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그대 쪽으로
- 작성일 200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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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그대 쪽으로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 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기형도, <바람은 그대 쪽으로>
1
나 지금 서울이야.
구역질이 날 때마다 귀 아래가 시큰거린다. 더 게워낼 것이 없어 혀 밑에 단침만 자꾸 고였다. 연신, 재채기. 폭음(爆音)이다. 재채기를 할 때마다 위장을 달구는 레버가 불꽃을 튀기며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뜨거워진 배를 한 팔로 감싸고 목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손가락이 내 몸 가장 부드럽고 약한 살을 더듬으며, 느낌표와 물음표와 말줄임표 사이에 숨은 기호들로 표현될 법한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비어져 나온다. 미지근하고 끈끈한 침이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변기 쪽으로 머리가 기울고 있다. 일순 아찔하더니 다리가 풀린다. 더 토할 것이 없는데도 속에서 출렁출렁 소리가 난다고, 느낀다. 숨을 몰아쉬자 옅지만 역하게 알코올 냄새가 난다. 일어설 기운이 생기질 않는다. 무릎으로 몸을 밀어내며 욕조에 이르러 샤워기 레버를 돌려댄다. 이마로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진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머리가 뜨겁다. 기침하자 목 안이 갈려 나가는 것 같다. 감기가 가는 기척은 느껴본 적이 없지만, 오는 것만은 안다.
폭음(暴飮)이었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혼자 마실 작정으로 술집에 들어갔다가 취기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까지는 생각이 나지만 그 뒤로는 아득하다. 불현듯 생경한 기분이 든다. 허겁지겁 빨래 바구니를 뒤져 어제 입었던 속옷을 찾아낸다. 아무런 기미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로 마음을 놓기는 어쩐지 석연치가 않다. 핸드폰 통화기록을 살핀다. 텅 비어있다. 문자 메시지함도, 마찬가지. 내 습관은 생각보다 힘이 셌다. 오싹오싹하는 소름이 말초에서부터 올라온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지만 벌써 날이 밝고도 한참이었을 시간인데 바깥은 흐리거나, 아직 어둡다. 조금 젖혀둔 커튼자락을 붙든 채 엊저녁을 떠올린다. 연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술을 마시러 갔던 것, 이라고 하면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주 오래 연의 목소리를 잊고 있었다. 그 애 목소리의 지문은 여전히 여리고 고왔고, 그래서 도리어, 그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렵지 않게 스무 살 즈음 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수화기에서 그 애의 따뜻한 숨이 가쁘게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서 나는 가슴이 조금 먹먹했다.
나 지금 서울이야.
나도 서울이야. 손가락들이 그 애의 목소리를 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전화기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긴장했을까, 맥락 없는 안부만 수화기를 맴돌았다. 만나자, 고 말하고 연은 약속장소로 우리가 다니던 대학 근처의 작은 술집 앞을 짚었다. 그리로 가는 길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 만은 무섭게도 온전했다.
2
대학에 입학한 해 나는 학교 기숙사에 살았다. 상경한 첫해 사월 서울에는 국지적으로 눈이 내렸다. 예고된 적 없는 것이었다. 눈은 제법 쌓였다가 날이 채 저물기 전에 다 녹았다. 지난 세기의 일이다.
겨우 십년이 조금 넘게 지났을 뿐인데 나는 가끔 그때가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때 내게 일어난 일들이 모두 사월의 눈 같았다. 술을 배웠고 이내 주정을 깨우쳤다. 처음 사귄 친구에게 선배 험담을 늘어놓았는데 소문이 퍼져 곤욕을 치렀다. 그 즈음 서울은 내내 흐렸고 나는 심한 감기를 오래 앓고 있었다. 늦봄에 곧 이름도 잊어버릴 남자를 사귀었다. 감기가 나을 즈음 전리품을 빼앗기듯 처녀를 잃었으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면 나는, 갑자기 나보다 열 살이 어린 스무 살의 내가 누워 있던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어질 때가, 종종 있다.
연을 만난 것이 그 즈음이었다.
