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 작성일 200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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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
그녀의 얼굴은 맑다. 위태롭게 이파리마다 맺혀있다 곧 증발할 동틀 무렵의 이슬과 같다. 나직한 숨결이 콧잔등에 닿는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소리 없이 여닫히는 물고기의 아가미를 보는 듯하다. 심해 속에 가라앉아 어느 누구와도 말하길 싫어하는 나처럼 그녀는 조용조용하다. 이따금 미소 짓는 그녀를 따라 나도 웃는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더듬는다. 따스한 손길이다. 멍한 피곤함속에서도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의 잠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봐 나는 숨소리를 누르고 또 누른다. 심장이 격동하여도 견뎌내야 한다. 그녀가 행복해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 그녀가 내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햇살이 다가오는 소리에 놀란 참새들이 창밖에서 요란하게 지저귄다. 그녀의 앳된 얼굴이 새싹처럼 선명해진다. 내 눈꺼풀이 햇빛을 어둠속으로 밀어낸다.
나는 오전 9시 느지막이 일어난다. 두어 시간쯤 잔 것 같다. 지금부터 나는 그녀와 함께 먹을 브런치를 준비한다. 고소한 냄새가 피어날 즈음 그녀는 일어날 것이다. 나는 계란을 삶고 빵을 굽는다. 그녀는 내가 껍질까지 말끔히 벗겨주는 계란을 좋아한다. 베이컨과 토마토를 곁들인 빵도 잘 먹는다. 식사 때마다 빠져서는 안 되는 메뉴가 하나 더 있다. 어금니에 살짝 씹히면 핏물이 배어나오는 생고기는 필수다. 육식을 전혀 먹지 않던 그녀의 식성이 변한 것이다. 그녀의 식탐은 나날이 증가했지만 체중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내 체중에 절반도 채 나가지 않는 45킬로그램을 유지했다. 신기한 일이다. 식사시간은 하루 중 제일 즐거운 한 때다. 그녀가 맛있게 먹어주면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그녀는 나를 사육하는 주인이다. 그녀는 매력이 넘치는 가수다. 피아노연주와 곁들여진 노랫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흡입력이 강하다. 그녀는 나처럼 무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다리가 자유롭지 못하다. 전동휠체어가 있음에도 언제나 두 다리를 질질 끌며 나에게 다가온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나는 괴롭다. 이럴 때마다 나는 짧은 순간 죽음을 떠올린다. 피투성이로 변한 내 몸뚱어리가 버둥거리고 있다. 고통은 없다.
그녀가 뒤에서 나를 껴안는다. 그녀의 가슴이 내 엉덩이에 와 닿는다. 말랑한 젖가슴이 뭉개지면서 내 등짝을 자극한다. 그녀가 아침마다 치르는 이 의식에서 나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오래도록 그녀가 나를 안고만 있으면 좋겠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돌아서야 한다. 늦어지면 그녀가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탄내가 온 집안에 퍼진다. 빵이 숯처럼 검게 타들어가고 있다. 그녀는 고소하던 냄새가 역하게 변해도 아랑곳 않는다. 하지만 나는 탄내가 무섭다. 나는 가스레인지를 끄고 생고기를 내려놓는다. 등심을 손질하던 내 손에 핏물이 묻어있다. 핏물을 물로 씻는다. 생고기의 비린내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돌아서지 않으면 그녀의 손톱이 내 살갗을 파고들지도 모른다. 내 허벅지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다. 자갈처럼 돋아난 종아리근육에 경련이 일어난다. 더는 버틸 재간이 없다. 나는 그녀를 향해 앞으로 돌아선다. 그녀는 흥분해 있다. 겁에 질린 나는 그녀를 밀어내고 싶어진다. 그러나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녀에게 또다시 상처를 줄 수 없다. 그녀는 진정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얇은 입술이 물고기의 긴 호흡처럼 깊게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입술과 혀가 나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치아가 흉터에 닿는다. 섬뜩하다. 그녀는 일부러 그곳을 더 자극하는 것만 같다. 온몸에 난 흉터들이 아우성이다. 나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두려움과 쾌감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내 고통이 커질수록 그녀의 쾌감도 커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젖히며 어금니를 악문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긴 생머리가 허벅지를 더듬는다. 마치 털이 무성한 다리를 가진 거미가 기어가는 것 같다. 소름이 돋는다. 발목에 족쇄처럼 채워진 바지 때문에 움직임이 불편하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저 그녀가 좋아하는 유희를 나도 묵묵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공포심이 나를 점령해 버린다. 방어능력을 상실한 나는 기다릴 뿐이다. 그녀가 나를 놓아줄 때까지. 나는 눈을 꼭 감고 생각에 빠진다. 조금 전에 있었던 내가 가장 행복해하던 장면을. 나는 빵을 굽고 있다. 고소한 냄새가 난다. 그녀가 등 뒤에서 나를 껴안는다. 말랑한 촉감이 엉덩이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그녀의 숨소리가 격렬해진다. 그만큼 내 공포심도 극으로 치닫고 있다. 어 어. 내 몸에서 체액이 쏟아져 나온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입안에 머금고 있던 체액을 꿀꺽 삼킨다. 어 어 어 어. 나는 쾌감과 고통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동시에 토해낸다.
