어. 그걸 시작한 지 벌써 삼 년째야. 이젠 불면증이 심해져서 수면보조제를 먹어도 잠이 오질 않아.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음반장에서 손님이 신청한 엘피를 꺼내던 사장의 손길이 떠올랐다. 늘 희미하게 떨리던 손마디들. 학생운동 시절 당했던 고문 휴우증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시의 치열함은 찾을 수 없었지만 사장은 늘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듯 했다. 그 허망함의 간극을 카페에 머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좁혀 나간다고 생각했다. 사장의 손가락 사이에 걸린 구부정한 잿덩어리가 힘없이 탁자 위로 툭 떨어졌다.
- 네, 일이 없는 날에는 하루 종일 카페에서 일하도록 할께요. 여기는 걱정마시고 몸조리 잘 하세요. 연락처는요? 
- 아니, 당분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휴대폰도 여기 그냥 두고 갈께. 자, 여기 내 통장이랑 현금카드 비밀번호야. 내일부터는 니가 카페운영자가 되는 거야.  
  나는 말없이 탁자 위에 놓인 통장과 현금카드를 쳐다 보았다. 
- 너로선 나란 인간이 이해하기 힘들 거야. 과거 골수운동권이었다는 작자가 카페에 틀어 박혀 약쟁이짓이나 하고 있으니. 
  마일즈 데이비스의‘라운드 미드나잇’이 흘러 나왔다. 이 곡을 발표하던 해, 마일즈는 수 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지독한 약물중독의 그늘에서 탈출했다. 당시 코카인은 재즈뮤지션들이 즐겨 복용하던 약물이었다. 특히 트럼펫을 포함한 관악기 연주자가 그것을 흡입하면 입 안이 심하게 말라 붙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마일즈는 자신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는 쾌감 때문에 마약에 탐닉했다고 토로했다. 
- 돌이켜 보면 남들보다 일찍 생의 정점을 지나쳤다는 절망의 연속이였어. 비주류 삶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절박감. 내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젊은 날의 패기는 포기한 지 오래야. 늘 어눌한 걸음걸이로 학교와 도서관만을 오가던 동창녀석들, 이젠 멀쩡한 사회인이랍시고 골프 타수와 지루한 재산 타령만을 반복할 뿐이지. 난 영원히 시대에 무인탑승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또 그들의 반대편에서 휘청거리는 내 자신까지도 말이야.
  약기운이 떨어진 것일까. 사장은 연거푸 보드카 잔을 들이키다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 하지만 난 사장님의 여유가 부러웠어요. 직장을 잃고, 월급쟁이로 다시 취업할 기회조차 없는 내 입장과는 비교도 못할. 
  사장이 급하게 말을 잘랐다. 
- 난 지금까지도 내 자신을 학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어. 과거라는 수렁에서 비틀거리는 시간치고는 너무나 긴. 
  치이익. 수동 턴테이블 음반 끝에 걸린 바늘이 투박한 비명소리를 토해냈다. 카운터 조명등만이 위태롭게 불을 밝히는 어두운 카페. 그곳에 걸린 커다란 벽시계의 초침이 새벽 네 시를 향해 투박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그러니까 증권회사 어디 지점이냐구요? 아니 그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이러세요?
  깡마른 체형의 여자는 금융계에서 근무하는 남자를 원했다. 나는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치다 보았던 증권회사를 내 직장이라고 둘러댔다. 여자는 내가 자신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는지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했다. 스물여덟. 항공사 스튜어디스.‘VIP 클럽’이라는 최고 등급으로 분류된, 다른 이들보다 두 배 정도 많은 가입비를 지불한 까다로운 회원이었다. 이병기씨. 이번에는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해. 우리 회사의 몇 않되는 최고등급 회원 중 한 명이니까. 김과장은 사무적인 어투로 내게 당부를 거듭했다.  
- 글쎄요. 그건 차차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계속 화만 내시니까 말하기가 영.
  회사의 인지도가 낮다 보니 높은 등급에 속하는 회원 역시 많지 않았다. 여느 군소 결혼정보회사처럼 여기에서도 VIP클럽에 속한 회원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VIP클럽회원 한 명의 이탈은 일반회원 두 명 이상의 손실로 이어졌다.
- 그럼 어디 사는 지나 말해주세요. 당연히 운전은 하실 거고.