스무 살 연은 낯가림이 심한 아이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날카로워 상대가 먼저 말을 걸기엔 쉽지 않은 인상이었다. 이렇다 할 특징 없이 둥글고 매끈한 내 생김새가 보는 사람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편이라면 연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워서 상대에게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필연 남자애들은 이유 없이 그 애 앞에서 초조해했고 여자애들은 그런 연을 달갑지 않아했다.
학기 초에 연과 나는 같은 학과의 친하지 않은 동기였다. 갓 상경한 나는 처음에 연의 희고 고운 얼굴, 뭐랄까 '서울 아이'의 이데아로서의 생김새에 주눅이 들어 있었고, 연은 연대로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내게 먼저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애초에 연은 서울 아이도 아니었고, 원인모를 내 인기 역시 오래는 가지 않았다. 각각의 이유로 우리 둘은 그해 봄의 커다란 우리들, 에서 손쉽게 빠져나와 각자 남았다. 세기말 서울에서 흔히 일어나던 일이다.
너도 여기 사니?
연이 먼저 물었다. 빨래바구니를 가지고 오지 않은 걸로 미루어 세탁실 TV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그때 연의 목소리는 어떤 반가움과 수치를 한 데 섞어놓은 것처럼 들렸다. 우리가 사는 곳은 오 층짜리 허름한 건물에 73개 호실이 빽빽이 차 있는 구 기숙사였다. 내 방 창문으로 보이는 바로 건너에는 그해 준공했고 입관비가 어마어마하기로 소문난 신축 기숙사가 있었다. 그 즈음 나는 방에 드나들 때마다 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 한 번 연이 물었다.
넌 몇 인실이야? 나는 2인실 사는데.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넣고 레버를 돌리자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세탁기 뚜껑을 짚으며 돌아섰다. 마주보는 벽에 이층침대 두 개가 각각 붙박여있는 4인실 내 방을 떠올렸다. 답답했다. 그래도 넌 나보다 형편이 낫구나, 내가 대답하기 전에 연이 덧붙였다.
장학금 받고 들어왔어.
구 기숙사의 장학금은 성적순이 아니라 얼마나 더 먼 곳에서 얼마나 더 가난하게 살았느냐를 기준으로 주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놀러올래? 내 룸메이트 밖에서 뭘 하는지 밤에 잘 안 들어와.
희고 말끔한 연의 얼굴, 심한 기울기나 억양 한 점 없이 깨끗한 그 애의 말씨를 나는 잘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애의 의젓한 얼굴은 온 힘을 다해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 때 그 애가 강박적으로 들어 올린 입고리가 마치 그 애 힘으로는 들 수 없지만 꼭 들어야만 하는 바벨처럼 무거워 보여서, 나는 경중을 가늠할 수 없는 말 다발을 건네는 대신 그 애를 안아주었다. 그 애는 놀랐고, 나도 몹시 놀랐다. 그래서 더 그 애를 안은 아름에 힘을 주었다.
좁은 지하 세탁실 안에는 우리 말고도 코인 세탁기가 다섯 대나 더 있었고 낡은 그 기계들은 일제히 열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처음에 아주 급하던 연의 박동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나는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연의 몸은 말라서 구겨질 것 같았다.
3
1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2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두어 번 가고, 곧바로 2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나는 일부러 사이를 둔다. 2가 좀 더 큰 소리로 말한다. 여보세요? 나야, ……어제 무슨 일 없었나 궁금해서 전화했어. 어제? 2는 음, 하고 목소리를 끈다. 어제, 나 예비군 훈련이라고 했잖아. 잊어먹었구나? 어제 왜, 무슨 일 있었어? 다시 한 번 눈앞이 아득해진다. 아니야, 됐어. 끊을게.
1이었을 수도 있다.