“바다에 다시 가고 싶어.”
그녀의 외마디가 내 목을 옥죄어오는 것 같다. 그녀가 나를 놓아준다. 아직 남아있는 격정에서 그녀는 서둘러 벗어나고 싶은 눈치다. 나는 눈을 뜰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다. 몇 년째 머릿속에 맴도는 의문이 불쑥 솟구친다.
그녀는 왜 생리를 멈춘 것일까.
어젯밤에도 그녀는 배가 아프다며 칭얼거렸다. 골반에서부터 두 가지로 뻗어나간 다리가 아릿아릿 저려온다며 울먹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잠들기 전 매일 하던 대로 내 왼팔을 주물렀다. 깜박깜박 졸면서도 그녀는 열심이었다. 그럼에도 내 왼팔의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내 왼팔을 부여잡고 땀을 흘리는 그녀가 너무도 안쓰럽다. 그녀는 나처럼 쉬이 내 왼팔을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다. 나에겐 어제 같은 밤이 흠뻑 안타깝고 흠뻑 두렵다. 자궁을 녹인 뜨거운 피가 쏟아져 나올 것처럼. 진통제를 내밀어도 그녀는 먹지 않았다. 매달 1일이면 그녀는 주기적으로 배가 아파왔다. 별다른 말없이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면 할수록 나는 나약해져갔다. 안절부절 못하며 그녀의 배를 어루만질 뿐이다. 나도 그녀의 피가 보고 싶다. 어쩌면 그녀보다 내가 더 그녀의 생리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학적으로 그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왜 그녀는 피를 몸 밖으로 빼내지 않는 것일까.
사고 이후 그녀는 그날이 오면 기념식을 치르듯 배를 부여잡고 울었다. 차라리 나를 때리며 울분이라도 퍼부어댔으면 좋겠다. 배가 아프다며 칭얼대는 그녀는 밤새워 옹알이를 해대는 어린아이 같았다. 잠자코 그녀가 잠들기를 기다릴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커질수록 내 죄책감은 커져만 갔다. 부디 하루라도 빨리 그녀가 피를 쏟아냈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참았던 핏덩이가 방안을 가득 매울지라도 그런 날이 어서 오기만을 나는 간절히 바랐다.
*
그녀의 손에 사혈 침이 들려있다. 그녀가 내 피를 또 보고 싶은 것은 모양이다. 마비된 왼팔을 그녀가 주무르고 있다. 늦가을 마른 갈대처럼 말라버린 왼팔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나는 진즉에 포기한 회복을 그녀는 애써 모른 척한다. 탁탁. 탁탁. 그녀가 사혈 침으로 손가락 끝을 찌른다. 핏방울이 맺히는 곳도 있고 줄줄 흘러내리는 곳도 있다. 그녀의 다섯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연결된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도 자신의 손가락 끝에 사혈 침을 놓아 피를 뽑아냈다. 서로의 피가 섞이고 손바닥이 피로 물드는 의식이 그년에겐 우리가 하나가 되는 방법이었다. 더이상 피가 나오지 않을 때쯤 그녀는 내 손가락을 하나씩 빨아준다. 붉은 피의 흔적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리듬을 타고 있다. 느리게 빠르게 부드럽게 강하게. 하지만 내 왼팔엔 여전히 아무런 감각도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눈가에 잡히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움직임에 따라 나도 리듬을 맞출 뿐이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어 어. 나는 해맑게 웃는다. 나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둥그런 이마에 좁쌀만 한 땀방울이 송골송골 돋아나있다. 나는 그녀가 측은해진다. 왜 하필 그녀는 나같이 못난 놈을 만나 이토록 망가져야 했을까. 그녀는 나같이 능력 없는 남자를 만나지 않았어야 좋았다.
