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 작성일 2008-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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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
내가 이 카페에서 일한 지도 두 달하고도 이틀이 됐다.
<커피 프린스>가 유행인 모양이지만 난 한번도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드라마란 꿈을 파는 것. CF를 파는 것. 상업주의를 퍼뜨리는 것. 내 지갑을 열도록 하는 것.
그러니까 난 망상이니 꿈이니 사랑이니 하는 추상적인 것은 싫다.
감정보다는 현실.
어린 시절부터 힘들게 돈을 벌어야 했던 내게 이런 사고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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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시네요, 남상미 닮았단 얘기 안 들으시나요?"
라며 주문을 하던 남자가 내게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아. 고맙습니다. 손님"
깍듯하게 말한 나를
그는 안경 너머로 다시 올려다보았다.
커피를 내리려 등을 돌리는 뒤에서 그가 갑자기 불렀다.
"윤아"
헉! 누군데 내 이름을 아는 거지? 너무나도 은근하고 부드러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그 목소리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라며 돌아선 순간,
"에스프레소.."라는 낮은 대답...
난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아까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아니었다. 내 이름을 부른 남자는.
바로 그 뒤에 서 있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
살랑거리는 갈색 곱슬 머리가 목 뒤에서 헐렁하게 묶여 있었다.
"에이~ 너잖아! 장난치지 마"
내 책망에 그 갈색머리는 자기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었다.
"에이. 누나. <에스프레소> 흉내 한 번 내봤는데.. 안 속네.
근데, 누나. 대체 <에스프레소>가 누구예요?"
난 "쉬!" 하고는 일을 계속했다.
갈색 머리는 새로 온 알바생.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고교 졸업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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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창고에 가는데
뒤에서 짐을 가지고 낑낑거리며 뒤따라 오던 그 알바생이 다시 말을 걸어 왔다.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글래머 커피 빈 누나는 속이 시꺼먼 에스프레소를 좋아한대요~"
난 또각 멈춰 섰다.
"장난이었거든? 에스프레소 따윈 없거든?"
그러면서 내가 미간을 모으자 그는 갑자기 내게 바싹 다가왔다.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 카푸치노도 있고 카페라떼도 있는데, 예쁜 누나는 진한 커피가 좋대요~"
"야!"
난 고함을 질렀다.
..에스프레소는 내가 사귀고 있는 과묵한 건축학도의 별명이었다. 어쩌다 한 번 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름을 밝힐 수 없어서 "에스프레소"라 칭했었다. 그의 과묵함과 성실함. 그리고 한결같은 사랑이 마치 진한, 불순물 없는 에스프레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정색을 했다.
"누나, 조심하시라고요. 에스프레소를 먹으면 배가 아플지도 몰라요.
진한 건
속을 버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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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을 마치고 그날 밤 터벅 터벅 집으로 걸어 오다가 <<에스프레소>>를 발견했다.
가로등 밑에 고개를 숙이고 말 없이 서 있는 그 모습이 너무 그림자 같아서 깜짝 놀랐다.
이내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며 수줍은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 표정이 천사 같아 보여서 마음이 풀어졌지만...
그와 내 옥탑 방 정원에서 커피 믹스를 마셨다. 그는 커피 믹스를 좋아한다. 에스프레소는 너무 진해서 싫단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가 <<에스프레소>>라고 불리는 건 납득이 안 된다는 현실적이고 평범한 사람.
다음주에 그의 집에 인사를 가기로 해서 난 좀 긴장이 되었다.
내가 긴장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미소지으며 입술에 살짝 키스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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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차리고 그의 집에 갔던 날 모처럼 그의 동생이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가족들이 서둘러 병원에 가고 없었다.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그와도 곧 헤어졌다.
그는 날 집에까지 못 바래다줌을 아쉬워했다.
내가 미인이라 누가 채갈까봐 무섭다며 농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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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짜로 그날부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밤에 자고 있는데 누군가 창문 사이로 날 보고 있었다. 헉-하며 놀라서 나가 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낮에 커피 빈에 일하러 언덕길을 내려갈 때면 등 뒤로 심상치 않은 기척이 느껴졌다.
밤에 일하다가 시선이 느껴져 밖을 보면 아는 얼굴이 없었다.
초조해서 나도 모르게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보내다가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손에서 커피잔이 툭 떨어졌다.
그는 내게 걸어왔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그는 "에이~ 누나. 정신 차려요."라며 내 손의 물기를 닦아 찬찬히 닦아 주고 바닥도 치웠다.
그날따라 세심하게 바닥을 닦는 그의 손길이 어쩐지 마음에 섬찟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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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건이 일어난 그날은
밤 늦게야 일이 끝났다.
<<에스프레소>>가 걱정할까 봐 혼자 집에 가려는데
문을 나섰다가
아까 창고에 핸드폰을 놔두고 온 게 생각이 나서 창고로 되돌아갔다.
어두침침해서 무서웠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 철제 문을 열었다.
스위치가 나갔는지 불이 켜지지 않았다.
손으로 벽을 더듬는데 누군가 갑자기 날 끌어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길고 긴 키스. 그리고 초조한 듯. 화가 난 듯 옷깃 사이를 밀고 들어오는 손길.
갑자기 그가 말했다. "에스프레소는..." 알바생? 그목소리는?
손길이 너무나 거칠고 탐욕적이고 폭력적이라 마구 반항을 하느라 그의 뒷말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 꺼냈다. 번쩍 했다.
목 뒤에 닿는 서늘한 감촉. 그건 잘 갈아진, 날이 선 칼이었다.
그는 내 입을 강하게 틀어 막고 칼로 목에 선을 그었다. 찌이이익- 살갗이 갈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렸다.
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얼음이 되었다. 눈물 콧물 피까지 범벅이 되어 마구 반항을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날 굳게 틀어잡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복도에 불이 들어 왔다.
알바생이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옆에서 날 끌어 안고 있던 건 다른 사람이 아닌 <<에스프레소>>였다.
"형! 그만멈춰! 이젠그만둬!"라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알바생이 무릎을 살짝 절고 있다는 걸 그 때 알았다.
둘은 바닥에서 칼을 사이에 둔 채 굴렀다.
<에스프레소>의 눈엔 동생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았다.
둘 다 키가 크고 목소리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닮았고 싸움 실력도 비슷했다.
에스프레소 동생이 다쳤다는 오토바이 사고 생각이 머리를 굴러 다니고
창문 너머로 밤에 날 쳐다 보던 눈길의 기억이 새롭게 머리 속을 겹쳐서 굴러다니는데
난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륵 주저 앉았다.
피가 많이 흘러 셔츠가 빨갛게 젖었다.
그리고 난 기억이 없었다.
누군가 내게 장난치듯 속삭이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다.
"글래머 누나.. 속을 버린다고 했잖아요.
속을 보여주진 않아도 되는데...!"
그리고 누군가 퉁-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둔탁한 시멘트 바닥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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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어...잘 해보려 했어. 지난번처럼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네가 여러 남자들을 만나 얘기 하는 것을 보고 이성을 잃었다.
그만두라고 이야기 할 수도 없고."라고 그는 나중에 냉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멀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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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
난 뜨끈한 커피를 커피 빈에서 마시고 있다.
느긋한 여유로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다.
스토커로 날 힘들게 했던,
남자 친구의 기억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난 내 앞에 앉은 남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이 자식..! 너 날 힘들게 하면 바로 지난번처럼 병원 신세 지게 해준다!"
그는 묶은 갈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보냈다.
"에스프레소.. 대신
카페라떼 마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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