1에게 전화를 건다. 오래 신호음이 울린다. 핸드폰 수신음을 항상 진동으로 설정해두는 1은 전화를 바로 받는 법이 없다. 더구나 휴일이다. 거듭 세 번을 다시 걸어서야 1은 전화를 받는다. 내가 먼저 묻는다. 여보세요? 대꾸하는 1의 목소리에는 잠이 잔뜩 묻어있다. 왜, 노는 날 아침부터 왜. 나는 침을 모아 삼킨다. 어제, 별일 없었어? 두 사람 모두 말이 없는 잠시가 나는 무섭다. 별일 있었으면? 1의 말이 차다. 목소리도 궁지에 몰릴 수 있는가. 나는 조심스레 묻는다. 내가 뭐 실수한 건…… 아니지? 1은 오래, 대답하지 않는다.
너, 나를 연이라고 불렀어.
밤에 1은 나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언제나처럼 전화를 늦게 받았을 뿐인 1에게 나는 전에 없이 긴 주정으로 화를 냈다. 1은 내게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1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취해서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1은 나를 대신해 술값을 계산했다. 1이 나를 부축해 일으켰을 때 나는 그에게 안기며 연, 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1은 자기가 모르는 그 이름이 당혹스러웠고 자기에게 안겨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내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연이라는 게 누구야, 그래서?
나는 1이, 남자도 아닌 연에 대해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조금 우습다. 연, 연 말이지. 그러나 나는 이윽고, 내가 연에 대해 한 마디 말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연이 누구냐, 면. 연은 말이야.
연도, 누군가에게서 내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헤매게 될까. 아니면 벌써 그런 적이 있었을까.
연이라는 글자는 내 이름 끝의 련 자와 같은 것이었다. 아름다울 연(孌), 내가 그 애를 부를 때 쓰는 연이라는 글자가 아름답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똑같은 글자가 내 이름에서는 련으로, 그 애의 이름에서는 연으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신기하게 여겼다. 스무 살 즈음에 내가 연아, 하고 그 애를 불렀던 것처럼 그 애도 종종 나를 련, 이라 불렀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부를 때 아름다워, 아름다워 고백하는 것 같다고 그 애는 말했었다.
우리는 종종 지하 세탁실에서 같이 공부를 하거나 방에서는 잡히지 않는 유선방송을 보거나 컵라면을 나눠먹거나 한 세탁기에 같이 빨래를 했다. 서울의 아래로는 어떤 바람도 불어 들어오지 않았다.
밤이 늦으면 닷새나 열흘에 한번은 연에게서 인터폰이 왔다. 오늘 내 룸메이트 안 들어오려나 봐. 그러면 나는 베개를 들고 층계와 복도를 건너 그 애의 방으로 갔다. 싱글침대에 두 개의 베개를 세로로 놓고 나란히 누운 채 우리는 다음날 아침이면 생각나지 않을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자주 통금을 어기는 연의 룸메이트가 밖에서 대관절 뭘 하고 있을지, 낮에 동기들에게 비웃음을 산 농담이 실은 얼마나 괜찮은 것이었는지, 가족 내에서 서로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따위의 하잘 것 없는 이야기를 우리는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으레 연이 먼저 잠들었고, 나는 그 애가 좋아하던 소설에서처럼 순간 내가 삼킨 숨이 그 애가 막 뱉어낸 날숨이 아닌지 생각하다 수면등을 끄곤 했다. 서로의 몸을 만지는 것은 우리의 가느다란 숨들뿐이었다.
4
연과의 약속시간이 한참 남은 이른 낮부터 나는 우리가 함께 자주 쏘다니던 대학가를 서성인다. 우리가 살던 구 기숙사에 한번쯤 다시 가 보고 싶지만 이미 그 건물은 헐리고 없다. 왜, 나는 이렇게 일찍 나와야 했을까. 대학 다닐 때 비슷한 습관이 있었다. 지하철로 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잘 모르겠으니 아예 아주 일찍 나가 버리는 것. 고치지 않는 한은 절대 서울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심하게 부끄러워했지만 떼어버릴 수 없는 몸의 일부 같은 습관이었다. 자가용이 생기면서는 고쳐졌다고 생각했으나 종종 희미해진 흔적기관을 발견하듯, 나는 약속에 너무 일찍 나와 버린 나를 깨닫곤 했다.