나는 야구선수였다. 고등학교 때 국가대표에 뽑힐 정도로 유망한 좌완투수였다. 프로에 가려고도 했지만 나는 대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나는 노는 것을 좋아했다. 날라리 기질이 다분해 내 유명세를 이용해 여자들과 자주 어울렸다. 두어 번 정도의 만남이면 잠자리까지 다들 쉽게 넘어왔다. 쉬운 만큼 나는 빨리 질렸다. 한차례 육체적 유희가 끝나고 나면 이내 다른 여자가 생각났다. 그런데 지금의 내 아내,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였다. 빼어난 외모에 연주 실력까지 모든 것을 다 가진 완벽한 여자였다. 그녀는 학내에서 ‘핑크신드롬’으로 불렸다. 그녀가 입는 핑크색 옷이 남자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날마다 바뀌는 그녀의 핑크색 패션쇼가 학내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녀의 매력에 빠진 남자들의 작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녀는 남자들의 관심 따윈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나는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그녀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녀의 미니홈피는 바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절절했다. 나는 외쳤다. 유레카! 그래, 바다에 함께 가는 거야. 나는 그녀의 휴대폰번호를 수소문 끝에 알아내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여섯시에독수리조각상앞에서기다릴게나와함께우리만의바다에가자핑크를사랑하는국가대표좌안에이스’
나는 오후훈련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조각상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일주일이 자나가도록 핑크신드롬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이상 똑같은 문자를 보내는 것도 창피해졌다. 나는 날을 잡아 그녀가 지나갈만한 길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그녀가 하얀색치마와 핑크색 니트를 입고 팔랑팔랑 나비처럼 다가왔다. 나는 그녀 앞을 무작정 가로막았다.
“너, 나 알지? 나랑 바다에 가자.”
그녀는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내 옆을 휑하니 스치며 비켜났다. 나는 바락 소리질렀다.
“야! 넌, 내가 그렇게 싫어?”
“아니! 너 싫지 않아. 하지만 너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함께 바다로 여행을 갈 수 있니? 그리고 너, 스타일 좀 멋지게 다가올 수 없어.”
“아, 정말! 나 못 믿어? 나 여기서 죽는 꼴 볼래.”
“풋.”
그녀의 웃음은 짧고 강했다. 이내 그녀는 매섭게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겁먹은 송아지마냥 눈꺼풀만 끔벅이다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녀 앞에 주저앉아 애꿎은 자동차 바퀴를 걷어차며 분풀이를 대신했다. 바퀴를 부여잡고 한참 낑낑거렸다. 차 밑으로 내가 기어들어가자 그녀가 큰소리로 웃었다.
“아하하하. 그만 쇼하고 어서 나와. 그래, 가자 가. 우리만의 바다란 곳에. 그 대신 정말 즐겁게 해줘야해. 아니면 너도 한방에 아웃인 거 잘 알지.”
나는 영동고속도로가 아우토반이라도 되는 듯 내달렸다. 시속 150킬로미터가 넘어서면 차가 휘청거렸다. 그때마다 그녀가 눈을 흘겼다. 속도를 줄이며 나는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작년 아시안게임 결승 때, 내가 마무리했잖아. 너, 봤지?”
“글쎄. 봤나? 기억이…… 그런데?”