  사는 동네, 자가용, 직장, 연봉, 오늘 따라 연기하기가 부담스럽다. 순간 내 휴대폰 주소록에 입력해놓은 여자회원이 떠올랐다. 이름이 김은지라고 했던가. 
  호텔 커피샵에서 지불한 쥬스 값으로 이미 회사에서 선불로 받은 돈을 초과해버렸다. 여자의 상태를 보아하니 어차피 성공수당을 받기는 글렀다. 그녀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다른 테이블에서 선을 보는 남녀들만 흘낏거리다 인사도 없이 먼저 자리를 떳다.
  사장은 내게 카페를 맏긴 지 이 주 가량이 지났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내게 그 만큼의 신뢰를 가지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헝크러진 삶에서 어떤 변화를 원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장을 찾는 단골손님들의 발길도 조금씩 뜸해졌다. 나는 그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카페의 폐점시간을 한 시간 뒤로 늘렸다. 간혹 그를 찾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나는 사장의 행적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결혼정보회사 일이 뜸할 무렵이었다. 이미 경쟁력에서 뒤쳐지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이렇다 할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 수신내역에 찍힌 그녀의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회사와의 약속은 염두에 없었다. 절대 두 번 이상 회원을 만나지 말 것. 내가 회사‘밝은 미래’에서 일을 시작할 때 김과장이 강조했던 사항이었다.
- 공부는 잘 돼가세요? 제가 먼저 연락을 했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신촌에 위치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는다고 했었지. 나는 분당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였고. 또 어떤 것이 내가 그녀 앞에서 보여주어야 했던 배역이었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회사는 내 정보가 노출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회사 홈페이지에 내 사진을 띄우지 않았다. 나는 늘 이름과 직업이 바뀌는 신출내기 회원으로 소개되었다. 어디선가 내가 만났던 다른 여자회원이 나를 훔쳐보고 있을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 그쪽에서 저한테 관심이 없나하고 고민했어요. 술, 좋아하세요?
  먹물티를 내지 않는 겸손한 말투, 마일즈 데이비스를 좋아 하는, 작고 부드러운 음성, 몸에 착 달라 붙는 연분홍빛 티셔츠까지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를 두번째로 만나는 날, 나는 카페를 오후 내내 비워야 했다. 마침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자애도 휴가 중이라 나는 밤 열두 시가 다 돼서야 카페 문을 열였다. 나를 믿고 카페를 맏긴 사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상수동에 이런 후미진 골목길이 있었다니.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골목 초입으로 들어섰다. 골목길 바닥에는 깨진 소주병과 음식물 찌꺼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어두운 골목길을 위태롭게 밝히던 가로등 빛을 조금씩 뒤덮었다. 잠시 후 길다란 검은 물체가 내 발치 아래까지 성큼 다가왔다. 인기척. 내 정면에는 커다란 도끼를 한 쪽 어깨에 걸친 비쩍 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잔뜩 구겨진 양복을 걸쳐 입은 남자의 한 쪽 팔에는 큼지막한 봉지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잠시 후 남자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 발치를 향해 내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봉지 끝에서 굴러 나온 것은 주사바늘 더미였다. 뒷덜미가 질펀해질 정도로 식은땀을 쏟아내면서 내가 소스라치게 잠에서 깬 곳은 마일즈 카페였다. 자정을 넘긴 카페에는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샐러리맨 만큼이나 세상에 널린 실업자 대열에 합류한 이후 내 취침시간은 항상 어머니와 정확히 일치했다. 나는 술집 일로 파김치가 되서 귀가하는 당신이 올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음악을 들었다. 방안 가득히 쌓아 놓은 재즈음반들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었다. 설령 천국이 존재한다 한 들 이보다 더 행복하랴. 하지만 시디 플레이어가 작동을 멈추고 얼음 같은 고요가 찾아올 때는 허무와 자학으로 세워진 지옥의 문과 마주쳐야 했다. 나는 매일 배터리가 녹아버린 로봇인형처럼 방구석에 누워 억지잠을 청했다. 내가 아는 세상에는 두가지 부류의 인간이 존재했다. 음악에 미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 홍대 근처에 자주 오시나요?
그녀를 만난 세번째 장소는 내가 일하는 상수동 부근이었다. 마일즈 카페를 오랫동안 비워놓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나는 그녀 앞에서 촉각을 다투는 사업가 행세를 했다. 그녀가 어떤 음료를 마시던간에 나는 늘 술을 주문했다. 애초부터 없었던 자가용 운전을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기 위해서였다. 