연은 늦을 것이다. 나처럼 연도 지하철 시간을 잘 계산하지 못했지만 연은 나와 반대로 내가 일찍 도착하는 만큼 약속에 늦곤 했다. 같은 곳에 살았으므로 약속하고 만날 일이 드물었던 연과 나는, 약속하고 만나면 오히려 잘 만나지지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연을 오래 기다리지는 못할 것 같다. 밭은기침이 난다. 나는 아무 곳에나 침을 뱉는다.
선 채로 십분도 버티지 못하고 나는 내가 2라고 부르는 남자에게 전화를 건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게 손이 시리고 위 아랫니가 멋대로 닿았다 떨어졌다 한다. 지금 나와 줄 수 있어? 어딘데? 나 지금 당장은, 글쎄,
거듭 나는 내리누르듯 발음한다. 지금, 나와 줄 수 있어? …… 미안, 좀 기다려야겠는데. 기다리는 거야 얼마든지 괜찮다. 정말로 와 주기만 한다면. 전화를 끊고 나는 조금 더 걷다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신다. 커피가 한 모금쯤 남아 미지근해졌을 때 가로수 옆에 쌓인 얼음에 붓는다. 김이 나는가 싶더니 이내 이상한 색으로 얼어버린다.
문득 고개를 들자 건너편 보도를 걷는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머리카락이 길고 그 가닥들이 얇다는 것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몸이 가늘고, 키가 작은데도 낮은 굽 구두를 신고 있다. 차는 많지 않았고 나는 마음이 급해서 되는 대로 길을 건넌다. 언뜻 시야에 닿은 건널목의 붉은 불빛이 머릿속에서 불규칙적으로 깜빡거린다. 걸음을 빨리 해 그 여자에게 다가선다. 팔을 뻗으면 그 여자의 어깨를 짚을 수 있을 듯한 자리에서 멈추어 선다.
연이 아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니 2가 이미 와 있다. 잡아보니 손은 아직 따뜻하다. 방을 잡아 허겁지겁 입을 맞추고 스스로 단추를 끄른다. 2는 나를 제법 오래 만나온 남자고 언제나 손수 내 옷을 벗겨와, 조금 당황한 눈치다.
왜 이래?
나는 멈추지 않고 손을 움직인다. 두꺼운 겨울옷 소매가 양 팔꿈치에 걸려 내가 버둥거리자 2는 슬며시 끝을 잡아당겨 준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나의 초조를 두려워하고 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한 번 그가 묻는다.
무슨 일 있었어?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나는 다시 벌어지려는 그의 입술에 내 것을 힘주어 댄다. 2는 저항하다가 이마에 총신이 닿은 포로처럼 곧 잠잠해진다. 내 흥분도 오래는 가지 않는다. 내가 풀죽어 기댔던 몸을 일으키자 2는 애완동물을 진정시킬 때의 몸짓으로 내 머리칼을 가만가만 쓴다.
왜 그래, 울지 마.
2가 내 턱 언저리를 어루만진다. 모르는 사이에 차가운 것이 뺨으로 비어져 나와 있다. 오래 만나지도 못한 연에게 무언가 많이 잘못한 듯한 느낌이 든다.
5
1은 나의 애인이다. 나는 2의 애인이다. 1은 자신이 나에게 1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2는 스스로 2가 되기를 원했다. 둘은 어찌어찌 만난 적도 있다. 나중에 1은 확신 없이 2와 나의 관계를 추궁했고 2는 1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근사한 남자가 아니어서 실망했다고 말했다.
1은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 2는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표현이 인색한 1은 어렵사리, 흠이다 싶도록 다감한 2는 습관처럼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섹스에 있어 의외로 1은 적극적이지만 2는 부끄럼을 탄다. 둘 다 내가 상위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내 두 허벅지가 그들의 골반에 걸려서 나아가지 못하고 허리를 끌어안는 느낌이라서? 일그러진 내 표정과 몸짓에 따라 흔들리는 내가 누워있을 때보다 잘 보여서, 혹은 단지 편해서.