“9회 말 투아웃에 주자가 만루였어. 우리가 일점 앞서고 있었고. 내가 무적의 강심장이긴 한데 진짜 떨리는 거야. 내가 마무리하러 마운드로 올라갈 때 감독이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하는 거야. ‘야, 빨리 끝내고 나이트 가자, 그냥 한가운데로 팍팍 꽂아버려’ 이러는 거야. 나는 심장이 벌렁벌렁 떨려서 죽겠는데 말야.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진짜 한가운데로 빛처럼 빠른 직구를 던졌어. 틱, 바로 포수 위로 공이 떠오르는 거야. 짜잔! 공 하나로 내가 끝내버린 거지.”
“그래서, 그날 나이트 가서 신나게 노셨어?”
“가긴? 감독 그 인간, 코치들만 데리고 밤새도록 놀더라. 젠장, 미성년잔 술 마시면 안 된데.”
“부라보! 멋진 감독님이네. 아무튼 그때 너 좀 멋있긴 하더라.”
“봤구나, 너? 내가 그렇게 멋있었어.”
“웃겨! 국가대표유니폼이 멋있었단 얘기야. 착각하지 마시와요.”
그녀는 소문처럼 까다롭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잘 들어주고 대꾸해주었다. 우리는 밤 11시가 다 되어서 송지호에 도착했다. 모래사장을 지나 북쪽으로 100여 미터쯤 올라가면 바위틈 속에 오묘한 나만의 또 다른 바다가 있었다. 작은 섬 같은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평화로운 우주를 보는 듯했다. 여기는 아무리 바람이 거세도 파도가 들이치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물결이 거짓처럼 느껴지는 바다였다. 손톱만한 치어들이 걱정 없이 노닐고 파릇파릇 여린 수초들이 춤을 추었다. 불현듯 엄마와 함께 이곳에 아빠를 놓아드린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엄마는 이 바다에서 아빠와 사랑을 맹세했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가 엄마에게 전한 마지막이 말이 이곳에 뿌려달라는 것이었다. 가끔 엄마는 이곳에서 합숙훈련중인 나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수화기 너머 한동안 말이 없으면 엄마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나도 데리고 가지, 엄마 진짜 나쁘다. 나도 아빠 보고 싶은데. 엄마는 내가 아무리 살갑게 칭얼거려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뾰족구두를 벗기고 운동화를 신겨주었다. 내 운동화가 그녀에게 너무도 커서 물갈퀴를 신은 것처럼 우습게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엉뚱한 모습을 내려다보며 장난치듯 치마를 펄럭거렸다. 나는 랜턴으로 길을 만들며 그녀의 손을 은근슬쩍 잡았다. 그녀가 넌지시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그녀가 몸을 바짝 붙여오며 팔짱을 껴왔다. 바람이 찼다.
“여기야, 우리만의 바다.”
“와아, 멋지다. 난 바다가 제일 좋아. 내가 다시 태어나면 난 바다에 사는 인어물고기처럼 조용히 살고 싶어. 해초만 골라먹으면서. 인어물고기는 포유류이면서 유일하게 초식만 하거든.”
그녀는 바다 속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물방울을 바라보는데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간절하게 끌어안는 듯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의 입술을 찾아 얼굴을 더듬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내가 묻힌 침에 범벅이 되었다. 그녀의 혀가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혀를 훅, 빨아들였다. 달달한 입내가 폐 속 깊숙이 스몄다. 맛있는 키스였다.
“춥지? 따듯한데 들어갈까?”
“응, 좋아. 근데 더 이상은 안 돼.”
“……뭘?”
“야! 몰라서 묻니?”
“아아, 알았어. 근데 우리 배고픈데 뭐 좀 먹고 들어가자. 쫀득쫀득 광어회 먹을까?”
“난 눈코입 있는 동물은 안 먹어.”
“눈코입 있는 동물? 물고기가 무슨 동물이야. 그럼 오징어나 대게도 동물이야?”
“당연하지. 그럼 오징어랑 대게가 식물이니. 어쨌든 난 물고기도 안 먹어.”
우리는 바닷가 근처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순두부를 먹었다. 나는 한참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오징어나 대게에 콧구멍이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긴 쪽팔렸고 나중에 백과사전이라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송지호콘도에 들어갔다. 그녀가 먼저 샤워를 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여자만 만나면 어떻게든 탐하고 싶어 안달이 나던 내가 차분했다. 그렇다고 욕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해지는 내가 신기하지만 했다. 그녀가 가운을 꼭꼭 여민 채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칼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졌다. 뺨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지상에 올라온 인어물고기를 보는 듯했다. 비누냄새가 향긋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콧구멍을 한껏 벌리고 킁킁거렸다.