- 글쎄요, 예전엔 술친구들이랑 어울려 자주 들렀지만 이젠 영 시간이 없어서요.
한 개의 거짓말을 하기 위해 열 개의 핑계가 따른다고 했던가. 나는 화려한 명품을 몸에 치장하지도, 하룻밤 술값으로 수십 만원을 써대는 잘 나가는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녀에 대한 호감이 늘어나는 만큼, 나에 대한 자괴감이 늦겨울의 폭설처럼 쌓여 가는 현실이 버거웠다. 
- 그럼 마일즈는 완전히 마약중독에서 벗어났나요?
나 못지 않게 마일즈 데이비스에 관심이 많은 그녀. 어딘가에서 자신의 팔뚝 속에 자리잡은 정맥 깊숙히 주사바늘을 쑤셔넣는 사장이 떠올랐다. 그는 마일즈처럼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맞이할 수 있을까. 음악에 대한 끝없는 열정에 휩싸였던 마일즈. 그에게 마약은 음악과 관계없이 치루어진 삶의 통과의례 정도가 아니었을까.
- 마약의 그늘에서 완전히 탈피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헤로인류의 중독성이 강한 마약에서는 벗어났다고 할 수 있지요. 
-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쉽게 마약의 유혹에 빠지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그녀는 두 손으로 턱받침을 만들면서 상체를 내 앞으로 기울였다. 나에 대한 경계심이 약해졌다는 증거였다. 나는 반 절 정도 남은 병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미지근한 기운이 목구멍 여기저기를 간지럽혔다.
마일즈가 마약복용을 중단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밀스타트 농장이었다. 농장에는 두 개의 방이 있는 허름한 나무집이 있었고 그곳에서 마일즈는 금단현상이 사라질 때까지 머물렀다. 오한과 환청에 시달리는 마일즈. 목과 다리를 포함한 온몸의 관절이 뻣뻣해지는 불쾌한 느낌. 그는 모든 관절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그곳에 손을 대기만 하면 엄청난 고통으로 비명을 질러대야 했다. 나중에는 이 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택하려 했던 그. 음식마저도 거부한 채, 십여 일 이상을 버틴 마일즈는 마약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변함없이 박사과정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커피숍을 빠져나와 함께 홍대거리를 거닐었다. 내일이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거미줄 같은 일상이 두려웠지만 그녀 앞에서는 어떤 내색도 할 수 없었다. 그녀와 만나는 시간을 제외한 내 일상은 여전히 43점에서 멈춰 있었다. 

회사‘밝은 미래’에 어두운 미래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정부기관장의 외아들이라는 회원의 불만이 접수되고부터였다. 그는 우리회사 VIP 회원으로 가입비를 낸 뒤, 여덟 명의 여자회원들과 만났다고 했다. 상대방 회원들에게 심한 불만을 토로하는 고객은 대충 두 가지 부류였다. 첫째, 지나친 자기도취. 둘째, 마음에 드는 파트너가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 VIP회원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나온 여직원은 정성을 다해 남자의 가려운 부위를 긁어줬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취기가 오른 남자는 여자의 양해없이 자신의 친구들을 술집으로 불러냈다. 그들이 테이블 근처로 접근하자, 여자는 더이상 거짓웃음을 제공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네 명의 친구 중 여자와 만남을 가졌던 또 다른 회원과 마주친 것이었다. 동명이인이 아닌, 이명동인의 정체가 탄로난 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VIP회원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를 일러바쳤고, 자식놈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아버지는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아버지는 언론사에까지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언론사는 이 문제가 전체 결혼정보회사의 실태인 양 사건을 확대했고, 결국‘밝은 미래’는 기존 회원들의 대대적인 이탈이 발생했다. 회사의 소방수 역할을 하던 나는 졸지에 미혼녀를 등 쳐먹는 암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나는 오 분 대기조에 속하는 계약직원이라는 이유로 퇴직금 한 푼 없이 유선 상으로 해고통지를 받았다. 내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가 사라졌지만, 자유롭게 은지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제는 내 점수에 대한 상승여지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달째 카페 사장의 행적은 묘연했다. 나는 사장이 그리웠다. 그의 그늘진 미소와 떨리던 손길마저도. 충전기에 외롭게 주저 앉은 사장의 휴대폰 액정을 밝히던 여자들도 연락을 끊은 지 오래였다.  