서울에서 태어났고 다른 지방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도 둘의 공통점이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하다. 서울 중산층 남자들의 영혼이란 원래가 모두 비슷비슷한 것인지, 시차를 두고 만난 둘이 가끔 똑같은 말을 해 나를 놀라게 하곤 한다. TV와 신문에 등장하는 무언가에 대한 둘의 시선은 거의 일치한다. 둘은 가끔 비슷한 이유로 나와 다툰다.
1과 2가 가장 닮은 것은 내리누를 때의 하중이다. 나에게 하중은 존재감이 아닌 거리감이다. 몸이 내리누르는 둔중한 무게가 느껴질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 곁이 아닌 위에, 혹은 아래의 높이에 누군가 있음을 깨닫는다. 삽입할 때 보통 나는 눈을 감지만 문득 지금 내 몸 위에 있는 사람이 1인지 2인지가 헷갈려 눈이 떠지기도 한다.
깨어나니 2의 팔에 허리를 내어준 채다. 겹쳐진 2의 몸 사이에서 다리를 힘주어 끄집어낸다. 어두워서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침대 옆 벽에 닫힌 창문이 있다. 덧문을 열어 보니 아직 밖은 밝다. 구름 덮인 하늘이 푸르지 못하고 하얗다. 해가 짧은 시기니 늦어야 오후 네 시쯤 되었을까. 아직도, 싶어서 다시 자리에 눕는다. 잠들어있는 남자의 얼굴을 본다. 사랑은 성욕이 아닌 동반수면의 욕구로 발현되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분명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2의 잠은 깊다. 나는 애인들에게서 연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쓴 적이 없었으나 깊고 풍요한 2의 잠은 때로 어쩔 수 없이 그 애를 떠올리게 했다. 같은 침대에 눕는 밤이면 연은 오래 깨어있지 못하고 이내 잠에 혼곤히 취한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뇌까리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즈음에는 더 심하게 잠이 가물어 늘 그 애보다 늦게 잠들고 먼저 깨어나던 나는 대개 조리에 닿지 않고 문법도 엉망이던, 그 시절의 오랜 연의 잠든 문장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때. 의 소녀들이 온몸에 휘감고 다니는 막막한 감정의 타래들을 연은 나에게 끝없이 풀어내서 내가 그애 투성이가 되고 난 다음에야 안아줘. 라는 말을 하곤 했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순간에 사람은 가장 사랑스럽다는 것을 나는 그 애에게서 배웠다. 이불을 끌어다 2의 벗은 팔에 덮어준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대를 빠져나온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몸을 씻고 화장을 고친다. 구두를 신고 장갑을 낄 때 두어 번 재채기가 난다. 놀라 돌아보니 2가 몸을 뒤척이다 다시 잠든다. 깨어났을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나는 아직까지도 생각한다. 나는 한 손으로 외투를 여미며 문을 연다.
6
연이 약속장소로 정한 곳은 그 즈음 우리가 자주 의식을 잃었던 술집 앞이었다.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민속 주점이었지만 천 원으로 동동주를 배부르게, 라 해서 안주로 해물 파전 하나 시켜놓고 앉아있기 좋은 곳이었다. 연 없이 마지막으로 가본 지도 삼년이 더 되었다. 서른 살을 넘기기 전이었다. 동동주 값이 삼천 원으로 뛰어 있었다. 캐치프레이즈도 '배부르게'에서 '무한리필'로 바뀌어 있었다. 격세지감이라고 했던가, 늘 북적이던 술집이었는데 한산했다. 테이블에 가깝게 종이갓을 씌운 형광등들이 내려와 있었고 나는 건너편에 앉은 대학생들의 구김 없는 주홍빛 얼굴들을 건너다보며 정말 오랜만에 의식이 부옇게 흐려지도록 술을 마셨다. 술이 깰 때쯤 쪼그려 앉아 토하는 내 등을 두드려 준 사람을 나는 또 잠깐 연으로 착각했었다. 울었던가, 조금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만나면, 뭘 해야 할까.