“우리 안고만 자는 거야. 딴 생각하면 죽음이야. 잘 알지?”
나는 샤워하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마치 어릴 적 친구를 우연히 동네 목욕탕에서 만나 물장난을 치며 노는 것 같았다. 설레는 마음보다는 반가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얼굴만 내밀고 배꼬듯이 뒹굴 거리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나는 추운 척 손바닥에 호호 입김을 불며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었다. 따듯했다. 그녀가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나에게 이렇게 무모한 면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 나, 미친 게 아닐까.”
“응. 너 미친 거 맞아. 그나저나 부모님한테 연락 안 드려도 돼?”
“여행 가셨어. 다음 달에나 오실거야. 근데 넌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난 거야.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느새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내 몸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그녀가 몸을 뒤로 뺐다. 마음이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남자의 본능으로 나는 그녀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내 모든 근육들이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의 손길이 따듯했다. 나는 우리만의 바다에서 오래도록 깊은 잠을 잤다.
서울로 돌아오고 길이었다. 우리는 둘 다 들뜬 기분에 취해있었다.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 여행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은 상쾌했다. 평일 낮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나는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치마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무릎 사이를 꼭 붙이고 내 손을 무릎위에 고정시켰다. 내 손이 팬티 속으로 더듬어 올라가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안 돼. 시작하는 것 같아.”
이내 그녀의 얼굴에 연분홍빛 진달래꽃이 피었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 손을 그녀의 치마 속에서 거두었다. 그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순간 치기어린 내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때까지 나는 내 장난이 이처럼 엄청난 사고를 내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녀가 내 어께에 얼굴을 기울이며 배를 어루만졌다. 나는 얼른 배에 힘을 주어 바지 사이에 공간을 만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내 바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놀란 듯 잠시 주춤했지만 흥분한 나를 밀쳐내지 않았다. 다급했다. 나는 엉덩이를 들어서 바지를 내렸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핸들을 잡은 왼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전방을 주시하던 나는 그녀를 내려다볼 수 없었다. 그녀의 따듯한 입김이 느껴졌다. 그녀는 반쯤 꺾인 자세가 무척 힘든 듯했다. 이내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순간 그녀의 입속으로 내가 깊이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 내 눈이 감겼다가 떠졌다.
도로바닥에 피가 흥건한 고라니 같은 사체가 나타났다. 눈앞이 온통 피바다였다. 나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앞으로 쏠리면서 하복부에 극심한 통증이 일었다. 에어백이 터졌다. 그녀는 옆 창문 밖으로 튕겨 나갈듯 요동쳤다. 차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잡아주지 못했다. 아니 내가 그녀를 밀쳐냈는지도 모른다. 끼이이익. 쿵.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미끄러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다 속 같은 적막이 이어졌다. 잠시 후 뜨거운 불길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뒤집힌 차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나는 그녀를 먼저 찾지 않고 바지를 치켜 올렸다. 나는 아스팔트에 누운 채 차 밑에 깔려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뒤통수가 점점 뜨거워지면서 눈이 감겨왔다. 도무지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 허리로 화염에 휩싸인 차축이 찌이익, 떨어졌다.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5개월 만에 깨어난 나는 말하는 능력과 왼팔의 움직임을 잃었다. 듣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입 밖으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바보가 되어갔다. 그녀의 허리 아래 감각도 영영 돌아올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처음 본 엄마의 표정은 덤덤했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어느 누가 보더라도 내 잘못이 분명했다. 사고 당시 나는 그녀를 반사적으로 밀어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퇴원을 한 후 나는 그녀와 한집에서 살아야 했다. 어쩌면 그날부터 우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
그녀는 사고 후부터 생리를 아예 하지 않았다. 의학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다. 의사는 심리적인 쇼크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인 장애라며 무심히 말했다. 그녀는 의사의 말을 믿었고 나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에스트로겐을 매일 복용했다. 매달 빠짐없이 병원을 찾아 호르몬주사를 맞는 것도 거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일시적인 장애가 3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녀는 두 다리로 설 수 없다는 상실감보다 생리를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몸에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머리를 크게 다쳐 의식이 없는 동안 그녀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 곁을 지켰다고 했다. 차라리 그때 그녀가 나를 홀연히 떠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내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엄마도 그녀도 무슨 작당을 했는지 너무도 태연하기만 했다. 한동안 나는 그녀가 다리의 신경을 잃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도 강해져 있었다. 아니 그녀는 원래부터 강인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만의 바다에 함께 갔던 것과 사고의 단편적인 기억이 전부였다. 사고의 기억도 두어 개의 편린밖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밀쳤다는 것과 그녀의 고통스런 얼굴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는 것 그리고…….