- 마일즈는 마약중독에서 벗어난 후 또 다른 침체기가 없었나요?
- 그렇지 않아. 그는 나이가 들어 다시 마약중독자가 돼. 제2의 침체기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그는 이번에도 멋지게 그것에서 탈피하지.
나는 은지에게 더 이상 존대어를 쓰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너도 한 번 피워볼래? 가제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사장의 원룸에서 짙은 회색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큼지막한 스피커에서는 지미 헨드릭스의 일렉트릭 기타 굉음이 칼춤을 추고 있었다. 유달리 기관지가 약한 내가 누런 가래침을 뱉으며 피우는 담배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약초가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가 그리울 때는 이게 최고야. 바깥에서 내리던 빗줄기가 방안에까지 들이치는 황홀한 기분말이야. 음악을 들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기타면 기타, 드럼이면 드럼,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얼마든지 골라서 들을 수 있거든. 이미 풀릴대로 풀린 사장의 동공이 내게 속삭였다. 그는 담배가루를 털어낸 빈 담배껍데기에 조심스레 대마 부스러기를 쓸어 넣었다. 조심스레 대마초를 만드는 사장이 마치 도를 닦는 은자의 행동과 흡사해 보였다. 사장은 내 얼굴을 향해 새로 만든 대마초를 겨냥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사장에게는 대마초를, 내게는 음악을. 영원히 그치지 않는 음악소리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세상을 말입니다. 내게 대마초를 권하던 사장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힘껏 빨아들인 대마초 연기를 삼키는 방식이 담배와는 틀려 보였다. 그날 이후 그는 내 앞에서 대마초를 피운 적이 없었다. 나는 사장이 카페를 떠나기 전까지 대마초 외에 마약이라고 일컫는 약물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장에 대한 기억에 빠져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은지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은 나 역시 피곤한 하루였다. 어젯밤 카페로 찾아 온 친구와 새벽녘까지 마신 술기운이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은지와의 관계가 조금씩 발전해 갈 즈음, 마일즈 카페에 사장을 안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나는 사장이 상수동 근처의 원룸에서 생활했다는 것과 고향이 춘천이라는 것 외에 그의 연고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사장의 이복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내 나이 또래의 남자는 사장의 죽음을 빠른 어투로 전했다. 그는 자신의 외투 속에 넣어 두었던 구겨진 봉투를 꺼내 내게 보여 주었다. 일종의 유서라고나 할까. 자신의 지인들한테 전하는 짧은 글귀들이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내 이름이 보였다. 자동응답기처럼 사장의 자살소식을 전하는 이복동생의 어투에서 한기가 새어 나왔다. 그는 카페의 운영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형의 상 중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사장은 인제 지방의 한적한 낚시터 부근의 숲에서 주삿바늘과 함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사인은 약물중독에 의한 쇼크사. 그는 카페를 떠나기 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던 것일까. 병원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사장은 이미 지인들에게 마저 잊혀진, 낡은 신발짝 같은 존재였다. 사장의 흑백사진을 마주하면서 나는 문득 개미지옥에 갇힌 사장의 옛모습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좌절이라는 미명 하에 스스로를 개미지옥에 가두고는 한다. 그 속은 깊고 어두워서 쉽게 빠져 나가지 못한다. 몸부림을 쳐 봐도 어쩔 수 없다. 조금씩 자신을 잡아끄는 개미귀신의 손아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기에. 차라리 자신을 그대로 놔둔 채, 좌절과 마주하면 어떨까.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채,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체험한 후에 개미지옥 위에 만들어진 빛 구멍을 쳐다보는 거다. 과연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건조한 삶의 개미지옥에서 빠져 나오는 지 알 수 없어도 말이다. 마일즈는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온 인물이 아닐까. 스스로를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차별과 마약의 나락에 빠뜨렸다가 그를 잡아끄는 개미귀신들을 뿌리치고 힘차게 세상 밖으로 나온 초인의 모습으로. 세상의 어두운 면면을 직시하는 거장의 모습으로.