술집 앞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술을 마시자고 할까. 기억에는 대학 시절 그 애도 제법 소문난 주당이었다. 동기들과 어울려 학교 근처 유명한 술집을 찾아가 그 곳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안주를 맛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우리는 단둘이 마시는 술을 더 좋아했다. 잠들 때 그랬듯 연이 먼저 취해 곯아떨어졌고 그러면 나는 그 애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가곤 했다. 가끔 우리보다 한 살 많은 그 애의 룸메이트가 방에 있기도 해서 연과 나는 눈빛을 교환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나는 내 방까지 가서야 겨우 긴장을 풀고 쓰러졌다. 왼쪽 이층이던 내 침대까지 기어 올라가지 못하고 사다리를 붙든 채 잠들 때가 종종 있었다.
스물한 살 가을이었을 것이다. 함께 술을 잔뜩 들이꽂고 기숙사로 돌아온 날 갑자기 연이 내게 입맞춘 적이 있다. 취기로 잠들기 직전 그 애의 가라앉을 듯 말 듯한 의식을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련아, 사랑해.
거듭 입 맞추며 연은 흐느꼈다. 그 애와 나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엉킨 채 그대로 복도에 쓰러졌다. 아프진 않았지만 뒷목과 등이 서늘해 술이 조금 깨는 듯했다. 연의 차고 흰 손이 웃옷 밑으로 불쑥 들어왔다. 브래지어와 옷을 한꺼번에 걷어 올리고 연은 내 두 유방을 만지작거렸다. 유두를 빨기도 하고 빗장뼈 아래를 깨물기도 하며 연은 계속 중얼거렸다.
사랑해.
연의 혀가 지나간 자리는 곧바로 차게 식었다. 모두 잠들어 복도는 아주 조용했고 누구 하나 방문을 열고 나오거나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연의 한 손이 배를 더듬으며 아래로 내려와 바지의 후크를 끌렀다. 이내 팬티 속으로 연의 손이 들어갔다. 나는 그 손가락들이 내 음모 가운데서 얼마나 더 희게 보일 것인지를 생각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몸은 달지 않았다. 나는 힘없이 늘어져있던 내 팔 들을 그 애의 등 뒤로 보냈다. 연의 몸은 오래 뜨거웠다가 잠이 들면서 조금씩 식었다. 내 몸 위에서 잠든 그 애의 몸이 믿을 수 없이 가벼워서 묘하게 외로웠다.
희부옇게 동이 터 올 즈음에야 연의 방으로 그 애를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 애를 거부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연이 바라는 사람이 아니고 싶지 않았다. 나도 사랑해. 잠든 연에게 소용없는 대답을 하며, 나는 내가 한 말이 우스워서 울었다.
자고 일어나자 연은 나에게 전날 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폭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 일 없었다고 말해주었다. 연은 그 뒤로 다시는 내게 입맞추지 않았다.
외로웠던 것일까.
7
약속 없이 서울에서 연을 만날 확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스물두 살 끝 무렵에 나는 자퇴서를 냈다. 이듬해에 전공을 바꿔 다른 학교에 편입했고 그 뒤로 연과는 소식이 닿지 않았다. 졸업하고 그 애가 고향에 돌아갔다는 것은 동기들을 통해 알았지만 그 애가 그 뒤로 어떻게 지내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 해 겨울에 연은 심한 감기를 앓고 있었다. 나은 듯해서 약을 끊으면 다시 살아나고, 나은 듯해서 병원 가기를 거르면 또 살아나며 감기는 모질게 연을 괴롭혔다. 사나흘 수업도 못 들어가고 침대에 누워있기도 했다. 나는 인스턴트 죽이나 야식집 순두부찌개 같은 것으로 연에게 약을 먹였다. 연이 수업을 듣지 못하는 동안은 나도 내내 그 애의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기침이 심하다 싶다가 갑자기 열이 펄펄 끓고, 열을 앓는가 싶으면 또 증세가 바뀌어 맑은 콧물을 한 바가지 쏟아내는 연을, 혼자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 지금 서울이야,
연의 곁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고 난 아침이었다. 환기하려고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자 맑고 찬 겨울 햇살이 연의 침대로 몸을 뻗었고 눈이 부시게 먼지들이 날아다니는 아래에서 연은 꿈꾸듯이 말했다. 나 지금 서울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상해. 서울은 나한테 도시가 아니고 상태인 것 같아. 겨울이 와도 나는 서울. 겨울이 가도 나는 서울. 여름도 가을도 봄도 없이 나는 서울이야. 그러다 연은 문득 나를 보며 물었다. 너도 서울이야? 나는 홀린 사람처럼 연을 쳐다보았지만 정작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내 서울일거야.