함께 살면서부터 그녀는 내 몸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잠을 관장하는 뇌신경을 다친 나는 한밤중에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두어 시간 힘겹게 잠을 이루고 나면 눈이 떠졌다. 수면제 한두 알로는 내 신경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많이 먹을 수도 없었다. 두알 이상 먹었다가는 그녀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나는 밤마다 그녀의 잠자는 해맑은 얼굴을 구경했다. 그래도 심심해지면 베란다에 나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하늘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기어와 바지를 벗겼다. 내가 주춤 물러서면 그녀는 말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슬픔과 고독을 그득 머금은 눈빛. 나는 차라리 그런 눈빛을 보느니 복종하기를 선택했다. 쾌락과 공포가 동시에 엄습해오는 순간. 그녀의 입술과 혀는 헤엄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유연했다. 나는 그녀의 속옷을 벗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했다. 다시 피가 나올 때까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나는 반드시 들어주어야 했다. 지금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나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얼마 전 그녀는 음반을 냈다. 그녀가 연습실에 갈 때마다 나는 운전기사가 됐다. 그녀가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나는 그녀를 수행했다. 이런 나의 행동에 그녀의 어머니는 항상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 앞에서는 늘 명랑하면서 내 앞에만 서면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그녀의 음반은 매스컴에도 자주 나오면서 잘 팔려나갔다. 그녀가 인터뷰를 할 때면 나는 옆에서 그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그 순간만큼은 즐겁기까지 했다. 그녀는 역경을 이겨낸 모든 공을 나에게 돌렸다. 그이의 격려와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어요. 그이가 없었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나는 세상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달리 밖으로 나가길 좋아했다. 그런데 왜 나를 꼭 데리고 다니려는 걸까. 내가 밖에 나가기 싫다고 하면 그녀는 말문을 닫고 등을 돌렸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의 운전기사와 수행비서가 돼야만 했다. 나는 이렇게 삶의 마침표를 찍어나가고 있었다. 이따금 공을 다시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생기지 않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만의 바다에 다시 가고 싶어.”
어 어 어 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침마다 그녀는 우리만의 바다에 가자고 했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자꾸만 바다에 가자고 조르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끝을 보고 싶은 호기심. 내가 느끼는 공포를 그녀가 모를 리 없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바다를 원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녀가 바다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모질게 등을 돌렸다. 그녀에겐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함께 살며 단 한 번도 내가 그녀의 말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의 간격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
그녀가 계속 바다에 가고 싶다고 조른다. 나는 우리만의 바다가 죽음만큼 두려운데도 말이다. 아니 바다로 가는 길이 더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용기가 없다. 정오가 다 되어도 그녀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단식과 함께 농성을 한다. 바다에 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연말공연날짜도 다가오는데 연습도 하지 않는다. 그토록 좋아하던 고기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 수시로 걸려오는 부모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집으로 찾아온 어머니에게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렀다. 그녀의 어머니는 현관 앞에서 한참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훔치다 발길을 돌렸다. 처진 어깨가 몹시 슬퍼보였다. 나는 타협을 시도한다. 지도책을 펴놓고 인천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녀는 펜을 빼앗아들고 송지호에 동그라미를 열 번도 넘게 긋는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녀가 지도책을 찢는다. 그녀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인다. 울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며칠째 그녀는 막무가내다. 아예 방밖으로 나오려고도 하지 않는다. 빵과 달걀 고기도 먹지 않는다. 방안으로 음식을 들여놓으면 접시 째 집어 던지기 일쑤다. 이젠 나를 향해서 유리잔을 던지기까지 한다. 