은지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사장의 장례식장을 다녀 온 다음 날이었다. 사장의 예상치 못한 죽음은 내 삶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은지와의 관계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다. 왠지 그녀라면 내 실체를 이해해 주리라는 기대와 애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이어진 내 씁쓸한 일상을 빠짐없이 털어 놓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눈물샘이 무너진 듯,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검지손가락을 눈가에서 떼지 못했다. 내가 그녀에게 던졌던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새로운 상처로 자리잡는 순간들. 더이상 백마에 올라 탄 왕자가 아닌 나. 부질없는 웃음과 호기로 자신을 무장했던 나. 그만큼의 아픔을 감수해야 하는 슬픈 내 모습. 먼저 자리를 비켜달라는 은지의 말이 작살처럼 날아왔다. 나는 이제 여유롭게 은지의 맞은 편에 앉아 있을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텅빈 카페에 앉아 사장이 좋아하던 음반들을 하나, 둘씩 꺼내 보았다. 사장의 넉넉한 글씨체처럼 엘피음반의 보관 상태도 가지각색이었다. 차분한 템포로 전개되는 연주를 즐겨듣던 나와 달리 강렬한 음악을 선호했던 그.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인 채, 사장이 카페에 들어 올 것만 같았다. 어떤 음반을 틀어드릴까요? 지금 있는 곳을 말해주신다면 이 음반들을 보낼께요. 참, 마일즈는 만나셨는지요? 그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그곳에서는 부디 행복하시기를. 이승에서 당신을 옭아맸던 편견과 혼란의 고통은 깨끗이 잊으시구요. 한참동안 음반들을 쳐다보던 나는 개미지옥을 뚫고 날아 오르는 사장을 상상해 보았다. 벌써 가을이었다.  

그녀가 보낸 이 메일. 은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지 세 달 가량이 지나서였다. 나는 그녀의그늘진 모습에서 또 하나의 단절된 세상과 마주쳐야 했다. 나는 이미 마일즈 카페에서 일하지 않고 있었다. 그곳은 사장의 이복동생이 분식점으로 업종을 바꾼 상태였다. 이제는 상수동 한 구석에서 고요하게 울려 퍼지던 마일즈의 뮤트 트럼펫 소리도, 사장의 무표정한 모습도, 사장을 찾아 오는 뭇여성들의 소근거림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메일에는 자신에 대한 고백들이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은지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쌍둥이 언니가 있었고, 혼기에 접어든 그녀의 언니는‘밝은 미래’의 회원이었다. 은지와 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언니는 회사에서 소개하는 남자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했다. 이는 회사에 대한 불만으로 전이되었고 나는 은지의 언니와 만날 예정이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 급한 일정이 생긴 언니는 회사 몰래 여동생에게 기회를 준 것이었다. 언니와 달리 고교졸업 후 대형서점의 매장직원으로 일하던 그녀는 서점측과의 재계약에 실패했고, 일 년이 넘도록 직업이 없는 상태로 지내왔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무능과 언니에 대한 열등감의 토로가 메일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두 개의 다른 가면을 뒤집어 쓴 채, 무도회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역을 알리는 지하철 안내방송이 들렸다. 내 건너편에는 차가운 철제 좌석에 누운채 잠이 든 취객이 보였다. 한 쪽 팔을 의자 아래로 힘없이 떨군 자세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날 자신이 보였던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었다는, 머뭇거리는 나를 보면서 초라한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메일의 마지막 내용이었다. 나는 힘없이 그녀가 보낸 메일 상단에 위치한 삭제 버튼 쪽으로 커서를 옮겼다. 

벌써 세 시간이 흘렀다. 이런저런 구직사이트를 뒤져 보았지만 정작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오랫동안 모니터 화면을 응시해서 그런지 눈가가 침침했다. 조심스레 기지개를 펴 보았다. 양 팔을 내리면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이를 흘낏 쳐다 보았다.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화면을 노려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컴퓨터 전원을 끈 뒤, 피씨방 카운터로 향했다. 아르바이트생 모집. 카운터에 부착된, 프린터기에서 출력한 반듯한 글자들. 이곳에는 컴퓨터에서 나오는 다양한 효과음들만 가득할 뿐, 어떤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 카페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던 형형한 눈빛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3층 계단을 내려와 음악카페가 밀집한 신촌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스산한 바람 한 줄기가 내 상의를 휘감았다. 밤거리를 가득 메운 네온사인 간판들이 시야에서 흩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건물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 시간 만큼은 나를 떠나간 사람들도,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불투명한 미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예고없이 찾아 온 현기증이 잦아질 무렵,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문득 그녀가 보낸 메일이 떠올랐다. 나는 피씨방에서 삭제 버튼을 클릭하지 않은 내 손가락을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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