연은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고 나는 그 애의 이마를 짚으며 그 곁에 엎드렸다.
겨울 동안 연의 감기는 좀처럼 낫지 않았고, 나에게 옮지도 않았으며, 나는 그 감기가 다 낫기 전에 도망치듯 기숙사를 나왔다. 돌아온 봄에 우리가 살던 구 기숙사 건물이 헐렸다. 우리가 꼬박 두 해를 지낸 곳이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내 안의 연은 드디어 허물어질 기미 없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었다.
약속 없이 헤어진 우리가 곧 다시 약속 없이 만나도 질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연락 없이 십년을 그대로 보낸 연의 마음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언제나 연은 서울이었고 그때 대답하지 못했던 나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늘 서울이었으므로 약속이 없어도 우리는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십년을 보냈다.
8
삼십 분이 좀 넘게 내리던 눈이 그치고 하늘은 높은 곳에서부터 채도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연과의 약속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장갑 속의 내 손이 젖어 있음을 깨닫는다. 가슴이 뛰고 있음을 안다. 핸드폰을 계속 열었다 닫았다 하며,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안다는 사실이 나를 자꾸 배신한다.
자꾸 숨이 몰아쉬어진다. 십년치의 시간이, 그해 사월의 눈이 떨어져 내리던 높이만큼 쌓여 있다가, 내 안에서 허물어지고 있다. 허물어지고 있다는 건, 높이 쌓여 있던 어떤 시간의 블록들이 내게 떨어져 내리는 일이다.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애인들의 시선들을 생각한다. 나는 멀고 높은 곳으로 흩어지는 내 흰 날숨을 내 눈으로 보면서 내가 긴장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한다. 연과 내가 스무 살 무렵을 나던 지하 세탁실은 그 때 서울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얼마나 높은 곳으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너무, 늦었다. 허물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이미 쌓여 있었다.
나는 연이 약속장소로 말했던 건물을 올려다본다. 연은 꽤 오랫동안 서울에, 적어도 학교 근처에는 오지 않은 듯하다. 우리가 자주 찾던 동동주 집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이방의 언어로 간판을 바꾸고 상호 밑에는 맥주를 판다는 말을 적어 놓았다. 어쩌면 연은 그 사실을 알고도 그 곳을 약속장소로 정했던 것일까. 없는 곳에서 만나자…… 진의는 알 수 없으나 어쩐지 연답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오늘은 연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연을 만날 준비도 나는 되어 있지 않다. 돌아서 걷기 시작한다.
몇 발짝 못 걸어 또 한 번 연을 닮은 옆모습을 본다. 이번엔 진짜 연일지도 모른다. 가슴이 뛴다. 그러나 뒤쫓지 않는다. 빠르게 걸으며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나 지금 서울이야.
대학 때 친구 만나러 간다더니?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나는 내 말이 우스워서 왈칵 눈물을 쏟는다. 누구인지 모를 애인이 나를 위로한다. 눈물이 지나간 곳은 이내 차갑게 식는다. 눈이 그친 길 위, 내 가슴 높이로 길고 깊은 리듬의 바람이 불어온다.
나 지금 서울이야.
다시 스무 살 계집애처럼 잇새로 웃음이 뱉어지는 휴일 오후였다. 빗장뼈 안쪽 깊은 가슴이 아프고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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