나는 깨진 유리조각과 음식물을 주워 담아 방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이제 그녀 옆에 나는 누울 수도 없다. 방으로 들어가 옆에 누우면 그녀는 비명과 함께 몸부림을 쳤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나는 거실에서 모로 누워 하늘을 본다. 눈을 감았다가 머리가 아파지면 다시 눈을 뜬다. 방문이 툭,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녀가 방에서 기어 나온다. 그녀가 냉장고를 연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나는 숨을 죽인다. 그녀가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돌아눕는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잠옷끝자락이 연한 핏물에 젖어들고 있다. 한동안 나는 눈을 떴다가 감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참새가 창문 가까이 날아와 연신 시끄럽게 짖어댄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처럼 그녀를 뒤에서 껴안는다. 그녀가 손대지 말라며 발버둥 친다. 그럼에도 나는 오른손에 힘을 빼지 않는다. 그녀가 내 가슴을 조막손으로 때린다. 나는 그녀를 가슴에 꼭 끌어안는다. 그녀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마음이 아파온다. 어 어.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다. 그녀가 말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녀의 얼굴에 핏물이 번져있다. 어 어. 나는 두 손을 펼치고 생고기를 뱉으라고 한다. 그녀는 핏물이 다 빠진 누런 생고기 한 점을 순순히 뱉었다. 나는 우리만의 바다에 그녀와 함께 가기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제야 그녀는 단식농성을 풀었다.
우리만의 바다로 떠나기로 한 날이다. 어젯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만의 바다에서 나를 죽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잘된 일이다. 나는 죽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몹시 두려워진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 길에 다시 서 있는 것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나는 그녀에게 죽어도 괜찮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어야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는 초연해진다. 그녀의 곤히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 방에서 나온다. 나는 음식준비를 한다. 어제보다 많은 빵을 굽는다. 오늘따라 식욕이 꿈틀꿈틀 요란스럽다. 그녀가 나를 안아주지도 않았는데도 몸이 달아오른다. 마지막을 예감한 몸뚱어리가 욕망들로 몸부림친다. 나는 문틈으로 그녀를 훔쳐본다. 그녀는 이불속에 폭 잠겨 보이지 않는다. 깨우려고 머뭇거리다 마음을 돌린다. 기다려야 한다. 그녀 스스로 일어나 나를 안아줄 때까지. 식사준비를 마치고 할일을 찾는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불안한 생각이 이어진다. 과연 그녀가 나를 죽일까. 아니다. 그녀는 내가 곁에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나만의 이기적인 상상? 스스로 판단해보아도 나는 참 나쁜 인간이다. 그래도 제발 그녀가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녀는 나를 오래도록 안아주었다.
*
나는 고속도로로 달리지 않고 국도를 따라 천천히 운전했다. 뒤에서 아무리 크게 클랙슨을 눌러대도 나는 속도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창문에 기대어 늦가을 풍경에 도취돼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 그저 내가 움직이는 대로 좌우로 몸이 흔들릴 뿐이었다.
드디어 우리만의 바다에 도착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나는 그녀를 안아들고 두터운 담요를 덮었다. 그녀는 추운지 바들바들 떨며 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모래사장을 지나 우리만의 바다로 올라가는 바위 앞에 나는 멈췄다. 불현듯 스산한 바다가 무서워졌다. 저 멀리서 흔들리지 않는 수평선이 나를 덮칠 것만 같았다. 내가 우두커니 서 있자 그녀가 목덜미에서 팔을 풀어 내려왔다.
나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등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그녀의 가슴이 내 엉덩이에 와 닿았다. 말랑한 젖가슴이 뭉개지면서 나를 자극했다. 나는 이런 순간이 가장 행복했었다. 그녀가 아침마다 치르는 이 의식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었다. 오래도록 그녀는 나를 안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돌아서야 했다. 늦어지면 그녀가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나를 재촉했다.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어붙은 손이 차갑다. 찬바람이 허리 언저리를 휘감았다.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말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서너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동그랗게 눈을 모아 뜨고 폴짝 뛰듯이 다가왔다. 나는 한 발짝 더 뒤로 도망쳤다. 그녀는 체념한 듯 주저앉았다. 나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모래 속에 파묻었다. 모래 속을 파헤쳐 큼지막한 글자를 새겼다. 나 죽고 싶어.
“아하하하. 아하하하.”
그녀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순간 내 심장에 비수가 꽂히듯 아파왔다. 이 비참한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목구멍까지 올라와 입 안 가득 쓴맛이 돌았다. 서러움 같았다.
“죽고 싶다고? 그래, 알았어. 그럼 왼손으로 다시 써봐.”
그녀의 요구를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왼손을 모래에 파묻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왼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하하하. 아하하하. 그녀가 또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나는 시무룩해졌다. 갑자기 그녀가 모래를 집어던졌다. 그녀의 장난이려니 하는 생각에 나는 쏟아지는 모래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모래알갱이들이 눈 속을 파고들었다. 눈썹위로 엄지손톱만한 돌멩이가 날아왔다.
“그 왼팔로 빛처럼 빠른 공을 다시 던져보란 말야.”
따뜻한 피가 흘러내렸다. 입속으로 핏물이 스며들었다. 고통은 없었다. 나는 오른손을 휘저었다. 어 어. 여전히 그녀는 모래를 집어던졌다. 그녀는 내가 많이 미운가보다. 파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발목에 닿는 바닷물이 불길처럼 두렵고 맵다. 그녀가 계속 모래를 던지며 벼랑 끝으로 나를 몰아세웠다.
“나쁜 새끼! 넌 나처럼 노력이라도 해봤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거야. 나도 얼마나 두렵고 견디기 힘들었는지 정말 몰라? 그래, 그렇게 죽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죽어. 죽어버려!”
바다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내 발걸음이 가볍다. 파도가 허리까지 차올랐다가 멀어졌다. 그녀가 있는 곳까지 파도가 올라왔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슬픈 노래처럼 메아리쳤다. 나도 눈물이 났다. 그녀가 슬퍼서 나도 슬퍼지는 것 같았다.
“아악! 제발, 이러지 마. 나 지금도 또렷이 기억해. 그때 니가 날 밀쳐냈던 거. 하지만, 니 잘못만은 아니야. 뜨거운 핏줄기가 입 안 가득 뿜어져 나올 때 나도 얼마나 무서웠는데. 꼭 말을 해야 알아? 그냥 나처럼 받아들여.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 사고! 그래, 어쩔 수 없는 사고였을 뿐이야. 그러니까 나처럼 살란 말이야.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알겠어? 내 감정 하나 하나에 안절부절 못하는, 바보멍청이처럼 나에게 목매고 사는 너, 예전 같은 매력 하나도 없어. 정말 모르는 거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 아 아 아.”
그녀가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 어. 그녀의 하얀 치마가 붉은 피에 젖어있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두 다리로 우뚝 일어선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나는 손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나는 그 자리에서 겅중겅중 뛰어올랐다.
“어 어 어 어.”
“왼손! 왼손을 들었어. 그래, 노력하면 움직일 수 있잖아. 지금 왼손으로 날 가리키고……”
그녀의 말꼬리가 부서져 온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왼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오른손으로 그녀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울음이 격해졌다. 그녀가 다시 피를 쏟아낸 것이다. 그녀의 붉은 피가 나를 기쁘게 한다. 어서 그녀에게 달려가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뱃속에서 빠져나온 피를 보지 못했다. 그녀의 몸 전체가 점점 더 붉게 물들었다. 내 마음은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게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 발길이 왜 움직이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가야만 한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우리만의 바다에 울리고 있는 소리가 그녀의 울부짖음인지 파도소리인지 알 길이 없다. 나는 핑크신드롬에 취한 나비가 되어 가벼이 날아가고 싶다.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는 엎드려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그녀는 내가 미운 것 같다. 눈도 맞추지 않고 등을 보이며 돌아앉는다. 나는 그녀의 좁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안는다. 그녀의 돌멩이 같던 어깨가 말랑말랑해진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이렇게 등 뒤에서 가만히 안아줄 때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그녀의 메마른 등에 나는 천천히 얼굴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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